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뜻밖의 아침 인사
번잡한 하루를 보낸 리아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깊게 잠들었다. 제집보다야 불편한 숙소이지만, 피곤이 수면제처럼 작용했다. 그래도 이제 왕궁에서 일한다는 뿌듯함이 리아를 행복하게 했다. 창가의 햇빛이 들자마자 리아는 번쩍 잠에서 깼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설레는 기분은 어린 시절 이후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출근해야지!”
괜히 입 밖으로 내어보았다. 왕궁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리아는 서둘러 씻고 기숙사를 나갔다. 식당으로 나서니 다들 출근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안녕, 리아.”
먼저 식사를 하고 있던 메이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메이 양.”
그녀는 말끔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문양이 리아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수습인 모양이었다. 리아는 빵과 스프를 받아 메이의 옆자리로 갔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괜찮아. 비어 있으니까.”
페넬로페 저택의 아침 식사에 비한다면 소박한 식사였지만 그마저도 맛있게 느껴졌다. 리아는 본격적인 첫 출근에 대한 기대로 한껏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 리아의 상태를 눈치채고 메이가 먼저 물었다.
“첫 출근을 앞둔 소감은 어때?”
“아, 너무 떨려요.”
“나도 첫 출근 때 떨리긴 했지. 물론 너와 같이 설렌다는 느낌이 아니라 긴장이 되어서.”
“메이는 언제 익숙해졌어요?”
“삼 일도 가지 않았어. 상관이 워낙 독한 놈이라 욕하기 바빴지.”
“상관이 어떤 분이신데요?”
리아의 상관인 케빈도 만만치 않은 느낌이었다. 도움이 될까 하여 리아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메이 또한 괜히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속삭였다.
“내 상관은 제1 왕자의 제1 보좌관 퍼스라고 하는데.”
“네? 퍼스 님이요?”
“퍼스 보좌관을 알아?”
뜻밖의 이름에 리아는 깜짝 놀랐다. 욕하던 상관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메이도 적잖이 놀란 듯했다.
“저를 왕궁에 올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시거든요.”
“그 인간… 아니 그분이?”
“네.”
리아의 말에 메이는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막 상관 욕을 시작하려는데 리아가 하필 퍼스의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한 것이었다. 하지만 리아는 메이가 퍼스의 욕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냉정한 말투와 태도가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기 좋았다. 리아 본인도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아직 확실하게 결론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상관으로서의 퍼스는 어떤지 조금 궁금해졌다.
“그래서… 퍼스 님이 어떠신데요?”
“아니… 아무에게도 이 얘기 옮기지 않을 거지?”
“그럼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아요.”
메이는 리아의 귓가에 더 가까이 기대 속삭였다.
“아니 내가 들어온 지 이제 겨우 한 달 넘었거든? 보통은 그런 부하면 아직 수습이고 한 달밖에 안 됐으니 실수도 할 수 있으려니 생각하잖아? 그런데 내가 실수할 때마다 꼭 벌레 보듯 한다니까? 그래서 내가 한 번은 정말 화가 나서 ‘퍼스 님은 신입 때 실수 안 하셨어요?’ 하니까, ‘저는 지금까지 입궁해서 한 번도 실수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러잖아?
그런데 더 화나는 건 그 인간이라면 실수를 안 하고도 남을 거 같아서 납득이 가는 거야! 가끔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아닐까 싶을 때가 있어. 서류 결재받을 때마다 심장이 떨린다니까. 게다가 말을 할 때마다 얼마나 냉기가 뚝뚝 흐르는지…….”
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너무도 퍼스 같은 면모였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려는 걸 빵 부스러기를 입에 넣는 것으로 틀어막았다.
“하, 정말. 여기 도청장치라도 심어둔 것 아냐?”
갑작스런 메이의 말에 리아는 의아해했다. 하지만 수프를 입에 넣으려던 순간, 그녀는 또다시 위기를 맞이했다. 눈앞에 자신을 향해 똑바로 걸어 들어오는 퍼스의 실루엣이 보인 순간, 입안의 수프를 뿜을 뻔했다. 덕분에 사레가 들려 켁켁댔다.
“좋은 아침입니다, 리아 양.”
하지만 말과 달리 퍼스는 무표정했다. 메이의 말에 딱 들어맞는 인사에 리아는 웃음이 다시 터질 뻔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사레가 들린 척 입을 막고 있었다.
“괜찮으신가요?”
그 이유도 모르고 퍼스는 리아에게 물잔을 들어 건넸다. 물을 한 번에 들이켜고 나서야 리아는 가까스로 대답할 수 있었다.
“네, 퍼스 님. 좋은 아침입니다만…. 어쩐 일이세요?”
분명 오늘부터는 사막 기후 식물 관리 부서에서 일하게 될 터라 퍼스의 안내도 따로 필요 없었다. 애초에 리아의 안내는 퍼스의 담당이 아니라고도 했다. 아침부터 그가 리아를 찾아올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옆자리에 있던 메이도 고개를 돌리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보좌관님.”
그리고 내키지 않는 인사를 했다. 어차피 출근해서도 볼 얼굴인데 굳이 이런 이른 아침부터 식당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마음이 듬뿍 담긴 인사였다.
“안녕하세요, 메이 플라워 양. 출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천천히 식사하셔도 됩니까?”
그 말에 메이는 깜짝 놀라 시계를 쳐다보았다. 기숙사 근처가 온실인 리아는 식사를 느긋하게 해도 시간이 남았지만, 왕자 궁에서도 끝쪽이 출근지인 그녀에게는 한참 시간이 모자랐다.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메이는 허겁지겁 남은 음식을 입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뜸 테이블에 퍼스와 둘이 남겨진 리아는 난감했다.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전 아침 안 먹습니다.”
