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도서관 미궁 (1)
작은 화분에 대한 감사 인사로 퍼스는 도서관 위치를 알려주었다. 게다가 종종 후원에 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상관으로서의 퍼스는 냉혈한일지 몰라도, 사람으로서의 퍼스는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리아는 생각했다.
이미 시간이 늦어, 내일 점심시간에 찾아가 보리라 결심한 리아는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쩡하다 생각했지만 막상 방으로 들어서니 절로 신음이 났다. 허리부터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의식을 까무룩 잃어갈 무렵,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리아.”
익숙한 목소리였다. 리아는 가까스로 눈을 떠 비척비척 문 앞까지 걸어갔다. 문을 열자,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메이의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 리아? 녹초가 다 됐네.”
“메이.”
괜찮다 말하려 했는데 메이가 먼저 리아의 양 볼을 담고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리아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메이는 스스럼없었다.
“메, 메이.”
“아, 불편했어? 미안. 내가 동생이 많다 보니 나도 모르게.”
메이는 자연스레 리아의 방에 들어왔다. 그러곤 리아를 침대에 앉혔다.
“점심시간 일이 신경 쓰여서 와봤어. 무슨 일 있었어?”
“첫날이라 긴장을 좀 많이 했나 봐요. 전 괜찮아요.”
“하루 만에 애 얼굴이 반쪽이 됐네.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킨 거야?”
그렇게 말하며 메이는 조심스레 리아의 얼굴에 손을 댔다. 이번엔 리아도 놀라지 않고 순순히 얼굴을 그녀의 손에 맡겼다. 얼굴에 온기가 닿자 왠지 안심이 되었다. 리아는 졸린 듯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풀린 리아의 얼굴을 보자, 메이는 조심스레 손을 뗐다.
“누가 괴롭혔는지 묻고 싶지만 졸린 모양이네. 얼른 씻고 자.”
“전 괜찮아요. 감사해요.”
메이 또한 무척이나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것 같았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환경을 만나 무척이나 긴장했었던 모양이었다. 메이의 온기가 닿자, 비로소 온몸의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 리아의 마음을 둥둥 뜨게 만들었다.
“괜찮기는. 알았어, 내일 봐.”
“네, 내일 봬요. 메이 양.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
씻기 위해 방으로 돌아서자, 창가에 놓인 화분이 보였다. 퍼스에게 준 화분에 들어 있는 씨앗과 같은 새싹이었다. 자신은 저 새싹이 후에 뭐가 될지 알고 있었다. 퍼스는 과연 자신의 선물이 무언지 짐작할 수 있을까. 왠지 그라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은… 쉬어야겠지.”
가까스로 기운을 내 씻은 리아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의식을 잃듯 잠이 들었다.
***
어제는 정말 리아에 대한 시험이었다는 듯, 다음 날엔 바로 멀쩡한 임무가 주어졌다. 사막 기후 관리 부서에 있는 식물들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각 담당자가 일정 구역의 식물을 모두 담당했고, 리아는 돌아가면서 이들의 시중을 들며 일을 배우게 되었다. 케빈은 식물들의 생장을 연구하는 일이 주였다. 그는 리아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줄 게 없다고 선을 그었다.
사막에 있는 식물이라고는 선인장밖에 몰랐던 리아는 사막 기후 관리 부서 곳곳을 돌아다니며 깜짝 놀랐다. 그 종류가 굉장히 많았고, 사막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랗게 자라는 식물도 많았다. 오아시스 구역엔 리아의 키를 뛰어넘는 높이의 식물도 많이 있었다.
담당자는 아주 키가 작은 사람이어서, 모든 일은 사다리를 타고 진행되어야만 했다. 바위 절벽 지대에서 자라는 식물을 위한 구역도 있었다. 실제 사막에서 공수해왔다는 커다란 바위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리아는 새삼 이 온실이 얼마나 식물이 살기 좋은 구조인지 알게 되었다. 높이 쌓인 바위 틈에서 다양한 색의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 구역 담당자는 장갑을 낀 채로 암벽을 타는 게 일상이었다.
