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4)화 (4/75)

#4. 오늘의 운세 몹시 나쁨

“뭐라고요?”

리아는 제1 왕자가 문 너머에 있다는 것도 잊고 큰 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퍼스는 대답 대신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열리는 문 너머로 책상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백금발의 화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그, 제1 왕자 알폰스 사이키델리아.

어디선가 후광이 비친다 했더니 큰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었다. 리아가 눈을 뜨지 못하자, 퍼스는 재빠르게 왕자의 뒤로 다가가 얇은 커튼을 쳤다. 그제야 왕자의 외모가 제대로 보였다. 만면에 미소를 띤 그는 파티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리아는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자님.”

“오랜만입니다, 페넬로페 영애.”

알폰스 또한 리아를 기억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페넬로페 백작의 영향력 때문에 억지로 외운 셈이나 다름없었다. 눈앞에 있는 리아를 보며 새삼 생각했다. 백작과 달리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성격인 것처럼 보인다고. 그녀의 아버지인 백작은 한 가지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일단 추진하기로 결정한 사항에 관해서는 타협 없이 빠르게 진행했다. 외모 또한 강해 보이는 편이었다.

“입궁 관련해서는 설명을 모두 들으셨죠?”

“네. 제가 키워야 할 식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리아의 말에 알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식물 때문에 어지간히 고민한 모양이었다.

“궁에 있는 정원사들이 하나같이 혀를 내둘러서 말이죠. 외부에 있는 인사들에게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마 식물 관련 능력자들이 이렇게나 적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 말고 다른 분들은 몇 분이나 되시나요?”

“세 명 정도 됩니다. 다 남자들뿐이죠.”

“그렇군요.”

“네 명 다 페넬로페 영애와 같이 꽃 같은 여성분이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성별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알폰스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리아는 대답 없이 살며시 웃었다. 대략 소문은 들었지만, 눈앞에서 직접 대화를 나누니 확실했다. 알폰스가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친절하다는 이야기는 사교계에 파다했다.

물론, 친절하기만 하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그의 엄청난 여성 편력은 사교계에 입문하는 여성이 가장 처음으로 듣게 되는 주의사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자라는 신분과 그의 화려한 외모에 낚이는 여성이 굉장히 많았다.

겉모습이 멀쩡하다는 부분은 리아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알폰스는 리아가 반할 만한 남자는 아니었다. 대화를 해보니 그나마 남아 있던 알폰스에 대한 이미지마저 바스라지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는 리아가 결혼할 수 있는 대상도 전혀 아니었다.

리아는 은근슬쩍 퍼스 쪽을 곁눈질했다. 그 눈빛에 담긴 항의의 의미를 읽었는지 퍼스는 티 나게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왕자님, 저와 한 약속 기억하시는지요?”

“아, 페넬로페 영애와 주마다 한 번씩 차를 마시자는 얘기 말인가?”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뜬금없는 소리에 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로 또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 보좌관이 한 번도 제게 뭘 부탁한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부탁이란 걸 하지 뭡니까. 수습 중 유일하게 귀족이고 여성분이신 페넬로페 영애가 궁 생활에 잘 적응할지 걱정이 된다면서. 한 달 동안만이라도 주마다 한 번씩 불러다가 차라도 마시면서 상태를 확인해달라고.”

알폰스는 소리 내 웃으며 퍼스의 어깨를 쳤다. 그는 퍼스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들었다. 평소 자신의 여성 편력을 못마땅해하던 퍼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와줄 줄이야.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였다. 외모가 좀 평범하긴 했지만 리아는 페넬로페 백작의 유일한 딸이었다. 친해져서 나쁠 게 하나도 없었다. 물론 단순한 친분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귀족 생활을 하시다 궁에서 근무하기가 힘드실 테니까요.”

“전 괜찮습니다.”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 힘들어지실 수 있습니다. 왕자님께서 호의를 베푸실 때 받아들이시는 게 어떠실지요?”

퍼스와 리아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알폰스는 눈치를 채지 못하고 빙긋 웃기만 했다.

“사양하지 마세요, 전 괜찮으니. 그럼 궁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숙소로 가서 짐부터 푸시죠.”

알폰스는 정중하게 집무실 문을 가리켰다. 퍼스가 그의 손가락을 따라 걸어가 문을 열었다. 리아는 살짝 치마 끝을 잡고 알폰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녀는 집무실에서 나오면서 퍼스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그러곤 집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항의했다.

“해명해주시죠.”

“미혼의 남성, 리아 영애께서 반할 만큼 훌륭한 남성, 한 달 동안의 만남. 조건은 모두 충족되었지 않습니까.”

“반할 만한 남성 부분에 의구심이 드는데요. 애초에 제1 왕자님과 제가 결혼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결혼할 수 있는 조건에는 부합합니다. 현실적으로 조건상 무리도 없고요.”

“혼약자가 있으신 걸로 아는데요.”

“반드시 결혼이 성립되어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는데요.”

퍼스는 리아의 항의에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이대로 집무실 앞에서 계속 얘기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리아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퍼스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로 향하면서도 리아의 항의는 끊이지 않았다.

“왕자님이라니!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제1 보좌관님께 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지만, 사교계에 왕자님에 관해 어떤 소문이 도는지 아세요?”

“그 이상 발언하시면 왕족 모욕죄가 성립됩니다. 그런 이야기는 궁 밖에서 하시죠. 그리고 어떤 소문인지 아냐고 물어보신다면,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 왕자님을 추천하신다고요?”

