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24)

07

다음 날 앤드류가 등교를 위해 일어났을 때 조지는 이미 나간 뒤였다.

오랜만에 혼자 일어나 학교로 향한 앤드류는 밤새 고민을 했다. 조지가 아닌 자신이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조지라는 상품을 어떻게 언론들이 소비해 왔는지 전부는 아니라도 얼핏 알았다. 조지에 대한 뜬소문이 조지에게 국한되지 않고 주변인들까지 포함된 것을 보았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자신의 차례였다. 

“하아…….”

수업에 도무지 집중이 안 됐다. 깊은 한숨을 쉬는 앤드류는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쉬는 시간에 영상을 봤다는 제임스에게 물어 어제 상황을 찍었다는 친구를 찾아갔다. 그들은 다행히 동영상을 업로드할 생각이 없다면서 앤드류에게 전송해 줬다.

“올렸다가 더 복잡한 일이 터질지도 모르고 학교 측에서도 얘기를 들어서.”

“학교 측에서 얘기를 했어?”

“응. 영상 찍은 애들 다 호출받았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더라. 어제 있던 일은 학교에서 처리하겠다면서 업로드하지 말래. 할 생각도 없었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학교 측은 최대한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어 했다. 언론사 측과 어떤 말이 오고 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구설수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조지에게 피로감을 줄 수 있는 일이다. 학교 측의 입장은 무엇인지. 왕실 측의 입장은 무엇인지.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조지는 모두 알고 있을까? 조지란 존재를 앞에 두고 뒤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과 거래들과 말들을? 

영상을 받고 혼자 남겨진 앤드류는 찍힌 동영상을 보았다. 기자의 발을 붙잡고 있는 조지는 화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자신이 느꼈던 것보다 조지는 더욱 화를 내고 있었다. 

기자를 향해 화를 내고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했던 조지. 

마음 같아선 당장 인터뷰를 하겠다고 나서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앤드류가 타깃이 될지 모른다는 경고의 말보다 이런 일을 직면했음에도 익숙하고 태연했던 조지의 태도가 더욱 마음이 쓰인 탓이었다. 

‘……이젠 괜찮아.‘

이런 일이 일상이냐는 말에 조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그 답이 앤드류를 더욱 서글프게 했다. 

“그럼 안 괜찮았던 적도 있단 얘기잖아.”

억울함에 중얼거렸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까. 괜찮아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 어두운 방 안에 오직 혼자서. 누구에게 약점 하나 잡히지 않기 위해서 홀로 악몽과 싸우는 조지를 떠올리던 앤드류가 [조지 하트]라고 검색창에 입력했다. 다행히 어제와 관련된 내용으로 나온 기사는 없었다. 이대로 포기할 기자가 아니었음에도. 

검색 결과 내용을 훑었다. 말도 안 되는 기사들도 있었고 사진도 있었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조지 하트에 대해서 사담을 나누는 것들도 있었다. 좋은 말도 있었고 근거 없는 비난도 있었다. 조지에 대해 수많은 말들이 넘쳐흘렀고 사진도 가득했다. 

파파라치가 몰래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린 시절에 가족들과 함께 찍은 희귀 사진들도 있었다. 그 사진 속에서 조지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부모님과 야외 피크닉을 나온 사진이었다. 아무 걱정 없는 조지는 딱 그 나이 또래의 개구진 아이와 같았다. 지금의 조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만약 상황이 조금 달랐다면.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면. 조지는 지금도 이렇게 웃고 있을 텐데…….’

천진하게 웃고 있는 조지의 어린 시절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지금이 301호실을 나올 순간이 아닐까? 지금 룸을 나온다면 기자가 자신의 형질을 들쑤실 필요가 없다. 자신이 오메가인 것을 밝힌다 하더라도 그건 앤드류 개인 차원의 문제가 될 것이다. 발현과 히트 사이클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건 조지와 앤드류만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만약 자신이 301호에 머물고 있는 사이에 조지의 말대로 오메가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는 게 밝혀진다면.

“뻔하지…….”

벌어진 일은 뻔했다. 자신이 오메가인 걸 속였다는 것보다, 조지가 알았느냐에 포커스가 집중될 것이다. 공범자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과연 둘이 아무 일도 없었는지에 관해서 말을 하겠지.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오늘 당장 301호를 나가면 끝날 일 같았다. 그러면 더는 자신의 형질이 조지의 약점이 될 일이 없다. 없었는데. 

앤드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기자한테 좀 적당히 할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면서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결론을 내지 못하고 무거운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데 갑자기 학교 건물이 술렁거렸다. 

“와아아! 와!!”

“진짜야? 진짜, 진짜?”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하는 학생들에 앤드류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뭔가를 발견했는지 학생들은 창가에 달라붙고 있었다. 아슬할 만큼 몸을 창밖으로 내밀고 있는 이들이 누군가를 환영하듯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복도를 미친 듯이 뛰어가서 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학생들이 외쳤다.

