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서 와 왕궁은 처음이지
입궁 날엔 비가 내렸다. 가랑비였다. 이렇게 부드럽게 내리는 비를 리아는 좋아했다. 특히 숲속의 이파리 위에 작게 내려앉은 물방울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왠지 리아의 입궁을 환영하는 비인 듯하여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리아는 다시금 의복을 매만졌다. 퍼스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왕궁에서 입궁에 관해 안내하는 서신과 입궁 때 입을 옷이 도착했다. 퍼스의 의상과 달리 화려한 금박 장식이 없는 소박한 의상이었다.
리아는 그 옷을 보자마자 수습을 나타내는 옷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소박한 수습복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토록 입고 싶었던 왕궁 근무자를 나타내는 제복이므로.
“아가씨, 입궁하는 게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좋지. 재클린도 알잖아. 내 꿈이 왕궁에서 일하는 거였단 거.”
재클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백작 가의 영애씩이나 되는 인물이 입궁이 왜 꿈이란 말인가. 재클린의 마음이 뻔히 보였다.
아무렴 어떠랴. 리아는 기쁨에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게다가 턱을 괴고 콧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제복도 좋고 아무튼 이래저래 좋은 날이었다.
“어때? 이 제복도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그렇게 수수한 제복이 뭐가 좋으시다고….”
“왜. 쓸데없이 무거운 장식도 안 달리고, 정신 사나운 무늬도 없고 깔끔하니 딱 좋은 것 같아.”
“게다가 흰색이라니, 빨래하기 얼마나 힘든데. 누군지 몰라도 생각 없는 사람이 옷을 디자인한 게 분명해요.”
“그건 그러네.”
제복을 내려다보며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습복은 실용성을 강조해선지, 종아리 중간 부분까지 오는 길이의 흰색 원피스였다. 목 부분과 원피스 끝자락에만 금장이 되어 있었다. 뭐라도 튄다면 금세 눈에 띌 만큼 흰 면적이 넓었다.
어느새 왕궁에 도착했는지 마차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 바닥에 흙탕물이 먼저 눈에 띄었다. 리아는 수습복에 흙탕물이 튀지 않도록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긴 드레스가 아니라 짧은 치마인지라 리아의 무릎이 드러났다.
“흠, 흠.”
갑자기 마차 문 옆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리아가 아는 인물이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퍼스 님!”
그는 리아의 무릎을 봐서 부끄러운 듯 얼굴을 돌려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귀 끝이 살짝 빨개진 상태였다. 역시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왕궁의 근무복에는 모두 의복이 더러워지지 않게 하는 초능력이 걸려 있으니 염려 말고 내려오셔도 됩니다.”
“와, 정말요?”
리아는 바로 치맛자락을 놓았다. 자유로워진 리아의 손 앞에 흰 장갑을 낀 퍼스의 손이 다가왔다. 사람에 닿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듯했는데, 이 정도 에스코트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리아는 최대한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그 바람에 발밑에 신경 쓰지 못해 몸이 휘청였다.
“악!”
“조심하시죠!”
반사적으로 퍼스가 손을 뻗어 리아의 허리를 낚아챘다. 덕분에 리아는 넘어지지 않고,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벌써 두 번째였다.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데, 여지없이 매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영애는 다리 힘을 좀 키우시는 게 좋겠군요.”
“죄,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리아가 떨어지자 퍼스는 역시나 제복을 툭툭 털었다. 미간에 주름 또한 그대로였다.
“퍼스 님은 다정하시네요.”
“네?”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안경 너머의 의아해하는 눈빛까지도 예상 그대로였다. 참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리아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푸흐흐 웃었다.
“두 번이나 절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셨잖아요.”
“그건 영애가 달려든 거잖습니까?”
“그래도요.”
사람과 닿는 걸 싫어하면서도 리아가 넘어지려 할 때면 꼭 잡아주었다. 특히 반사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다는 점이, 퍼스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튼 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퍼스의 의례적인 인사에도 리아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재클린은 궁에 따라갈 수 없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퍼스를 따라 궁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정문 대신 옆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이 문으로 궁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앞으로는 이 문으로 출입하시면 됩니다. 왕궁에 고용된 자들만이 다니는 문이니까요.”
“오, 네.”
거짓말처럼 궁 안으로 들어서니 비가 멈췄다. 궁 안은 기후 능력자의 능력으로 항상 온화한 날씨를 유지하는 모양이었다. 당연하고 사소한 일이지만 리아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눈을 반짝이며 뒤를 따르는 리아가 퍼스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여기저기 한눈을 팔며 걷고 있어서, 또 언제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쪽 후원 뒷길로 쭉 가면 바로 제1 왕자 궁입니다. 먼저 왕자님께 인사부터 드리고, 생활하실 왕비 궁 옆 직원 처소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가져오신 짐은 거기로 다 옮길 겁니다. 마지막으로 근무하실 왕비 궁 내 온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억양 없는 설명이었지만, 몹시도 자세하고 친절했다. 역시 상냥한 사람인 것 같아. 리아는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보좌관님.”
“아까처럼 편하게 퍼스라고 불러주십시오.”
저도 모르게 퍼스를 편하게 ‘퍼스 님’이라고 불러댔던 걸 떠올리며 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퍼스 님.”
“네.”
퍼스는 이름이 불리자, 가던 길을 멈추고 리아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몇 번 봤다고 리아는 왠지 그 얼굴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안내는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요.”
의외로 토 다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리아는 잠시 눈을 좁혔다, 태연히 말을 이었다.
“퍼스 님은 제 직속 상관이신가요?”
