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비한 식물 키우기
“제 능력이요?”
“리아의 능력을 말인가?”
놀란 백작과 리아가 동시에 물었다. 그야말로 꼭 닮은 부녀지간이 아닐 수 없었다. 퍼스는 궁금증 많은 부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리아 영애가 가지고 있는 식물을 자라게 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리아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벌어진 입을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꿈꿔왔던가. 국가의 부름을 받는 이 날을! 자신의 초능력이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하지만 리아의 아버지인 페넬로페 백작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리아는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또 결혼 이야기를 꺼낼 모양이었다. 리아는 백작이 말을 꺼내기 전에 퍼스의 손을 잡고 소리치듯 말했다.
“좋아요! 뭐든 제 능력이 필요한 일이라면 하겠습니다.”
“리아, 무슨 일인 줄 알고 덥석 받아들이는 거냐?”
“제1 왕자의 제1 보좌관님이 직접 오셔서 부탁하실 일이라면 뭔지 몰라도 아주 중대한 일이겠지요. 그게 뭐든 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지금껏 이 초능력이 쓸모없다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가. 특히 백작과 리아의 두 오빠는 모두 공격 계열 초능력인 데 비하면 리아의 초능력은 하찮게 여겨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리아는 자신의 초능력은 반드시 어딘가 쓸 데가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이건 좀 놓고 얘기하시죠.”
퍼스는 리아의 손을 뿌리치더니 괜스레 옷깃을 여몄다. 좀 전 저택 입구에서 리아가 실수로 안겼을 때와 비슷한 태도였다. 백작을 의식해서인지 아까처럼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지는 않았다. 자신이 치한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리아는 머쓱해졌다. 아무래도 그는 사람과 접촉하는 걸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함부로 결정하지 마라, 리아. 혹시 어떤 일인지 알 수 있겠나?”
“네, 물론입니다. 리아 영애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은 왕비 마마의 식물을 키우는 일입니다.”
“왕비 마마의?”
생각보다 큰 일에 리아도, 백작도 깜짝 놀랐다. 퍼스는 그들의 태도를 예상한 듯 의연하게 설명을 이었다.
“왕비 마마께서 서쪽 사막 나라에서 오신 건 알고 계십니까?”
“네, 사이키델리아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요?”
“왕비 마마의 고향에서 선물을 보내오셨습니다. 사막에서 자라는 식물이라고 하더군요. 총 열 모종을 보내왔는데 궁 내 정원사들이 모두 제대로 키우질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반절 정도가 시들어 버렸습니다. 왕비 마마의 말에 따르면 커다랗게 자라는 식물이라고 하는데 살아남은 것들은 모종 상태에서 자라질 않고 있고요.”
사막에서 자라는 식물은 리아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책을 통해 접했을 뿐이었다. 궁전에 있는 정원사들도 기르지 못하는 식물이라니. 키우는 방법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닌 듯했다.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진 않던가요?”
“알아서 잘 자라는 식물이라는 말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원사들 손에 닿는 족족 죽어 나가기만 하니, 원….”
퍼스는 난감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죽어 나가는 식물을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었다. 고작 식물 하나 키우지 못하는 궁전 정원사들을 한심해하고 있었다.
“그럼 그 식물 때문에 보좌관이 직접 리아를 찾아 변두리까지 오게 된 건가?”
백작의 말의 의미는 이러했다. 고작 풀떼기 하나 때문에 제1 왕자의 제1 보좌관씩이나 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 바쁜 시간을 쪼개 굳이 리아를 찾아 페넬로페 백작 저까지 오게 된 사연이 대체 무엇이냐고.
“그 식물이 왕비 마마께서 어릴 적부터 대단히 좋아했던 식물인 모양입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왕비 마마를 보다 못한 제1 왕자께서 직접 식물 관련 능력자들을 궁으로 모으길 지시하셨습니다. 리아 영애 외에도 많은 여러 명의 식물 관련 능력자들이 입궁할 겁니다. 그중 식물을 키우는 데 성공한 자에 한해 제1 왕자께서 왕궁 내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직책을 내려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직책!”
