#12. 도서관 미궁(2)
뒤돌아보니 여전히 화려한 금발을 자랑하는 제1 왕자, 알폰스가 서 있었다. 전혀 만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리아는 잠시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내 제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잡았던 책을 내려놓고, 그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제1 왕자님을 뵙습니다.”
“페넬로페 영애도 도서관에 관심이 많나 보군.”
“사막의 기적을 키우는 법에 관한 힌트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왔습니다.”
리아는 묻는 알폰스에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알폰스는 흐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리아가 방금 내려놓은 책을 들어 올렸다.
“난생처음 시작하는 가드닝?”
“아, 뭐가 있는지 둘러보느라고….”
알폰스의 목소리는 마치 리아에게 사실 식물 키우는 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아니냐고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다. 필사적으로 변명한 리아는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변명 같은 대답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하지만 알폰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뭐, 기본이 중요한 법이니까요.”
감싸는 듯한 발언에 오히려 의아해졌다. 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로 눈썹 한쪽을 추켜올렸다. 알폰스에게서 들을 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리아는 예의상 정중하게 대답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사막의 기적이라는 식물은 좀 살아나고 있나요?”
“아직 이틀이라 섣부르게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잘 살아 있습니다.”
“제가 너무 안타까워서 말입니다. 식물이 자라나지 못한다는 게….”
알폰스는 가족이 아픈 사람처럼 사막의 기적을 걱정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겠지만, 리아는 알폰스의 눈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리아의 어머니 그리고 두 오빠들은 저렇게 가끔 리아의 앞에서 연기를 하곤 했다. 사람들 모두 진심이라고 생각했지만, 리아는 그들이 연기를 한다는 걸 몇 가지 단서로 금세 추측해냈다.
“건강하고 크게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굳이 내진 않았다. 연기에 동참하듯, 리아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기 위해 두 눈썹을 아래로 축 처지게 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표정이 마음에 든 듯,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타까움과 아련함이 적절히 섞인 미소였다. 뭇 여성들이라면 한 번에 반해버렸을 듯했다.
하지만 리아는 알폰스의 미소가 계산된 미소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표정을 하면 상대방이 자신에게 반하는지 아는 사람이 분명했다. 특히 리아의 둘째 오빠가 그런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확신했다.
“믿음직스럽네요.”
공간 능력자가 조절한 도서관에도 창문은 존재했다. 그 작은 창문 틈으로 한줄기의 햇살이 내려왔다. 정확하게 그 빛이 알폰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조각 미남은 보기만 해도 완벽한 그림 같았다. 그래서, 리아는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은 확실하게 계산된 각도에 서 있는구나.
“그런데 제1 왕자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알폰스라고 불러달라니까요.”
은근슬쩍 왕자님이라는 호칭마저 사라졌다. 정말 절친한 사이일 경우만, 왕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허용되었다. 그것도 사적인 자리에 단둘이 있을 때만. 그런데 그 호칭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건… 리아와 그런 사이가 되고 싶다는 암시였다.
“왕자님께서도 식물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그리고 리아는 은근슬쩍 그 요청을 모른 체했다. 마주친 시선이 부담스러워 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옆얼굴에 집요하게 따라오는 시선이 느껴졌다.
“네. 물론 리아 양처럼 식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막의 기적을 살릴 수 있다면 제 미약한 실력으로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페넬로페 영애에서 슬쩍 호칭을 바꾸었다. 리아가 불러주지 않으면 직접 부르면 되지. 알폰스는 눈앞의 연한 금발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걸 보았다. 자신의 쨍한 금발과는 다른 부드러운 금발은 알폰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보통은 자신이 이 정도 하면 레이디들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곤 했다. 하지만 눈앞의 레이디는 달랐다. 자신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눈빛과 마주하면, 속까지 꿰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끊임없는 알폰스의 유혹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지, 시선을 피하며 책에만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알폰스는 알았다. 대부분의 레이디와는 다르지만, 그녀는 알폰스에게 반했음을. 최대한 반하지 않은 척해서 일부러 그의 마음을 끄는 레이디도 많았다. 분명 리아는 그중 하나에게 조언을 들었을 거였다.
흘끗흘끗 저를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충분히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궁에 들어오는 결혼적령기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제 옆자리를 노릴 게 당연했으니까.
“정말 효심이 지극하시군요.”
그렇게 말하며 리아는 그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 왕자의 폭주를 막아줄 사람. 그리고 어쩌면 우연인 척 가장하고 이 만남을 계획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햇빛에 비친 머리카락이 정말 아름답군요.”
알폰스는 슬쩍 리아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그렇게 머리카락 끝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면 제게 설레지 않는 레이디는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눈앞에서 리아가 빠져나갔다.
“퍼스 님!”
창가 아래로 다가가자, 역시나 예상했던 자줏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는 여유롭게 도서관 한쪽에 마련된 탁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다리를 꼰 덕분에 책장 구석에서 삐져나온 구두를 보고 그가 있음을 알아냈다. 반가움에 리아는 자신이 왕자와 말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퍼스에게 다가갔다. 의기양양한 표정의 리아를 보자, 퍼스는 보던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안녕하십니까, 리아 양.”
어제도 봤지만 마치 오래 안 본 사람처럼 데면데면한 인사였다. 그의 눈에는 ‘왜 한창 재밌게 보는 와중에 말을 거느냐’는 약간의 비난도 서려 있었다. 하지만 리아는 모른 척하며 그가 읽고 있는 책 이름에 관심을 가졌다.
“‘사막 기후의 생태’인가요?”
“온실 관리인들에게만 맡겨두기엔 사막의 기적 사태가 생각보다 중대해서요.”
온실 관리인들의 무능을 지적하며 퍼스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자신을 포함해서 무시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리아는 퍼스가 무척 반가웠다.
