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8)화 (8/75)

#8. 위대한 출근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리아는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퍼, 퍼스 님! 설마 이 쿠키가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죠?”

하지만 당황스러운 상황에도 퍼스는 냉정했다.

“말씀드렸듯이 이 쿠키는 이상이 없습니다.”

“그럼 제1 왕자님께서 왜 이러시는 거죠?”

“글쎄요.”

알폰스는 여전히 놀란 얼굴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런 그를 퍼스는 한심하다는 듯 슬쩍 내려다보았다. 퍼스의 따가운 시선을 눈치챈 듯, 알폰스는 자연스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여간 우리 보좌관은 재미가 없다니까. 자네 때문에 다 망했잖는가.”

“악취미십니다.”

리아는 상황을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한다는 걸 안 퍼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항상 이렇게 장난을 치곤 하십니다. 능력자가 만든 음식을 레이디에게 대접하고 독이 든 척하시죠.”

“하하하! 이게 다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낯설고 어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놀라셨나요?”

놀라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왕족이 먹는 음식에 독을 넣는다는 건 즉시 처형당할 수 있는 중죄였다. 혹시나 이 오해를 풀지 못하면 죽을 수는 있는 일이란 말이었다. 그런 일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리아는 당장에라도 눈앞의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왕족, 그것도 차기 왕이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제1 왕자였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만 했다. 하지만 속에서부터 오르는 분노를 도무지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알폰스 왕자님.”

“네, 말씀하시죠. 페넬로페 영애.”

“이 다과 모두에 독이 안 든 게 맞나요?”

“물론입니다. 제가 먹어서 증명해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렇담 맛있게 드시죠! 저는 볼일이 없으시면 이만 출근해도 될까요?”

마음 같아서는 ‘너나 맛있게 먹어!’ 하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리아는 최선을 다해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거절이었다.

“출근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와 만났다고 하면 영애의 상관도 뭐라 하지 못할 겁니다.”

전혀 고맙지 않았다. 리아는 지금 당장 출근하고 싶었다. 아침까지 완벽하게 좋았던 기분을 알폰스가 완벽하게 망쳐 놓았다. 도대체 이런 왕자에게 여성들이 왜 넘어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퍼스는 그런 리아의 기분을 십분 이해했다. 왕자의 이런 행동을 제일 이해할 수 없는 건 바로 그였으니까. 리아가 양쪽 치마를 꽉 쥐는 걸 보며, 퍼스는 내심 혀를 찼다.

“배려… 감사합니다만… 이만 일어나도 될까요?”

퍼스는 그녀의 인내심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게 분명하면서도, 그녀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왕족이라 봐준다를 머리에 새기고 있을 게 뻔했다. 반면,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뻔뻔하게 웃었다.

“아직 제 볼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볼일이 뭔지 여쭈어도 될까요?”

다행히도 이번에는 알폰스가 농담을 하거나, 시간을 끌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랬으면 리아는 정말 참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럼 피차 바쁜 것 같으니 본론만 얘기하겠습니다. 페넬로페 영애와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물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요.”

아하, 이거였군. 리아는 그제야 알폰스가 아침부터 귀찮게 자신을 찾았던 이유를 이해했다. 페넬로페 백작과 친해지기 위해 일부러 리아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많았다. 알폰스 또한 페넬로페 백작의 세력이 필요한 게 분명했다.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리아도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큰 뒷배가 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리아와 친해지려는 사람 대부분 리아 자체를 보기보다는 리아의 성인 페넬로페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더욱 리아는 스스로를 인정받고 싶었다. 부족한 능력을 인정받아 궁으로 올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온전히 리아의 능력만으로 인정받은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이 몹시 슬프면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지금 알폰스의 태도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리아는 그렇게 탐나는 능력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강력하지도 않았다. 알폰스가 그녀의 능력에 관심을 가지 않는 건 당연했다.

“와. 무려 제1 왕자님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니 제가 더 영광이죠.”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 퍼스가 부탁한 것보다 더 자주 만나 뵙기로 할까요?”

“…네, 그러겠습니다. 오늘 중요한 일정이 있으시다고 하던데 왕자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어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페넬로페 영애에겐 언제든 시간을 내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알폰스는 일어나 리아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리아는 재빠르게 일어서 마주 허리를 숙였다.

“영애를 출근지까지 데려다주게.”

“예, 알겠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마세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알폰스는 리아에게 거부할 한번의 기회조차 다시 주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고 후원을 빠져나가는 알폰스의 뒷모습을 보며 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렸다. 그제야 식은 홍차와 다과가 눈에 띄었다. 그거라도 어디겠나 싶어 홍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고생하셨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보기로 한 약속, 지켰으니 이번 주는 된 거겠죠?”

리아는 퍼스를 한껏 노려보았다. 알폰스와의 만남으로 기분이 몹시 저조했다. 퍼스는 또다시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방금 왕자님과 친하게 지낸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마 일주일보다는 더 자주 만나게 되시겠죠.”

“퍼스 님, 저는 왜 이 상황을 만든 게 자꾸 제1 왕자님이 아니라 퍼스 님 같죠?”