“왕궁 내 근무?”
리아와 백작이 동시에 밝은 표정을 지었다. 리아는 드디어 왕궁에서 직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뻤다. 오랜 꿈을 이룰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반면, 백작은 리아를 왕궁에 보낼 기회가 생긴 점이 좋았다. 귀족가의 여식을 왕족의 시녀로 보내 높은 분들의 눈에 들게 하는 방법은 귀족들이 흔하게 쓰는 방법이었다. 왕궁에서 리아의 좋은 혼처를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한은 얼마나 되지?”
“삼 개월입니다.”
“삼 개월이라…?”
이번에도 리아와 백작은 동시에 고민에 빠졌다. 리아는 삼 개월 내에 식물을 키워낼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반면, 백작은 삼 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내 리아가 높은 분들의 눈에 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퍼스 또한 꼭 닮은 부녀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제1 왕자는 식물 관련 능력자로 알려진 자라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꼭 다 데려오라 지시했다. 특히 여자의 경우에는 반드시.
대외적으로는 친어머니도 아닌 왕비를 따르고 아끼는 것처럼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여자라면 노소를 가리지 않고 친절한 것뿐이었다. 그의 보좌관으로서 제일 처음에 했던 일은 복잡한 여자관계 정리였다. 리아는 식물 관련 능력자 후보 중 유일한 여자였다. 데려가지 못하면 제1 왕자가 얼마나 못살게 굴지 눈에 선했다.
“대가는 충분하게 드리겠습니다.”
“아니, 금전적인 건 문제가 되지 않네.”
“그럼 어떤 부분이…?”
리아는 백작이 반대할까 봐 긴장했다. 하지만 백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 리아에게 적합한 남자를 소개해줄 수 있나?”
“예?”
“아버지!”
백작은 몸을 기울여 퍼스 쪽을 향했다. 리아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퍼스는 백작이 접근하는 게 부담스러워 몸을 살짝 등받이 쪽으로 뺐다. 하지만 백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리아는 열여덟이네, 열여덟. 이 아이는 국가의 부름을 기다리겠다며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데, 보통 열셋에서 열다섯 사이에 국가에서 부름을 받아서 일을 시작하지 않는가.”
“그, 렇습니다만….”
“하지만 이 아이는 열여덟이 되도록 국가에서 소식이 없었네. 심지어 이번에 자네가 제안하는 일도 임시직이지 않는가. 정규직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그렇습니다….”
점점 백작은 앞으로, 퍼스는 뒤로 몸이 기울어졌다. 소파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뉘이다시피 해서 퍼스가 도망갈 곳이 없어지자, 백작은 제자리로 돌아와 고쳐 앉았다.
“성인식은 열여섯에 치르니 벌써 이 년이나 지났네. 다른 귀족들의 여식은 태어날 때부터 혼처가 정해지는 경우도 많은데 어린 시절부터 약혼이라면 치가 떨리도록 싫어해서 할 수조차 없었다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지. 제 초능력으로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겠다며 결혼은 늦게 하겠다고 했어. 그런데 설마 늦게가 이렇게까지 늦게가 될지 나라고 알았겠는가?”
“예, 예….”
이제 백작은 퍼스를 붙잡고 신세 한탄을 하고 있었다. 리아는 창피함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넌 조용히 있어! 퍼스, 자네라면 이 애끓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겠지?”
이번엔 백작이 퍼스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퍼스는 정중하게 손을 뒤로 빼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변했다.
“글쎄요. 제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아서.”
“호오, 자네 미혼인가?”
백작은 퍼스를 보며 눈을 빛냈다. 당장에라도 퍼스와 리아를 엮어버릴 심산이었다. 퍼스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리아가 이미 그 표정을 본 후였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전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요!”
“또 그놈의 ‘인연이 되는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없으면 혼자 살면 되지요’ 그 말을 하려고? 어림없지! 왕궁에 들어가고 싶으면 반드시 소개를 받아!”