“왕이시다!”

외치는 소리에 앤드류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커졌다. 

‘왕이 오셨다고?’

앤드류도 창문으로 급히 향했다. 지금까지 학교에 왕이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이 학교에 재학하던 중에도 졸업식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이 학교에 따로 온 적이 없었다. 물론 조지가 입학을 했을 때에도 오지 않았다. 그런 왕이 불시에 학교를 방문한 것이다. 

학교 측은 당황을 넘어서 경악을 했다. 왕을 맞이하기 위해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교장과 이사장 모두가 갑자기 나타난 왕을 맞이하기 위해 급히 밑으로 내려왔을 때 왕을 태운 차는 교정 안으로 느리게 들어오고 있었다. 

다시 못 볼 구경거리에 유리창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학생들은 검은색 세단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모습에 환호성을 질렀고 앤드류는 이미 자리를 선점한 아이들 때문에 뒤에서 틈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멈췄다. 이제 내리려는 듯?”

“두 대가 왔네? 이거 뉴스에 나오나?”

대화 소리를 들으며 덩치가 산만 한 녀석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던 앤드류는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앤디. 이리 와 이리.”

명당이라 불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한 제임스가 앤드류가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다시 한번 참우정을 느끼며 얼른 합류한 앤드류가 고개를 내밀었고 타이밍이 좋았는지 때마침 왕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많지 않은 수의 가드를 데리고 대동한 국왕은 곤색의 단정한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언론을 통해 볼 때와는 다르게 제법 수수한 차림이었다. 단발의 흰색 머리는 염색을 하지 않았으나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웨이브가 들어간 단발은 잘 고정되어 있었고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왕이 차에서 내리더니 얼굴 한번 보겠다고 달라붙은 학생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어제 그 난리가 났는데 가만히 넘어갈 리는 없었다지만…….”

환호성이 터져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제임스의 말이었다. 아마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왕이 왜 학교에 왔는지. 파파라치 일이 터진 것은 학교 내에서 소문도 빠르게 돌았다. 신기할 만큼 학생들은 사건의 경위를 제법 잘 알고 있었다. 

일을 수습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내려질 것이란 생각은 다들 했지만 그게 왕의 행차일 것이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이것은 경고의 의미였다. 왕실이 이만큼 조지의 신변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언론사들은 조지에 대해 가십을 쓰는 데 전보다 주저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조지의 후견인이면서도 한걸음 뒤에 물러서 있던 왕실이 이제는 조지를 비호하기 위해 전면으로 나설 의양이 있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있었다.

“조지다!”

얼떨떨하게 왕을 보던 앤드류는 그 앞에 선 조지를 발견했다. 왕을 봐서 어딘가 들뜬 사람들과 다르게 조지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차분한 태도였다. 익숙하게 왕의 수행원들의 인사를 받는 것을 보니 새삼스럽게 조지가 전 공주의 아들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같은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을 하다 보니 조지가 슬슬 익숙해졌던 앤드류는 왕의 앞에 선 조지가 조금 낯설게 보였다. 유난히 허리가 꼿꼿하게 느껴졌다. 

사실 조지도 왕의 등장은 조금 의외였다. 낮은 굽을 또각거리며 다가온 왕은 자신의 손주 앞에 서더니 다정하게 손을 토닥인 다음에 조지의 볼을 아프지 않게 잡아 늘렸다. 

“할미를 봤는데 표정이 왜 그렇게 얼음장이야.”

“갑자기 오신다고 하시니까.”

“그럼 더 반가운 얼굴을 해야지.”

“할머니, 좀 놓고.”

악력이 좋은 왕 덕분에 조지의 볼이 붉어졌다. 왕이 웃었다. 조지는 익숙한 듯 제 볼을 문지르고 왕을 끌어안았다. 

“직접 오실 줄은 몰랐어요.”

“내가 어떻게 오지 않을 수 있겠니. 네 그 말을 듣고.”

왕은 즐거워하고 있었고 조지는 조금 민망했다.

“에디한테는 그렇게 전화도 잘하면서, 왜 나한테는 전화도 안 하고.”

“바쁘시니까요.”

“내 핑계는.”

왕은 전 공주와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조지를 사랑스럽게 살피더니 왕은 뒤를 돌아봤다. 자신을 반기는 학생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순간 교정이 떠나가라 환호성이 울렸다.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그동안 못 한 네 할머니 노릇 좀 해 볼까. 그동안 너무 널 외면한다며 나보고 야박하다는 사람들에게 좀 보여 줘야지.”

“네?”

“뭐라더라. 나보고 피 한 방울 안 나올 철의 왕이래. 철의 노인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노인이 되니까 노인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왕이라 참 다행이란다. 철의 노인이 아니라 왕이잖아. 왕. 그래도 너한테 듣는 할머니는 좋으니까 걱정 마렴.”

