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추모식 중계가 끝나고 학생들 대다수가 자리를 찾아갈 때까지 앤드류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속으로 울음을 삼켰지만 쏟아지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코가 붉어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울 동안 옆자리를 지키는 제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훌쩍임이 조금 사그라들 때 제임스가 물을 건네줬다. 퉁퉁 부은 얼굴로 민망함도 없이 받아 목을 축이는 앤드류는 코를 푼 뒤에 맹맹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추하냐?”
빤히 바라보는 제임스의 시선이 조금 민망했다.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킁. 훌쩍.”
“너 이렇게 우는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더 추하게 우는 것도 봤는데 뭐.”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지만 제임스는 묘하게 가라앉아 보였다. 앤드류가 퉁퉁 부은 눈을 비볐다. 눈이 뻐근했다. 우느라 얼굴에 올라온 열이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고 올라온 서러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쉬는 숨에도 물기가 서려 있었다. 간헐적으로 딸꾹질을 하는 앤드류의 등을 몇 번 두드려 준 제임스의 주먹이 오늘따라 무겁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가 말했다.
“근데 오늘따라 더 못생겼다, 진짜.”
“시비 걸지, 흑. 마. 아파. 때리지, 끅. 마.”
다분히 감정적인 손길에 등이 아프다는 핑계로 앤드류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제임스는 아직 촉촉하게 젖은 앤드류의 흔들리는 눈썹을 가만히 보다가 티슈를 건넸다. 약간 어색함은 느끼면서도 주는 건 또 덥석덥석 잘 받는 앤드류가 얼굴을 닦았다.
“너 어릴 때 내 앞에서 대성통곡하고 울었던 거 다 기억해?”
“몰라. 한두 번이어야지.”
정말로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에 자전거를 배우다 넘어져 무릎이 다 깨졌을 때도 제임스 앞에서 펑펑 울었다. 그땐 피도 엄청 나서 어린 마음에 겁에 질린 제임스를 붙잡고 무작정 살려 달라고 외쳤었다.
‘뼈가 보여! 뼈가!’
뼈가 보일 리가 없음에도 앤드류는 그렇게 난리를 쳤다. 저보다 더 하얗게 질린 제임스는 죽어라 울어 대는 앤드류를 업고 집까지 뛰면서 말했었다.
‘내가 살려 줄게, 앤디. 살려 줄게.’
그 기억은 생생했다. 그리고 또 언젠가. 엄마가 아팠을 때도 앤드류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대성통곡을 했다. 외할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얼마 뒤였다. 앤드류의 어머니는 아주 많이 아팠다. 몸에 손을 댈 수 없을 만큼이었다. 그때 앤드류는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킨 어머니가 얼마나 구슬프게 울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외할머니의 병실 밖에서 들었던 어머니의 절규는 꽤 충격적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거대하게 보이는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어머니가 그렇게 절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때 겁에 질린 앤드류는 자신의 어머니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두려웠었다. 어머니의 등이 왜소하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자신의 어머니를 잃은 엄마는 장례식 내내 외톨이처럼 보였고 얼마 뒤에 크게 아팠다.
앤드류는 두려웠다. 엄마가 할머니를 잃은 슬픔에 앤드류를 두고 떠나려 한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했다.
‘나 버리고 가지 마, 엄마. 가지 마.’
그 말을 차마 아픈 엄마한테 할 수가 없어서 제임스를 붙잡고 말하며 울었었다.
‘그런 일 없어. 괜찮아 앤디.’
제임스는 그런 앤드류를 끌어안고 다독여 줬었다.
형제와 다름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한 결과였다. 그 뒤로도 몇 번을 제임스 앞에서 울었었다. 물론 제임스도 제 앞에서 몇 번 크게 울었고. 성장 과정에서 어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들은 서로의 바로 옆에서 지켜본 셈이었다.
“우리 열한 살 때. 딱 오늘이었는데.”
“……응?”
그 수많은 기억 중에서 오늘? 제임스는 물티슈로 앤드류의 얼굴에 난 눈물길을 닦아 주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뽀뽀했다가 직살 나게 얻어터진 날.”
“…….”
“그때가 오늘이었다. 전 공주의 장례식이었지.”
“…….”
“그날 숨넘어갈 듯 울었어, 너.”
전 공주 내외. 이제는 조지의 부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훨씬 편한 그분들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했던 날이었다. 나라에 침울함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날, 앤드류는 가족들과 함께 거실에 모여서 장례식을 함께 봤다.
그때는 너무 어렸지만 장례식의 의미를 모를 만큼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관이 나오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앤드류는 그때 자신과 또래의 소년을 봤다. 조지였다. 그날 조지는 울다가 실신을 했었다.
“그때 얘기 왜 하는데.”
하필 지금 그날을 끄집어내는 제임스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제임스는 물티슈로 앤드류의 얼굴을 닦아 주다가 손을 내렸다. 휴게실에는 아직 몇 명의 학생들이 남아 있었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소란스러웠으나 거슬리지 않았다. 제임스는 말했다.
“그냥. 그때가 생각났어.”
“…….”
“너는 울고.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우나 물어도 답도 없이 너는 그냥 울고 또 울었어.”
“…….”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울었을까. 네가 그렇게 공주를 좋아했었나?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까 너는 그게 슬퍼서 운 것 같지 않았어.”
제임스는 씁쓸했다. 함께 중계를 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던 앤드류 때문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도 답도 제대로 못 한 앤드류가 왜 울었는지도 몰랐다.
“무릎이 깨졌을 때는 들고 뛰기라도 했지. 그땐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더라.”
이유라도 알면 괜찮다고 말해 줄 텐데. 그런 말도 없이 목 놓아 우는 게 가슴이 아팠고 무서웠다. 제임스는 엉망으로 우는 앤드류를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생각했었다. 자신이 장난스런 뽀뽀를 해 주면 앤드류는 혹시 웃지 않을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얼마 전에 보았던 드라마 때문일 수도 있고 울 때마다 볼에 입을 맞춰 주던 누나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앤드류의 볼을 잡고는 아이 장난하듯 입을 맞췄는데 돌아온 반응은 상상 초월이었다. 울음이 범벅이었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더니 이내 곧 분노로 돌아왔다. 얻어터지고 난 뒤에 제임스는 밤에 자신의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앤드류한테 미움받았다는 생각에 겁을 먹어서 며칠 동안 방을 나오지 않았다.
앤드류가 다음에 자신이 만든 오렌지 에이드 마시라고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앤드류의 곁에 다가가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때를 생각한 제임스가 앤드류를 바라봤다.
“내가 뭐 해 줄 수도 없고. 그게 얼마나 난감했는데.”
앤드류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딱히 네가 뭐 해 주길 바라는 거 없어.”
그 말이 딱히 무슨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란 것을 잘 안다. 나를 위해 애써 위로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임을 안다. 그 말의 숨은 의미를 제임스는 잘 알았다.
“난 네가 나한테 뭔가를 바래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 앤디.”
앤드류는 순간 말을 삼켰다. 제임스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어떻게 안 지워지냐. 운 티가 안 사라져.”
앤드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임스가 너무 낯설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제임스가 불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오메가가 됐음에도 제임스는 친구였지만 오늘 제임스는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어… 나 좀 피곤해. 나 좀 쉬고 싶어.”
자리를 피하는 게 최선인 것 같았다. 허둥지둥 일어난 앤드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룸으로 돌아왔다. 제임스가 붙잡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앤드류는 문득,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임스가 붙잡을까 봐 겁을 먹었다. 자신을 붙잡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할까 걱정을 했었다.
뭐가 문제인 건가. 그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이상한 적이 없었는데. 역시 오메가로 변한 탓인가? 페로몬의 영향은 없다고 하지만 알파의 본성이 정말로 알아보는 걸까? 근데 나는 지금 조지와 본딩을 했을지 모르는데. 왜 갑자기 제임스가 나한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
형질이 바뀌고 나서 앤드류는 타인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에 민감했다. 조지야 처음부터 오메가가 된 상태에서 마주했기 때문에 태도의 기복이 없었다. 알파인 줄 알았던 처음 며칠의 냉랭한 태도는 오메가인 것을 발견하고도 한동안 지속됐다.
오메가가 됐다고 갑자기 살갑게 대하거나 없는 친절을 끌어오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이런 식의 태도 변화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앤드류는 자신의 몸을 더듬다가 얼굴을 쓸었다. 혼란스러웠다. 혼란을 참지 못하는데 모바일이 울렸다.
[잘 끝났어. - 웰시빵댕이 PM 16:14]
문자를 확인한 앤드류가 입술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조지에게 고민을 말해 볼까 싶었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답을 못 한 앤드류는 겨우 태연을 가장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응. 봤어.]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밤이 내릴 때까지 방에서 꿈쩍도 안 했다. 밥도 안 먹었다. 왠지 의지할 곳이 없어진 기분이었다. 방 밖이 부담스러웠다. 이곳이 제일 편한 느낌이라 한동안 방 안을 맴돌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고민에 고민을 했다.
자신에게 제임스는 둘도 없는 친구를 넘어서 형제에 가까웠다. 허물이 없었다. 늘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이며 어떤 추태를 보여도 서로 흉이 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뭘 고민하는 거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네가 조금 이상해졌는데. 내가 과민 반응하는 걸까? 형질의 다름으로 인해 내가 자격지심을 느끼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서러웠다.
