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작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온실로 돌아가기 전, 리아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온실 입구 관리인을 찾았다. 안면이 있는 그는 리아의 얼굴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리아의 요청에 응했다. 어디에 쓰려는지 묻기에, 리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비료를 나르려고요.”
“비료요? 염력 능력자가 날라주지 않았나요?”
관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확신했다. 케빈은 자신을 괴롭히는 게 맞다고. 아닐 거라는 마지막 가능성마저 날아갔다. 리아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은 채로, 리아는 빌린 물건을 들고 사막 기후 식물 관리 부서로 향했다. 오후 내로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자신이 맡은 사막의 기적을 보러 가고 싶었다. 오늘 출근하고 난 이후, 정작 담당한 식물 근처는 가보지도 못했다.
정식으로 함께 일할 동료를 소개받는다든가, 일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을 거라는 예상과 전혀 다른 근무였다. 하다못해 기존에 사막의 기적을 맡았던 사람들에게 키웠던 방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라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케빈은 리아를 정식 채용시켜 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멀리서 케빈이 있을 천막이 보였다. 리아는 그쪽을 일부러 한 번 노려본 후, 비료 포대가 쌓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이상한 광경에 눈을 비벼야 했다.
“응? 내가 점심을 잘못 먹었나?”
분명 반 이상 남아 있어야 할 비료 포대가 반절 이상 줄어 있었다. 처음에 분명 리아의 키만큼 쌓여 있다가 가슴 부근으로 줄어든 터였다. 그런데 지금 높이는 허리 아래 정도였다. 리아의 기억력이 어지간히 나쁜 게 아닌 이상, 분명 비료 포대를 누가 나른 게 틀림없었다. 그렇담 도대체 누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등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벌써 지친 건가?”
뒤로 돌아보니, 오전과 똑같이 띠꺼운 표정의 케빈이 보였다. 이 사람은 주기적으로 자신에게 시비를 걸러 오는 게 분명했다. 허리에 올린 양손을 보아하니 착각은 절대 아니었다.
“지금 움직이려고 했습니다….”
“그건 뭐지?”
“아, 이거요.”
케빈은 리아의 옆에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리아는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퍼스가 알려준 비장의 비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수레?”
“네! 들고 걸어가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라서 도구를 좀 이용해보려고 합니다.”
리아는 짐짓 유능한 척, 퍼스의 대사를 이용했다. 무거운 물건을 능력도 없는 일반인이 옮기려면 바퀴가 달린 수레를 이용해야 한다는 게 그의 조언이었다. 케빈은 말없이 눈썹 한쪽을 올렸다. 분명 그가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한 리아는 더 의기양양해졌다. 하지만 케빈의 입에서 나온 건 미처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이제 겨우 사람의 머리를 쓰게 됐군?”
“네에?”
“무거운 걸 나르라고 하면 수레 같은 도구를 이용하는 게 제일 첫 번째지. 일 해보지 않은 귀족 아가씨다 보니 몸을 직접 쓰는 방법밖에 생각하지 못하더라니.”
울컥한 마음에 리아는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리아가 입을 열기도 전, 케빈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도 제법이네.”
지금 뭐라고…? 그의 말에 리아는 뛸 듯이 기뻤다. 그에게서 칭찬 비스무리한 말이 나오다니! 별건 아니지만 왠지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기뻐서 화내려던 것도 잊고 활기차게 대답했다.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곤 수레에 비료 포대를 싣고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비료 포대 넘어뜨리지 말고!”
뒤로 케빈의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그마저도 왠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처럼 바꿔서 들렸다. 이건 다 퍼스 덕분이었다. 일을 마치자마자 퍼스에게 꼭 사례를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흥분한 리아는 비료 포대 중 일부를 누가 옮겨줬는지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
솔직히 힘들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오후는 빠르게 지나갔다. 비료 포대를 다 나르자 케빈의 허락하에 사막의 기적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사막의 기적을 생각하면 없던 생기도 솟아났다. 꼭 살려내고 싶다는 마음이 차올랐다.
해가 질 시간이 되자, 온실 내부도 해질녘처럼 어스름이 지기 시작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밤이 되면 퇴근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 없었다. 리아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안녕.”