“주 1회, 딱 4번만 티타임을 가지시면 됩니다. 리아 영애도 어차피 결혼이 하고 싶지는 않으시잖아요?”

“그건….”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 않나요? 리아 양은 주 4회 티타임을 가지는 것만으로 리아 양과 저 두 사람 모두 백작님과의 계약 조건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퍼스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래서 제1 왕자의 제1 보좌관인가 보다 싶었다. 리아가 설득된 듯 하자, 퍼스 또한 리아 모르게 슬며시 웃었다. 어지간히도 순진한 귀족 아가씨였다. 말 몇 마디에 금세 수긍하다니. 앞으로 두 번도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될 듯싶었다.

“다정한 분인 줄 알았더니, 교활한 면도 있으시군요.”

한참을 고민하던 리아의 결론이었다.

“사람을 한쪽 면만 보고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영애.”

퍼스는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원래라면 그저 웃어넘겼을 테지만, 왠지 리아가 불쌍하게 느껴져 잠시 참견을 한 것이었다. 리아는 퍼스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가 묻었습니까?”

“이상하신 분.”

퍼스는 살짝 고개를 돌려 리아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능력을 드러내는 듯, 그녀의 눈동자 또한 선명한 녹색이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하자, 속까지 투명하게 비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생소한 느낌이었다. 보통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건 퍼스 본인이었으니까. 퍼스는 의식하지 못하는 새 긴장한 듯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런 식으로… 사람에 대한 감상을 바로바로 말하는 게 습관이신가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요.”

“궁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영애. 아무리 영애가 귀족이라고 해도 이제부터는 한낱 수습이실 뿐이니까요. 특히, 지금 가시는 왕비 궁에서는 더욱 그렇고요.”

“감사합니다. 명심할게요.”

리아는 좀처럼 퍼스를 종잡을 수 없었다. 잔소리인 듯하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그의 말투가 더욱이 그녀를 헷갈리게 했다. 제1 왕자를 상대랍시고 제게 소개했을 때는 퍼스를 다정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화가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보니, 제게 손해가 될 제안은 아니었다. 퍼스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건지. 생각에 잠긴 사이, 왕비 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숙소는 이쪽입니다.”

제1 왕자 궁과 다르게 왕비 궁은 화려한 장식품이 많았다. 기둥부터 천장까지 꾸며지지 않은 곳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였다. 리아는 휙휙 돌아가는 눈을 단속하느라 애를 썼다. 퍼스는 매일 봐서 그런지 왕비 궁에 있는 장식품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앞서 걸었다.

그는 지름길을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윗분들과 마주치지 않은 채로 수월하게 숙소로 진입할 수 있었다. 왕비 궁 한편에 있는 숙소는 왕비 궁과 달리 아무런 장식이 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실용성만을 강조한 듯했다.

겉만 놓고 보면, 왕자 궁과 비슷한 건물 형태였다. 내부적으로는 넓은 방과 다양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퍼스가 들어서자 숙소의 관리자가 재빠르게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보좌관님. 보좌관님께서 어떻게 직접 이런 누추한 곳까지….”

“안녕하세요, 관리인님. 이쪽은 오늘부터 수습으로 온실에서 일하게 된 리아 페넬로페 양입니다.”

퍼스는 아랫사람에게도 정중했다. 리아도 퍼스를 따라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리아 페넬로페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무려 페넬로페 영애시군요!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관리인 마리입니다. 짐은 방에 다 도착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리. 방으로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리아 영애, 저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퍼스는 현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숙소 내부의 여성 전용 방은 상관이라 해도 원칙적으로 남성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전 여기서 책 보며 기다리면 되니 천천히 나오십시오.”

항상 가지고 다니는지, 퍼스의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책이 튀어나왔다. 퍼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주저 없이 관리인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리와 리아는 방 안쪽으로 향했다. 리아가 살게 된 곳은 2층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복도의 나무가 끼익거리는 소리가 신기했다.

“너무 시끄러우시죠?”

“아뇨, 괜찮아요!”

“저택에서 살던 영애께서 어쩌다가 이런 누추한 숙소로 오셨는지 몰라도 양해 부탁드릴게요. 궁이라고는 하지만 이 건물은 워낙 낡아서 겉만 멀쩡하지 여기저기 문제가 많답니다.”

리아는 정말 괜찮았다. 처음 저택에서 나와 살게 된 것만 해도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바닥에서 소리가 나는 것도 신기해서 쳐다본 것뿐 거슬리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아, 내가 궁에서 정말 수습으로 일하게 됐구나.’ 하는 실감을 안겨줬다.

“여깁니다.”

마리는 2층의 끝방을 가리켰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박한 방에 가구라고는 침대와 책상 하나,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책상 위로 난 창문 덕분에 다행히 방에 햇살은 잘 들고 있었다. 자그마한 방에 비해 리아의 짐이 많아, 방이 더욱더 비좁아 보였다.

“씻는 곳과 화장실은 2층에 하나, 1층에 하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식사는 따로 식당 건물이 있으니 그곳에서 드시면 되고요.”

“네, 감사합니다.”

“짐 확인하시고 내려오시죠.”

“감사해요, 마리. 다시 한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주세요.”

마리는 상냥하게 웃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관리인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리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방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워낙 많아 뭐부터 정리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리아는 일단 제일 위에 있는 트렁크를 내리려고 했다. 그러다가 실수로 트렁크의 손잡이를 놓쳐 우당탕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리아의 짐들이 모두 무너졌다. 미처 수습도 하기 전에 쿵쿵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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