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식물의 우울 (2)
뾰족뾰족한 잎사귀를 가진 식물은 크기가 고작 리아의 손바닥만 했다.
“그래. 왜 자꾸 죽는지 모르겠어. 벌써 여럿 죽였는데….”
케빈은 말하다 말고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난 비가 오게 하는 능력자야. 사막의 어떤 식물이든 정글에서 자라는 식물처럼 자랄 수 있게 하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모래 한복판에 똑 하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윽고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비가 쏟아졌다. 리아와 퍼스가 단번에 젖을 정도였다. 하지만 둘 모두 젖는 걸 신경 쓰기보단 발밑의 식물에 집중했다. 그나마 뻗어 있던 이파리마저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물만 주면 이렇게 시들시들해진다 이 말이지. 지금은 둘 정도를 가지고 하나는 이 주일, 하나는 한 달 간격으로 물을 주는 실험을 하고 있어. 보다시피 결과는 다들 시들고 있고.”
“물을 아예 안 주는 건요?”
“그렇게도 한 번 시들었지. 선인장처럼 안 줘도 되는 것도 아니고. 애매하다고.”
리아는 젖은 모래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조심스레 시든 이파리를 만져보았다. 그러곤 이파리에 얹힌 물을 살며시 털어주었다.
“이 아이 이름은요?”
“글쎄. 정확히 외국어로 어떻게 발음하는지는 모르겠어. 사막의 기적이란 이름이라고 하더군.”
“사막의 기적….”
물을 아예 안 줘도, 많이 줘서도 안 됐다. 리아는 자그마한 사막의 기적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퍼스는 단지 인상을 쓰고 그 작은 식물을 노려볼 뿐이었다. 도대체 저 작은 식물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야 하는지, 원.
“제 능력을 써봐도 되나요?”
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케빈은 리아를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아가씨 능력이 뭔데?”
“식물을 자라게 하는 능력입니다.”
“…좋아. 써봐.”
리아는 조심스레 식물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곤 평소에 하던 것과 같이 집중했다. 제발 능력이 제대로 제어가 되길 바랐다. 이번에 잘 해내면 왕궁에 정식으로 취직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아.”
하지만 리아의 바람과 다르게 한참이 지나도 식물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숨을 내쉰 건 케빈이었다. 평소엔 제멋대로 자라서 문제였는데 이번엔 전혀 반응이 없다니. 리아는 크게 당황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이유를 모르겠지만 이 식물은 아가씨와 같은 초능력으로 크지 않더라고. 식물 생장을 제어하는 능력자들 모두가 도전했지만 실패했어. 역시 아가씨도 다르지 않군.”
리아는 거듭 능력을 사용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퍼스와 케빈은 이미 예상했던 듯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원래 얼마까지 자라는 식물이라던가요?”
“거대한 종은 엄청나게 거대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저렇게 작은 식물이 말입니까?”
“번식만 하지 않으면 20년은 거뜬히 살아낸다고 하더군요.”
퍼스는 의심스럽다는 듯 작은 식물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식물이었다. 식물을 성장시키는 능력도 통하지 않는 식물이 어떻게 거대해진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현재까지 남은 종수는요?”
“다섯입니다.”
“그중 하나를 삼 개월간 리아 양에게 전담 부탁드리겠습니다.”
“능력도 통하지 않는데 저 아가씨에게 맡겨도 될까요?”
“…….”
퍼스도 그 부분이 의문이었다. 능력도 통하지 않는 식물에게 능력자를 붙여놓아 봤자 시간 낭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능력뿐만 아니라 식물 자체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고 자부합니다. 맡겨주신다면 꼭 이 아이, 살려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능력을 자각한 이후, 거의 매일을 식물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능력을 쓰면 거의 무조건 식물들이 거대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키우는 방법 또한 익혀왔다. 식물에 대한 친화도로 따지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처음 보는 식물이기는 했지만 이 아이를 꼭 살려내겠다고 리아는 다짐했다.
“허풍이 아니면 좋겠군.”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긍정이었다. 케빈의 말을 들은 리아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리곤 허리를 꺾고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대신 이 식물을 키우는 것 외에도 우리 부서에서 하는 잡일을 진행해줘야겠어.”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리아 양. 정식으로 사막 기후 식물 관리 부서 수습이 되셨네요.”
무척이나 영혼이 담기지 않은 축하 인사였지만 리아는 그마저도 기뻤다. 저도 모르게 퍼스의 손을 잡고 팔짝팔짝 뛰었다.
“이게 다 퍼스 님 덕분입니다! 절 찾아와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케빈이 다시 의심스러운 눈길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퍼스는 당황해서 손을 빼내려 했지만 리아의 힘이 워낙 세서 잘 빠지지 않았다.
“이, 이것 좀 놓고….”
애원해봤지만 리아의 귀에 전혀 와닿지 않았다. 결국 리아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퍼스는 손이 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
그날 저녁. 퍼스는 리아를 안내하느라 밀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은 늘 그렇듯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펜으로 글씨를 쓰는 소리로 가득했다. 곧 퇴근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보면 오늘 예정한 일은 모두 끝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퍼스!”
늘 그렇듯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상관만 아니라면 말이다. 시종을 시켜서 문을 여는 것도 아니고, 직접 노크도 없이 문을 쾅쾅 열어대는 저 상관. 퍼스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며시 그를 노려보았다.
“다 티 나네. 노려보는 거.”
“그랬습니까. 실례했습니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로 퍼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방해가 되는 존재라도 일단 왕족이었다. 일어나서 맞이하는 게 맞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시지 어떻게 몸소 이렇게 누추한 보좌관 집무실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아닐세. 자네와 나 사이에 그런 예의를 차리는 건 어울리지 않아.”