겨우 도착하고 숨이 채 진정되지 않은 채로 리아는 사막의 기적을 살폈다. 다른 다섯 뿌리와 함께 있었지만, 리아가 담당하는 사막의 기적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관찰했다.
어제 물을 뿌리고 나서 더 시들해진 이후로 다행히 큰 변화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왜 시들시들한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흙이 잘못된 건가 해서 손가락으로 살짝 뿌리 주변을 파봤다. 하지만 흙은 어제 케빈이 내린 비로 촉촉한 상태일 뿐, 큰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뭐 때문에 자꾸 시드는 거니….”
혹시나 해서 슬쩍 능력을 다시 흘려 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제 능력이 부족해진 건가 하는 마음에 준비해온 빈 화분에 살짝 씨앗을 꽂아 넣고 손끝으로 능력을 아주 조금만 흘렸다. 적당한 양으로 쏟는 제어는 어려웠지만, 살짝 싹만 틔우는 정도로 제어하는 건 가능했다. 바로 반응하듯 새파란 새싹이 흙을 뚫고 톡 올라왔다. 능력이 안 통하는 건 아니고, 사막의 기적에만 능력이 통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분명 더 커지는 종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호기심이 일었다. 리아는 사막의 기적 생김새를 최대한 자세히 기억하려 애썼다. 지금 리아가 가진 정보만으로는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도서관에 가서 서적을 좀 찾아봐야 할 듯했다. 왕실 전용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로 했다. 리아는 사막의 기적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내일 또 보자.”
다른 사막의 기적들 역시 마찬가지로 시들고 있었다. 진짜 사막과 같은 기후를 만들어줬는데 왜 그러는 걸까. 역시 원인은 물 양인 듯한데…. 슬쩍 목걸이를 빼려 하자 훅 열기가 밀려들었다. 기후 관리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리아는 고민하며 온실을 나섰다. 도서관이 있는 위치를 물으려 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퇴근한 후였다. 아는 사람이 몇 없는 리아는 도서관의 위치를 물을 사람을 찾지 못했다. 별수 없기도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아는 식사를 받아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 뭡니까?”
그곳엔 약속이나 한 듯 퍼스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저녁도 변함없이 혼자 먹는 듯했다. 자신만의 장소였던 후원 귀퉁이에 또다시 리아의 모습이 보이자, 퍼스의 입에서 불만이 툭 튀어나왔다.
“혹시나 해서 왔는데 역시나 여기 계시네요.”
“있을 줄 알고 오신 겁니까?”
“반반이었어요. 동료분들이랑 식사 안 하세요?”
“업무 시간에도 계속 보는데 밥까지 같이 먹어야 하나요?”
식사 시간을 방해받아서 불쾌한지 퍼스의 대답이 곱지 않았다. 머쓱해진 리아는 식사를 들고 퍼스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았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저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안 보이는 곳에서 조용히 먹고 갈게요.”
그렇게 말한 리아는 주위의 풀을 당겨 본인의 모습을 가렸다. 모자란 부분은 살짝 능력을 써 당기자, 덩굴이 쭉쭉 늘어났다. 곧 퍼스의 시야에서 리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거기서 멈췄어야 하는데 또 제대로 제어가 안 된 건지, 덩굴은 몸을 늘리다 끝내 꽃을 피우고 말았다.
“…능력으로 자라게 하신 겁니까?”
“어엇… 네. 조금만 자라게 한다는 게 그만. 죄송합니다.”
“꽃이 피는 식물이었군요. 이 덩굴이.”
아주 작고 하얀 꽃 몇 송이가 정확히 리아의 손끝이 닿은 덩굴 끝에 피어 있었다. 이 덩굴은 꽃이 피지 않는다고 해서 심은 것이었다. 꽃 알레르기와 비슷한 증상이 있는 왕자의 눈에 꽃이 띄어선 안 되니까. 그 사실이 기억난 리아는 파랗게 질렸다.