“저도 관련 서적을 찾고 있었는데. 지금 보시는 책 저도 볼 수 있을까요?”
“제가 먼저 집었습니다만?”
“그럼 읽고 빌려주시면 안 되나요?”
본의 아니게 자신의 존재를 무시당한 알폰스는 순간 분노에 떨었다. 한낱 보좌관이 든 책 때문에 자신을 무시하다니. 저 영애는 생각보다 더 둔한 게 분명했다. 눈앞의 남자가, 그것도 왕자가 제게 관심을 두고 있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알폰스가 어떤 생각을 하든 말든 리아와 퍼스는 서로 책을 빌려주네 마네의 여부로 다투고 있었다. 퍼스는 제가 읽고 반납할 테니 그때 빌려가라고 했고, 리아는 읽고 반납할 때 그냥 제게 넘겨주면 안 되겠느냐고 끊임없이 퍼스를 설득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다툼을 지켜보던 알폰스가 근처로 다가와 섰다.
“퍼스.”
“네, 알폰스 왕자님.”
그가 부르자 퍼스는 재빨리 테이블에서 일어나 정자세로 섰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책이 떨어졌다. 리아가 허리를 숙여 책을 받아내,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알폰스에게는 책을 떨어뜨리고 받는 장면마저 두 사람의 합이 척척 맞는 것처럼 보였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알폰스는, 퍼스에게 명령했다.
“그 책은 영애께 넘기도록.”
퍼스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아마 리아에게 했던 말처럼 제가 먼저 집은 거라고 항의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알폰스가 눈을 가늘게 뜨자, 바로 책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전 보좌관 님께서 읽으신 다음도 괜찮습니다.”
아까까지는 ‘퍼스 님’이라고 했으면서 그의 앞에선 ‘보좌관 님’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폰스는 리아에게 대답하는 대신 퍼스에게 눈길을 보냈고, 퍼스는 직접 손으로 책을 집어 리아에게 내밀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영애.”
자신 때문에 퍼스가 책을 빼앗긴 게 미안했다. 사과하려고 했지만, 알폰스가 있는 앞에서 사과하는 건 좋지 않을 듯했다.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봤는지 어쨌는지 퍼스는 성큼성큼 걸어 알폰스의 뒤쪽에 가서 섰다. 늘 그랬듯이.
“제 보좌관이 영애께 맞는 책을 찾아드렸나 보군요. 영애의 시간이 단축되어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나가실까요?”
“하지만.”
“죄송하지만 여기 도서관은 해질녘 이후가 되면 더 이상 문을 열지 않아서요, 영애.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기숙사에 들어가셔야겠죠?”
알폰스는 살짝 리아의 어깨를 밀어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해질녘이면 도서관이 닫는다는 것 또한 거짓말이었다. 퍼스에게 분명히 저녁까지 올 수 있다고 미리 안내를 받은 그녀였다. 하지만 리아는 알폰스에게 항의할 수 없었다. 이곳 또한 왕궁의 일부였으므로, 왕자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나가라고 하면, 리아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네. 책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아는 마지막으로 퍼스에게 한 번 더 인사했다. 하지만 퍼스는 늘 그렇듯 무표정하게 고개를 한 번 마주 숙일 뿐이었다. 세 사람이 도서관에서 나오자 문 앞에 있던 관리인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1 왕자님, 보좌관님, 페넬로페 영애. 어떻게 같이 나오셨는지…?”
“해질녘이 되었으니 도서관을 닫게. 추가 근무하면 안 되지, 자네도.”
“예? 하지만….”
“야근도 습관이라네. 이만 들어가게.”
관리인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알폰스가 웃으며 압박하기에, 문을 꽉 닫은 후 손잡이를 돌려 도서관을 모두 원위치시켰다. 그 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영애도 어서 들어가시죠. 퍼스.”
“네.”
자연스레 퍼스가 다가와 서자, 리아는 두 손을 휘휘 저으며 거절했다.
“아녜요. 이번엔 정말 안 데려다주셔도…!”
“‘제’ 마음입니다. 받아주시죠.”
마지막까지 알폰스는 매너 있게 굴었다. 하지만 리아에게는 지나친 배려일 뿐이었다. 부담스럽지만 왕자의 말을 두 번이나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스는 정중하게 리아에게 허리를 살짝 숙였다.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선 알폰스의 입가에 더 이상의 미소는 없었다. 하지만 변한 알폰스의 표정은 모르는 채로, 리아 또한 뒤돌아섰다. 퍼스가 한 발 앞서 걷고 있었다. 걷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알폰스의 기척이 사라지자, 리아는 조심스레 먼저 물었다.
“죄송해요. 먼저 읽으실래요?”
“괜찮습니다. 먼저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
리아는 안경 너머로 퍼스의 표정을 읽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알폰스와 달리 퍼스의 표정은 읽기가 힘들었다.
“정말 괜찮으니까요.”
자신의 기색을 살피는 걸 알았는지, 퍼스가 먼저 말했다. 하지만 그 말조차 왠지 선을 긋는 듯했다. 괜스레 서운해지려는 마음을 숨기고 물었다.
“제1 왕자님께서 도서관에 온 건 우연인가요? 아니면 이것도 퍼스 님의 계획 중 일부인가요?”
하필 식물 관련 장르에 왕자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리아였다. 자연히 알폰스의 방문에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퍼스는 이 또한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저희 상관의 말을 빌리자면, 그럴 때는 ‘필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상관의 보좌관이 만든 인연의 줄임말인가요?”
“로맨틱하지 않았나요? 상대방의 관심사를 함께한다는 콘셉트인데요.”
‘로맨틱’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퍼스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너무도 그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리아는 그만 풋,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