제임스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게 조금 비참했다. 알파였다면 친구 관계에서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텐데. 너와 나는 언제나 동등한 친구였을 텐데. 이게 다 내 형질 때문인가 봐. 내가 변해서. 끝도 없이 자책을 하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앤드류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역시나 반가움보다 이제는 낯선 제임스가 앞에 있었다.
“잠깐 나올래?”
“…….”
“저녁도 안 먹었잖아.”
“…….”
“나와.”
다정하게 웃는 제임스를 빤히 바라보던 앤드류는 짧은 고민 끝에 문을 열고 나왔다. 제임스 앞에 선 앤드류의 주먹이 잘게 떨렸다.
앤드류와 제임스는 후원을 걸었다. 인적이 별로 없었다. 앤드류는 제임스의 침묵이 불편했다. 둘이 있으면서 이렇게 침묵이 불편한 적이 별로 없었다. 예전에는 말 안 하고 있어도 상관없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앤드류는 침묵이 사실은 아주 많은 사정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화를 하자는 말에 여기까지 나왔지만 앤드류는 사실 제임스가 아무 말 하지 않아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저기 제임스…….”
겨우 용기로 제임스를 부른 앤드류가 몸을 돌려 제임스를 바라봤다. 제임스의 익숙한 얼굴을 눈에 담았다. 생각보다 앤드류는 예민했다. 제임스의 태도 변화가 그렇게 극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미묘한 차이를 앤드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늘 바라보는 시선에 앤드류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얼핏 보였다. 어제와 오늘 그랬다. 제임스는 여전히 제임스였지만 얼핏 엿보이는 평소와 다른 감정에 앤드류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오메가인 것을 밝힐 것이다. 조금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제임스에게 네가 지금 조금 이상하게 구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해 잘 다독여 주고 싶었다. 앤드류는 제임스도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예상을 했다. 그렇게 판단을 내렸고 겨우겨우 용기를 냈다. 제임스는 제 친구니까. 형제와도 같았다. 신뢰하고 있었다. 그 믿음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불렀다.
“너 어제 오늘…….”
“나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기껏 용기 내서 말하려는데 제임스가 말을 잘랐다. 앤드류만큼 단호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앤드류는 김이 빠져 버렸다.
“어? 어… 어 그래. 먼저 해…….”
엄청 중요한 얘기인가 보다. 엄청 단호하네. 생각한 앤드류가 제임스를 빤히 올려다봤다. 시선을 마주한 제임스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앤디. 내가 며칠 고민을 했어.”
“…….”
“네가 나한테 말해 주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
앤드류가 숨을 삼켰다. 설마……. 놀라서 제임스를 바라봤다.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의문이 가득한데 제임스가 말했다.
“네가 나한테 숨기는 비밀에 대해서.”
앤드류는 숨도 못 쉬고 제임스를 바라봤다. 아. 오늘 나는 친구 하나를 이렇게 잃게 되는구나.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제임스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하는데 제임스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나는 상관없어. 그게 무슨 흠이라고.”
“…….”
“설마 그런 거 때문에 요즘 나랑 안 놀아 준 거면 내가 엄청 서운해.”
“저기, 짐. 그게.”
“요즘 시대에 알파끼리 연애하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뭐?”
“그런 일도 있어. 잘못된 일이 아니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당연히 오메가 문제를 말할 줄 알았던 앤드류가 당황해서 제임스를 바라봤다. 앤드류는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알파와 알파 얘기를 왜 꺼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우리에게 필요한 소리지.”
“우리?”
“그래. 우리.”
그러니까 그게 왜 우리한테 필요한 소리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 앤드류를 제임스는 전에 없이 진지하게 바라보다가 한 발자국 다가섰다. 앤드류가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이해가 안 됐다. 앤드류는 혼란스러웠고 제임스는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앤디 나는 말야. 나는…….”
***
왕성의 저녁 만찬 자리는 생각보다 호사스러웠다. 총리를 비롯해 정재계의 이름 있는 사람들, 언론사의 사주들, 왕실 어른, 여왕, 왕세자까지.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이들의 대부분이 모이는 자리는 매년 피곤하긴 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조지는 오늘따라 유독 불편한 자리에 속이 갑갑했다. 환기가 안 되는 것도 아닌데 공기는 매캐하게 느껴졌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자꾸 먼지가 목구멍에 걸렸다.
입맛이 없어서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속이 계속 좋지 않았다. 얹히는 느낌이 들어서 물만 마시는 조지는 되도록 일찍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왕이 만든 자리라 그러지도 못했다. 자리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쏟아졌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때때로 공주에 대해 말을 하기도 했고 조지의 근황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그것이 정말 조지가 궁금해서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조지는 이곳에 오면 자신이 정말로 왕실의 일원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디저트로 하나 집어 먹었던 마카롱이 잘못된 것인지 속이 도무지 편하지 않아서 조지는 슬금슬금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혹시 몰라서 폰을 확인했는데 앤드류의 연락은 없었다.
“조지,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아. 괜찮습니다.”
“술 마셨어?”
“아니요.”
“근데 얼굴이 좀 붉다. 덥니?”
왕세자비는 조지의 팔에 팔짱을 끼고 발코니로 인도했는데 밖에서 마주친 것은 구석에서 시가를 물고 있던 왕세자였다. 왕세자비와 조지를 발견하더니 멋쩍게 웃은 왕세자는 얼른 시가를 비벼 껐다.
“여보. 여기서 뭐 해요?”
“잠깐 휴식.”
웃어 보인 그는 얼굴 좀 비추라는 왕세자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조금 쉬었다 오라 말하고는 다시 회장으로 들어가는 왕세자 부부를 조지는 잠시 바라봤다.
화려하게 빛나는 곳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왕실에 온다고 유난히 격식을 차린 이들의 얼굴에 붉은 조명이 일렁였다. 빛에서 멀어지는 곳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조지는 다시 한번 폰을 확인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폰을 보다가 간밤에 앤드류와 나눴던 것들을 다시 확인했다.
불안했다. 낮에 기자단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봤다. 묘지로 향하던 조지가 잠깐 멈춰 섰던 이유가 그였다.
‘내가 뭘? 이게 내 잘못이야? 네가 공주의 아들인 게 내 잘못이야?'
이렇게 말했던 그는 앤드류를 때린 기자였다. 그는 기자단 사이에서 카메라도 들고 있지 않았다. 알아보는 조지와 눈을 맞추고는 씩 웃어 보이는 게 전부였다. 비릿한 웃음이었다. 기자들이 그렇게 웃는 건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그가 뭔가를 알고 있다. 아직 모른다 해도 결코 조지에게 좋을 일은 없을 것 같았고 당연히 앤드류가 떠올랐다. 왕의 비호를 받으니 기자도 쉽게 나설 수 없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조지의 삶을 끊임없이 도마 위에 올리는 사람이니까. 불안은 크고 높았다. 조지에겐 너무 익숙한 것들이라 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애써 숨을 가다듬는데 왕실 사람들이 조지를 찾아 발코니로 나왔다. 조지는 다시 시작될 대화가 피곤했지만 참아 넘겼다. 왕실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이유는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반갑게 조지를 맞이한 왕실 사람들은 숨기지도 않고 말했다.
“역시 조지가 제일 기대를 많이 받아.”
“그러게요. 요즘 왕실을 보는 시선이 별로 좋지 않은데, 조지만 예외예요.”
“세금 먹는 도둑이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니까.”
내심 왕실에 쏟아지는 좋지 않는 시선을 조지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공주님이 계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왕실의 권위가 바닥이다.”
“공주님도 왕실의 내일을 무척 걱정하셨단다.”
“결국 왕실도 인기가 필요한 것 아니겠니……. 왕세자님이 왕위에 오르신 다음. 그다음이 우리는 걱정이야.”
조지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왕실은 변화하는 사회에서 흔들리는 위치를 견고히 다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조지에게 협조를 바랐다. 현재 가장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이 조지였으니까. 왕세자의 인기는 조지의 인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런 말도 돌았다. 조지 하트가 언제 왕가의 성을 되찾을지 궁금하다고. 성인이 됐으니 다시 왕실로 들어가는 절차를 밟지 않겠느냐고.
“공주님도 복권되셔야지. 언제까지 그 묘에 모실 수는 없지 않겠니?”
“…….”
“조지. 너도 이제 왕가로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니?”
그들은 말했다. 전 공주를 공주로 복권시키고 그와 동시에 조지를 왕실로 받아들이는 계획을. 올해도 이어지는 같은 말들을 물끄러미 듣던 조지는 평소라면 아무 말도 안 했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이번에는 그들에게 물었다.
“그럼 제 아버지는요?”
그 물음에 답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왕실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제 아버지는 작위를 받고 부군이 되시나요?”
“아, 그건 더 논의를 해 봐야.”
역시나다. 조지는 웃었다. 평민 출신의 아버지를 그들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왕족의 권위를 손상시킬 수는 없으니까. 왕실이 유지되는 사회는 아무리 고상한 척해 봐도 결국 신분제가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그들은 평민이 자신들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평민과 자신들은 태생부터 다르다고 믿었으며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시대가 변화한다 해도 계급이 남아 있는 사회였다.
