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식물의 우울 (1)
갑작스런 방문에 리아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굳었다. 무례하게 소리를 지르며 들어온 것은 한 여성이었다. 잠을 자고 있었는지 슬립 차림에 안대를 올려 이마에 끼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등 뒤까지 길게 찰랑이고 있었다. 그녀는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화가 난 표정도 위압감 있어서 그녀의 외모에 감탄할 수만은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짐이 미끄러져서.”
“당신,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수상한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리아는 또다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리아 페넬로페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수습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아, 그 귀족 영애 말이지? 아무리 귀족이어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숙소에서 소란스럽게 굴면 곤란해!”
“네, 명심할게요.”
리아는 끙끙거리며 캐리어를 정리하려 애썼다. 여자는 리아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옆에 와 섰다.
“이것만 세우면 돼?”
“네! 감사합니다.”
험한 입과는 달리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자는 리아의 앞에 서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곤 지휘하듯 위로 부드럽게 당겼다. 그녀의 손을 따라 리아의 캐리어가 살며시 떠올랐다.
캐리어가 그녀의 손끝을 따라 오르내리더니 열을 맞춰 서기 시작했다. 그녀는 악단의 지휘자처럼 보였고, 캐리어는 춤추는 댄서 같았다. 리아는 캐리어의 움직임이 멎자 저도 모르게 짝짝짝 박수를 쳤다.
“염력 능력자셨군요! 대단해요!”
리아의 칭찬에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칭찬이 쑥쓰러운 모양이었다.
“흔한 초능력인데, 뭐.”
“아니에요! 그만큼 강력하고 쓰임새도 많은 초능력이잖아요. 감사해요! 덕분에 손 안 대고 캐리어 정리를 모두 마칠 수 있었네요.”
“뭘 그 정도 가지고.”
첫인상과 달리 그녀는 좋은 사람인 듯했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리아는 먼저 허리를 숙였다.
“앞으로 이웃으로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어…. 난 메이 플라워야.”
“잘 부탁드려요, 플라워 영애.”
“난 귀족이 아니야. 그냥 메이면 돼.”
“그럼 저도 그냥 리아라고 불러주세요.”
메이와 방문 앞에서 인사를 나눈 뒤, 1층으로 향했다. 퍼스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리아가 오는 걸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곤 리아 쪽을 보지도 않은 채 돌아섰다.
“자, 그럼 이제 온실로 가실까요?”
“네.”
리아는 딱히 그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몸에 효율적인 움직임이 밴 사람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퍼스는 주변엔 시선도 주지 않고 오로지 온실만을 향했다.
***
왕비 궁에 있는 온실은 페넬로페 저택의 것보다 세 배는 더 컸다. 일단 그 사이즈에도 놀랐지만 입구부터 보이는 다양한 식물들에 리아의 눈이 돌아갔다. 신기해하는 리아의 마음을 눈치챈 듯 퍼스가 먼저 설명했다.
“왕비 마마가 식물을 좋아하셔서요. 세계 각지의 대표적인 식물이 모여 있습니다. 사이키델리아 외에 다른 지역에서 온 식물들을 위해 날씨 관련 능력자들이 상주하며 몇몇 구역의 환경을 조절하죠.”
리아에겐 온실 자체가 거대한 성처럼 느껴졌다. 리아와 같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삐 식물들 사이를 오갔다. 자신도 저 중 한 명이 될 거라는 사실에 몹시 들떴다.
“리아 양이 담당하게 될 구역은 이쪽, 사막 기후 식물 관리 부서입니다.”
퍼스는 황토색으로 된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육중한 문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힘을 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리는 문이었다. 역시 왕궁은 초능력이 곳곳에 녹아 있었다. 리아는 너무 촌스럽게 놀라지 않으려 노력했다.
문이 열리자, 후끈한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입구 건너편에 있던 관리인이 퍼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곤 목걸이 두 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퍼스 님. 그리고 새로 오신 수습 분. 이곳에선 체온 관리가 필수입니다. 두 분 모두 목걸이를 착용해주시죠.”