왕은 학교를 한번 쓱 눈으로 담더니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교사진을 보았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어 조지의 팔짱을 끼고 걸으며 왕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우선 인사부터 우아하게 건네 볼까.”

왕은 교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말 그대로 우아했다.

그날 하루 학교는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일단 수업은 진행이 되어야 해서 학생들과 교사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지만 교정은 묘한 설렘과 긴장으로 술렁였다. 어딜 가나 왕 얘기뿐이었다. 왕은 교사진과 함께 학교 시설을 돌아봤다. 시찰 의도는 아니라고 밝히면서도 왕은 조지가 생활하는 곳을 둘러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수업 도중에도 왕이 학교에 왔다는 것을 넷으로 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진과 동영상 모두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장을 둘러보는 왕, 수영장을 둘러보는 왕, 조지와 포옹하는 왕, 이라는 제목으로 실시간 중계가 됐고 덕분에 나라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비공식 방문은 곧 온 나라가 알게 됐고 많은 말들이 쏟아졌지만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렇게 왕이 학교를 다 돌아봤을 때 시간은 점심이었다. 이왕 온 김에 학생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가겠다는 왕의 말에 학교 측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으나 거절은 하지 못했다. 따로 자리를 만들겠다는 말에 평소대로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왕은 조지와 식당으로 동행했다. 메뉴를 고르고 줄을 서서 계산까지 마친 왕은 조지의 맞은편에 앉아 상기된 얼굴을 했다.

“내 학생 시절이 생각이 나서 재미있구나. 이젠 기억도 흐릿하지만 말이야. 그땐 식당 음식이 정말 끔찍하게 느껴졌었지. 지금은 좀 괜찮나 먹어 볼까?”

빵에 잼을 발라 먹은 그녀는 여전히 맛이 별로라며 웃었다.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기운은 폭풍과 다름없었지만 왕과 조지 단둘만 태연했다. 왕은 조지와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다가 힐끔거리며 자신을 보는 학생들을 둘러보더니 허리를 숙여 속삭이듯 물었다.

“그 학생은 어디에 있니?”

“네?”

“네 룸메이트 앤드류 말이야. 어떤 아이인지 궁금한데.”

“얼굴 아시잖아요. 성격도 아실 거고…….”

조사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에 왕은 웃었다. 알아도 굳이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조지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말했다.

“조지. 그건…….”

“알아요. 제 걱정으로 그러신 거. 그런 거로 마음 상하지 않아요. 제가 감수해야 할 일에 불평하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할머니가 많이 신경 쓰고 계시는 것도 잘 알아요. 제가 원하지 않으면 내색하지 않으시잖아요.”

“그거라도 해 줘야지.”

씁쓸함이 묻어나는 왕의 말에 조지는 식당 안을 살펴보곤 말했다.

“앤디는 없어요.”

“앤디?”

“네. 여기 안 올 생각인가 봐요.”

“아무래도 왕인 나를 별로 안 좋아하나 보다. 다들 날 보겠다고 저렇게 모여 있는데. 혹시… 왕실 폐지를 주장하니?”

“……안 물어봤어요.”

“그래? 나중에 내가 물어봐야겠다. 보고 싶었는데. 앤디를 말이다.”

그녀는 짐짓 아쉬운 투로 말했다. 식사를 끝낸 다음에 수업 종이 울리기 전까지 왕은 조지와 정원을 걸었다. 봄기운이 완연했다. 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길을 걷던 왕은 어느 정도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조지. 가서 에드워드에게 몇 시에 출발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오렴.”

“제가 가면 혼자 계실 텐데요.”

“괜찮아. 잠시 혼자 있어도. 설마 이런 곳에서 누가 날 저격하겠니?”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괜찮아. 위험하면 MI라도 나타나겠지 뭐.”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지 조지는 폰으로 연락을 하려 했으나 왕이 극구 말리며 보내 버렸다.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다고 사라지는 조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왕은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후원을 둘러봤다. 

오후 수업이 시작하기 전임에도 학생들이 적었다. 아마도 어느 정도 통제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휴식을 만끽했던 왕이 조지와 함께 걷다가 발견한 갈색 머리통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학생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는지 통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엄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국왕 폐하께서 오신 건 오신 건데, 무슨 사인이야! 아 정말. 인증 샷은 무슨 인증 샷! 그러다 나 왕실에 끌려가. 조지? 안 친해. 안 친하다니까. 뭐? 엄마 막 왕실 특공대가 나를 잡아가길 바라는 거지? 아. 끊어요. 끊을게요. 수업 시작했다! 끊을게!”

무슨 인증 샷이냐면서 투덜거린 앤드류가 전화를 끊고는 뒤돌았다가 왕을 보고 기겁했다. 

“으억!”

“정말 내 손주랑 안 친해?”

어머니와 전화를 하느라 뒤에서 누가 접근하는 줄도 몰랐던 앤드류가 놀란 얼굴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로 왕을 봤다. 왕은 미간을 구겼다.