억만장자라 해도 평민 출신이라면 그들에겐 무시를 당했다. 겉으론 몰라도 속으론 우월감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아버지는 절대 받아 주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는 공주로 복권시킬 수 있지만 그 남편은 작위를 줄 생각이 없었다. 역사 속에서 아버지는 영원히 대접받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는 사랑받았지만 아버지는 아니다. 그걸 모를 만큼 조지는 바보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추모했지 아버지의 죽음을 추모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늘 소외당했다. 아버지는 철저하게 외딴섬이다. 아버지는 오히려 나쁜 사람이란 이미지를 가졌다.
순진하고 착한 공주를 꾀어낸 사람. 그것도 모자라 공주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착한 공주가 그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말들을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오직 조지만이 안타까웠다. 오직 조지만 가슴 아파했다. 자신에게 더없이 다정했던 아버지였다. 일이 바빠서 늦게 퇴근한 날에도 조지의 볼에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속삭여 준 아버지. 늘 최선을 다해 살았다. 좋은 일을 많이 하려고 노력도 했다. 전 공주를 독차지한 벌을 받는다면서 사회에 보답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아버지는 그저 사랑을 많이 했던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의 성이니까 조지는 지킬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복권되고, 자신이 왕가로 입적되면 아버지는 정말로 외톨이가 된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전 하트 성이 좋습니다. 이 이름으로 제 부모님께 넘치게 사랑받았어요.”
“…….”
“제겐 부족할 것 없는 부모님이셨어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저는 제 성이 자랑스럽습니다. 제 부모님과 공유하고 있는 성을 버릴 생각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조지는 생각했다. 자신의 삼촌이 보수 공사를 했다는 그 집. 그 집을 떠올리자 앤드류가 생각이 났다.
공주를 추모한다는 핑계로 길어진 저녁 만찬이 끝났을 때에는 녹초가 됐다. 찾아온 손님들이 모두 물러가자 공허한 곳에 남은 조지가 벽에 등을 기댔다. 답답해서 타이를 풀어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었다. 단추 두어 개를 풀고는 당기는 목덜미를 만졌다.
별로 달갑지 않은 사람과 어려운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늘 진이 빠지는 일이다. 어쩐 일인지 올해는 공주 복권을 노골적으로 꺼내고 있어서 더 피곤한 조지가 조금 나른한 얼굴로 뒤늦게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10분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조지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역시 연락은 없었다.
“한 번을 먼저 안 하네…….”
조용히 앤드류가 남긴 메시지를 하나씩 눈에 다시 새기던 중이었다.
“조지, 피곤하지?”
어느새 다가온 국왕의 말에 조지는 미소 지었다. 국왕은 미안해하고 있었고 조지는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오늘 자신이 종친들의 입으로 들은 말이, 비단 그들의 의견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할머니이기 이전에 국왕이었다.
왕족의 수장인 왕은, 조지를 지키는 데 최선을 다했지만 왕실의 문제 역시 생각해야 했다. 경제가 나빠질수록 세금 문제가 예민해진다. 왕족의 품위를 위해 왜 돈을 내야 하느냐는 사람들과, 왕족이 유지되어 벌어 오는 관광 자원이 만만치 않다는 이들은 끊임없이 갈등했다.
역사와 정통을 중시하는 것과 실리를 따지는 것. 사회 차별적인 구조가 사실 왕족을 유지하면서 벌어지는 것 아니냐면서 진보를 위해선 왕실을 없애야 한다는 말들 속에서 왕실은 굳건을 가장했으나 사실은 위태로웠다. 역사는 영원해도 왕실은 영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지는 왕을 이해했다. 그녀는 국왕이다. 자애를 잃지 않으면서 원하는 것을 취하는 법을 아는 사람.
“괜찮아요.”
“내일 아침엔 할머니가 호두 파이 만들어 줄게. 내일은 아무 일 없을 거다. 여기서 푹 쉬어. 집이라 생각하고.”
집. 집이라. 단 한 번도 궁을 집이라고 말하지 않던 왕이었다. 조지는 국왕을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어머니의 추억이 서린 궁을 돌아봤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만들어진 것들이 없다고 들었다. 높은 천장에서 사치스럽게 빛나는 샹들리에의 값어치만 해도 엄청나다고 들었다. 세계인들의 칭송을 받는, 역사에 이름 남긴 사람들이 설계하고 만들어진 것으로 치장된 이곳. 왕실 그 자체가 예술품으로 취급받는 이곳에 그림으로 존재하는 사람들. 그림처럼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그 생각을 하자 딛고 있는 바닥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숨이 턱 막힐 것 같았다. 실내의 온도는 터무니없이 덥고 건조하게 느껴졌다. 가슴은 근질거렸다. 조지는 건조함에 뻐근한 눈을 비비다가 말했다.
“할머니. 죄송해요.”
“응?”
“돌아갈래요.”
“…….”
“돌아가야겠어요.”
그 말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국왕은 곧 체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갈 곳이… 있어요.”
“…….”
“갈래요.”
그 말에, 국왕은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조지를 말리지 않았다. 아직은 조지에게 할머니로 존재하고 싶었기에 차를 불러 준 그녀를 두고 조지는 빠른 걸음으로 만찬장을 빠져나왔다.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깔린 붉은 카펫을 걷는 마음이 이상하게 떨렸다. 지금 당장 앤드류를 보지 못하면 큰일 날 것처럼 숨이 찼고, 손도 떨렸다. 휴대폰을 꺼내 앤드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떨어져 있는 이틀 동안 연락하면 바로 답을 하던 앤드류는 잠잠했다.
마음이 더 달았다. 왜 이렇게 초조한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앤드류를 보러 가지 않으면 꼭 앤드류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밖으로 나갈 생각으로 걷는데 곧 왕이 보내 준 차가 조지를 발견했다.
“조지?”
무작정 주차장을 걷던 조지가 얼른 차를 탔다. 기숙사로 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전화를 다시 걸었지만 앤드류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
“왜 안 받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마음으로 흘러 들어오는 불안이 어쩌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인가? 앤드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불안함에 조금 더 속도를 내 달라고 말한 조지는 그리 멀지 않는 기숙사가 오늘따라 너무 멀게 느껴졌다. 시간이 갈수록 더 그리웠다. 더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기숙사에 도착했고, 차에서 뛰어내린 조지는 기숙사를 향해 달렸다. 앤드류는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왜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앤드류를 보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강인하게 자신의 삶을 지키고 있는 앤드류를 보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았다. 답답함에 터질 듯한 이 몸도. 전부. 모든 게 다.
앤드류를 보면 나아질 것 같아서 숨을 헐떡이면서 기숙사 계단 위를 큰 걸음으로 올라갔다. 301호 문을 열면 앤드류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문을 벌컥 열었지만 없었다. 불은 켜져 있었는데 앤드류가 없었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은 거대했다. 조지는 순식간에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어디 갔지? 너 어디 갔지? 왜 여기 없지? 불안이 몰려왔다. 조지의 숨이 가빠졌다.
‘엄마랑 아빠는요?’
물었던 자신이 기억났다. 분명 도착하면 전화를 준다고 했는데 없었다. 집에 돌아왔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던 그날에 조지는 상장을 받았다. 다정한 친구에게 주는 상을 자랑해야 하는데. 왜 전화를 안 하지? 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이렇게 불안했다. 하루 종일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더 연락에 집착했던 조지는 해 질 녘에 전화를 받았다. 이해할 수 없는 얘기들이 쏟아졌고 조지는 주저앉았었다. 그때가 생각이 났다. 앤드류가 없어서 텅 빈 공간을 보니 그날이 생각났다.
모두가 없어지는 순간. 그리고 지금 네가 없었다. 네가 없다. 네가 없다. 네가. 너마저 없다. 피는 차갑게 식었고 숨은 멎었다. 지중해의 바다처럼 부드럽게 일렁이던 눈동자는 다시 얼음이 됐다. 앤드류가 없다.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만 가득했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절망한 것처럼 하얗게 질린 입술을 꽉 다무는데 그때였다.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조지가 전화를 받았다.
- 조지! 전화했어?
“내가, 내가 몇 번이나 했는데.”
- 잠깐 얘기 중이라 못 받았어. 무슨 일이야?
“내가…….”
앤드류의 건강한 목소리에, 처음 호흡을 배우는 것처럼 숨을 뱉은 조지가 얼굴을 쓸었다. 애써 마음을 누르며 말했다.
- 미안해. 그래서 내가 전화했잖아.
조지가 작게 숨을 고른 뒤 301호를 빠져나왔다. 바쁜 걸음으로 기숙사 계단을 내려오며 물었다.
“지금 어디야?”
- 나? 지금 후원 걷고 있어.
“후원?”
- 응. 바람 쐬러 잠깐 나왔어. 생각도 정리할 겸. 네가 뭐라 할까 하는 말인데 지금 혼자 있어.
조지가 발걸음을 옮겼다.
- 근데 너는 어디야?
“너는 어딘데?”
- 나 후원이라니까. 요 며칠 날씨 괜찮더니 다시 구름이 몰려오나 봐.
