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머리통을 끌어안은 손은 힘을 풀 생각이 절대 없어 보였다. 장단 맞추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앤드류는 조지의 돌발 행동에 적절한 대응을 못 하고 있었다.
“앤디. 많이 아팠구나.”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손길이 자꾸 의식이 됐다. 귓가에 조지의 호흡이 느껴졌다. 의식하지 말자는 생각은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서로를 알고 있었으니까.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밀려 올라왔다 빠져나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는 살짝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는 손길에 앤드류는 숨을 멈췄다. 소름이 돋았다. 얼굴 바로 앞에 있는 조지의 어깨를 보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연기에 심취한 것인지 걱정을 감추지 못하는 눈동자를 아무 생각 없이 눈에 담았다.
조지의 체취와 페로몬이 뒤섞인 체온이 느껴졌다. 숨이 떨리는 것을 들킬까 봐 숨을 삼킨다. 서로를 이루는 것의 감촉을 잘 안다. 체온이 어떤지. 심장이 어떻게 뛰는지. 만지는 손길이 어떤지. 땀에 젖어 달뜬 숨을 내던 붉은 내 볼을 네가 어떻게 어루만졌는지. 그때의 손길이 지금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무언가를 만지는 행위가 너는 그토록 조심스러운 아이라서. 그래서 내가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홀리듯 조지를 바라보던 앤드류가 조지의 옷자락을 잡았다. 힘을 주어 자신에게로 당기려 하던 때였다.
“거기, 무슨 일이니? 왜 그래?”
“헉!”
멀리서 나는 소리에 앤드류가 정신을 차렸다. 교정을 가로지르며 학교 관계자들이 서둘러 달려오고 있었다. 앤드류는 조지를 잡아당기려 했던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인상을 구겼다.
‘나 방금 뭐 하려고 한 거야?’
기자는 이동하는 내내 자신은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어필했다.
나쁜 의도는 없었고 어쩌다 학교에 들어와서 앤드류에게 출구가 어디냐고 말을 건 것뿐이라는 거짓말을 쉼 없이 쏟아 냈지만 믿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가드들에게 잡혀 보안실까지 꼼짝없이 끌려온 기자는 종종 사나운 눈동자로 조지와 함께 앉아 있는 앤드류를 보았지만 앤드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는 길만 물었는데 저 학생이 휴대폰을 뺏어서 그런 거라니까요.”
“듣자 듣자 하니까 무슨 변명이 그렇게 창의성이 없어요?”
“이봐 학생!”
“아저씨. 아저씨 휴대폰에 무슨 사진들이 가득한지 그새 잊었어요?”
앤드류가 품에서 폰을 꺼내 흔들었다. 증거가 여기 있는데 발뺌을 할 생각이냐는 시선에 기자는 말했다.
“그러니까요. 이 학생이 제 폰을 훔쳤다니까요. 제가 현장을 딱 잡아서 쫓아간 건데 다들 오해를 하신 겁니다. 네? 저는 도둑질당한 거예요.”
기가 막힌 소리에 앤드류가 혀를 차고는 명함을 꺼냈다.
“제가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에 저 사람이 말을 걸었어요. 명함을 주더라고요.”
앤드류가 내민 명함을 보안 요원들이 확인을 했고 분위기는 험악하게 흘러갔다. 기자는 잠깐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뻔뻔하기로 작정을 했는지 말했다.
“제가 명함을 준 걸 누가 봤어요? 저 학생이 명함도 같이 훔친 거면요?”
“…….”
“제가 떨어트린 명함을 보고 내가 기자인 것을 알았고. 내 휴대폰에 기사와 관련된 사진이나 글이 있을지 모르니까 훔칠 마음을 먹은 거죠.”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앤드류가 도둑질을 했다고 몰아가는 뻔뻔함에 앤드류는 기겁을 했다.
인간 실격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라니!
“이런 애를 감싼 겁니다, 조지가. 조지, 친구 잘 만들었다?”
갑자기 기자는 조지를 끌어들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목표는 오직 조지였으니까.
조지는 기자를 바라볼 뿐 별 반응이 없었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었다. 기자의 도발에 조지가 반응을 보이면 좋은 기삿거리 제공해 주는 것뿐이니까. 앤드류의 걱정 어린 눈빛을 마주한 조지는 눈썹을 으쓱였다.
“저 정돈 양호해. 어떤 파파라치는 어머니 얘기까지 꺼내면서 화를 유도하거든.”
“……뭐?”
“아. 그것도 저 잡지사인가?”
“이런 미친 새끼가!”
공주의 사고까지 들먹여서 애 앞에서 그랬단 말이야? 이런 후안무치한 것들!
당장 의자를 집어 던질 기세인 앤드류를 겨우 조지가 진정시켰다. 별일 아니라는 태도였는데 앤드류는 그게 더 속상해서 이를 박박 갈다가 입 안이 다친 것을 깨닫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아으으, 하면서 볼을 감싸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통증을 잊으려고 숨을 크게 들이쉬는데 기자가 말했다.
“제가 조지 사진을 찍으려 한 것은 맞아요. 휴대폰에 조지 사진? 있습니다. 저 말고도 다른 기자들도 많아요. 언론인으로서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기자에게 출입 금지가 어디 있습니까? 출입이 금지된 곳에서 얼마나 구린 일들이 가득한데요.”
기가 차서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도 기자는 말했다.
“학교 규칙에 위반되는 일은 했을지언정 법적으로 잘못 한 일은 없습니다.”
“날 때렸잖아요.”
“꼬마야. 모르겠니? 나는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방어를 한 거야. 알겠어?”