“답이 없네. 내 손주랑 안 친하니?”

“아. 아. 아니요. 안 친한 건 아닌데요.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그게?”

“친… 친해요. 친합니다.”

“그래? 그럼 됐다.”

만족스러운 표정의 왕을 앞에 둔 앤드류는 혼란스러웠다. 오전 내내 피해 다닌 왕을 이렇게 마주친 것도 당혹스러운데 그녀가 혼자라는 것이 더 놀라웠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고 앤드류는 정적 끝에 말했다.

“폐, 폐하. 안녕하세요.”

딱히 할 말이 없어 건넨 인사가 어색했다. 스스로도 민망해서 인사할 타이밍은 아니었나 싶었는데 왕이 웃으며 받아 줬다.

“그래. 안녕, 앤디.”

“애, 앤디요?”

“내 손주가 널 그렇게 부르니 나도 그렇게 부르려고 하는데. 안 되겠니?”

앤드류가 홀린 듯 고개를 저었다. 

“펴… 편하신 대로, 부… 부르세요……. 폐하.”

“다정하기도 해라, 앤디. 놀랐지 뭐니. 조지가 널 앤디라고 부르고 있는 줄은 몰랐거든.”

“저기 근데… 혼자세요? 조지는요? 수행인들은요?”

“손주랑 데이트하고 싶다는 핑계로 가드들은 뒤로 물렸고, 마침 너를 발견해서 이번엔 너랑 데이트할 생각으로 조지는 잠깐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다.”

“네?”

“그러니까. 조지가 올 때까지 나랑 있어 주렴.”

앤드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대답도 필요 없다는 듯이 벤치에 앉기를 종용하는 왕 탓에 앤드류는 얌전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자세가 절로 공손해졌다. 자세뿐만이 아니라 숨 쉬는 것도 공손했다. 앤드류는 등줄기로 흐르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안 됐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이 나라 국왕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화는 어머니셨니?”

“아! 네. 네. 저희 엄마가… 그…….”

“인증 샷 찍어 줄까?”

“아,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이번에 사진 찍어 가면 엄마는 나중에 더한 걸 요구할 거예요.”

“더한 거?”

“조지를 집에 데려오라든가. 뭐 그런 거요.”

“그럼 안 되니?”

“되나요?”

“내 허락이 필요해?”

“아! 아아… 아? ……아아!”

“와. 아. 라는 소리 하나로 네가 납득하는 과정을 구경했구나.”

“아! 아 그러네요!”

왕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아이라면서 작게 소리까지 내며 웃는 왕을 보며 앤드류는 바보 같은 자신의 행동에 민망해서 멋쩍은 얼굴을 했다. 왕족을 옆에 두고 앉아 있어 마음이 편하지 않아 웃음이 어색했다.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왕은 웃음을 거둔 뒤에 앤드류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기자에게 맞았다고 들었는데.”

“아, 네. 여기…….”

볼을 슬쩍 가리키는 앤드류는 식은땀이 줄줄 나는 것 같았다. 

“이런. 아팠겠구나.”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제 동생한테 맞은 것보다 덜 아팠어요.”

“그래. 동생이 있다고 했지. 이름이 제인이라고 했던가.”

그 말에 앤드류의 눈동자가 긴장으로 물들었다. 왕은 앤드류가 말하지 않은 동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조지가 말했나? 짧은 순간 생각했지만 조지가 말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 성실한 녀석이라 자신에 대한 정보를 그 누구에게도 넘길 리가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녀가 조지도 말하지 않은 앤드류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것은 위치 덕분일 것이다. 

그래. 그녀는 왕이었다. 정보 기관을 따로 둔. 

앤드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 이 나라의 권력의 최정점 중 하나인 왕이라는 사실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왕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감추고 있는 비밀까지. 

“눈동자가 선하게 생겼구나. 네 동생도 비슷하니?”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앤드류가 정신을 차렸다. 애써 웃었다.

“아, 아뇨. 저는 엄마를 닮았고 동생은 아빠를 닮아서 약간 붉은빛이 돌아요.”

“조지는 아빠를 닮았는데. 보이지? 내 공주는 내 눈동자를 닮았거든. 조지는 사파이어 빛에 가깝지.”

왕은 자신의 올리브색의 눈동자를 가리키며 웃었다. 

“어떠니, 나는?”

“네?”

“내 눈동자도 선해 보이니?”

의도를 알 수 없는 물음에 앤드류는 왕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이 깊었다. 연륜이 묻어 있었다.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어? 이런. 최대한 선한 얼굴을 했는데.”

실망스럽다는 말투였지만 표정은 온화했다. 앤드류는 눈가에 주름이 깊게 파인 왕을 보았다. 

“왕좌라는 게. 선하기만 해서는 지켜지지 않는 자리라고 알고 있어요.”

“…….”

“그래서 더 고통스러운 자리라고 늘 저희 부모님이 말씀하셨어요. 선함을 좇으며 사는 삶이 편하다고 하셨거든요. 그건 가치 있는 것이니까.”