앤드류는 평소보다 평온한 목소리였다. 사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조지는 앤드류를 찾았다. 그러나 발길 닿는 곳마다 앤드류가 없었다.
- 너 뭐 해? 왜 숨이 거칠어? 산책하고 있어?
“응. 그러고 있어.”
- 오… 궁 후원은 뭐가 좀 달라?
“별거 없어.”
- 맛있는 거 많이 먹었어?
“별로. 가장 먹고 싶은 걸 못 먹었어.”
- 그게 뭔데?
“있어 그런 게. 먹으면 큰일 나는 거.”
조지가 걸었다. 앤드류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어서 찾고 싶었다. 눈을 두리번거렸다. 꿈속에서는 야한 모습으로 잘만 있더니 오늘은 어쩐지 찾기가 힘들었다. 넓지도 않는 곳에서 왜 이렇게 엇갈리는지 모르겠다. 조지가 잠시 멈추었다. 앤드류의 페로몬을 찾았다. 집중하니 사과 향이 길처럼 보였다. 앤드류를 향해 인도하는 푸른 실선을 따라 걸었다.
- 아참. 나 영화 정했어. 어바웃타임 알아? 봤어?
“아니. 안 봤어.”
- 그거 보고 싶어. 혹시 내가 너무 말랑말랑한 거 정했나? 넌 정했어?
“사실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어.”
- 뭐? 뭐야. 내가 얼마나 심사숙고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나 지금 다른 거 생각 안 들어.”
- 뭐야. 그래 놓고 왜 전화를…….
“네가 보고 싶어.”
- …….
“네가 보고 싶어.”
바람이 불었다. 희미한 사과 향이 넘실거렸다. 그 인도를 따라가니 가로등 밑에 서 있는 앤드류가 보였다. 향긋한 페로몬을 품에 가득 머금고 있는 앤드류의 등이 보였다. 조지는 왈칵 눈물이 새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아 눌렀다.
그런 순간이 있다. 도저히 포기를 못 하는 순간.
그 순간은 아마 바라만 봐도 눈물이 나는 순간을 말하는 건 아닐까? 그냥 보고 있음에도 눈물이 쏟아지는 순간을 말하는 것 아닐까? 애틋한 사람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에 눈물을 쏟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순간을 말하는 것 아닐까?
조지는 떨리는 숨을 뱉으며 앤드류의 앞에 섰다.
“보고 싶어, 앤디. 나 좀 돌아봐 줘.”
앤드류가 봐 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어서 나 좀 봐 줘.”
타들어 가는 듯 간절한 목소리에 앤드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앤드류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조지를 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조지의 몸이 떨렸다. 힘을 주어 손을 한번 쫙 편 조지가 작게 조금 화가 난 듯한 얼굴을 했다.
“조지…….”
부르는 목소리에 조지는 성큼성큼 걸어 앤드류의 앞에 섰다. 앤드류가 시선을 올렸다. 눈앞에 조지가 있었다.
“못 기다리겠어.”
“…….”
“못 버티겠어.”
“…….”
“네가 이런데, 내가 어떻게 더 나를 참아? 너도.”
“…….”
“너도 알잖아, 앤디. 너를 알잖아.”
조지는 거친 파도 같았다. 파도가 되어 앤드류의 앞에 섰다. 조지는 자신의 감정이 앤드류를 삼켜 버리길 바랐다. 자신의 모든 것이 앤드류에게 의미 있는 것이길 소망했다. 어느새 손이 닿을 수 있을 만큼 다가온 조지가 앤드류의 떨리는 손끝을 잡았다.
“너는 날 사랑스러워해.”
“…….”
“날 이렇게나 사랑스러워 하잖아.”
“…….”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널 참아.”
조지를 대하는 앤드류의 태도에 묻어나는 것은 사랑스러움이었다. 아주 순수하게 앤드류는 조지를 사랑스러워했다. 이성이 흐려지고 본능이 지배했던 순간. 히트 사이클이 터졌던 날에 조지의 몸을 만지던 앤드류의 손길과 눈길의 종류는 이것이었다. 사랑스러움. 오직 그것 하나였다.
숨겨지지 않는 마음은 마주치는 눈빛에도 절절했고 조지는 그래서 앤드류라는 사람에게 경계를 완전히 내렸다. 그렇게 사랑스러워해 주는데. 마음의 벽은 애정 앞에서는 우스울 만큼 쉽게 무너졌다.
조지도 놀라울 정도였다. 앤드류를 외면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도 굳건했지만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앤드류는 어느새 그럴 만한 존재가 되어 있었고 조지는 자신을 사랑스러움으로 대하는 앤드류의 앞에서 더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앤드류가 욕심이 났다. 지금까지 지나간 것들만 붙잡고 후회하던 조지는 처음으로 앤드류가 욕심이 났고 그래서 더 포기할 수가 없었다.
“네가 날 이렇게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고 있는데.”
지금 조지의 앞에 있는 앤드류는 그랬다. 흔들리는 동공을 어쩌지 못하면서도 조지를 눈에 담는 눈동자엔 애정이 가득했다. 떨리는 조지의 손을 단단히 잡아 쥐는 앤드류는 마음을 간질거릴 만큼 떨리는 숨을 뱉으며 조지의 앞에 존재했다. 사라지지 않았고 물러서지 않았다. 가장 안전한 곳이 자신이라는 단단한 확신을 가진 앤드류는 조지 앞에서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사랑스러움으로 존재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사람을 향해 쏟아지는 사랑을 막을 수가 없다. 제어할 수가 없었다. 원하는 모습으로 되어 줄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기엔 마음이 너무 넘쳐흘렀다. 욕심이 났고 확신이 들었다.
너 없이는 평생 외톨이로 떠돌 뿐이다. 네가 없는 나의 내일은 새로울 것도 없으며, 아름다울 것도 없는 지루한 하루가 될 뿐이다. 네가 없는 내 공간은 자해와 오만이 가득 채울 뿐 사랑과 안식은 없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오직 너여야만 했다. 너 말고는 필요 없다.
앤드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지의 확신을 앞에 두고 묵묵할 뿐이었다. 조지가 앤드류의 볼을 천천히 쓸었다. 손길을 피하지 않는 앤드류를 향해 조지가 말했다.
“내가, 너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
“오직 너만 그리워하는 나를. 오직 너만 원하는 나를. 넌 그런 나를 사랑스러워해.”
“…….”
“나 이제, 외톨이가 싫어.”
“…….”
“싫어.”
둥둥 울리는 심장 소리가 이제는 멀게 느껴졌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지끈거리던 소리가 아득했다. 오직 들리는 것은 조지의 목소리뿐이었다. 손끝에 퍼지는 조지의 체온에 혼란스러움이 고요해졌다. 앤드류가 고개를 들어 조지를 바라봤다. 확신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지는 빈틈이 없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조지.”
잠시 침묵하던 앤드류가 조지를 부르며 조지의 볼을 쓸었다. 손길에 애틋함이 묻어나와 조지는 서러운 숨을 내쉬었다.
“조지. 낮에 울었어?”
“아니.”
“울고 싶었어?”
“응.”
“그래서 지금 울어?”
“……으응.”
조지는 울고 있었다. 아주 서럽게. 울 곳을 드디어 찾은 듯이 온몸을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안쓰러움에 앤드류가 조지의 손을 꽉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자신의 열기가 조지의 얼음장 같은 손을 녹여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앤드류는 조지의 손을 주무르다 후, 하고 뜨거운 바람을 불어 넣었다. 숨결을 불어 넣었다.
앤드류에겐 계기가 필요했다. 모든 선을 넘어갈 계기가. 용기를 낼 계기가. 형질이 나뉜 세계에서 조지에 대한 감정이 특별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오메가인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직은 조금 이상한 자신의 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19년 동안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필요했다. 적절한 계기가.
오늘 조지를 본 모두가 조지가 슬퍼한다고 말했다. 학생들도. 중계진도. 기사도. 댓글도. 찾아본 모든 것들은 공통적으로 조지가 부모님을 그리며 슬퍼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앤드류는 다르게 생각했다. 조지는 분명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도 낮에 울었어.”
“…….”
“네가, 네가 나를 너무 그리워해서.”
“…….”
“거기에 없는 내가 너무 미울 만큼. 네가 너무 나를 그리워하고 있어서.”
조지는 그 어떤 것도 아닌 앤드류를 그리워했다. 가장 슬프고 외로운 순간에 옆에 있어 주길 바라는 사람이 앤드류였다. 앤드류를 보지 못해서 조지는 그렇게 슬퍼하고 있었고 조지의 감정을 공유한 앤드류는 그래서 울었다.
추모식 중계를 보면서 앤드류가 울음을 터트린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흘러 들어오는 감정이 낯설다는 생각을 하다가 곧 이건 조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었다. 본딩되어 있으니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조금 놀랐는데 흘러 들어오는 마음이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조지는 그리워했다. 그 그리움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향한 것인 줄 알았는데 곧 깨달았다. 조지는 그 순간에 앤드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본딩으로 감정이 넘어올 만큼 앤드류만을 부르고 있었고 그 감정에 앤드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펑펑 울었다. 그 자리에 없는 내가 싫어서. 널 혼자 두고 있는 내가 너무 미워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고 앤드류는 깨달았다.