스스로 파랗게 빛을 내는 물방울 모양 목걸이였다. 상급 능력자는 본인이 아니라 사물에도 능력을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인 듯했다. 리아는 목걸이는 찬 후, 매끈한 물방울을 몇 번 쓰다듬었다. 그러자 땀이 삐질삐질 흐르던 뜨거움이 사라지고, 상쾌한 바람이 한 번 불더니 리아의 땀을 모두 가져갔다.
“괜찮으십니까?”
퍼스 또한 목걸이를 착용해 보송보송해진 상태였다.
“네, 쾌적하네요.”
“저희들은 여기서 일할 때 모두 그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밖으로 가지고 나가실 수는 없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관리인의 안내를 따라 두 사람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사막 기후 식물 관리 부서 영역은 몹시도 컸다. 빽빽이 물이 자라 있던 다른 곳과는 다르게, 마치 정말 사막에 온 것처럼 끝없는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정말 식물이 자라기에 완벽한 환경이네요.”
“왕비님의 온실에는 왕궁에서도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아마 세계에서 이만한 온실을 가진 이도 드물 겁니다.”
입으로는 칭찬하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작 이런 풀때기에 돈을 이만큼 투자해서 어쩌려고’ 하는 듯한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실용주의자일 것 같은 그에겐 커다란 온실에 전 세계의 식물을 모으는 게 이해가 안 될 법도 했다.
“그럼요! 왕비님은 이 나라의 자랑입니다. 이렇게 식물에까지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이 어디 있다고요! 이 온실 덕분에 나라 곳곳의 농업을 비롯 원예업이 활성화될 수 있는 겁니다. 왕비님께서는 몸소 산업 하나를 살리고 있으신 거예요!”
관리인은 퍼스에게 온실의 중요성을 알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조금의 감흥도 없는 게 분명했다.
“리아 양이 일하게 될 곳은 어딥니까?”
목걸이를 착용해 더위는 이미 가셨을 게 분명한데도 그는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는 왕비궁 내 예산 집행을 담당하고 있지도 않았다. 본인에게 온실의 중요성을 어필해서 어쩌잔 말인가. 이런 불필요한 대화는 딱 질색이었다.
퍼스의 기분을 눈치챈 건지 관리인은 조용히 사막 기후 식물 관리 부서 영역에서도 가장 안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곳엔 흰 천으로 된 막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디가 어디라고 이름표도 붙어 있지 않았는데, 관리인은 익숙한 듯 가장 오른쪽 막사의 입구를 열고 들어갔다.
“케빈! 자네 아래로 들어올 신입 데리고 왔네. 그리고 퍼스 님도 계셔.”
“퍼스 님?”
막사 안에 식물을 보고 있던 남자의 이름이 케빈인 듯했다. 그 또한 퍼스와 같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문양의 화려함이 퍼스의 것보다 덜했다. 리아의 것보다는 화려했지만. 직책에 따라 문양의 화려함 정도만 달라지는 듯했다.
그의 키는 퍼스와 비슷했지만, 골격이 몹시 컸다. 기사라 해도 믿을 만한 몸이었다. 피부색 또한 진한 편이라 퍼스와 나란히 서니 몹시 대조되었다. 그는 리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퍼스를 보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퍼스 님.”
“오랜만입니다, 케빈 님.”
하지만 퍼스는 손을 마주 잡는 대신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케빈은 머쓱해하며 내민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렇게 인사하실 필요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전직 기사단 부단장님이시니까요.”
전직 기사단 부단장? 리아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떤 의미론 리아의 추측이 맞은 셈이었다. 케빈은 비릿하게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본인의 의지로 좌천된 건 아닌 듯했다.
“다 예전 일인데요. 지금은 한낱 온실 관리인일 뿐입니다.”
전직 부 기사단장에서 온실 관리인이라니. 엄청난 부서 이동이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뭔가 사연이 있는 듯했다. 하긴,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쪽은 리아 페넬로페 영애입니다. 오늘부터 여기서 수습으로 일할 겁니다.”
퍼스가 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리아는 그 소개에 따라 정중히 인사했다.
“리아 페넬로페입니다. 모자란 점이 많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
“그 삼 개월짜리 수습이로군요?”
케빈은 리아의 말을 싹둑 잘라버리곤 퍼스를 향해 말했다. 노골적인 무시였다. 리아는 조금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퍼스는 눈을 살짝 찌푸렸을 뿐, 당황하지는 않았다.