애초에 리아를 퍼스가 직접 데리러 온 것부터가 의심스러웠다. 능력이 먹히지 않는 식물, 리아의 능력을 기대하지 않는 알폰스의 태도… 모든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퍼스는 딱 잡아뗐다.

“궁정 온실 관리자들 중에서도 식물을 직접 생장시키는 염림력은 몹시 희귀합니다. 대부분 기후 관련 능력자 중 능력 강도가 약한 편에 속하는 자들이 온실 관리자로 부임받게 되죠.”

하지만 자신은 그 희귀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제어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동안 왕궁의 부름을 받지 못했던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막의 기적은 그 능력도 통하지 않잖아요?”

“염림력도 사람에 따라 강도가 다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찌되었건 바라던 대로 궁에서 일하게 되지 않으셨습니까? 기쁘지 않으신가요?”

“무척 기뻤습니다.”

“과거형이군요.”

“네, 아침까지는요.”

퍼스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그런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간 리아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오늘 아침 티타임도 퍼스 님 기획 맞으시죠?”

“오해가 크군요.”

“퍼스 님, 사실 여자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아니세요?”

뜬금없는 리아의 말에 퍼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요?”

“아니, 보석보다 비싼 초능력 쿠키로 마음을 얻으려 하다니 이상하잖아요. 낯선 상대에게서 그런 부담스러운 것 받는 걸 보통은 꺼려한다고요? 게다가 독… 그것도 농담이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하마터면 왕족 시해 죄로 제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농담이라고요?”

“대부분은 좋아하시던데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알폰스가 비싼 선물을 하는 것과 알 수 없는 농담을 하는 것 모두 상대방 여성은 좋아했다. 알폰스는 객관적인 조건으로는 정말 완벽한 남자였다. 권력, 돈, 외모를 모두 가진 존재였다. 오히려 그런 알폰스를 불편해하는 리아가 더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 만큼.

“뭘 생각하시는지 대략적으로 알 것 같은데 이상형 조건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요.”

“그럼 리아 양의 이상형은 어떻게 됩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리아는 가던 길을 멈췄다. 질문을 던진 퍼스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한참을 생각하던 리아는 퍼스를 한 번 흘깃 보곤 말을 할지 말지 망설였다. 사실 이상형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바가 없었다. 애초에 왕궁에 취직되는 것 외에 연애에 지대한 관심은 없었기에 구체적인 기준 또한 생각해봤을 리 만무했다.

“글쎄요. 어떨 것 같으세요? 저는 퍼스 님께서 저희 아버지께 말씀해주셨던 자신 있으시다는 부분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자신 있다고까진 안 한 것 같은데요.”

“이번 소개는 그다지였던 것 같으니 다음을 기대하고 있을게요!”

리아는 웃으며 퍼스의 첫 번째 소개를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원리원칙주의자인 퍼스는 계약 조건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래도 한 달은 만나보셔야 합니다.”

“네, 네.”

“사람 일 모르는 거잖습니까. 아직 리아 양은 알폰스 님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시고요.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리아는 퍼스의 말에 깜짝 놀랐다. 누구보다 그런 말을 할 거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람에 대해 냉정하기만 할 것 같던 퍼스의 입에서 알폰스를 다시 봐달란 말이 나오자, 리아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퍼스의 말이 틀린 말인 것도 아니었다. 리아는 소문만 듣고 알폰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방금 전 일도 화나는 일이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면 그에 대해 리아가 잘 모르기 때문에 거부감이 든 걸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최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알폰스 왕자님을 보려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도 결혼은 불가한 분이란 건 보좌관이신 만큼 잘 아시죠?”

“물론입니다. 만남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신다니 다행입니다. 제 상관께서는 아무래도 리아 양과의 친분을 유지하고 싶으신 것 같으니까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둘은 어느새 온실 입구까지 다다라 있었다. 퍼스는 온실 문을 열고 리아가 들어가길 기다렸다. 그러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식 첫 출근 축하드립니다.”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

그리고 정식으로 첫 출근하게 된 리아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이, 이걸 다요?”

“잡일도 하기로 했으니까. 이 정도는 물론 할 수 있겠지?”

리아는 눈앞의 비료 포대의 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게가 꽤 나가 장정이 한두 개를 드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바로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케빈의 태도와 말투로 말미암아, 그가 그녀를 시험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발끈한 리아는 당장에라도 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정말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염력 능력자를 쓰시면….”

“염력 능력자들은 대부분 전투를 위해 기사단에 배치되지. 안타깝지만 고작 온실을 위해 염력 능력자들을 배치해주지는 않아.”

그 말에 곧바로 한 염력 능력자가 떠올랐다. 하지만 리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제 일이었다. 본인의 일만으로도 바쁜 메이에게 부탁을 할 수는 없었다. 굳게 결심하고, 리아는 비료 포대를 하나 들어 올리려 허리를 숙였다. 무게 때문에 들어 올리긴 힘이 들었지만, 아예 못 들어 올릴 정도는 아니었다.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며 리아가 물었다.

“어디로… 나르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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