“그래서 널 기다렸어. 꼭 네가 올 것 같아서.”
“…….”
“너를 기다렸어.”
“…….”
“날 그리워하는 너를 기다렸어.”
계기. 나를 나로 받아들이는 시작점에 설 수 있는 계기가 조지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것이 아니던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훌륭한 것은 없었으니까.
앤드류가 울음을 삼키며 웃었다. 조지의 볼을 손으로 감쌌다. 애정이 넘치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앤드류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사랑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조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테니까.
따스한 시선을 마주하던 조지가 앤드류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저항 없이 조지의 품에 안긴 앤드류가 조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따스한 체온이 마주한 가슴 사이로 퍼졌다. 향긋한 향기가 올라왔다. 원하던 품이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조지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앤드류는 미소 지었다.
마음은 신기했다. 어떤 사람을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색을 가졌다. 기쁘고 설렜고 슬펐고 불안했다. 마음을 확인하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는데 불현듯 뭔가를 깨달은 앤드류가 물었다.
“아! 근데 너 내일 오기로 했잖아.”
한참을 끌어안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다음에 앤드류가 물었다. 울음을 참느라 붉어진 앤드류의 코를 조지가 장난스럽게 쓸었다. 하지 말라고 밀어내는 사이에 인기척이 느껴져서 어정쩡하게 서로 거리를 벌린 다음에 머쓱한 분위기를 피하려고 앤드류가 한 질문에 조지가 말했다.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보고 싶어서.”
“야, 너.”
“왜? 부끄러워?”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진짜? 라고 말하며 확인할 듯이 얼굴을 들이대는 조지의 볼을 억지로 밀어낸 앤드류가 투덜거렸다.
“아니라고.”
“어제 하루로 충분해. 더 떨어져 있기 싫었어.”
“그럼 다시 안 가도 돼?”
“안 가도 돼. 잘 말하고 왔어.”
“뭐라고 말하고 왔어?”
“너 보고 싶어서 가야겠다고.”
“……뭐?”
정말? 진짜로 그렇게 말했어?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는데 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돌아오기 전에 왕에게 조지는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그게 사실인데 뭐.”
“아니 그래도. 그걸 그렇게…….”
“내가 일찍 와서 싫어?”
“뭐?”
“나 다시 돌아가?”
서운한 티를 감추지 않는 조지가 귀여운 앤드류는 그냥 웃었다. 배시시 웃으며 조지의 품에 매달렸다.
“가지 마. 나랑 있어.”
“…….”
“나도 사실 너 없는 동안 되게 허전했어.”
“…….”
“텅 빈 것 같더라고. 하루 종일 네 생각만 들고.”
앤드류가 재잘거렸다. 미소를 방실방실 띠면서. 은은한 사과 향을 풍기면서. 마음이 너무 간지러워서 조지는 조심스럽게 앤드류의 손에 자신의 손끝을 걸었다. 밖이라 신경이 쓰이는지 잠깐 주변을 둘러본 앤드류는 딱 간지러울 만큼 제 손을 잡아 쥐는 조지의 손끝을 꽉 움켜잡았다.
“웃지 마.”
그러나 조지는 좀처럼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고 앤드류도 싫은 건 아니었다. 늘 어딘가 눌려 있는 미소가 아니라 정말, 정말 순수하게 지금 이 순간이 기뻐서 천진하게 웃는 조지는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이 순간을 새기듯 깊이 바라보던 앤드류가 말했다.
“방금 전에 제임스가 나한테 묻더라.”
“뭐? 지금 다른 알파 얘기가 나와?”
“걔가 알파냐?”
“알파지 뭐야.”
“아 좀.”
“방금 전까지 짐이랑 있었던 거야, 그럼?”
“어.”
“…….”
“…….”
“…….”
“야… 넌 어떻게 할 게 없어서 짐한테 질투를 다 하냐? 그런 종류 아니야. 오히려 고마워해야 해. 아까 그 녀석이 묻더라 나한테. 널 좋아하냐고.”
방금 전에. 조지가 오기 전에 제임스가 자신을 불렀을 때에 앤드류는 오늘 친구 하나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을 느꼈었다. 제임스가 자신에게 할 말이 무엇인지 예측이 안 됐는데 제임스가 한 말은 이랬다.
‘앤디 나는 말야. 나는 알아. 너를. 어릴 때부터 유독 그 녀석 문제라면 눈이 시뻘게지는 너를 너보다 잘 알아. 실신한 조지를 보고 울던 어린 너를 아직도 기억해.’
‘…….’
‘입학식 날 조지를 발견한 네가 얼마나 행복한 얼굴로 웃었는지 너는 몰라도 나는 알아.’
‘…….’
‘너. 조지 좋아하지.’
‘…….’
‘괜찮아 앤디. 나한테까지 숨길 이유가 뭐야. 나는 예상했는데. 왜 그걸 나한테 감추고 나한테 거리를 둬? 네 고민 들어 줄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다고. 조지가 좋아? 그래서 걱정돼? 앤디. 걱정 마. 걱정하지 마.’
‘…….’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형질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야. 같은 형질이라도. 다른 형질이라도 사랑할 수 있어. 사랑에 잘못은 없어. 세상이 비난할까 겁나? 그래도 괜찮아. 너한텐 네 편이 있잖아.’
‘…….’
‘그러니 걱정하지 마. 조지도 너도. 너넨 서로 좋아해.’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앤드류는 단 한마디도 못 했다. 어른스러운 얼굴을 한 제임스는 안심이 되는 얼굴로 웃었다. 운동을 하느라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앤드류의 손을 잡아 준 제임스는 든든하게 느껴졌다. 앤드류는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제임스마저도 눈치를 챈 것은 자신의 형질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마음에 담는 것은 숨겨질 수 없는 일이었다. 형질을 떠나서. 성별을 떠나서 사랑은 그저 그 자체로 존중받을 만한 것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앤드류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조지가 아닌 제임스가 자신의 편이 되어 주겠다는 말에 겨우 인정을 했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고 누구를 사랑해도. 자신의 형질에 상관없이 우정으로 자신을 응원해 줄 한 사람이 있다는 말에 인정할 수가 있었다.
만약 자신이 알파였다면 조지를 좋아하는 마음이 달랐을까?
물음에 답은 하나였다. 알파였어도 조지를 좋아하게 됐을 것이다. 조지가 오메가였어도 사랑하게 됐을 거다. 그게 조지이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답이 사실 너무 어려워서 마주하기 힘들었지만 조지가 무엇이라도 좋아했을 게 분명했다. 좋아하는 마음에 형질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고 앤드류는 이제 와 조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불안해하지 말라는 듯 다독이는 손길을 받으며 앤드류는 마음을 다잡았다. 제임스가 너무 고마웠다. 이 말을 해 주자고 제임스는 얼마나 단단히 마음을 먹었을까.
‘고마워, 짐.’
‘고맙긴. 90년 우정인데. 내가 너보다 생일 한 달 형이잖냐. 공으로 먹은 게 아니지?’
평소처럼 거들먹거리는 제임스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앤드류는 자신의 형질을 밝혀도 제임스는 자신을 똑같이 대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기숙사로 돌아간다는 제임스에게 먼저 가라 말하고는 후원에 남은 앤드류는 무언가를 기다렸다. 가만히 밤바람을 맞으며 울렁거리는 자신의 감정을 좀 차분하게 누르려고 노력했다. 이제 와 보니 두려움은 아주 사소했다. 두려움은 넘기 전에는 거대하게 보이지만 올라선 뒤에는 아주 사소해진다. 그리고 지금 눈앞엔 조지가 있었다. 앤드류가 물었다.
“네가 많이 좋냐고 물어서.”
“…….”
“그렇다고 했어. 네가 좋다고.”
“…….”
“그런 내용이라고.”
좀처럼 펴지지 않는 조지의 미간이 어이가 없었다. 앤드류는 손을 뻗어 이마를 꾹꾹 눌러 주고는 말했다.
“너 연애할 때 질투 많이 해?”
“…그런가 봐.”
“그런가 봐는 뭐야? 경험 없는 것처럼.”
“…….”
“…….”
“내가 누구 만났으면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을 텐데.”
“뭐?”
“……알면서 뭘 물어?”
조지의 반듯한 이마를 어루만지던 앤드류의 손이 뚝 멈췄다. 그러고 보니 별별 기사가 다 있었지만 연애 관련은 없었다.
“진짜로 없었다고? 기사만 없는 게 아니라, 진짜로?”
“…….”
“그럼 진짜. 잠깐. 먹고 튄다는 게…….”
앤드류가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없어.”
“진짜?”
“없어.”
이 말에 앤드류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까 당연히 경험이 있는 줄 알았는데!
“너는 뭐 있는 것처럼 말한다?”
“아니 나도 없는데, 없었는데……. 너는 당연히. 그, 근데 왜 그렇게 잘해?”
“…뭘?”
“그날.”
“뭘.”
묻는 조지의 목소리엔 웃음이 묻어 있었다.
“아니. 잠깐. 그러니까.”
“뭘? 말을 해 줘야 알지.”
“나는… 나는 그냥, 그때 네가 너무 잘 먹길래.”