술술 내뱉는 것은 막힘이 없었다. 이런 일에 처한 경험이 많은 사람처럼 대응이 능숙했다. 경멸과 혐오를 담아서 바라보는 시선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이 얼굴에 보통 철판을 깐 것이 아니었다.
기자가 저렇게 뻔뻔한 이유도 있었다. 형사 처분까진 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파파라치나 기자가 학교에 침투를 해도 가드들이 쫓아낼 뿐 소송까지 가는 일은 없었다. 만약 구실을 찾아 소송을 한다 해도 처벌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인생에 별 타격을 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왜요? 문제 있어요? 있으면 조지… 왕실에 전화라도 해. 왕실 사람들 좀 만나 보게. 나 국왕 만나나?”
또 조지를 도발하고 있었다.
만약 조지가 연락을 하면 어떤 기사를 쓸 것인지 뻔했다. 악의가 가득한 사람이니 어떤 식으로 왜곡할지 모르는 일이다. 있는 일도 감추고 없는 일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다행히 아직까지 조지가 반응이 없었다. 속에서 불이 나는 앤드류는 그런 조지가 대단해 보이면서도 마음이 쓰였다.
어떤 말들을 들었기에 이렇게 미동도 없을까.
들은 적도 없다는 듯이 시선도 안 주고 있는 태도가 단단한 만큼 이런 도발이 많았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지를 빤히 보던 앤드류가 기자를 한번 노려보고는 자신의 폰을 꺼냈다.
“왕실 사람들이 나설 필요 없어요. 아저씨가 나를 아주 물로 보시네. 쯧쯧.”
앤드류의 폰. 입장하십니다.
경건한 얼굴로 폰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고 파일을 찾으며 앤드류가 말했다.
“내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아저씨 붙잡고 이런저런 말을 한 줄 알았어요? 우리 엄마가 말하기를 듀라한이 네 목을 가져가려 하면 너는 그 녀석의 가랑이 사이를 노리라고 했거든요. 그냥은 안 당한다 이거지 내가. 여기 있다.”
씨익 웃은 앤드류가 녹음 파일 재생 버튼을 눌렀다. 살짝 잡음이 나온 뒤에 기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제대로 된 사진. 허울뿐이지만 작위를 가진 이들의 자식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립 학교. 그것도 알파 전용 학교니 알 만하지. 약 같은 건 안 해? 이상한 모임들도 있을 텐데. 혹시 조지가 한다면 현장을 찍어 주고.’
여기까지 듣던 기자가 당황해서 일어나 폰을 뺏으려 했지만 보안 요원이 막아 세웠다. 앤드류는 볼륨을 더 키웠다.
‘오메가들과 파티 같은 것도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짧게나마 동영상이면 좋겠고. 왜. 알잖니. 별일 다… 있을 거 아니야.’
‘아. 그런 거.’
‘그래. 그런 거. 제대로 된 사진을 찍어 오면… 네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돈을 주마. 평생 용돈 걱정 없이 살 만큼의 돈을.’
‘아저씨. 폰이요. 연락처 입력하려고요.’
‘폰 번호 적는 거 맞아?’
‘메일도 적느라.’
녹음은 여기서 끊어졌다. 파일을 듣던 이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기자에게 향했다. 이를 벅벅 갈고 있는 기자를 가소롭게 보던 앤드류가 보안 요원들에게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폰은 저분이 직접 주셨습니다.”
“근데 왜 도망갔어? 어? 도망을 왜 가. 도둑이니까 도망을 가지이. 내가 잠깐 줬지? 갖고 도망가라고 줬어? 어?”
“그건 제가 사진을 못 찍어 준다고 하니까 화가 나서 때릴 것처럼 달려와서 도망친 거예요.”
“네가 먼저 나를 약 올렸잖아!”
“사진 못 찍어 주겠다고 말씀드리니까 눈을 이렇게 뜨면서 달려들었거든요. 저거 보세요. 딱 저런 얼굴로. 그런데 어떻게 도망을 안 가요? 따귀 한 대로 안 끝났을지 몰라요. 덩치는 산만 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어요, 전.”
진심이라고 고개까지 끄덕인 앤드류는 이거 보라면서 맞은 곳도 보여 줬다.
“이거 봐요. 이거! 입 안도 까지고. 피 터지고! 조지가 중간에 도와주지 않았다면 전 응급실에 있을걸요.”
약한 목소리로 말하며 조지를 힐끔 바라봤다.
‘연기. 들어오세요.’
눈빛을 쏘아 댔더니 조지가 말했다.
“미안하다. 앤디… 나 때문에…….”
목소리 좋고. 눈빛 좋고. 근데 이번엔 ‘우리 앤디’가 아니라 그냥 ‘앤디’네? 앤드류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조지 네가 왜. 우리의 진실한 우정을 시험에 들게 한 저 인간이 나쁜 거지.”
아련한 목소리로 저희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 두말할 것도 없이 우정이 지극한 모습이라 모인 사람들 모두가 납득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기자를 향해 비난의 눈길을 쏟아졌고 기자는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소리를 지르며 앤드류가 앉은 의자를 발로 차려고 했다. 가드들에게 바로 제압당해서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거 봐요. 저러는데 일단 도망치고 봐야죠! 그리고 저 사람이 매수한 학생이 몇 명 있어요. 최소 네 명이요. 보세요. 저 기자한테 제 정보를 넘긴 애들.”
“뭐?”
그 말에 조지가 당황해서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널 알고 접근한 거야? 그냥 걸린 게 아니라?”