“저 위에서부터 식물이 괜찮은지 확인하는 거야.”
담당자는 직접 올라가는 시범을 보였다. 자칫 잘못해 미끄러졌다간 바위에 머리를 박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올라가는 내내 리아는 불안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네가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불안해해?”
케빈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올라가는 게 숙련된 담당자는 훌쩍훌쩍 가볍게 올라가더니 이내 최상층에 다다랐다. 그러곤 고개를 내밀어 아래에 있는 리아와 케빈에게 손을 흔들었다.
“위험해요!”
“걱정 마! 숙련되면 너도 금방 올라올 수 있어.”
걱정과 달리 담당자는 해맑았다. 최상층부터 하나씩 식물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내려오는 것도 순간이었다. 폴짝폴짝 가볍게 뛰어 내려오는 게 마치 다람쥐 같았다.
“저도 올라가야 하나요?”
리아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그러자, 케빈이 비웃으며 팔짱을 꼈다.
“왜? 못하겠나?”
사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산을 자주 다닌 리아였지만, 암벽을 오른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못하겠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수습 그만하고 집으로 퇴근하라고 할 것 같은 기세였다. 리아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
“해, 해보겠습니다.”
그러고 바로 바위에 오르기 위해 손을 올렸다. 그러자 케빈이 당황하며 그녀를 말렸다.
“진정해. 맨손으로 바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그는 가볍게 한 손으로 바위에 매달린 리아를 떼어냈다. 잠깐 허리에 그의 손이 감겼다. 그녀를 들었다 놓았는데도 케빈에겐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과연 전직 기사단 부단장 출신이어서인지 근력이 좋은 모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리아는 지나치게 열정을 드러낸 게 창피해졌다. 그리고 머쓱함에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던 케빈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한 손에 감기던 허리의 감촉이 떠올랐다. 부끄러워하는 리아를 보고 있으려니 케빈도 괜히 손을 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흠. 앞으로는 저기도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해.”
“네. 열심히 연습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일찍 퇴근하도록 해.”
첫날과 달리 일찍 일이 끝났다. 사막 기후 관련 부서 각 구역마다 일주일씩 일하러 가기로 한 게 다였다. 사막의 기적을 잠깐 관찰하고, 리아는 도서관으로 발을 옮겼다.
***
리아는 품속에서 퍼스가 그려준 지도를 꺼냈다. 아직 궁에 익숙하지 않은 리아를 위해서 상세하게 적힌 지도였다. 그의 조언에 따라 온실 관리인으로부터 수습임을 증명하는 증서까지 발급받아 왔다. 도서관은 왕자 궁 근처에 가까웠다. 물론 아는 사람을 마주칠 리 없겠지만,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갔다.
한참을 걷다 보니, 화려한 문양으로 된 커다란 문이 보였다. 퍼스가 말해줬던 도서관 입구인 듯했다. 테이블을 펴고 앉아있는 문지기에게 다가갔다. 졸고 있던 문지기는 리아가 다가가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십니까?”
“아, 온실에서 일하고 있는 수습 리아 페넬로페라고 합니다.”
“페넬로페 영애이십니까?”
관리인은 리아의 이름을 듣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궁에 들어와서 이런 반응은 오랜만이라 리아도 덩달아 당황했다.
“지금은 그냥 온실 수습일 뿐이니까요.”
리아의 말에 관리인은 침착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선 리아가 건넨 수습 증명서를 살폈다.
“어느 분야 책을 보고 싶으신데요?”