그 말을 가만히 듣던 왕은 인자하게 웃었으나 부드러운 미소는 아니었다. 

“그래. 너희 부모님은 왕실 폐지를 주장하셨지.”

앤드류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왕은 웃었다.

“나름 유명하셨던데.”

“아… 어… 어…….”

나름 어디서 유명했는지 앤드류는 잘 알았지만 그걸 여기서 말할 수는 없었다. 혼란스러워서 뇌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부모님의 과거를 앤드류가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왕실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신 건 맞았다. 차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왕실도 사라져야 한다고 아직도 가끔 말씀을 하시긴 했다.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서 저항 의식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라 약간 괴짜라는 소리도 듣는 부모님. 그런 부모님을 왕은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러시니?”

“어. 제가 알기론, 아직도 공주님 짱 팬이세요.”

그 말에 왕은 웃었다.

“내 딸이지만 대단했지. 왕실을 폐지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내 딸을 좋아했으니까 말이다.”

“네! 그러세요!”

이거면 대충 넘어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왕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물었다.

“근데, 그럼 왕인 나는 싫어하시니?”

“…….”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이거 설마 신종 고문인가요? 차마 뱉지 못할 생각을 하면서 앤드류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왕은 사색이 된 앤드류를 보다 물었다.

“왜 그렇게 겁을 먹니. 꼭 내가 널 어떻게 할 것처럼 보는구나.”

“그게, 그게요.”

“어떠니? 이제 답해 보겠니? 날 싫어하셔?”

“아니요! 좋아하세요!”

“그래? 그럼 너는 어떠니?”

“네?”

“이것도 잘 모르겠니?”

그 물음에 앤드류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 폐하가 선하지 않다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진짜로 아니에요.”

“그래? 안 그런 것 같은데?”

“아니. 아닙니다. 다만 제가 감히 판단할 일이…….”

이미 겁을 먹을 만큼 먹은 앤드류는 이제는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주먹을 파르르 떨면서 앤드류는 자신의 무슨 답이 왕의 심기를 어지럽혔을까 필사적으로 생각을 했다. 그런 앤드류를 바라보던 왕이 부드럽게 웃으며 땀에 젖은 손을 다정하게 다독였다.

“하하. 알았다. 알았어. 놀라지 말거라. 내 손주 친구에게 장난을 친다는 것이… 내가 왕이란 걸 잠깐 잊었구나.”

“…….”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인데 주변 사람들은 농담으로 받을 수가 없지. 내가 잠시 들떠 잊었다.”

“노, 농담이세요?”

전 정말 트집 잡아 저를 끌고 가시려는 줄 알았어요.

차마 왕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삼키며 앤드류가 올가미에서 벗어난 듯이 숨을 쉬었다. 왕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래. 이래서 내 보좌관들이 늘 고생을 해. 나한테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말라고 늘 혼낸다니까.”

앤드류가 눈을 깜빡거렸다.

“비밀이란다.”

“네. 네!”

앤드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앤디. 그 말은 동의한다. 선함은 가치가 있는 것이란다.”

“네. 알고 있어요.”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말이야. 상황이 따라 주지 못해도, 인간은 결국 선함을 따라야 해. 그래서 다행이다.”

“네?”

“조지에게 룸메이트가 생겼다는 건 알고 있었단다.”

본론이 나오자 앤드류는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그… 그 룸메이트가 사실 오메가라는 것도. 아… 아시나요?’

속으로 물었다. 앤드류는 혹시 왕이 이곳까지 온 이유가 자신의 비밀에 관해서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 사건 때문에 왔다고 다들 생각했지만 숨겨진 비밀이 있기 때문에 겸사겸사 오메가인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처리하기 위한 목적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은 왕을 보기 위해 쫓아다닌 것과 반대로 왕을 피해 요리조리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비밀이라는 것이 사실 한 국가의 상징인 왕실의 정보망 앞에 가려질 수 없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잠재적 위험 요소가 되어 학교를 나가 달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강경한 협박은 아니라 하더라도 부드러운 회유 정도는 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알고 있니?”

‘그게 제가 오메가라서 오신 건 아니시겠죠오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밝히고 물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고 앤드류의 머릿속에선 클리셰 가득한 영상이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신분 차이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비련의 연인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 말이다. 재물을 안겨 줄 테니 내 자식과 떨어져 주게나, 라는 회유를 가장한 협박. 그리고 그 협박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의 최후를. 

상대는 왕실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존경받는 왕실. 만약 왕이 알아서 301호실에서 나가라 앤드류에게 직접 말하고 그걸 거절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래. 그날이 오고야 마는 것인가? 암살? 암살인 거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안녕. 학교여. 안녕! 나의 알파 생활이여! 