“응. 나에 대한 정보도 받았나 봐. 기가 막히지? 나도 어이없어 죽는 줄 알았어. 우리 학교에 이렇게 배신자가 많을 줄이야.”
“…….”
“제가 조지 룸메이트라는 걸 알고 접근했어요.”
그 말에 조지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적당히… 적당히 하면 안 됩니까?”
참고 참다가 뱉은 말은 상상도 못 한 종류의 것이라 모두가 조지를 봤다.
조지는 조금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악몽을 꿀 때만큼 고통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앤드류는 지금 조지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았다. 감정을 밖으로 보이면 타인의 흥밋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운 조지는 그 어떤 감정도 쉽게 내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아주 조금의 괴로움만 표현하고. 그 마저도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가 뭘? 이게 내 잘못이야?”
잘못이라고는 없다는 태도는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네가 공주의 아들인 게 내 잘못이야?”
방금 전까지 뜨거웠던 분노가 싸늘하게 식었다. 누구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조지의 옆에 앉아 있던 앤드류의 시선에 조지의 손이 보였다. 잘게 떨리고 있었다. 문득 생각을 했다.
잡아 주고 싶다고.
세상에 기대서 쥘 것 하나 없다는 듯이… 텅 빈 것을 움켜쥐고 있는 조지의 손이 너무 애처롭게 보여서. 잡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앤드류는 손을 뻗었다.
앤드류의 손이 조지의 떨리는 손 위에 내려앉았다. 조지의 손을 부드럽게 쓸어 준 앤드류가 시선을 맞추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지.”
“……앤디.”
손을 내밀어 준 앤드류가 웃으며 말했다.
“저 기자 새끼 야동 취향이… 궁금하지 않아?”
“뭐?”
감동 먹을 뻔했던 조지가 황망한 얼굴로 앤드류를 봤다.
“나 알아.”
“……뭐어어?”
씨익 웃는 앤드류의 얼굴은 사악했고 조지는 얼이 빠졌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이 대목에서 기자의 야동 취향을 말하다니.
도무지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인데 저렇게 상큼한 얼굴로 걱정 말라는 듯이 손을 다독여 주니 묘하게 믿음도 갔다. 앤드류의 생각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았다.
‘손해는 안 봐. 그게 뭐든 간에.’
제임스의 말은 사실이며 상황은 여기서 끝난 것이 절대 아니다.
‘도대체 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니. 무서운 거라는 건 없는 건가?’
기자와 맞설 필요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조지는 앤드류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듀라한보다 더 악독한 것들이 자칭 펜대를 잡은 작가란 사람들 아니던가. 조지가 엉거주춤 일어났지만 앤드류의 입이 훨씬 더 빨랐다.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관리실로 향하는 기자의 다리 사이를 정확히 노렸다.
“그러다 다쳐요. 병원 가요.”
“난 기자야. 이런다고 내가…….”
“아니요. 아저씨 취향 얘기하는 건데요.”
“뭐?”
그 말에 다들 싸늘해졌다. 조지도 마찬가지였다. 앤드류가 검지로 기자의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그러곤 느리게 빙글빙글 돌렸다.
“그건 좀… 위험해 보이던데. 직접 하는 건 아니죠?”
“뭐… 뭐, 너 뭐라는 거야!”
사색이 된 기자를 향해 방긋 웃어 보이며 앤드류가 말했다.
“걱정이 돼서요. 그게… 그게 그렇게 되나? 아니 그게 말이에요.”
“그게 뭔데?”
듣던 관리인들이 묻자 앤드류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거 말이에요. 그거… 그게… 그게 그렇게… 되나?”
“뭐, 뭐라는 거야 이 자식아! 닥쳐!”
“아니. 취재 나오는 와중에도 야동을 보시는 그 정력은 인정하는데요…….”
“조용히 안 해! 무슨 헛소리 하는 거야? 너!”
“이… 이만했나? 아니. 이만했나?”
얼굴이 시뻘게진 기자가 그만하라고 악다구니를 썼지만 이미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는 앤드류에게 향해 있었다.
도대체 뭐가 이만했는데?
의문을 담은 눈동자들은 초롱초롱했고 관리실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기자의 가랑이 사이로 모였다. 다들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중에는 조지도 있었다. 난데없이 야동 취향 하나가 까발려지는 수치를 당한 기자는 얼결에 무릎을 모았다. 다리 사이를 손바닥으로 엉거주춤 감추는 데 최선을 다하는 꼴에 관리인들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앤드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이런 게 들어가는 줄 처음 봤네……. 이게 더 두껍나? 이만했던가……. 아저씨, 이거보단 작았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조용히 안 해?”
매직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묻는 앤드류는 천진하기 그지없었다.
“와. 기자님 표정 보니까 이만한 것도 넣어 보셨나 보다. 으으. 안 아픈가?”
“너, 너, 너 내가 가만둘 줄 알아?”
“와. 이 와중에 해 본 적 없다는 말씀은 안 하신다.”
“뭐, 뭐? 새파랗게 어린놈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내가 누군데 나한테 이런 짓을!”
“그리고 기자님. 왜 저한테 화를 내세요? 제가 뭐 어쨌다고? 저는 아저씨의 요도구 건강을 염려해 준 것뿐인데!"
“너 이 새끼가!”
“이제 그만 당신의 소중한 요도구 확대를 멈춰 주세요!”
침묵이 맴돌았다.
“요도… 구.”
조지의 낮은 목소리만 울릴 뿐, 누구 하나 말을 쉽사리 못 뱉었다. 다들 바쁘게 돌아가는 상상에 홀려서 기자의 다리 사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질색을 했다. 곧이어 모두의 시선은 방금 전에 앤드류가 들고 있던 매직으로 향했다.