너무 당연하게 잘 빨길래. 맞아 그때 그랬지. 그때 진짜 너,
“네 입이 너무 지저분하게 굴어서… 그러길래.”
“…….”
“…….”
“하아……. 앤디. 너 지금 무슨 얘기 하는 줄은 알고 해?”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앤드류가 훅 올라오는 열기를 느꼈다. 그날 자신의 몸에서 입술을 좀처럼 떨어트리지 않았던 조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니면 일부러 이래?”
팔을 괸 조지는 말투와는 다르게 즐거워 보였다. 꼴깍.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앤드류는 조지를 진정시켜야 했는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 조지, 일단, 명상을 하자.”
“명상?”
“심호흡을 해. 후. 후. 보여?”
“…….”
“방금 우리의 대화를 머리에서 지우는 거야.”
“참. 매번 지우고 싶은 기억도 많다.”
“그래. 그러니까 기억을.”
“싫어.”
씩 웃으며 말한 조지가 앤드류의 손을 붙잡았다.
“억!”
당황한 앤드류의 손목에 입을 맞춘 조지가 코를 비볐다. 거친 숨소리가 맥이 뛰는 곳에 쏟아져 순식간에 소름이 돋은 앤드류의 발가락이 저절로 모아들었다.
“야, 조지!”
쪽. 소리를 내더니 혓바닥을 내서 손목을 넓게 핥은 조지는 곧장 기숙사로 향했다. 말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끌려가면서 앤드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제 앞에서 망설임 없이 301호로 향하는 조지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본 앤드류는 일단 말을 걸기로 결정했다.
“조지. 너 그냥 돌아가라. 응? 돌아가야 하지 않아?”
“안 가.”
“아니 그래도, 약속이 있잖아. 할머니와 오손도손.”
“네가 걱정할 일 없어.”
“조지.”
“앤디. 네 생각이 뭔지는 알겠는데 나 지금 네가 숨만 뱉어도 꼴려.”
“…….”
301호를 앞에 두고 문고리를 잡은 조지의 말에 앤드류는 순간 생각을 잃었다.
얘 이런 애였지. 맞다. 이런 애였지.
고상하고 얌전한 척 굴지만 저 입이 손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앤드류는 잘 알았다. 오직 앤드류만 알고 있는 조지의 한 부분이었다. 왠지 수긍이 됐다. 깜빡 잊고 있었지만 전에도 틈을 보이면 이상한 짓 하려고 덤비던 놈이었다.
맞아. 내가 그걸 까먹었네. 그런 녀석 앞에서 그런 말을 했으니!
자책을 하던 앤드류는 단단하게 허리를 감아 안는 손길에 히익, 소리를 내며 어깨를 모았다. 밖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한마디 하기 전에 어둠으로 내몰린 앤드류는 뒤에는 벽, 앞에는 조지라는 벽에 갇힌 뒤에야 방에 돌아왔음을 알았다.
“어… 조지?”
앤드류가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딸깍. 소리와 함께 방문이 잠겼다. 조지와 시선이 마주치자 긴장이 몰려왔다. 여기는 301호고 둘은 방금 마음을 확인했다. 조지의 눈동자에는 열기가 가득했고,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자신의 몸 위로 올라올 때 조지는 그런 눈동자를 했다.
“어… 조…….”
상황이 이렇게 됐으나 앤드류는 조지의 열기에 호응할 수가 없었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 일단 진정을 시킬 생각으로 말을 걸었지만 조지는 무시하고 앤드류를 끌어안았다. 단순한 포옹이 아니었다. 몸을 터트릴 듯이 꽉 안는 것은 방금 전의 포옹과 전혀 달랐다. 갑갑했다. 압박감에 숨쉬기가 조금 불편했다. 그래도 앤드류는 거부하지 않았다. 다만 말은 했다.
“조지. 일단 좀 진정을 좀, 하읏.”
조지가 앤드류의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협상력을 발휘해 볼 생각이었지만 대상자는 전혀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는 등허리를 쓸어 주자 앤드류는 신음을 흘릴 뻔했다.
소리를 삼키기 위해 앤드류는 조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는 이를 악물었다. 척추를 훑듯이 하나하나 어루만지는 손길을 따라 몸에 불길이 치솟았다.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손길에 몸을 얌전히 맡기고 있는 앤드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지를 꽉 끌어안았다.
조지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미 잔뜩 열이 오른 조지 덕분에 덩달아 몸에 열이 올라오기 시작한 앤드류는 다리를 배배 꼬았다. 이걸 어쩌지. 이러다 진짜 끝까지 갈 생각인가? 나 이대로 끝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설마. 설마. 조금 만지다 끝나겠지. 라는 속 편한 생각을 하면서 앤드류는 사실 충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지가 앤드류의 턱을 잡았다.
“조지. 일단 좀…….”
조지의 뜨거운 숨이 앤드류에게 전해졌다. 조금 거친 입맞춤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힘들어서 끙, 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깐 입술을 놓아준 조지가 다시 입을 맞췄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앤드류의 허리를 감싸 쥔 조지는 앤드류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버거워하는 앤드류의 얼굴을 쓸어 주면서 숨을 조금 쉬게 해 주더니 다시 입을 맞춰 왔다.
“흐으…….”
앤드류의 신음은 입 안에서 퍼졌다. 큰 손으로 가슴 부근을 더듬어서 참기가 힘들었다. 조지는 앤드류가 유독 약한 왼쪽 가슴을 지분거렸다. 손끝으로 만지며 누르더니 이제는 가슴을 입으로 베어 물었다.
앤드류는 눈을 꽉 감았다. 이보다 더한 일을 전에 했는데 심장은 오늘이 더 두근거렸다. 터질 것 같았다. 온몸이 울렸다. 너무 자극이 심했다. 입맞춤이고 손길이고. 피부에 떨어지는 조지의 숨소리도.
한참 앤드류의 가슴에서 제 좋을 대로 핥고 빨던 조지가 허리를 세웠다. 조지는 눈을 질끈 감은 앤드류를 바라봤다. 뚫어지게. 그 시선은 눈을 감고 있어도 느껴졌다. 앤드류는 차마 그 눈동자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열망이 득실거리는지 안 봐도 생생했다. 모조리 옭아매겠다는 그 시선을 마주했다간 그 자리에서 정말 숨도 못 쉬고 죽을 것 같아서 앤드류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조지는 다독이듯 앤드류의 미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앤드류는 더 이상 조지를 부르지 않았다. 말려야 한다는 생각도 못 했다. 입술이 달았다. 머리가 멍했다. 이건 야하다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홀리듯 바라보았던 길고 긴 손가락, 그 움직임. 그런 것을 떠나서도. 생긴 것과 정반대로 앤드류의 몸을 만지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던 조지는 히트 사이클의 기억을 살피자면 앤드류 기준에서는 사실 조금 난잡한 정도였다. 핥고 빨고, 그러는 것만 해도 그랬다. 넣지는 않았다는 뻔뻔함도 그랬지만, 거기까지 가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그랬다. 어울리지 않는 얼굴로 그래서 더 사람 미치게 만들었다.
“앤디.”
앤디. 나의 앤디. 이젠 정말 나의 앤디.
부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흥분됐다. 그래서 앤드류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목덜미와 귓불에 입을 맞춰 오자 잔뜩 긴장해서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앤드류가 그 부름에 힘겹게 눈을 떠서는 조지를 바라봤다. 그게 얼마 만의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눈꺼풀이 형편없이 떨렸다. 조지가 망설임 없이 앤드류의 바지춤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조지는 앤드류의 바지를 무릎까지 내렸다. 더운 숨을 쌕쌕 쉬면서 붉어진 가슴을 내보이며 바라보는 앤드류와 눈을 잠깐 맞추더니 입맞춤을 하면서 밑으로 내려갔다. 곧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손. 아니면 입. 그래서 눈을 질끈 감으며 대비를 하던 앤드류가 번뜩 눈을 떴다.
“자, 잠깐!”
외치며 일어난 앤드류가 허리를 비틀었다. 조지가 잡아 올려서 허공에 붕 뜬 제 다리를 보면서 조지의 어깨를 있는 힘껏 밀었다. 갑자기 깨진 분위기에 조지가 고개를 들었다. 당황한 앤드류가 주춤주춤 몸을 뒤로 물렸다. 조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앤드류를 바라봤다. 완전히 맛이 간 얼굴이었다.
“잠깐만 조지. 내 말을 좀 들어 봐.”
“하아. 하아…….”
“그게 그러니까.”
조지에게 설명을 해야 하는데 앤드류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난데없이 서러웠다.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휘감는 것도 그랬고. 정말로 기갈 들린 사람처럼 제 몸에 가차 없이 입을 맞추는 조지도 그랬다. 기분 좋았으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앤드류는 그것에 자존심도 조금 상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에 달콤했던 순간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감정이 곤두박질칠 수가 있나? 통제가 안 돼서 코를 훌쩍이는데 마른침을 삼킨 조지가 헝클어진 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물었다.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앤디. 뭐가 문제야?”
탓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말로 뭐가 문제인지 궁금해서 묻는 말이었다. 그러나 앤드류는 그 물음이 비난처럼 들렸다.