드물게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는 통에 손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고 있었다. 이대로 포기하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박한 마음으로 설득을 해 볼까 싶었다. 어떤 말로 왕을 설득해야 하나. 아니. 설득이 통할까? 조지를 불러서 삼자대면을 해야 하나? 

“나는… 처음 들었단다.”

‘그러니까 그게. 제가 오메가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는 말은 아니시겠죠.’

이제는 그 앞에서 울고 싶었다. 왕이 하는 말 모두가 자신의 형질에 관한 소리로 들렸다. 고양이 앞의 쥐도 이렇게 떨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점심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먹은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아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오들오들 떠는 모습은 가련하기 짝이 없었고 그런 앤드류를 아는지 모르는지 왕은 말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단다.”

곧 숨넘어갈 것처럼 보이는 앤드류를 본 왕은 빙긋 웃었다. 그게 마치 불경스럽게도 자신을 부르는 천사의 미소처럼 보였다. 이제는 이까지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는데 왕은 말했다.

“이해해 다오. 아무래도 조지의 위치가 있다 보니. 주변에 있는 인물이 위험한 사람인지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단다. 변변하지 못한 보호자라 하더라도 조지에게 벌어지는 일은 알아야 하거든. 그 녀석이 감추고 있는 일도 나는 알아야 해. 그게 선하지 않는 일이란 걸 잘 알지만.”

그래서 이제 저보고 알아서 학교를 나가 달라는 말씀을 하실 차례신가요? 여기가 끝인 건가요? 왕이 뜻을 이루고 학교를 떠나겠다는 예감이 든 앤드류는 선고를 받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설득을 빙자해서 빌어 보자! 

“폐하! 저는!”

“나는 말이다.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어머니이기보다는 왕실의 얼굴이었고 국가의 상징이었다.”

네. 제가 학교를 나가야 한다면… 네? 

앤드류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왕을 돌아봤다. 왕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말했다.

“나는 지켜야 할 게 많은 사람이다.”

“…….”

“조지가 아주 어렸을 때에 나는 그 녀석을 보호할 수가 없었어. 왕실과 척을 지고 살겠다고 성까지 버린 내 딸은… 국민들에게 사랑은 받았지만 왕실 내부에선 그러지 못했으니까.”

“…….”

“그 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언론에서 멀어지길 소망했다. 그녀를 빼앗아 갔다는 그에 대한 여론이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숨어 살기를 바랐고 나는 의식적으로 내 아이의 삶에서 멀어져야 했어. 그 아이가 죽어서도, 묘지를 어디에 둘 것인지 싸움이 일어났을 때에 했던 내 결정에 한없이 부끄러우면서도 나는 티를 낼 수가 없었다.”

“……폐하…….”

회한을 감추지 못하며 왕은 말했다. 

“아주 나중에 조지를 돌보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아주 늦은 뒤였어.”

“…….”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한걸음 물러섰다고 나는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어. 나는 그냥 돌아볼 자신이 없었던 거다. 엄마로서 할머니로서. 내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내 마음속의 죄책감을 돌아볼 자신이 없어서… 조지를 방치했다.”

“…….”

“그건 지금도…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아. 왕인 나는, 조지를 가만히 놔두라고 말할 수가 없어. 온 국민을 사랑하고 품어야 하는 나는 왕실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기도 해서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내 가족만을 지키고 책임질 수가 없다. 왕실의 이익. 국가의 이익으로만 움직이지.”

앤드류는 가만히 왕을 바라보다 말했다.

“조지도 잘 알아요.”

“그래. 잘, 잘 알지. 그래서 더 미안하지.”

“…….”

“그 녀석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어. 나를 원망하지 않았고 그렇게 떠나 버린 자신의 부모도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흥미로 소비하는 이들도 원망하지 않았어. 자신의 몫인 듯 수용하고 받아들였어.”

“…….”

“세간의 평가처럼 어른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투쟁할 이유가 없어. 자신의 권리를 찾을 이유가 없다. 치열하게 삶을 열망하지 않는다. 그저 살 뿐이야. 죽는 순간을 기다리며 의미 없이, 열정 없이 이대로 눈을 감길 바라면서. 마치…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

“나는 그게 늘 안타까웠다. 좋고 싫고를 표현하지 않고 삶에 대한 열정을 소거한 조지가 내게 부탁하는 날이 오기를. 자신의 삶을 위해서 내게 부탁을 하길. 자신의 하루를 지켜 달라고 내게 원하길.”

말하며 왕이 손을 흔들었다. 왕의 시선 끝에는 조지가 있었다. 왕과 함께 있는 앤드류를 발견하고는 조지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앤디. 나는 너를 위해 이 자리에 왔다.”

“네?”

“나는 지금 너를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거란다. 너를 내 뒤로 숨기고자.”

“…….”

“내 손주의 오늘을 지켜 주고자.”

앤드류가 왕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조지를 한동안 바라봤다.

“앤디, 어떻게 여기 있어?”

“전화하고 있길래 내가 붙잡았지.”