“이만한 게?”
“진짜?”
관리인들의 의문에 앤드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말했다.
“나는 정말 걱정이 돼서 그래요! 의사한테 가서 물어봐요. 의사도 걱정된다고 말할걸요?! 피오줌 싸면 어떻게 해!”
“이 새끼! 너 내가 가만 안 둘 줄 알아!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누구긴 누구야! 성인병 걱정되는 아저씨지! 걱정해 줘도 난리야!”
뒤늦게 폭발해서 난동을 부리는 기자와 건강 걱정해 주는 건데 뭐가 문제냐고 덩달아 악다구니를 치는 앤드류 때문에 관리실은 난리였다. 뒤늦게 정신 차린 관리자들이 기자를 끌고 다른 곳으로 들어갔다. 수치와 모멸감에 물든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 절대 가만 안 둘 거라고 욕을 퍼붓는 소리가 사라지자 앤드류가 손을 탈탈 털었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당해 봐야 지가 한 짓이 얼마나 더러운 일인지 알더라. 꼭 저런 짓 하는 사람들이 자기 사생활은 금이야 옥이야 해.”
기자가 사라지고 난 뒤에 관리실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침 삼키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적막이 맴도는데 앤드류가 조지를 돌아봤다.
“조오지이?”
앤드류의 표정이 의기양양했다.
‘복수했다! 어떠냐? 나의 복수가!’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방금 벌어진 상황이 워낙 생각과 상식 밖의 일이라 혼란을 담아서 앤드류를 우두커니 바라보던 조지는 칭찬을 기다리는 게 분명한 앤드류를 보다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 사진 넘긴 애들 찾으려다가 우연히 봤어. 떠억하니 있더라고. 그러니까 폰은 남한테 함부로 빌려주면 안 돼. 폰은 소중히 해야 해.”
큰 교훈을 얻었다면서 앤드류가 자신의 폰을 챙겼다. 조지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아무 말이 없었다. 조지의 반응을 살피던 앤드류는 방금 전에 기자가 조지의 부모님을 들먹인 것이 역시 상처였나 싶어서 조지의 어깨를 다독였다.
안타까움을 막을 방법이 없었는데 조지에게서 끅끅, 이란 이상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울음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묘하게 귀에 걸리는 소리에 앤드류가 손길을 멈추고는 조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는 머리도 살짝 들썩이고 있었다.
“조지…….”
너도 쌓인 게 많았구나. 그럴 만하지. 생각하며 앤드류가 들썩이는 조지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지. 그냥 크게 웃어.”
“크흡. 큽. 어떻, 크흡…….”
조지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참았다. 배를 붙잡고 온몸을 떨며 웃으면서도 참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얼굴까지 시뻘게져서는 소리를 목으로 삼키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앤드류가 별안간 조지의 등을 아프게 후려갈겼다. 갑자기 벌어진 폭행에 억, 하는 소리를 터트린 조지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관리실에 조지의 웃음소리가 가득했고, 한 건 했다는 생각에 앤드류는 흐뭇했다.
기자에 대한 처분은 학교 측에 맡기기로 했다.
학교 규칙을 위반했지만 형사 처분은 힘들어 보인다고 보안 측은 설명했다. 다만 신문사에 학교 차원의 항의를 할 것이고 보안을 강화해서 차후에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말에 조지와 앤드류는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수용했다.
“앤드류. 부모님껜 우리가 연락을 드릴까? 네가 폭행으로 처벌을 하고 싶다면…….”
보안 요원의 말에 앤드류는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학교를 통해 연락을 하면 조지와 룸메이트란 것이 밝혀질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저희 부모님. 저 맞은 거 알면 엄청 속상해하실 거라……. 제가 잘 설명할게요.”
학교를 통해 연락을 하면 불필요한 정보까지 넘어갈 수 있었다.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을 하다 보면 현재 조지와 룸메이트란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따지고 보면 조지와 같은 방을 쓰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에 보안 요원들은 부모님에게 알리는 건은 앤드류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그러나 혹시 개별적으로 일을 진행할 생각이라면 학교 측에 말은 해 달라고 했고 앤드류는 고개를 끄덕이곤 기다리던 조지와 함께 보안실을 나섰다.
“으어.”
문을 닫고 나오자 거친 숨소리가 터졌다. 허리를 축 늘어트린 앤드류는 피곤한 하루였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고아고. 하는 소리까지 내는 앤드류를 지켜보던 조지가 대신 가방을 들어 줬다. 자연스럽게 가방을 넘긴 앤드류가 목을 빙빙 돌리며 걸었다.
그 상황에서 태연한 척했지만 스트레스가 아주 없을 수는 없었다. 난생처음 기자와 마주쳤고 그런 일을 당했으니 뒤늦게 탈력이 몰려오는 것도 당연했다. 터덜터덜 걷던 앤드류와 조지가 복도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정신없이 흘러간 하루가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병원 가야지?”
“병원?”
조지는 앤드류의 얼굴을 살폈다. 많이 아프게 맞은 것은 아니지만 한쪽 볼은 이미 조금 부어올랐다. 아마 멍도 들 것이 뻔했다.
“병원까지 가야 하나?”
“입 안도 다쳤잖아.”
“그렇기는 한데 시간도 늦었고 진료 시간 끝났잖아.”
“일단 응급실로 가.”
“뭐 그렇게 할 필요까지?”
“가. 덧나면 고생해.”