‘왜? 이제 와서 내빼게?’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음에도. 이런 분위기가 되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열기에 쓸릴 때는 정신이 없었는데 이성이 돌아오니 걱정이 많았다. 이상하게 비참한 기분까지 들었다. 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뒤숭숭한 마음에 앤드류는 두 눈을 꼭 감고 말했다.
“내가 오메가라.”
“…….”
“……우성은.”
앤드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확률이 높아.”
무슨 확률이 높은지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조지는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이냐며 묻지 않았다.
“너도 우성이고. 나도.”
높은 확률과 높은 확률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단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앤드류의 말에 조지가 멈췄다.
“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몸이 달아서 더 만지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그 후에 따라올 문제는 고려하지 못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앤드류가 자신의 팔뚝을 쓸었다. 어쩐지 좀 춥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도 모르게 조지의 눈치를 살폈다. 곰곰이 생각을 하던 조지가 말했다.
“……콘돔 없지?”
“없지.”
“빌릴 사람 없나?”
“뭐? 그걸 왜 빌려! 어떻게 빌려!”
앤드류가 질색했다. 진심으로 빌릴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앤드류가 인상을 구겼다. 알파만 가득한 기숙사다. 개인적으로 피임 기구를 구비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지금 이 시간에 빌린다는 건 주목받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뒤에서 무슨 말이 돌지 몰랐다.
“정신 차려. 소문낼 작정이야? 나 졸업해야 해.”
“…….”
“졸업 방해하면 가만 안 둔다. 어?”
강력한 의지를 담은 시선에 조지는 정말로 아쉬운 얼굴을 했다.
“사 둘걸 그랬다.”
당장 오늘 이곳에 돌아오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서 사 올걸.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자책하는 조지를 물끄러미 보던 앤드류가 어깨를 모았다. 조지는 앤드류를 빤히 바라봤다. 흥분이 가신 얼굴을 한 앤드류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약간 위축돼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지의 눈치를 한번 살핀 앤드류가 말했다.
“미안.”
그 말에 조지가 인상을 구겼다. 미안? 앤드류가 지금 미안하다고 말한 게 맞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미를 모르겠는데. 뭐가 미안해?”
“내가 분위기를 깨서. 깼잖아.”
과거 알파인 줄 알았던 앤드류는 알파의 속사정을 잘 안다고 자부했다. 알파들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지 않았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들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알파들의 오만과 거만을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앤드류는 분위기를 깼다는 사실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게 미안했다. 따지고 보면 미안할 이유가 없었는데 그냥 무턱대고 잘못한 것 같았다.
‘분위기 잡았더니 싫다고 빼더라. 자기한테 공을 더 들여 달라나 뭐라나. 존나 어이가 없었다니까. 떡 치는 게 유난이야. 상전인 줄 안다니까?’
어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어린 알파들은 오메가를 무슨 정복해야 하는 대상처럼 바라봤다. 자신과 밤을 보낸 오메가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품평을 하는 것도 종종 봤었다. 그때마다 눈살을 찌푸렸던 앤드류는 그때는 알파로서의 기본 소양이 부족한 자식들이라고 욕을 했었다. 그게 지금, 이 순간에 떠올랐다.
조지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음에도. 왜 마음 한구석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자리 잡는 것인지, 왜 자신이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앤드류는 알지 못했다. 조지는 한동안 앤드류를 빤히 바라봤다.
앤드류의 감정을 모두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답답함으로 한참을 보다가 아직은 알파이고 싶다던 앤드류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몸이 어색하고 무섭다는 앤드류의 말도 생각이 났다. 혹시 그 불안함이 여기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히트 사이클의 앤드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적극적이었는데 주기가 아닌 앤드류는 다른 건가? 생각 끝에 조지는 어쨌든 이건 자신의 잘못이란 결론을 내렸다.
“네가 뭐가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은 건데.”
“…….”
“마음이 들떠서 너무 앞서갔어. 미안해.”
“아니 뭐… 네가 뭐… 딱히…….”
“나한테 너무 맞추려 하지 마. 안 어울려.”
왜 하필 이런 상황에서 자신한테 맞춰 주지 못한 걸 미안해하는 건지. 조지는 그게 조금 속상해서 말했다.
“그리고 이럴 땐 미안하다고 하지 마. 너무 빠르다. 하기 싫다. 오늘은 싫다. 이렇게 말해.”
“…….”
“내가 잘못했으니까 나를 혼내. 그런 것도 생각 못 했냐고 눈치 없다고 욕해. 그게 너 할 일이야. 반성은 내가 할 일이고.”
앤드류를 만지는 조지의 손길은 다정했다. 마주 보는 시선도 다정했다. 앤드류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봐. 다른 누구도 아닌 조지인데.’
풀어지는 앤드류의 표정을 보던 조지가 앤드류를 끌어안고는 침대로 넘어갔다.
“억. 조지. 조지.”
“그냥 이러고 있자.”
“…….”
“안고 있자.”
마주 닿은 몸이 두근거렸다. 장난치듯 어깨에 이를 세워서 앤드류가 웃었다. 성적인 의미가 없는 스킨십이 이어졌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볼을 비비는 행동에는 포근한 애정이 가득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까의 불안은 거짓말이라는 듯 사라졌다. 앤드류가 투덜거렸다.
“좁아.”
“좁아서 더 좋은 거야.”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냐?”
“상식?”
이제 완전히 자기 페이스를 찾은 앤드류가 잘게 웃었다. 귀여워라. 그런 상식은 또 어디서 들었대? 이런 조지도 귀여워 보이면 내가 드디어 미친 거지?
아무래도 단단히 홀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제 아랫배에서 손가락을 두드리며 만지는 조지의 손길을 편하다 생각할 리가 없었다. 앤드류가 꿈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조지의 얼굴을 마주 봤다. 다정한 시선이 편했다.
“나 궁금한 거 있어.”
“뭔데.”
앤드류가 조심스럽게 조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곱슬한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쓸리는 감촉이 좋았다.
“근데 진짜 괜찮아? 일찍 돌아와도.”
“그게 그렇게 신경 쓰여? 할머니가 언제 저녁 같이 먹자고 하셨어. 삼촌도 너 보고 싶대. 만찬에 초대하신대.”
“저녁 만… 만 뭐?”
저녁 만찬? 만찬? 요즘도 만찬이란 게 있어? 앤드류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왕실 사람들이 궁에서 벌이는 만찬. 이상하게 중세 시대가 튀어나왔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높게 올린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디저트를 먹으며 포커를 치고 피아노를 치고 춤을 추고. 요즘 시대에 그렇게는 안 하겠지만 빈약한 상상력이 시대물을 펼쳐 주고 있었다.
“한 번은 가야……. 무슨 생각해.”
“만찬이란 소리에 내 뇌를 뛰어다니는 저 중세 시대 사람들은 뭐야? 좀 말려 봐.”
“지금 베르사유 궁전 같은 거 생각했어?”
“아니. 따지자면 천일의 스캔들이야.”
“그거나 이거나.”
“자동으로 상상이 그렇게 가는걸. 태양왕 이런 거. 짐이 곧 국가니라!”
“그건 또 왜 베르사유 쪽이래? 대체 왜 거기까지 달려가? 그 정도 아니야.”
“혹시 말이야. 이건 그냥 하는 말인데. 내가 너랑 사귀게 된다면.”
“말이 좀 이상하다?”
“아. 사귀고 있지. 있는데…….”
“걱정하지 마.”
“뭐?”
“걱정하지 마. 너는 아무 일 없을 거야.”
조지는 단호함을 넘어 결연해 보였다. 앤드류가 잠시 심각한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는 왕족이 아니니까 뭐.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싶었다. 깊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졌다. 이제 막 마음을 확인한 상황에서 굳이 그런 문제를 들추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의 감정에 충실할 것을 택했다.
“하긴. 뭐. 너무 앞서 나가는 생각인 것 같다. 그치? 일단 연애나 잘하지 뭐.”
“…….”
“잘해야지.”
쪽. 소리에 당황한 앤드류의 동공이 터질 듯이 커졌다. 이왕 시작한 연애에 최선을 다해 볼 의지를 다지고 있는데 입술에 뜨거운 게 닿았다 떨어졌다. 앤드류를 놀랜 조지가 씨익 웃더니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앤드류는 조지의 숨결을 느끼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키스는 조지만큼 달콤했다.
몇 번의 입맞춤이 오고 가고, 소곤거리는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앤드류의 말이 느려졌다. 조지의 체온에 푹, 싸여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조오지, 하음, 혹시 꿈에서 나 만났어?”
“…….”
“나는 너 만났어.”
앤드류가 볼을 올리며 웃었다. 어제저녁에 꿈에서 조지를 만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네 꿈에도 내가 있으면 좋겠다고.
“나도 만났어.”
그래서 기뻤다. 기뻐서 웃는데 그걸 빤히 보던 조지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더니 앤드류의 코에 입을 맞췄다. 꽉 끌어안아 오는 몸에 답답하다고 몸을 움찔한 앤드류가 조지를 바라봤다. 조지의 표정이 너무 좋아 보였다. 조금 얄미울 정도였다.
“그렇게 좋았어?”
“응. 엄청.”
“……왜 약이 오르지?”
꿈에서 날 본 게 좋아서 웃고 있는데. 이상해. 약이 올라. 뭐지? 뭔가 알 것 같은 이 기분은?
