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멀고도 험난한 정식 채용의 길
땀이 뚝뚝 떨어졌다. 분명 사막 기후 식물 관리 부서 입구에 들어설 때 받은 목걸이로 체온 조절이 되고 있을 게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외부 기온은 차단해줄지언정 내부인 몸에서 열이 올라오는 것까지 막아주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양손을 다 사용하고 있는 리아는 땀을 닦을 수조차 없었다. 다행히 비료 한 포대씩은 들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보다 힘이 약한 리아였기에, 훨씬 느리고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야 함은 분명했다. 체력이 빠르게 떨어졌다. 팔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무겁고 둔해졌다. 점점 정신도 멍해지고 있었다.
“아직 이것밖에 못 했나?”
머리 위로 케빈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의식이 흐려진 리아는 대답해야겠다는 생각도 못한 채로 비료를 나를 뿐이었다. 지정된 곳에 비료를 떨어뜨린 리아는 잠시 허리를 펴고 천장을 보았다. 어떤 능력자의 능력인지 몰라도 진짜 사막처럼 내부가 밝고 햇빛이 쨍쨍했다. 어지럼증까지 더해지자 정말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보이는 환경은 정확하게 사막과 똑같았으므로 더욱 그랬다.
“벌써 체력이 다했나?”
“…아니에요.”
케빈은 그녀를 전혀 도와주지 않은 채 감시만 했다. 그는 리아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리아를 꽤 탐탁지 않아하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그는 왜 리아를 싫어하는 걸까. 그녀의 출신 때문일 걸까. 짐작이 가는 건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왕궁 근무자 중 귀족 출신은 꽤 많았다. 그녀가 귀족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할 이유는 없었다.
“뭘 그렇게 보나?”
“이제 점심시간이라서요. 식사하고 와서 마저 해도 될까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러도록.”
케빈은 노골적으로 남은 비료 포대를 훑어보고 천막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런 케빈의 행동을 못 본 척 리아는 자리에서 돌아섰다. 사실 밥이고 뭐고 당장에 방에 들어가 쓰러져 자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잠이 들어버리면 한동안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리아!”
식당에 가니 메이가 먼저 와 있었다. 같은 부서원들과 함께 식사를 온 모양이었다. 아침에 깔끔한 모습으로 나갔던 것과 달리 산발이 된 리아를 보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메이 양.”
“무슨 일이야? 설마 퍼스 그 자식이 널 데려가서 괴롭히기라도 한 거야?”
“아뇨. 괴롭힌 건 퍼스 님이 아니에요.”
“그럼 누가 널 괴롭힌단 말이야?”
리아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메이의 험악한 표정을 보아하니, 누군지 알려주면 당장에라도 쫓아갈 것만 같았다. 대신 화내주는 메이를 보자 조금 마음이 풀렸다. 멀리서 메이의 동료들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동료를 돌아보며 당황했다.
“그럼 저도 식사하러 갈게요.”
메이를 위해 리아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러곤 식사를 받는 줄 맨 끝에 섰다. 직접 식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는 건 익숙지 않은 일이었지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아침과 별다르지 않은 소박한 식사였다.
소란스러운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리아는 식사를 시작했다. 의자에 앉으니 몸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빵을 야채가 든 죽에 찍어 한입 넣으니, 순식간에 행복해졌다. 왕궁이라서 그런지 식당 요리사들 실력이 좋은 듯했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미각이 발달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일하고 나서 먹는 식사가 맛있다는 걸 리아는 난생처음 깨달았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도 점심시간이 아직 조금 남아, 후원에 나가기로 했다. 리아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바닥에 놓았다. 그러곤 빈 곳에 가 드러누웠다. 다들 귀족 아가씨니, 영애니 하지만 리아는 사실 예의범절 따위 벗어버리고 풀숲 한가운데 있는 게 제일 마음 편했다.
능력이 이래서인지 식물이 좋고, 식물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행복했다. 그래서 왕궁에 들어와서 제대로 식물에 대해 배우고 싶었다. 제 능력을 써서 죽어가는 식물들을 모두 살리고 싶었다. 리아는 사람보다 식물이 더 편했다.
사막의 기적에 대해 고민하는 건 좋았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건 젬병이었다. 자신을 이유 없이 싫어하는 케빈에 대해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잘 지낼 수 있을까?”
바스락.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음…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넘어지기라도 하신 겁니까?”
깜짝 놀란 리아는 상체를 일으켰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누군가에게 보일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치마를 툭툭 털며 일어서려 하자, 퍼스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말렸다.
“쉬고 계셨던 거라면 제가 방해했군요. 비켜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퍼스 님도 쉬러 오신 건가요?”
“네. 사람 많은 곳에서 식사하는 걸 선호하지 않아서요.”
그러고 보니 퍼스의 손엔 식당에서 나오는 빵과 야채죽을 담은 그릇이 있었다. 리아는 자리를 비켜 옆을 비웠다.
“앉아서 드시겠어요?”
“…네, 그러죠.”
퍼스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리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리아가 앉아있던 자리는 퍼스가 매일 점심을 먹으러 오는 자리였다. 누워 있는 걸 봤을 때는 적잖이 놀랐지만, 그녀가 있다고 식사에 방해를 받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원래 자신이 매일 오곤 했던 자리를 비켜주는 건 왠지 빼앗기는 듯한 기분이 들어 별로였다.