이번엔 양보가 없을 듯이 병원에 꼭 데리고 가야겠다는 의지가 묻어나는 말투에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던 앤드류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조지에게 약한 게 분명했다.
“알았어. 가서 치료받고 올게. 간 김에 진단서도 떼지 뭐.”
혹시 몰라서 증거물을 만들어 둘 생각이었다.
“너무 늦지 않으려면 바로 출발해야 해. 가자.”
“너도 가게?”
“그럼 혼자 가게?”
앤드류가 아주 당연하게 혼자 갈 생각을 한 것처럼 조지는 아주 당연하게 같이 갈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조금 충격받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조지를 물끄러미 올려다본 앤드류가 말했다.
“뭘 같이 가. 혼자 가도 돼. 많이 다친 것도 아니고. 걱정할 것 없어.”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니며 사실 부상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조지를 귀찮게 만들지 말고 혼자 다녀올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조지가 말했다.
“내가 불편해?”
“뭐?”
앤드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랑 나랑. 우리 서로 베프라고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연기까지 했지만 편함과 불편함을 논할… 그런 사이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생각은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어서 설명을 하라며 눈빛으로 다그치는 조지를 마주하던 앤드류가 한숨을 푸욱 쉬었다. 분명히 자신은 조지에게 약했다. 어쩐지 이제 자신은 정말로 조지와 한패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니. 진작 한패였나.
“내 말은 네가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빨리 갔다 올 수 있다 뭐 이런 거지.”
“내가 네 다리라도 잡아끌고 가?”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아니면 뭔데? 나한테 화난 것도 아니고. 내가 네 다리 잡아끄는 것도 아닌데?”
말투가 삐딱했다. 투덜거리며 하는 말에 억울함도 살짝 묻어 있었다. 자신의 단어 선택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을 하던 앤드류는 순간 이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나는 밖에 또 뭐가 있을 줄 몰라서 그랬어.”
“밖에?”
“그래. 다른 파파라치가 있을 수도 있고. 나갔다가 너 알아본 사람이 너 귀찮게 할 수도 있고…….”
앤드류 딴에는 조지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학교 내부에 침투한 기자도 있지만 학교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파파라치가 없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 혹시나 외출을 했다가 조지가 봉변을 당할까 봐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인데 뱉고 나서 앤드류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조지의 표정이 눈에 보일 만큼 굳었기 때문이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알았어.”
“…….”
“조심히 갔다 와. 치료 잘 받고.”
말하는 조지는 평소와 같아 보였다. 하는 말도 통상적이었다. 그런데 앤드류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조지를 두고 가는 느낌이 드는 걸까?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가 없는데도 아주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갔다 오라고 말하고는 뒤돌아 기숙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독 작게 보였다. 방금 전 기자를 마주했던 조지의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앤드류를 알아보고 일부러 접근했다는 말에 유난히 비틀거리던 눈동자를. 무심코 손을 내밀어 잡아 주고 싶을 만큼 안타까웠던 눈동자를.
결국 결심한 앤드류가 가로등 밑을 걸어가고 있는 조지를 향해 큰 걸음으로 걸어갔다. 단숨에 조지의 옆에 자리 잡았다. 멈칫해서 자신을 보는 조지의 눈동자에 가득한 자신을 보며 말했다.
“좋아. 같이 가.”
“…….”
“대신. 그러고는 못 가.”
함께 기숙사로 향했다.
병원은 같이 가더라도 이 모습으로 갈 수는 없다는 앤드류의 의견에 조지는 두말없이 따랐다. 조지는 침대에 걸터앉아 분주하게 옷장을 뒤지는 앤드류를 관찰하고 있었다. 모자를 가져온 앤드류가 조지의 머리에 모자를 씌우고 서랍을 뒤져서 찾은 마스크를 쓰게 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건 더 수상해 보이는데?”
“그래?”
“누가 봐도 조지야.”
나 수상해요. 수상한 사람은 바로 조지입니다.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모자를 벗기고 다시 씌우고. 마스크를 줬다 뺏고. 그러느라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외출 한번 같이 하기 힘들다고 투덜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옷장을 뒤진 앤드류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촌스러운 옷을 찾았다.
“이 정도는 입어야 네가 조지란 생각을 못 하지. 목 늘어난 티에. 빛바랜 체크 셔츠에. 아빠가 입을 것 같은 베이지색 면바지!”
“…….”
“너드의 정석이지! 음화화. 자, 입어.”
겨우 옷을 찾아 조지에게 갈아입으라 말하고는 화룡정점이 필요하다며 앤드류는 방을 나갔다. 잠시 뒤에 뭔가를 손에 들고 나타난 앤드류는 옷을 입은 조지를 보고 인상을 썼다.
“왜? 뭐가 문제야?”
“문제는 네가 조지라는 게 문제인 거 같다.”
내가 입으면 바로 이 학교의 너드는 바로 저예요. 할 옷차림이 조지가 입으니까 왜 다른 건지?
밉게 바라보면서 앤드류가 가져온 검은 뿔테 안경을 조지에게 건넸다.
“안경도 쓰라고?”
“그럼 뭐 하러 가져왔겠어.”
“이거 도수 없는 거네.”
“응. 그 녀석도 시력이 좋은…….”
시간을 확인한 앤드류가, 안경이 불편한지 테두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조지를 돌아보곤 흠칫 놀랐다.
“그 녀석?”
“…….”
“앤디?”
“어, 어. 왜.”
넋 놓고 바라보다 정신이 들었는지 시선을 피하는 앤드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조지가 물었다.
“이건 어디서 났어.”
