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별도 없이 이야기는 시작되고
리아는 눈앞의 이끼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절벽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위에 쪼그려 앉은 모양새는 전혀 레이디답지 않았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은 이미 흙바닥에 닿아 젖기 시작했다. 심지어 점점 이끼의 초록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 모습을 유모인 재클린이 봤더라면 경을 쳤을 게 분명했다.
“어중간하게 덮여 있네.”
바위를 이끼가 빼곡하게 덮고 있었다. 그중 누가 밟고 지나가서인지 동그랗게 구멍이 난 부분이 있었다. 리아는 그 부분에 살며시 손을 댔다.
“하트모양이면 예쁘겠지?”
리아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곳에서 천천히 이끼가 자라났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트 모양을 만들며 자라나던 이끼는 이내 속도를 높이더니 빈틈을 모두 메워 버렸다.
“그만! 그만!”
당황한 리아가 손을 휘저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끼는 빈틈을 메우고 더 촘촘하게 자라나더니, 이윽고 그녀의 드레스 반 정도를 초록색으로 물들였다. 리아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자락을 잡고 올렸다. 투톤으로 변한 드레스를 보며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재클린한테 단단히 혼이 나겠는걸.”
“아가씨! 그런 모습을 보고 누가 귀족 아가씨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하녀도 그렇게 먼지 구덩이를 뒤집어쓴 모습은 하지 않는다구요!” 하는 재클린의 잔소리가 귀에 울리는 듯했다. 정말로 드레스에 물이 완전히 들기 전에 돌아가야겠다 생각하며 리아는 바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착지에 실패해 몸을 휘청이다 바닥에 손이 닿았다.
“우왁!”
실수로 리아의 손바닥이 야생 고사리에 닿았다. 그러자 고사리는 거짓말처럼 쑥쑥 자라나더니 이윽고 리아의 앞에 고사리밭을 만들어냈다.
“이렇게까지 자랄 필요는 없었잖아…. 치렁치렁한 차림으로 헤치고 나가기가 얼마나 힘든데.”
리아는 울상을 지었다. 그러다 이윽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드레스 자락을 올려 한쪽으로 묶어 올린 뒤, 고사리밭을 나아갔다.
리아가 사는 나라, 사이키델리아에 사는 국민은 모두 초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물, 불을 가지고 조종하는 능력부터, 염력, 투시력 등 초능력의 종류와 발현할 수 있는 정도는 개인별로 차이가 있었다. 리아의 초능력은 주변에 있는 식물을 자라게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녀가 태어나던 날은 한겨울에 바깥에 폭설이 쏟아지던 날이었지만, 마당에 있던 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웠다고 한다.
사이키델리아는 신분제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소유한 초능력이 강력하다면 신분에 상관없이 인재를 중용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전투에 관련된 초능력이 있고, 그 능력이 강력하다면 왕궁 기사단에서 여지없이 발탁해갔다. 예언 능력이 강력하다면 국가 정책 안보실에서 초청장이 날아왔고, 약하다면 기상 관련 부서에서 연락이 왔다. 이런 식으로 사이키델리아는 초능력을 국정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아는 열여덟이 넘도록 국가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식물 관련 부서에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기대했던 그녀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리아의 아버지, 페넬로페 백작은 얼씨구나, 하고 이를 빌미로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다. 하지만 리아는 아직 유부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제 능력을 발휘해서 일을 하고 싶었다.
본인의 초능력이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리아의 초능력에는 큰 단점이 있었다. 바로 제어력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원치 않아도 식물이 제멋대로 자라기 일쑤였고, 원하는 대로 자라주지도 않았다.
백작은 성 뒤편에 리아만의 온실을 만들어주었다. 그곳에서 리아는 식물을 키우는 능력을 다루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을 계속했다. 온실이 가득 차 밀림으로 변하자, 리아는 이따금 숲으로 빠져나오곤 했다.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다. 오늘도 실패했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인정받고 싶었다.
“아가씨!”
멀리서부터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이 들려왔다. 보나 마나 재클린이었다. 리아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발걸음을 빨리했다. 빠르게 혼나고 방에 들어가 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거 참. 금방 간다니까 그새를 못 참고.”
수풀이 걸리적거렸다. 리아는 양팔을 마구 휘둘러 대충 풀 가지들을 꺾이게 한 다음, 나중에 와서 다시 자라나게 해주리라 생각했다. 이윽고 평지가 나왔다. 저택 입구에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손님이 오신 모양이었다.
리아는 온 힘을 다해 달려나갔다. 뛰다가 재클린에게 혼나든, 늦어서 아버지에게 혼나든 둘 다 혼나는 건 확정이었다. 어차피 혼날 거면 차라리 재클린인 편이 나았다. 시끄럽기는 해도 아버지, 백작의 촌철살인보다는 나았다.
“조심하세요!”
저택의 입구로 들어가려는 순간, 마차에서 사람이 내렸다. 손님은 이미 저택으로 들어갔을 거라 생각했건만, 오산이었다. 멈추려고 했지만 전속력을 다한지라 급하게 멈추기가 힘들었다.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리아는 손님에게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요란한 소리가 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리아는 꽉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화려한 금박 무늬의 제복이 보였다. 단추 또한 황금색으로 된 옷이었다. 이 옷이 상징하는 의미는 하나밖에 없었다.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
“언제까지 이렇게 계실 겁니까?”