언제부터 그렇게 친한 사이였다고. 내심 그렇게 생각했지만 퍼스의 얼굴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 영애 말이야. 페넬로페 영애.”
“네.”
안 그래도 물어볼 줄 알았다. 리아는 이번에 입궁한 식물 관련 능력자 중 유일한 여자였다. 게다가 유능하기로 소문난 페넬로페 백작의 여식. 알폰스가 관심을 안 가진다고 하면 더 이상할 상황이었다.
“어떻던가?”
“뭐가 말입니까?”
퍼스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알폰스의 물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일을 잘하냐고 묻는 건가? 그런 걸 물을 위인이 아닌데.
“아무래도 나한테 반한 것 같던데.”
“…예?”
“아, 이놈의 미모가 죄야. 퍼스, 오늘 밤부터 그녀가 내 생각으로 잠들지 못하면 어쩌나?”
알폰스에게는 고질병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저 왕자병. 누가 왕자 아니랄까 봐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그를 향해 결국 퍼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적당히 하시죠.”
제 상관에게 하기엔 무례한 말이었지만, 알폰스는 웃으며 넘겼다. 어릴 적부터 봐온 사이였기에 서로에 대해 잘 알았다. 일반적인 평민의 기준에 따르면 소꿉친구에 해당할지도 몰랐다. 알폰스에게 퍼스는 가장 신뢰하는 신하이자, 친우였다. 퍼스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좀 어떤가?”
“아까부터 도대체 뭘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페넬로페 영애의 능력.”
“아직 제대로 보진 못했습니다. 말씀하신 식물을 키워보려고 했지만 역시 능력이 통하지 않더군요.”
식물 이야기를 꺼내자 알폰스의 미간도 찌푸려졌다.
“그 식물 말이지. 도무지 자라지 않던.”
“네. 리아… 페넬로페 양이 입궁한 것도 그것 때문이니까요.”
리아 외에도 몇 명의 수습이 함께 입궁할 예정이었다. 모두 식물 관련 능력자였다. 사이키델리아에서는 대부분의 식물이 능력자의 손에 닿으면 잘 자라나기 때문에, 식물 관련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사막의 기적과 같이 능력이 통하지 않는 식물을 키우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능력자들 중 식물과 친숙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부른 것이었다.
“어마마마는 도대체 왜 그 식물이 키우고 싶으신 건지.”
효심이 지극하다는 평과 달리, 알폰스는 왜 왕비가 사막의 기적을 키우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겉으로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왕비가 아끼는 식물을 키우려는 노력을 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다 퍼스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고향이 생각나서 그러신 것 아닐까요. 저하께서도 사막에 가보고 싶다거나 하진 않으신가요? 어떻게 보면 출신지이시기도 한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난 날 때부터 사이키델리아 사람인데. 사막 따위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네.”
알폰스는 퍼스의 집무실 한구석에 있는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러곤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입만 열면 날라리 같은 구석을 보이긴 하지만, 다물고 있으면 대부분의 여자들이 숭배하는 백마 탄 왕자님 그 자체였다. 퍼스는 이런 왕자가 싫다는 한 여성을 떠올렸다.
-사교계에 왕자님에 관해 어떤 소문이 도는지 아세요?
조금 심하게 놀긴 했지만, 어쨌든 왕위계승권을 쥐고 있는 게 바로 눈앞의 제1 왕자, 알폰스였다. 그와 조금이라도 연이 닿으려 노력하는 여성들이 궁 밖까지 줄을 설 정도였다. 리아처럼 노골적으로 거부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퍼스는 어떻게 해야 리아가 반할 만한 남자의 조건에 들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다. 객관적인 조건만 놓고 보면 사이키델리아에서 알폰스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진 남자는 없었다. 그의 외모와 지위, 경제력 모두 완벽했다. 바람둥이라는 것만 빼면.
둘 다 상념에 잠겨 있느라 한동안 집무실에는 침묵만 감돌았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알폰스였다.
“페넬로페 영애와는 언제 차를 마시면 되지?”
“주에 한 번만 마셔주시면 됩니다. 왕자님께서 시간 되실 때 영애를 불러오겠습니다.”
“시간이야 없어도 만들면 되는 거고. 그럼 내일 당장 영애와의 티타임을 가지도록 시간을 비워주게!”
“내일은 궁정 회의 일정이 있어 무리십니다.”
“제1 보좌관 특별 권한으로 빼주는 건?”
“어렵습니다. 회의를 빠지시다니요?”
퍼스는 힐난하는 듯한 눈빛으로 알폰스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는 퍼스의 사나운 눈초리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페넬로페 양이 밤새 나를 보고 싶어 했을 텐데 당연히 얼굴이라도 비춰줘야 하지 않겠나! 그럼 궁정 회의 전에 아침에라도 찾아갈 수 있게 일정 조정 부탁하네.”
“오전에는 궁정 회의를 준비하셔야….”
“눈뜨자마자 궁정 회의를 준비하진 않을 거 아닌가.”
“그럼 정말 눈뜨자마자 페넬로페 양에게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맞네. 오랜만에 궁정에 온 신선한 바람인데 당연히 즐겨줘야지.”
알폰스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리아 페넬로페는 따분한 궁정 생활에 활력을 줄 존재였다. 귀족 영애라니 위험부담이 조금 따랐지만, 그는 위험한 게임을 더욱 즐겼다. 게다가 일이 잘될 경우, 페넬로페 백작과도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퍼스도 이 점을 잘 알았기에 반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폰스의 표정을 바라보자 왠지 리아에게 그를 소개한 게 잘한 일이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동시에 정략결혼이긴 하지만, 알폰스의 혼약자가 조금 불쌍해졌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상관은 상관. 퍼스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