조지는 왕과 앤드류를 번갈아 봤다. 대화 내용이 궁금한 듯 보였다. 

“앤디. 정말 인증 샷 필요 없니?”

“아, 아니요! 하나 찍어 주세요.”

앤드류가 서둘러 휴대폰을 꺼냈다. 왕은 진작 그럴 것이지. 라면서 앤드류의 옆에 바싹 앉았다.

“조지. 조지도 이리 오거라.”

왕의 손짓에 머뭇거리던 조지는 앤드류의 옆에 가서 앉았다. 최대한 밀착을 한 세 사람이 웃었다.

사진을 찍은 뒤 왕은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한다며 일어났다. 얼결에 동행하게 된 앤드류는 조지를 바라봤다. 곤욕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앤드류를 보며 조지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녀는 차에 오르기 전에 조지의 볼에 입을 맞췄다.

“금요일 저녁에 오는 거 잊지 않았지?”

“알아요.”

“주말은 나와 보내야 한다.”

“그것도 압니다.”

“기다리고 있으마. 그리고, 앤디?”

아까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아서 혼자 심각하게 생각 중이던 앤드류가 화들짝 놀라 왕을 돌아봤다. 

“변함없이 조지와 사이좋게 지내 주렴.”

지극히 할머니의 얼굴로 하는 부탁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떠났다. 

오후 수업은 제법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한바탕 쓸고 간 폭풍에 다들 탈력을 느꼈는지 소동을 이어갈 체력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앤드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 인증 사진을 전송한 뒤로 한동안 통화를 해야 했다.

“엄마, 방금 사진 전송.”

‘앤디! 앤디! 엄마 지금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어떻게 사진을 찍었어? 안 된다며! 세상에 왕과 조지와 같이 사진을 찍다니! 세상에! 우리 아들! 너 그 학교 안 갔으면 어쩔 뻔했어!’

절대 못 보낸다고 강경하게 굴 때가 아주 먼 과거인 것처럼 어머니는 기뻐했다. 앤드류가 웃었다.

“언제는 왕실 폐지해야 한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건 거지! 얘가 공사 구분이 안 되네!’

이게 공사 구분할 일인가? 의문이 갔지만 앤드류는 묻지 않았다. 흥분한 어머니는 한동안 아들의 자랑스러움을 말했다. 다시 수업 들어가야 한다는 말로 겨우 통화를 끊은 앤드류는 수업 준비를 하다가 문득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어쩌면 조지와 처음으로 같이 찍은 사진일지 몰랐다. 왕도 함께였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왕의 옆으로 앤드류는 조금 겁에 질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옆으로 조지도 함께였다. 

“웃은 거 맞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것 같았다. 폰에 들어갈 기세로 눈을 바싹 붙이고 확인하는데 엄마의 메시지가 왔다.

[조지도 웃고 있네. 그래도 명심해. 조지도 알파다. 조심해!]

역시! 웃은 거 맞지? 앤드류가 가벼운 마음으로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해가 질 무렵에 기숙사로 향하려던 앤드류는 조지를 발견했다. 앤드류를 기다린 것 같았다. 함께 걷기 시작했고 인적이 조금 드문 곳에 도착하자 조지가 물었다. 

“할머니가 아까 뭐라고 했어?”

정원을 걷다가 고개를 든 앤드류는 조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냥 너랑 친하게 지내라고 말씀하셨지 뭐.”

“그래?”

“그래. 진짜 놀랐어.”

“나도. 그럴 줄은 몰랐지.”

조지의 동의에 그가 따로 부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한 거야? 뭐라고 한 거야?”

뭐라고 했기에 왕이 자신을 위해 이곳에 왔다 갔을까. 아마도 앤드류가 숨기고 있는 진짜 형질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 왕이. 

“별말 안 했어.”

“…….”

“아마 당분간 별다른 일은 없을 거야. 할머니가 학교에 오셨으니 당분간 나나 왕실을 향해 나쁜 기사는 쓸 수가 없을 거라는 얘기야.”

“아…….”

“걱정하지 마. 네가 졸업할 때까지 나 때문에 정체가 밝혀지고 그런 일은 없게 할 테니까.”

다독이는 말투에 앤드류는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수업 시간 동안. 아니. 그보다 훨씬 예전부터 앤드류는 조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 질문이 있는데, 물어도 돼?”

“뭘?”

“네가 밤에 무슨 꿈을 꾸는지. 악몽 말이야. 무슨 악몽인지.”

“…….”

“묻지 마?”

“이미 물어 놓고.”

그래도 혹시 조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질문은 아닐까 앤드류는 조심스러웠다. 조지는 말했다.

“사실 잘 기억은 안 나. 여러 가지라. 꿈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파편처럼 떠오르는 것도 많아. 실제 있었던 일도 있고. 없었던 일도 있어.”

“없었던 일? 뭐… 귀신 같은 거?”