“음… 식물 관련 분야와 사막 기후 관련 책을 읽고 싶은데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관리인은 테이블 한쪽에 놓인 작은 상자를 제 앞으로 가져왔다. 그 상자의 위와 양옆에는 돌아가는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관리인은 끼릭끼릭 소리를 내며 오른쪽 손잡이를 잡고 몇 바퀴 돌리다가, 위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입구 문이 조금씩 돌아가면서 그 문양을 달리했다.
“우와…. 대단해요.”
리아가 신기해하자, 관리인은 머쓱해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공간 능력자이긴 한데, 제 힘을 조절하려면 이런 도구가 필요해서요. 사실 이 손잡이 자체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제 능력을 어느 정도 쓸지 조절하는 용도로 사용할 뿐이죠.”
“이 도서관이 매우 큰가요? 공간 능력을 써야 할 만큼?”
그는 씨익 웃어 보였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했다.
“그냥 들어가시면 미아가 되실 겁니다. 공간 능력으로 만든 거라 도서관 내부는 살아 움직이듯 계속 움직이니까요. 원하셨던 사막 기후 관련 분야와 식물 관련 분야 도서만 모아서 공간을 재구성해두었습니다. 들어가시면 원하시는 책만 보이실 거예요.”
“빌려서 나올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다만 빌릴 수 없는 책들은 이 입구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없어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관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문까지 열어주었다. 문 너머는 빛이 들지 않아 어두웠다. 리아가 발걸음을 내딛기를 주저하자, 관리인이 살며시 등을 떠밀어 주었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몇 걸음 내딛자, 육중한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윽고 완전한 어둠에 갇히고 말았다. 불을 어떻게 켤까 고민하기도 전에, 리아의 바로 옆부터 차례로 불이 켜졌다. 이 또한 능력자의 손길이 닿은 듯했다. 왕궁은 어느 곳 하나 능력자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모든 게 새로워 리아는 그만 소리 내 놀라고 말았다.
“우와….”
이윽고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도서관 내부에서는 리아의 발걸음 소리만 들릴 뿐, 다른 기척은 전혀 나지 않았다. 온전히 불이 켜지고, 주위가 환해지고 나서야 리아는 책 목록을 둘러보았다.
관리인의 말처럼 리아가 원하는 분야의 책들이 엄청나게 많이 꽂혀 있었다. 분명 원하는 분야의 책들로만 정리해달라고 했으니 몇 권 없을 줄 알았는데 꽤 양이 많았다. 이 정도 양이면 리아가 수습 기간 내내 도서관에서 책만 봐도 다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다 찾아보려면 애 좀 먹겠는걸.”
리아는 관리인에게 원하는 주제의 책을 더 좁혀달라고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먼저 책들을 전체적으로 훑어보기로 했다. 아주 고대의 양피지로 된 문서부터, 가장 최근에 쓴 듯한 책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심지어 사이키델리아의 언어로 되어 있지 않은 책도 많았다. 곤혹스러운 마음에 일단 식물 관련 책 중 아무거나 한 권을 뽑았다.
‘난생처음 시작하는 가드닝’
그곳에선 식물 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이 식물을 키우는 법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었다. 좋은 씨앗을 고르는 법부터 가지치기까지 취미로 식물을 기르는 사람이 볼 법한 책이었다. 리아는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라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을 사용하면 사막의 기적과 같은 아주 드문 식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엄청난 속도로 자라났다. 그래서 천천히 키우고 싶은 식물은 오히려 능력을 쓸 수가 없었다. 덕분에 리아는 능력을 쓰지 않고도 식물을 키우는 방법을 아주 잘 알았다.
다만 사막의 기적처럼 모르는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은 키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잘 알지 못했다. 다행히 페넬로페 백작이 식물 관련 책은 외서까지 많이 구해준 터라, 이론상의 지식은 조금 있었다.
하지만 사막의 기적과 같은 식물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분명 그 지방에서는 흔하다고 하는데도 책에서 본 적이 없었다. 아마 들풀처럼 흔한 거라 오히려 책에 실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꽤 애먹고 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