딱 부러지는 거절에 리아는 민망해졌다. 그녀의 식사는 아직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 식사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역시 제게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듯했다.
“제게 무슨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천천히 식사하시죠.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퍼스는 맞은편 의자를 꺼내 앉았다. 졸지에 리아는 먹는 모습을 퍼스에게 구경시켜주게 되었다. 너무 허겁지겁 먹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리아는 쉬지 않고 스푼을 놀렸다.
“그러다 체하십니다. 아까도 사레들리신 것 같던데.”
퍼스는 리아의 빈 잔에 물을 다시 채웠다. 얌전히 받아먹으면서도 리아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분명 제게 별로 좋지 않은 일일 게 뻔했다.
“먹다 궁금해서 체할 것 같아서 그런데 무슨 일인지 먼저 말씀해주실 수 없으실까요?”
리아가 솔직하게 말하자, 퍼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라는 듯한 제스처였다.
“알폰스 왕자님께서 리아 양을 보고 싶어 하셔서요.”
“저를요…? 이 아침부터요?”
갑자기 식욕이 떨어졌다. 리아는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퍼스를 보았다. 첫 출근으로 설렜던 기분이 많이 가라앉았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게 이렇게 빨리 닥쳐올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왕자님께서 오전부터 일정이 있으셔서요. 오늘은 특히, 대단히, 몹시 바쁘신 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아 양을 꼭 만나셔야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바쁘면 일이나 하지. 그 말을 속으로 삼키고 리아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는 사람이 퍼스가 아니라 알폰스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가하게 아침이나 먹을 때가 아니었다. 왕족의 심기를 거스르긴 싫으니까.
“그럼 아침은 다음에 먹겠습니다. 얼른 가시죠.”
“현명한 판단입니다, 리아 양.”
퍼스는 드물게 리아를 칭찬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
퍼스가 직접 기숙사 식당으로 찾아온 건 만나는 장소가 왕자의 집무실이 아닌 기숙사 근처 정원이기 때문이었다. 화려하게 장식이 된 정원 가운데 분수대와 티테이블을 놓은 곳이 있었다. 그곳에 당연한 듯이 왕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주변을 살며시 돌아보는 그의 턱선은 완벽했다. 정작 그걸 본 당사자인 두 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좋은 아침입니다, 페넬로페 영애. 아침부터 눈부시게 아름다우시군요!”
“…감사합니다, 제1 왕자님.”
“딱딱하게 부르지 않아도 돼요. 편하게 알폰스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도대체 이분은 뭘 잘못 드셔서 아침부터 이러시는 걸까. 알폰스가 쏟아내는 느끼한 멘트에 리아는 뒤집어지려는 속을 애써 다스려야만 했다. 그러고 흘깃 퍼스를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는 리아를 알폰스의 맞은편에 안내하곤 두 사람의 찻잔에 따뜻한 홍차를 따랐다. 잘 끓여진 홍차에서 좋은 향기가 났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편하게 드시지요.”
“…예.”
전혀 편하지 않은 태도로 리아는 홍차가 담긴 찻잔을 조심스레 들었다. 마시기 직전 왕자와 퍼스의 안색을 살폈다. 도대체 뭘 원하고 친절을 베푸는 걸까. 퍼스의 무심한 표정과 알폰스의 생글거리는 얼굴을 보니 도저히 홍차 맛이 느껴질 것 같지 않았다. 본론만 간단히 하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의 두 포커페이스는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알폰스는 홍차에 이어 간식도 권했다.
“이것도 좀 드시면 많이 쓰진 않으실 겁니다.”
독이라도 들진 않았을까. 알폰스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지 못한 리아였다. 집이었다면 순식간에 해치웠을 다과를 보면서도 리아는 쉽게 손을 뻗지 못했다. 퍼스가 말한 일주일에 한 번의 만남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 정식으로 일하는 첫날인데.
“안 드시나요?”
묘한 압박이 느껴졌다. 먹으라고 말했는데 따르지 않는 리아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했다. 왕자가 말하는 데 따르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리아는 슬금슬금 다과에 손을 뻗었다.
“맛있…네요.”
“제가 주방장에게 특별히 부탁했으니까요. 생기를 돌게 하는 능력이 섞인 쿠키입니다.”
능력자 쿠키라니! 리아는 먹던 쿠키를 떨어뜨릴 뻔했다. 능력자가 만든 쿠키는 귀족도 쉽게 접하지 못할 정도로 비쌌다. 특히 맛을 증진시키는 것 외의 효과가 있는 쿠키는 더했다. 가끔 사이키델리아의 외교 무기로서도 역할을 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생기를 돌게 하는 쿠키라고는 하지만 어떤 효과가 있을지 몰랐다. 독일 수도, 약일 수도 있는 쿠키였다. 남은 쿠키를 입에 넣기가 겁났다.
“말씀드린 대로의 효과만 있을 뿐, 독 같은 건 들어 있지 않으니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퍼스가 옆에서 한마디 더 덧붙였다. 리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아,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조금도….”
“괜찮습니다, 영애.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은 의심해볼 만도 하지요. 현명한 태도이십니다. 하지만 퍼스 말대로 이 쿠키엔 정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답니다. 뭣하면 제가 먼저 먹어볼까요?”
말을 마친 알폰스는 주저 없이 쿠키를 들어 입에 넣었다. 몇 번 씹던 그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씹는 걸 멈추었다.
“이건…!”
그의 표정을 본 리아는 사색이 되었다.
“왜, 왜 그러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