그깟 놈의 결혼이 뭐라고! 리아는 억울한 마음에 이를 뿌득 갈았다. 하지만 백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리아를 외면했다. 이제 결정권을 가진 건 퍼스였다. 퍼스는 두 부녀의 싸움을 지켜보며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제1 왕자의 명령을 수행하려면 지금 냉정히 판단해야만 했다. 퍼스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무언가 결단을 내릴 때 그가 항상 하는 습관이었다.
“예, 그럼 소개를… 시켜드리지요. 제가 아는 남성은 별로 없으나… 원하시는 사윗감 조건이라도 있으신지요?”
퍼스의 말에 백작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반면 리아의 얼굴은 죽상이 되었다. 당사자의 의견도 물론 중요했지만, 퍼스는 지금으로선 백작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게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 거라 판단했다.
솔직하게는 자신이 누군가를 소개할 정도의 인맥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정 안 된다면 여자라면 가리지 않는 제1 왕자라도 들이밀 생각이었다. 백작이 원하는 혼인이 될지 안 될지는 왕의 허가가 있어야 하니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개’라는 조건에는 부합하니까.
백작은 퍼스를 향해 세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세 가지 조건인가요?”
“아니, 혼기가 찬 미혼 남성 세 명이면 되네.”
“나이나, 지위나, 희망하시는 직업군은 따로 없으신지요?”
“리아가 보고 반할 만한 남성이면 되네.”
애매한 조건이었다. 퍼스는 안경다리를 매만졌다. 난감한 일이 생겼을 때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리아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백작을 보았다.
“그럼 보좌관님이 소개해주시는 남자가 다 마음에 안 들면요?”
“그럼… 한동안 결혼 얘기는 꺼내지 않으마. 단! 퍼스 보좌관이 소개해주는 상대를 한 달 동안 꾸준히 만날 것. 총 세 명의 후보를 만나보고 결정해야만 한다.”
“한동안이라뇨! 아예 안 꺼내셔야죠!”
“그럼 평생 결혼도 안 하고 늙어 죽을 셈이냐?”
“인연이 아니면…!”
“또 그 소리!”
부녀의 싸움은 한동안 이어졌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퍼스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조건이 심각하게 객관적이지 못했다. 리아의 마음에 들 만한 남성이 어떤 남성인지 퍼스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퍼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리아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겠습니다. 성사 여부 상관없이 미혼 남성 세 명을 소개해드리면 된다는 조건, 맞으시죠?”
퍼스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백작은 체통도 잊은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는 여전히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다.
“맞네.”
“정확하게 하기 위해 계약서를 작성했으면 합니다만.”
“정확한 것 좋지. 데브!”
백작은 바로 집사를 불렀다. 눈치 좋은 집사는 바로 종이와 펜을 대령했다. 퍼스는 노련하게 계약서 내용을 작성했다. 평소 문서 쓰는 데는 이골이 난 터였다. 이런 계약서쯤은 금방 작성할 수 있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퍼스가 쓰는 계약서를 확인했다. 언뜻 보기에도 흠이 없어 보이는 계약서였다. 두 장을 모두 작성한 퍼스는 한 장을 백작에게, 나머지 한 장은 리아에게 내밀었다.
“두 분 모두 확인해보시고 문제없다면 서명해주시죠.”
백작은 내용을 이미 확인했기에 주저 없이 서명했다. 리아는 계약서를 읽으면서 퍼스 쪽을 흘끔흘끔 보았다. 하지만 무표정한 퍼스에게서 무언가를 읽어내는 건 무리였다. 리아로서는 계약서 쪽은 문외한이라 이 계약서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강제로 세 명의 남성을 소개받는 게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백작이 세 명 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동안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세 명 모두 거절해버리면 그만이었다. 퍼스가 얼마나 대단한 보좌관인지는 몰라도 리아 본인도 모르는 취향의 남자를 데려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론을 내린 리아는 계약서에 화려하게 서명했다.
“입궁을 축하드립니다, 리아 영애. 다음엔 궁에서 뵙죠.”
퍼스는 본인도 서명 후 한 장을 곱게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