“제임스 방에서 가져왔어.”
“제임스?”
“그 녀석 예전에 만난 오메가의 이상형이 수학 잘 푸는 알파였거든.”
“…….”
“걔도 멍청하지. 수학을 잘 푸는 알파지… 잘 풀게 생긴 알파가 아닌데. 걔는 심지어 어울리지도 않았어. 한 달 만에 차였다지.”
“……이거 꼭 써야 해?”
“써.”
단호한 답에 안경을 벗으려던 조지의 손이 얌전히 내려갔다. 앤드류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준비를 서둘렀다.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둘이 기숙사를 나설 때엔 이미 어둠이 짙게 내린 뒤였다. 기숙사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니 인기척이 뜸해졌다. 소란스러운 학생들의 소리가 사라진 자리가 맞은편에 있는 큰 도로의 차들이 내는 소음으로 채워졌다. 조명이 반짝이는 어두운 거리에 괜히 코를 한번 훌쩍인 앤드류는 갑자기 어색함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조지와 외출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늘 학교와 기숙사에서만 얼굴을 마주치다가 밖에 나왔는데 생각보다 어색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그런가.
도시에 내린 어둠의 냄새가 괜히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흔들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옆에 있는 게 자연스러웠던 존재가 굉장히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장소의 변화는 참 많은 감정의 변화를 가져왔다. 묘하게 떨림이 느껴졌다. 지난 며칠의 이 시간과 오늘의 이 시간이 아주 많이 다른 것 같았다. 불빛이 요란한 거리를 우두커니 보다가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에 서서 조지를 몰래 바라보는데 조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랑 외출하는 거 처음이네.”
“그러네.”
“……좀 이상하다.”
그리고 조지의 그 말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조지도 자신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어졌다.
“그러니까. 되게 이상하다. 저녁이라 그런가?”
“그런가?”
“뭔가 좀 신도 나고?”
“왜 웃어?”
“네가 먼저 웃었잖아.”
“난 외출 나와 좋아서 웃었는데?”
“그럼 나도 그래서 웃었나 보지 뭐.”
실없는 소리를 나누는 동안 앤드류는 조지와의 외출이 생각보다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색한 공기가 많이 누그러졌고 때마침 택시가 도착했다.
“진단서요?”
“네.”
병원에 도착해 진료를 시작하자마자 앤드류가 꺼낸 본론이었다. 진단서를 뗄 수 있겠냐는 말에 의사는 그렇게 심한 상처는 아닌데 필요하냐고 물었다. 어쨌든 맞았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줄 것이 필요했다. 손에 입은 상처도 필요하냐는 말에 앤드류는 그건 필요 없다고 말했다.
“다행히 바느질할 만큼은 아니네요. 아무는 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한창때니까 금방 나을 겁니다. 어쩌다가 손바닥을 이랬을까. 조심해야지. 옆에 있는 친구랑 싸웠어요? 칼부림이라도 했나?”
“네? 아, 아니요. 이 친구는 제 보호자 자격으로…….”
“알아요. 알아. 농담이에요. 나도 오늘 뉴스 챙겨 봤어요.”
“네?”
“뉴스에 칼부림 얘기는 없었어요.”
의사의 눈빛과 말을 보건대 조지를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앤드류는 자신의 상처가 어떤 경위로 생긴 것인지 설명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억측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일이니 미연의 방지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의사가 말했다.
“방수 팩을 붙여 주겠지만 장시간 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 게 절대 좋지는 않겠죠? 볼은 아이스 팩으로 찜질하면 가라앉을 겁니다. 볼에 난 상처와 입 안에 난 상처는 소독 후 연고를 발라 주시구요.”
말이 빨라서 앤드류와 조지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경청했다.
“지금 응급 환자가 있어 치료는 간호사가 해 줄 거고요. 소독하고 약 바르면 되는 간단한 치료니 간호사가 저보다 상냥하고 친절하게 잘해 줄 겁니다. 치료받으시고 가실 때 진단서 받아 가시구요. 그리고, 보호자분.”
갑자기 조지를 부르자 정신을 못 차린 앤드류가 뒤를 돌았다. 보호자라는 말에 잠깐 멈칫한 조지가 의사와 시선을 맞췄고 의사는 일어나며 말했다.
“팩 갖다 드릴 테니까 친구분 찜질 좀 도와주세요.”
그러고는 사라진 의사의 뒷모습을 보던 앤드류가 말했다.
“설명해야 하나?”
“안 해도 돼.”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정말 괜찮냐고 몇 번을 확인한 앤드류가 느껴지는 시선에 뒤를 돌아봤다. 데스크에서 바삐 움직이는 간호사들과 응급실 환자들이 곁눈질로 조지를 살피고 있었다. 의심은 확신이 됐다. 아이스 팩을 갖다 주고 조금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떠난 간호사의 태도를 보건대 모두가 조지를 알아봤다. 시선을 차단할 목적으로 커튼을 친 앤드류가 조지를 살폈다.
다행히 불편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병원까지 오는데 무슨 생각이 많은 것인지 별말도 없었던 조지는 병원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약간 기분이 내려간 듯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눈치를 보면서 아이스 팩을 부어오른 볼에 대려는데 조지가 손을 뻗었다.
“도와줄게.”
“굳이 그럴 필욘 없는데.”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굳이 나서는 조지가 다가와 아이스 팩을 뺏었다. 거절을 할까 생각했던 앤드류는 전투의지를 상실한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맘대로 하라는 듯 얌전히 굴자 조지가 손을 뻗어 앤드류의 고개를 받치고는 조심스럽게 붉게 부어오른 곳에 팩을 올렸다.