“피면 안 되는데 꽃이 피어 버린 건가요?! 정말 죄송합니다. 꺾… 꺾어야 할까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퍼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꽃이 피는 게 불가능한 식물로부터 꽃이 피게 하는 능력이라니. 식물을 키우는 능력이라고만 생각했지, 이 정도까지일 줄은 전혀 몰랐었다. 다만, 퍼스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확실히 기적이 맞았다.
“이 정도 작은 건 괜찮겠죠. 그냥 둡시다.”
그래선지 퍼스는 평소라면 전혀 내리지 않았을 결론에 다다랐다. 희고 작은 그 꽃을 그냥 내버려 두자는. 제 부하들로부터 냉혈한이라는 평을 듣는 그였다. 그 자신도 부하들의 평가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은 왠지 모르게 그의 마음이 풀어졌다. 하얗고 작은 존재에게 시선과 마음이 빼앗겨버린 듯했다.
“꽃이 피는 종이었나?”
그의 의문에 리아가 대신 대답했다.
“꽃이 피는 종이 아니어도 꽃이 피게 할 수 있어요. 능력을 다 개방해서 쓴다면 후원이 온통 꽃밭이 될걸요?”
그녀는 본가인 페넬로페 저택의 온실에서도 종종 꽃을 피웠다. 식물학자들이 본 적 없는 꽃들이 리아의 손끝에서는 계속해서 피어났다. 그래서 리아는 식물학자들의 지식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리아의 손이 닿은 식물에 한해서는, 그녀만이 알 수 있는 정답이 존재했다.
“예외라는 걸 눈앞에서 볼 줄이야.”
“재밌는 말씀을 하시네요. 능력자들 모두 예외라면 예외잖아요.”
사이키델리아 밖으로 나가면, 능력자들은 단순히 이상한 인종이 되어버린다. 국민 자체가 자원인 사이키델리아는 인력의 유출을 매우 꺼렸다. 일부 국경지역에서는 사이키델리아 국민을 돈으로 사기도 했다.
노예로 이용당하는 국민을, 사이키델리아는 어떤 예외도 없이 지켜냈다. 그 국민이 있는 나라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사이키델리아의 국민은 철저히 사이키델리아의 보호를 받았다. 그들은 외부에서는, 철저한 예외에 속했다.
“그렇긴 하죠.”
꽃 때문에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져 있었다. 리아는 주춤주춤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퍼스는 손을 뻗어 그런 리아를 말렸다.
“그냥… 드시죠.”
“그래도….”
“후원은 어차피 제 것도 아니니까요.”
어색하게 자리를 옮겨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보고 앉아있게 되었다. 퍼스는 무감하게 빵을 씹었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에게 전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마치 불을 내기 위해 땔감을 집어넣는 것 같았다.
“오늘 감사했어요.”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자, 리아는 처음 목적이었던 감사 인사를 조심스레 꺼냈다. 하지만 퍼스는 자신이 조언한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썹이 올라간 것을 보고, 리아는 그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단 걸 알았다.
“수레… 알려주신 거요.”
“아.”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퍼스. 리아는 수줍게 웃으며 겉옷 안쪽에 품고 있던 화분을 꺼냈다.
“보답이라기엔 약소하지만 제 능력으로 싹을 틔운 화분이에요.”
됐다고 말하려던 퍼스는 리아의 능력으로 싹을 틔웠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식물에 문외한인 그로서는 고작 싹이 난 그 식물의 정체를 알 순 없었다.
“이건 뭡니까?”
“뭔지는 키워보시면 알아요!”
“뭔지도 모르고 제가 키울 수 있나요?”
“매일 신경 쓰실 필요 없이 일주일에 한 번만 물을 주시면 돼요.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저한테 가지고 오세요. 금방 다시 생생하게 해드릴게요.”
식물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하지만 리아의 능력에 흥미가 생겨서, 이 식물에 대한 궁금증도 솟아났다.
“이것도 당신의 능력으로 꽃이 안 피는 식물인데 꽃이 피거나 할 수 있나요?”
“그럼요. 작은 기적을 보실 수 있어요.”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작고 탐스러운 꽃이 소담한 자태를 뽐냈다.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감사합니다.”
퍼스는 어느새 자신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걸려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