조지는 계속 웃었다. 그 의미를 알 리 없는 앤드류가 뚱한 얼굴로 조지를 보다가 그냥 그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우리 오늘은 만나지 말자.”
꿈속에서 안 만날 거야. 찾아가나 봐라. 심술이 나서 괜히 하는 말이었다.
“싫은데.”
“내가 안 갈 거야.”
“그럼 내가 찾아갈 거야.”
그 말에 살짝 코끝이 찡했다. 앤드류가 결국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숨어야지.”
“찾아야지.”
곧 잠이 엉겨 붙은 눈이 감겼고 얼마 뒤에 쌕쌕거리는 달콤한 숨소리만 방 안에 울렸다. 편안한 숨소리를 내는 앤드류의 체온은 따뜻했다. 그 몸을 끌어안고 있던 조지가 천천히 상체를 떼어 냈다. 살짝 밑으로 내려가 앤드류의 코끝에 제 코끝을 비볐다. 혹시 앤드류가 떨어질까 한 손으론 허리를 붙잡았다.
“앤디?”
속삭이듯 불렀지만 앤드류는 깨지 않았다.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뱉을 뿐이었다. 다른 손으로 앤드류의 볼을 쓸던 조지가 웃었다. 불편한지 움찔거리다가 조지를 향해 더욱 몸을 밀착하는 그 작은 행동에 애틋함이 몰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앤드류를 꽉 끌어안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숨이 달았다. 숨이 달다는 것이 미치도록 좋았다. 특별할 거 없는 숨이 이렇게 달 수 있다는 것을 조지는 앤드류를 통해 배웠다.
조지가 미소를 지으며 앤드류를 끌어안았다. 행복했다. 행복에 겨워서 눈이 가물거렸다. 여기가 가장 안전했다. 네 품이 가장 안전했다. 네가 있는 곳에는 황폐가 없다. 네가 있음으로 황폐가 사라졌다. 너는 그런 존재였다.
서로를 끌어안고 잠에 든 밤에 꿈은 꾸지 않았다. 꿈을 꿀 필요가 없었다.
***
언론사는 분주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데스크에 앉은 기자는 조용히 조지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앤드류와 조지의 관계를 캐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요즘 정보 조달이 시원치 않다. 조지가 눈에 거슬려서 골탕을 먹일 작정으로 협조하던 학생들이 국왕 행차로 인해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곤 빠르게 손을 털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자는 조지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이걸 뒤져?”
뒤에서 나는 소리에 기자가 인상을 구기며 뒤를 돌아봤다. 편집장이었다.
기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편집장은 얼마 전 왕의 전화를 받은 뒤, 곧바로 조지에 대한 취재를 금지했다. 앤드류를 파 보려고 마음을 먹었던 바로 그날. 그러나 그는 멈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왕세자비 내외의 육아 경험도 아니며 이미 단물 다 빠진 왕의 기사도 아니다. 조지였다. 조지. 판매 부수를 확 올려 주는 건 누구도 아닌 조지였다.
“왜? 이젠 내가 뭐 하는지도 조사해요?”
“이 사진을 왜 아직도 보고 있냐고. 내가 조지는 그만 건들자고 했지?”
“…….”
“아니. 왜 이렇게 조지한테 집착을 해? 어? 왜? 옛날처럼 조지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 써서 자리 유지해 보려고? 지금 이 자리에 앉게 해 준 게 조지라서 더 그래?”
“편집장님.”
“그만해. 지금 뒤에서 돌고 있는 소문 몰라? 왕실에서 조지 복권을 논의하고 있다는 소식도 모르냐고. 뒤에서 지금 별별 말들이 다 들리는데. 지금 이 와중에 조지 기사 내서 뭐 하자고?”
“그러니까 더더욱 지금 내야죠.”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더더욱 내면 안 되는 거지!”
“그럼 전 공주 기사는 왜!”
“그건 전 편집장한테 따지든가! 말은 바로 하자. 네가 모자이크도 없는 그 사진 찍어서 터트려서 판매 부수가 잠깐 올랐다지만 그 뒤에 세무 조사다 뭐다, 언론사가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상도는 있어야지 상도는! 네가 진짜라며 데려온 공주의 내연남. 알고 보니까 그냥 꽃뱀이었지. 그거 때문에 고소다 뭐다 얼마나 욕을 처먹었는 줄 아냐고.”
“…….”
“너 때문에 언론사 문제 많다는 분위기 돌아서 다들 욕 처먹고 몸 사리게 된 거 모르냐고. 어? 몰라?”
편집장이 기자의 명찰을 잡아 흔들었다. 기자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언제부터 우리가 권력 앞에 고개를 조아렸어요?”
“야. 네가 무슨 투사야? 권력 앞에 고개를 조아려?”
“…….”
“너 때문에 소송당한 게 지금 몇 건인 줄 알고 그래? 예전이랑 지금은 다르다고 했잖아. 예전에야 언론사가 막무가내로 나간다고 해도 다들 어느 정도 용인해 줬지만 지금은 게네들도 어마 무시한 변호사들 끼고 덤비니까 내가 선은 지키라고 늘 말했지.”
“…….”
“개인 사유지 침입. 할 거면 걸리지나 말든가. 하는 짓마다 죄다 걸려?”
기자가 가만히 바라봤다.
“네가 나보다 입사 선배면서 편집장은 내가 먼저 단 이유가 뭔 거 같아? 어?”
“…….”
“적당히 해. 어? 적당히 하라고. 지금도 충분히 잘 팔려. 파격적인 한 방? 그거 잘못 노렸다가 다 옷 벗어. 골로 간다고.”
“…….”
“언제까지 싸구려 기사만 팔아먹을 건데? 언론사면 이제 좀 언론사답게 하자. 황색 언론이란 비아냥 좀 그만 듣자. 괜히 정치, 경제 지면 늘리고 있는 줄 알아? 이제 이 회사에 그런 거 별로 안 바래. 안 바란다고. 국회 의사당에서 뭘 논하는지 더 궁금하다고. 어? 급 좀 올리자. 제발. 품위 좀 살리자고 좀.”
“…….”
“네 맘대로 할 거면 옷 벗을 각오하든가. 그동안은 의리로 봐줬지만 이젠 한계야, 우리도.”
“…….”
“하여튼 싼마이들은 끝까지 싼마이야.”
편집장이 혀를 차며 자리로 돌아갔다. 기자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많은 문제를 일으킨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좋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내 그림자도 못 쳐다보던 것들이…….”
지난날. 그가 낸 기사들이 메가 히트를 쳤을 때는 모두가 그를 부러워했다. 그때의 영광을 떠올리며 기자가 조지의 사진을 노려봤다. 조지는 자신을 다시 그 위치로 올려 줄 유일한 키였다.
요즘 조지를 주목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재계 사이에선 왕실이 조지를 복권시키려 움직인다는 말이 돌았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진 왕실 인기와 가혹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경제적 불황이 겹친 상황이었다. 돈 앞에서 장사 없다고 그 고고하다는 왕실도 얼마 뒤엔 왕실이 폐지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런 절박함 치고는 왕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왕은 조지에게 어떤 강요도 제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난번 조지의 학교까지 친히 나선 것이 조지를 데려오겠다는 의지의 표명 아니겠냐는 말이 돌기는 했지만 그런 것치고 왕은 지난 추모식에서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들 그때 즈음엔 왕실 측이 에밀리 공주의 복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언질을 조금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 이유로 편집장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적어도 기자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지금 자신의 데스크에 있는 고소장들은 아무런 문제도 안 됐다. 그깟 고소장들은 대박 사건 하나 터트리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오랜 감은 앤드류를 향해 있었다.
자신의 요도구 건강을 염려하던 건방진 녀석.
살면서 공개적인 곳에서 그런 모욕을 당한 건 처음이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알아본 유명인들이 질색을 하며 욕을 한 것은 기삿거리에 불과했다. 그는 난생처음 앤드류를 통해 모욕을 느꼈다. 자존심에 금이 갔다. 그는 그래서 더 물러설 수가 없었다.
“옷 벗을 각오? 하. 돈 앞에 장사 있어?”
지금은 안 된다고 말을 해도 기사가 나간 뒤 판매 부수가 오르면 저런 소리 못 할 것이다. 그때는 자신이 아니라 편집장이 옷을 벗게 되겠지. 그러기 위해선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만한 기사를 써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사실을 보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장 자극적이게 보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기자는 자신의 일에 적극 협력해 줄 사람을 찾던 중에 가장 저격인 사람을 찾았다. 과거, 쿠퍼란 성을 가지고 있는 학생. 그 학생은 앤드류를 추적하던 기자가 얻은 다른 월척이었다. 자신을 도와줄 적임자가 바로 ‘쿠퍼’였다. 그를 기억한 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기자의 손에는 아주 오래된 기사가 있었다. 제목은 이랬다.
「상대편 운전사, 블랙박스 확인 결과 사고 당시 통화 중」
그리고 그 기사 옆엔 다른 종이 한 장이 있었다. 병원 진료 기록이었다. 몰래 빼내느라 애를 먹은 만큼 흥미로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앤드류 스윈턴. 형질의학과에 세 차례 방문」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