불쾌함이 가득 담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리아는 몸을 떼면서 상대방이 누군지 확인했다. 자색 머릿결을 하나로 묶어 늘어뜨리고, 안경을 쓴 남자였다. 키가 워낙 커 리아가 고개를 꺾어야만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근래 본 남자 중 가장 잘생긴 남자인 건 틀림없었다.
안겨본 결과, 학구파로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더러운 것에 닿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로 제복을 털고 있었다. 흰 장갑을 낀 손이 그가 깔끔한 것을 선호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죄송합니다. 저택에 온 손님이신가요?”
리아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해 보이며 사과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리아의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다행히도 빈말이란 것을 할 줄은 아는 사람인지 표정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괜찮습니다. 왕궁에서 왔습니다. 제1 왕자님의 제1 보좌관을 맡고 있는 퍼스 베르시에라고 합니다. 페넬로페 백작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아버님을 만나러 오셨군요? 저는 리아 페넬로페입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리아 양.”
“저도요.”
퍼스는 끝까지 표정은 솔직한 남자였다. 입으로는 사교적인 멘트를 할 줄 알면서 표정 관리는 못 하는 듯했다. 그런 그를 비웃듯 리아는 자연스레 웃어 보였다. 그리고 뛰다가 그에게 부딪힌 게 거짓말이었던 듯 우아한 자세로 저택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아가씨.”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재클린을 먼저 마주했다. 손님이 있어 티는 내고 있지 않았지만 눈으로 리아를 비난하는 중이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들어왔느냐고. 게다가 리아의 옷 반절은 초록색으로 물든 상태였다. 리아는 모른 척 웃으며 말했다.
“재클린, 왕궁에서 손님이 오셨다고 아버님께 좀 전해드려. 난 응접실로 손님을 안내해드릴 테니.”
“네, 아가씨.”
리아는 하녀를 통하지 않고 직접 응접실 문을 열어 퍼스를 안내했다. 퍼스는 처음 온 저택인데도 한 번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지 않았다. 리아가 안내한 자리에 앉으면서도 테이블을 바라볼 뿐이었다. 목적만 이루면 돌아갈 셈이란 게 확실했다. 주변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분명하다고 리아는 제멋대로 추측했다.
“어떤 홍차 좋아하시나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게다가 홍차에도 관심이 없고. 리아는 슬쩍 눈을 좁혔다. 홍차 취향도 없는 남자라니. 잘생긴 외모와 달리 재미가 없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실론으로 드릴게요. 요즘은 그게 제일 맛있어서요.”
사실은 리아가 좋아하는 홍차일 뿐이었다. 리아가 눈앞에서 홍차를 끓이는 동안에도 퍼스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움직이는 리아의 손끝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도 흥미가 있어서 보는 게 아니라 눈앞에 움직이는 게 있어서 보고 있는 것뿐이라는 표정으로.
리아는 홍차를 끓이며 퍼스가 저택에 방문한 목적을 고민해봤다. 아버지, 페넬로페 백작은 제1 왕자와 친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부리는 수행비서나 다름없는 제1 보좌관을 보낸 걸 보면 직접 전하고 싶은 중대한 사안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뭘까 고민하면서도 손으로는 홍차를 따라 퍼스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백작이 올 때까지 잠깐의 시간이 있었다. 리아는 자신에게도 방문 목적을 슬쩍 귀띔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퍼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퍼스는 홍차를 마시는 것만이 자신의 의무라도 되는 사람처럼, 홍차만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한 모금 마시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마저도 잠시뿐 본래의 표정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리아는 금세 그 변화를 알 수 있었다.
“홍차는 입에 좀 맞으시나요?”
“예, …놀라울 정도로.”
그로선 드물게 솔직한 대답이었다. 리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홍차는 누구에게 부탁하지 않고 항상 직접 끓여 마시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있었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이네요.”
“홍차 끓이는 데 재능이 있으시군요.”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칭찬이었다. 기분 탓인지 퍼스의 뚱한 표정도 조금 풀어진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무뚝뚝하지 않고 귀엽고 솔직한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과찬이세요.”
그때, 문이 열리며 페넬로페 백작이 들어왔다. 얼굴이 약간 상기된 것으로 보아, 서두른 듯했다. 집무실에선 항상 편한 차림으로 있는 터라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기 위해 의상을 갈아입었어야 할 터였다. 백작은 활짝 웃으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퍼스 보좌관.”
“페넬로페 백작님께 인사드립니다. 한낱 보좌관의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왕궁 내 자네만큼 유능한 사람이 없다고 평판이 자자한데 모를 리가 있나. 어서 앉으시게.”
백작이 왔으니 리아는 자리를 비켜주는 게 맞을 듯했다. 인사 후 자리를 떠나려는데 퍼스가 그녀를 붙잡았다.
“영애도 자리에 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당사자이시니까요.”
당사자? 뜬금없는 말에 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페넬로페 백작도 영문을 모르는 듯 퍼스에게 되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자네가 직접 내 저택으로 온 데다 내 딸이 당사자라는 건가?”
리아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가슴이 몹시 뛰었다. 설마, 설마 자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건가?
“먼저 기별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서론은 그만두게. 리아나 나나 급한 성격이라 현기증이 날 지경일세.”
백작의 말에 퍼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곤 리아와 백작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리아 양의 능력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