“으으…….”
“아파?”
“아니. 차가워서.”
“나 때문에 괜한 일 겪었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조지의 말이 진심임을 설명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과를 받게 된 앤드류는 아이스 팩의 온도에 구겨졌던 얼굴을 풀고는 조지를 돌아봤지만 조지는 눈을 맞추지 않았다. 잔뜩 굳은 얼굴에 가득한 것은 죄책감과 수많은 생각이었다. 앤드류는 방금 전에 관리실에서 굳어 있던 조지를 떠올렸다.
“너도 나 때문에 괜한 일 겪고 있는데 뭐…….”
“…….”
“나 때문에 너도 고생이 많아. 병원까지 같이 와 주고……. 철없는 나 단속도 시키고.”
그 말에 팩을 움직이던 조지의 손이 멈췄다. 앤드류의 고개를 받치고 있던 손도 뻣뻣하게 굳었다. 이상함에 앤드류가 조지를 올려다봤다.
“왜… 왜 그렇게 봐?”
조지의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묻는 말에 대답도 없이 앤드류만 바라보고 있는 조지의 표정은 심각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의문을 담고 있는 것도 같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긴장이 몰려왔다. 침묵이 둘 사이를 가득 채웠으나 열기가 올라왔다.
앤드류의 볼을 감싸고 있던 조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볼을 쓰는 행위에서는 다분히 성적인 의도가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엄지손가락이 볼을 어루만졌다. 앤드류가 멈칫하다가 손을 뒤로 뻗어 시트를 단단히 붙잡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저 볼을 조금 만져 준 것이 전부인데 긴장이 몰려왔다.
“조지?”
겨우 뱉었다. 시선을 피하고 싶어서 고개를 돌리려 하는데 조지가 허락을 안 했다. 조심스럽게 볼을 잡아 돌리는 손길에 다시 조지와 눈을 맞추게 된 앤드류는 그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너, 왜, 왜 이래?”
“아팠지?”
조지는 엄지손가락으로 앤드류의 입술을 쓸었다. 약간 거친 입술을 쓸고 가는 손가락에 창피함과 함께 저도 모르게 아랫배가 요동쳤다. 앤드류의 시선이 어지러웠으나 조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금의 미동도 없이 집요하게 앤드류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에 갇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도톰한 입술은 말라 있었다. 건조한 곳을 손가락으로 쓸더니 살짝 밀어 넣은 조지가 앤드류의 치아를 살짝 더듬었다. 앤드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입술이라도 깨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버틸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사이 벌어진 입술 틈으로 조지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위기감을 느낀 앤드류가 조지의 손목을 잡았으나 그뿐이었다. 괜찮다고 다독이는 손길에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앤드류는 조지를 밀어내지 못했다.
조지의 손가락이 입천장을 가볍게 쓸고 지나가자 소름이 몰려왔다. 피가 살짝 고여 있는 입 안을 조지가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으.”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볼이 얼얼할 정도의 통증은 있었다. 아픈 표시를 냈지만 조지는 망설이지 않았다. 찢어져 붉게 부어오른 볼 안쪽 살을 손가락으로 더듬을 뿐이었다. 액이 고여 목울대를 울렁거리던 앤드류의 눈에 천천히 물기가 돌았다.
정신은 하나도 없고. 조지가 만지는 곳은 아프고. 그런데 그만하라는 말은 못 하겠고. 몸은 떨리고. 생각은 퍼지고. 형질을 제어하는 것이 힘들었다. 몸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는데 막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페로몬을 열 것 같은 상황에서 조지만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소독하고 연고만 바르면 된다고요?”
커튼 바로 뒤에서 간호사가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소리가 났다. 정신을 차린 앤드류가 조지를 다급하게 밀어내곤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침으로 잔뜩 젖은 제 입술이 너무 적나라했다. 조지가 스치고 간 입술에 열이 몰려 있었다.
“우리 앤디. 지난밤이랑 반응이 너무 다르네.”
간호사가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속삭이는 것이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입이 얼얼했다. 그날과 비슷했다. 조지의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오느라 벌어졌던 입이 후끈거렸다.
“환자분?”
조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앤드류는 자신을 부르는 간호사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튼을 치고 다가오는 간호사에 조지가 뒤로 물러섰으나 앤드류에게 향한 시선은 변함없었다. 간호사는 모르는 긴장감이 이곳에 가득했다.
여운에 숨이 잘게 떨렸다. 애써 갈무리를 하며 작게 숨을 내쉬는 사이에 간호사는 앤드류의 상처를 살폈다. 손을 확인하고 입 안 상처를 보기 위해서 입을 벌리라는 말에 앤드류는 조지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상처를 확인하게… 환자분?”
재촉에 앤드류는 살짝 몸을 비틀었다. 조지의 시선은 아무래도 부담이었다. 조지를 등지고는 아- 하고 입을 벌리자 유심히 상처를 살핀 간호사는 통상적인 위로의 말을 꺼내다가 불현듯 앤드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이 있네요?”
체온이 지나치게 높았다. 안 그래도 화끈거리는 몸을 알고 있던 앤드류는 간호사의 말에 전보다 더 올라오는 열을 느꼈다. 죄지은 아이처럼 움찔거렸다. 몸이 뻣뻣하게 긴장됐다.
“아니요. 없는데요? 열 없어요.”
지금 이 상황에서 열이 있다고 하시면 제가 많이 민망한 상황이거든요.
간호사에게 사정 설명을 할 수는 없어서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효과는 당연히 없었다. 간호사는 단호했다.