조지는 그 말에 잠깐 웃고는 괜히 제 손을 봤다. 그 손길에서 초조를 엿본 것 같은 앤드류는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침묵은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 주고 있었지만 조지는 떨리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나는 가끔. 아니 사실 자주 생각했어. 떠올렸어. 아마도 내가 죽는다면… 교통사고로 죽을 게 분명하다고.”

“…….”

“우리 부모님처럼.”

“…….”

“내가 교통사고로 죽는다는 건 사실 악몽은 아니야. 꿈속에서 망가진 차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내가 느끼는 두려움은 죽는다는 것이 아니었어.”

“……그럼.”

“불러도 오지 않는 것. 내가 죽어 가는 순간에… 이름을 간절하게 불러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 다들 나를 구경만 해. 언제 죽나 하고.”

“…….”

“갈 곳도 없으면서 차를 탄 나를 지켜만 봐.”

잠시 흐른 침묵 끝에 앤드류가 말했다.

“나도 가끔 꿈을 꿔. 워낙 꿈을 안 꾸는 체질이지만.”

“……넌 무슨 꿈인데.”

“기억이 흐려. 흐린데… 아마 겨울 바다를 구경하러 갔던 날일 거야. 너무 추워서 사람이 아무도 없던 날. 생각보다 기온이 더 낮았거든. 나한테 바다는 늘 즐겁고 행복한 곳이라 상관없었는데 엄마랑 제인은 아니었나 봐. 결국 엄마한테 잔소리 먹고 몇 시간 만에 집에 돌아가기로 결정해서 근처 식당에서 맛없는 밥 먹고 투덜거리다가 차에 탔었어.”

“…….”

“어린 나는 내 동생이랑 바로 잠이 들었지. 한참 도로를 달리는데 내가 중간에 한 번 깼어. 그때가 가끔 생각이 나.”

“…….”

“차 안에서 나는 방향제 냄새. 조용한 라디오 소리. 엄마와 아빠의 대화 소리. 집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대화 내용. 내 옆에서 잠든 내 동생의 숨소리… 차에 가득한 밤공기 냄새에 창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별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한 부분이거늘 그때가 종종 떠올랐다. 

‘여보, 힘들지? 내가 운전할까?’

‘아니야, 괜찮아. 우리 이따가 커피 좀 마실까?’

‘내 거 좀 남았는데 마셔. 그러게 집에 있자니까. 어, 앤디 왜 안 자?’

‘앤디 안 자? 피곤할 텐데? 아들 왜 안 자?’

‘화장실 가고 싶어? 아니야? 과자 먹을래? 아니야? 라디오 소리 높여 줄까? 이것도 싫대. 볼이 빵빵한 것 봐. 내 아들이지만 귀여워.’

‘나 닮아서 그래. 여보. 메리 여사. 가서 우리 마티니 한 잔씩 하자. 앤디랑 제인은 코코아 주고.’

약간의 피로와 졸음이 녹아들어 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앤드류는 창 너머를 바라봤었다. 맑은 하늘 위에 별이 한가득 수놓아져 있었다. 빤히 바라보던 앤드류가 창문을 열고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검고 푸른 하늘색에 물든 구름이 걸려 있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하늘은 얼마 전에 보았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을 떠오르게 했다. 왠지 모르게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웠던 그 그림을 생각하며 앤드류는 추운 공기에 입김을 뿜으면서도 웃었다. 

그게 왜 그렇게 행복하고 특별한 기억이 됐을까. 

“추운데 창문을 열었다고 혼나서 다시 닫은 별거 없는 기억인데… 그게 참 행복했어. 그 순간이 좋았어. 차가 밀려도 좋았고 밀리지 않아도 좋았어. 집까지 돌아가는 도로는 설렜어. 편안했어. 그래선가… 가끔 생각도 나고 꿈에도 나와.”

“…….”

“무섭지 않았어. 두렵지도 않았어. 나는… 나는 돌아갈 곳이 존재했으니까. 어디를 떠나도 상관없었어. 돌아가면 됐으니까.”

소복이 쌓인 일상들 가운데에 행복이 있다. 스치듯 지나가는 오늘의 짧은 순간도 별 이유 없이 특별해질 수 있다. 소중한 사람이 함께 있다면. 돌아갈 사람. 기다려 줄 사람. 함께해 줄 사람. 함께 웃어 줄 사람. 함께 울어 줄 사람.

그 모든 것이 오늘을 살아감에 귀중한 원동력이 된다. 오늘을 기대하게 만든다. 설사 오늘이 조금 실망이라 하더라도 내일을 꿈꾸게 해 줬다. 삶의 투지를 잃어버린 조지. 내일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이 그저 외톨이고만 싶은 조지. 그런 조지를 앞에 둔 앤드류는 말했다. 

“조지.”

“응.”

“네 꿈 너머에 내가 있을게.”

“…….”

“그러니까 무사히 건너서 날 보러 와.”

“…….”

“내가 있을게. 나는 꼭, 그렇게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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