“아닙니다.”
앞으로도 퍼스와 일을 한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라니. 저도 모르게 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아 영애는 왕비 궁에서 일하게 되시니 왕비 궁에 따로 상관이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상관도 아니신데 어떻게 퍼스 님이 직접 제 안내를 나오게 되신 건가요?”
“뭐, 말씀하신 대로 원래는 수습을 하나하나 마중 나오진 않습니다. 다만 전 영애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볼일이요?”
리아는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그런 리아의 표정을 본 퍼스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이유를 모를 수 있느냐는 의미가 담긴 표정이었다.
“소개 말입니다.”
“아.”
궁에 들어온다는 사실에 들떠 소개에 관한 부분은 잊다시피 하고 있었다. 궁에서 일하는 삼 개월 동안 미혼 남성 세 명을 한 달씩 만나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그 조건! 리아는 속으로 이빨을 뿌득 갈았다.
“계약서상에 따르면 석 달을 한 명당 한 달씩 꼬박 채워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려면 당장 첫날부터 만나는 게 맞죠.”
“네…. 그렇죠.”
리아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리아가 남성을 소개받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은 퍼스도 잘 아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해는 잘 되지 않았다.
“싫으십니까?”
“별로… 좋지는 않네요.”
“어째서입니까? 페넬로페 백작님께서는 꽤 리아 영애의 혼인을 원하시는 것 같던데요.”
퍼스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백작이 제시한 조건은 ‘리아가 보고 반할 만한 남성’이었다. 조건에 부합하는 사내를 찾으려면 최대한 리아의 취향을 파악해놔야 했다. 하지만 본인이 일단 남성을 만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다면 얘기가 좀 달랐다. 이상형을 찾기가 더욱 까다로워지는 것이었다.
“제 꿈은 왕궁에서 일하는 거였어요. 혼인이 아니라. 저는 혼인엔 별로 관심이 없어요.”
“혹시 남성에 관심이 없으십니까?”
“예, 저는 남성분께는 큰 관심이 없어서….”
“혹시 여성을 좋아하십니까?”
“예?!”
리아는 화들짝 놀랐다. 퍼스는 그 반응을 보고 리아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니군요. 그럼 됐습니다. 제가 만족시켜야 할 조건은 리아 영애가 ‘반할 만한 남성’이지, ‘혼인할 만한 남성’은 아니었으니까요.”
퍼스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리아가 남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 알면 됐다. 나머지는 그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멍하니 퍼스의 뒤를 바라보던 리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뛰어서 퍼스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제가 반할 만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시고요?”
너무도 자신만만한 퍼스의 태도를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리아 자신도 평생 남자에게 관심이 워낙 없던 터라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 기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퍼스가 저리도 자신만만하게 소개해줄 남자가 누군지 궁금증이 일었다.
“뭐, 일단 보통의 평균적인 여성이라면 대부분 좋아할 만한 남성입니다.”
“벌써 상대를 구하셨나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석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꼭 채워야 한다고.”
“누군가요?”
“일단 가보시면 압니다.”
그 남자가 어디에 있는지는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남겨두라며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농담이라고는 하나도 할 줄 모르는 것 같이 생긴 사람이 말해 주지 않자 리아의 의심은 점점 커졌다. 아무나 데려오려는 건 아니겠지?
***
제1 왕자 궁으로 가는 길은 궁전의 출입구에서도 꽤 거리가 되었다. 후원이 어찌나 큰지 아무리 걸어도 끝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분명 후원인데 꽃이라곤 한 송이도 보이지 않아 리아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퍼스 님, 이 후원에는 왜 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지금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아무리 봄의 끝자락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꽃이 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지나가면서 보이는 식물들 대부분 아예 꽃이 없는 종이 대부분이었다. 하다못해 들꽃이라도 하나 피어 있을 법도 한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 제1 왕자님께서 꽃 알레르기가 있으십니다.”
“꽃가루 알레르기요?”
“아뇨, 꽃 알레르기라고 합니다. 본인 말로는.”
왕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퍼스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그의 표정은 왕자에 대한 비호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예전 어린 시절에 고백했던 첫사랑에게 후원에 꽃을 잔뜩 심어 고백했다가 장렬하게 차였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로 꽃만 보면 그 첫사랑이 생각나 온몸이 간지럽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런 쓸데없…. 그런 이유로 후원에 꽃은 못 심게 하십니다.”
“아….”
리아의 마음속에서 제1 왕자에 대한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 사교계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을 때 보곤 했다.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사글사글한 성격도 갖추고 있어, 뭇 귀족 여성들의 마음을 많이 훔쳤다고 들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비밀이 있었다니.
퍼스는 말해놓고 잠시 생각하다가, 몸을 돌려 리아에게 당부했다.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이미 들은 걸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하나요?”
“그럼 적어도 제가 말한 건 아니라고 해주십시오.”
“그 비밀을 다른 사람들도 많이 알고 계신가요?”
“아뇨. 보좌관인 저만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누군지 말 안 해도 누가 말했는지 저절로 알게 되잖아요.”
퍼스는 턱에 손을 올리고 잠시 고민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네요.”
외견상으로는 아주 똑똑해 보였는데, 생각보다 덜렁거리는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 사람은 첫인상으로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겠다고 리아는 다시금 다짐했다.
“하지만 적어도 리아 양은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시죠.”
“왜인가요?”
말하는 사이, 두 사람은 제1 왕자 궁에 다다랐다. 기사들을 물리치며 퍼스는 직접 집무실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열기 직전, 리아에게 속삭였다.
“제가 소개해드릴 첫 번째 분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