“네. 일단은 삼 개월간 여기서 일하시게 되실 겁니다. 정식 고용 여부는 삼 개월 후에 검토해볼 생각입니다.”
“왕자님은 마음도 후하시군요. 실력도 알 수 없는 외부인에게 기회도 주시고.”
노골적인 비꼼이었다. 자신의 주군을 모욕했으니 퍼스에게도 모욕적일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퍼스는 익숙한 듯 의연하게 대처했다.
“궁정에 계신 분들이 제대로 일해주셨으면 이런 추가비용은 안 나갈 텐데 말이죠. 왕비 궁 일에 왕자 궁 예산을 쏟아붓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 할 텐데. 저희 주군께선 효심이 지극하셔서요.”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냉기가 흘렀다. 케빈은 자신들의 무능을 질책하는 말에 인상을 썼다. 퍼스는 입꼬리를 당겨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살벌했다. 주위의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리아는 혹시 목걸이가 너무 잘 작동한 게 아닌가 의심했다. 잠시간의 정적을 깨고 케빈이 먼저 말했다.
“퍼스 님은 여전히 만만찮은 분이시군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이왕 오신 거 그 식물이나 보고 가시지요. 왜 궁정 온실 관리인들이 못 살려내는지 직접 확인해보시는 게 좋겠네요.”
웃으며 말했지만 그 속엔 뼈가 있었다. 퍼스는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웃는 낯 그대로 수긍했다.
“그러지요. 몹시 바쁘지만 케빈 님의 제안이니까요.”
“수습 하나를 직접 데려오시기까지 하고. 한가해 보이시는데요? 설마….”
케빈은 의심스러운 듯 퍼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리아는 의아했다. 퍼스와 자신이 계약 관계에 있다는 걸 케빈이 눈치챈 건가?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일 뿐이었다. 케빈이 말한 의미를 단번에 파악한 퍼스는 인상을 팍 쓰고 부정했다.
“아닙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지 않습니까. 맘대로 해석하지 마세요.”
그제야 리아도 케빈이 무슨 오해를 한 건지 깨달았다. 퍼스와 리아가 연인이라도 되는 게 아닌지 오해한 모양이었다. 방금 전 제게 소개 상대라며 제1 왕자를 들이민 사람에게.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오해였다.
그리고 퍼스는 그 오해가 몹시 기분이 나쁜 듯했다. 냉정했던 사람이 언성을 높일 정도로. 감정적으로 대응한 퍼스 때문에 리아는 상대적으로 차분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이분은 그저 제 아버지 부탁으로 절 도와주시려고 한 거예요.”
리아의 차분한 응대에 퍼스의 열도 식었다. 순간적으로 발끈해 부정했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리아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리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퍼스가 원하는 대로 두 사람이 아무 관련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퍼스 님’이란 호칭 대신 ‘이분’이라는 호칭을 썼다. 먼저 배려하기는커녕 배려를 받고 말았다. 퍼스는 내심 부끄러웠다.
“말씀해주신 식물을 보고 싶은데요. 제가 앞으로 맡게 될.”
리아가 이어서 말했다. 케빈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길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태연한 리아의 태도에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이쪽이야.”
그들은 막사에서 나와 사막 정중앙으로 향했다. 발밑의 부드러운 모래 때문에 발이 푹푹 빠졌다. 몇 번이나 넘어지려 하는 리아를 퍼스가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
“감사합니다. 얼른 적응해야겠네요.”
리아는 그때마다 퍼스의 손을 슬며시 떼어냈다. 사람과 닿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넘어지길 잘하는 리아 때문에 몇 번이나 사람에게 닿아야 했다. 싫을 거라 생각해 리아 나름대로 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퍼스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아까 정색하고 부정한 것 때문에 리아가 내심 속이 상한 게 아닌가 싶었다. 본래라면 신경을 껐을 텐데, 위태위태하면서도 의연한 표정을 보이는 리아가 신경이 쓰였다. 괜스레 미안해지기도 했다.
“다 왔습니다. 여기 이 식물이야, 아가씨.”
“리아라고 불러주세요.”
“그건 차차 부르면 되고.”
케빈은 여전히 리아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리아는 속상해하지도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리아의 시선은 모래사장에서 자라나는 작은 식물에 꽂혀 있었다.
“이 아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