“오늘 점심 맛있더라고요.”
“왕궁 요리사가 만든 거니까요.”
“맛있을 법도 하네요! 퍼스 님도 드실 만하신가요?”
“네.”
모든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그였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본심인 건지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태연하게 식사를 하는 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리아는 머리에 떠오른 질문을 꺼냈다.
“언제부터 왕궁에서 일하셨나요?”
“음…. 일곱 살 때부터일까요.”
“일곱 살이요?”
“어릴 때부터 알폰스 왕자님의 눈에 띄어 입궁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왕궁에서 일하기 시작하는 평균 나이가 열다섯에서 열입곱 살 정도인 걸 생각하면, 꽤 이른 나이였다.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대신 리아는 다른 질문을 하기로 했다.
“처음 왕궁에 들어왔을 때… 힘드셨나요?”
꽤 오래전 이야기라 그런지, 퍼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곱 살 때를 회상하는 듯했다. 리아는 재촉하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빵을 한입 베어 물고 우물거리던 그는 삼키고 나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글쎄요. 왕자님께서 어리고 그러셔서 절 좀 괴롭히고 싶으셨던 건지 이상한 걸 이것저것 시키시긴 했습니다. 제가 별 반응이 없자, 금방 그만두셨지만요.”
“괴롭혔다고요? 어떻게요?”
“그 나잇대에 맞는 장난이었습니다. 괜히 높은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오라고 시키시거나, 제 신발을 숨기거나, 제 방문 위에 물을 가득 채운 양동이를 올려놓으시거나 하셨습니다.”
그 정도면 노골적인 괴롭힘이었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그 일을 당했을 퍼스를 생각하니 리아는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 하지만 퍼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지난 일을 회상했다.
“리아 양도 누가 괴롭히시나요?”
그리고 불시에 질문이 돌아왔다. 당황한 리아는 아니라고 말하려다 그만 솔직하게 말을 해버렸다.
“으, 그게 아닌지 맞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제 상관분이 저를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 같다고 할까…. 음, 잘 모르겠어요.”
분명 상대는 냉정하다는 평가까지 듣고 있는 퍼스였지만, 리아는 왠지 그에게 상담하고 싶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듯, 고민하는 내용 또한 제대로 대답해줄 거란 기대를 했다. 하지만 퍼스는 리아의 말을 듣고도 무표정하게 식사를 계속할 뿐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한참을 기다리던 리아는 곧 점심시간이 끝나감을 깨달았다. 왕자궁은 이 근처였기 때문에 퍼스는 조금 더 있어도 될 듯했지만 온실까지 가야 하는 리아는 서둘러야 했다.
“먼저 일어나볼게요. 식사 맛있게….”
“뭘 시키는데요?”
“예?”
“케빈 님 말입니다. 리아 양에게 뭔가 하기 힘든 일을 시켜서 괴롭히는 것 아닙니까?”
“괴롭…히는 건 아닌 것도 같은데. 비료 포대를 나르라고 시키셨어요.”
“리야 양 한 명에게 말입니까?”
“예….”
“몹시 비효율적인 일을 시키는 걸 보니, 괴롭히는 게 맞군요. 혹은 리아 양을 시험하고 있거나요.”
리아도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해 최대한으로 노력하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도 반 이상 남은 비료 포대를 생각하니 온실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졌다.
“그럼 해내면 되겠네요.”
퍼스는 간단히 결론지었다. 리아는 궁금해져 다시 퍼스의 옆에 앉았다.
“어떻게요?”
“리아 양은 지금 비료 포대를 어떻게 나르고 계십니까? 리아 양의 신체 능력으로는 비료 포대 하나를 드는 것도 힘겨울 것 같아 보이는데요.”
“안 그래도 하나씩 겨우 들어 나르고 있어요.”
“역시나 몹시 비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계시군요. 근성을 보여주는 데는 그만한 방법이 없겠지만, 일 처리 능력을 증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방법입니다.”
근성을 보여주려 한 것도 맞는 얘기였다. 하지만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는 말에 리아는 솔깃해 저도 모르게 퍼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나요?”
“그건….”
그녀의 말에 대답하려 퍼스가 고개를 리아 쪽으로 돌렸다. 그러다 리아의 얼굴이 몹시 가깝게 있다는 걸 깨닫곤 조금 눈이 커졌다. 하지만 리아는 그가 놀랐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에겐 방법이 몹시 절실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얼굴이 숨결이 서로에게 닿을 정도로 가깝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그건?”
“얼굴이 너무 가까운데요.”
“제발 말씀해주세요!”
리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퍼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퍼스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분명 그녀는 질문을 하고 있을 뿐인데도, 하마터면 그녀에게 무슨 짓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위기감이 느껴졌다. 재촉하는 그녀 때문에 퍼스는 당황한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대답을 해야 했다.
“능력을 이용하면 되지요. 염력 능력자라든가….”
“이미 말해봤는데 온실에 파견 나올 한가한 염력 능력자는 없다고 하던데요.”
퍼스는 순간적으로 파견할 만한 염력 능력자를 떠올렸다. 리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케빈이 그렇게 말한 데는 분명 그녀 혼자의 능력을 사용하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퍼스는 잠시 식사를 멈추고 고민했다. 리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빠르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