“아니긴요? 체온이 높은데. 열 있어요.”
“저 되게 멀쩡해요. 완전 평상시랑 똑같은 정상… 어…….”
떼쓰는 아이를 혼내듯 말한 간호사는 앤드류의 말을 듣지도 않고는 체온계를 가져온다고 황급히 데스크로 향했다. 간호사를 잡으려다 타이밍을 놓친 앤드류는 마른침을 삼켰다. 열이 오르게 한 당사자는 바로 자신의 뒤에 있었다.
‘왜 조지와 이곳까지 함께 왔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체온이 올랐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조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태도를 보일지 가늠이 안 됐다. 혹시 다쳐서 열이 올랐다고 이해를 할까? 생각하는데 킥킥거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분명 조지의 것이었다.
“웃어?”
이게 지금 웃을 일이야?
황당해서 조지를 바라봤다. 자신은 떨리는 숨도 들킬까 봐 작게 숨을 내쉬고 있는데 지난밤을 운운한 당사자는 작게 웃고 있었다. 어마 무시한 배신감이 몰아쳤다. 허무를 감추지 못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는데 조지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이게 웃겨?”
“네가 당황하는 게 재미있어.”
잊고 있었다. 이 녀석 성질머리가 이랬지. 짧게 반성한 앤드류가 조지를 밉게 봤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알아. 나 때문이잖아.”
“…….”
“그래서 더 즐거운 건데.”
와, 저 성질머리 봐. 앤드류는 오소소 올라오는 솜털을 느꼈다.
잠시 뒤. 병원을 나온 앤드류는 무척 지쳐 있었다. 필요 없다고 극구 사양하였으나 직업 의식이 투철한 간호사님 덕분에 결국 해열제까지 받은 앤드류는 자괴감을 느꼈다. 상실감도 들었다.
조지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럴 리가 없는데……. 손바닥이라면 내 손바닥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치료받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 자신의 생각과 일이 아주 많이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기숙사에 돌아와서 첫날 알았지만 이건 또 다른 국면이었다.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구상에서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 하나일 것이다. 조지가 사실은 여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세상천지에 앤드류 하나일 것이다!
“앤디. 택시 잡아야지.”
이제는 애칭으로 부르는 게 당연하다는 듯 부르고 있었다. 위화감도 없었다. 부르는 사람이 저렇게 태연하게 부르니 듣는 사람도 당연하게 들렸다. 앤드류는 지금까지 자신이 조지의 페이스에 마구마구 휩쓸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지가 입술을 만지게 내버려 둔 나는 도대체 뭔가? 왜 저 녀석을 거부할 수가 없지?
도무지 멈추지 않는 생각이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이런 앤드류를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아도 상관없는 것인지 앤드류보다 조금 앞서가던 조지가 뒤를 돌았다. 조지는 순진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묻는 목소리는 소년의 것 같았다.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이 보는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순진 그 자체일 것 같았다. 그러나 앤드류는 그 안에 자리한 것이 여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입 안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만지더니 잊으려 했던 그날 일을 굳이 꺼내 펼치고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저 녀석. 네가 가장 큰 문제야!
“앤디?”
그리고 내가 문제다.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 좀 봐. 내 이름이 앤드류라 다행이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귀에 감기는 목소리에 소름이 몰려왔다. 홀리듯 조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조지가 앤드류에게 다가왔다. 거리가 줄어들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앤드류의 머릿속에는 다른 그림이 펼쳐지고 있었다. 귓가에 자신의 이름을 속삭였던 조지.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애가 타서 팔을 등에 감았…….
“야야야!!”
생각이 흘러가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앤드류가 기겁을 했다. 어느새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조지에 앤드류가 손을 올려 막고는 뒷걸음질 쳤다.
“왜 그래?”
무슨 일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조지를 노려보며 앤드류가 거친 숨을 씩씩거렸다.
“너, 너!”
“뭐?”
“너무 가까워!”
“…….”
“그래. 너 너무 가까워!”
봄이 완연한 계절의 선선한 밤공기가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조명에 빛나는 조지의 얼굴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자신의 태도는 설명되지 않았다. 오메가인 자신이 싫다는 주제에 조지가 의식돼서 죽을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조지의 얼굴을 어떻게 본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병원에서 조지의 말을 듣고 난 뒤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땀으로 젖었던 조지의 등을 더듬던 느낌이 생생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시하고 싶지만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무시가 안 됐다. 그러기엔 조지가 너무 가까웠다. 앤드류와 조지. 둘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짧았고 그래서 무서웠다. 방금 손을 피하고 노골적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너무 가깝다고 말한 자신을 앞에 둔 조지의 표정이… 즐거움을 감추지 않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너, 너. 금지야.”
“뭐?”
“그렇게 웃는 거 금지야!”
“…….”
“더 가까이 오는 것도 금지고, 아까처럼 막. 막. 하여간 너 금지야!”
“아까 뭐?”
“아무튼 금지라니까?”
“그러니까 뭐가? 네 입술 만진 거? 네 입 속을 더듬은 거?”
“악! 악! 말하지 마! 금지야 금지! 아까 전 그런 태도도 금지고, 그날 일 꺼내는 것도 금지야! 한 번만 더 그날 일 꺼내기만 해 봐!”
조지가 웃으며 한 걸음 다가오자 앤드류가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열 걸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금지야!”
“우리 앤디는 뭐, 다 금지래.”
“그냥, 네가, 네가 금지야!”
어설프게 화를 내며 걷는 앤드류의 머리 위로 김이 보이는 것 같았다. 조지는 소리 죽여 미소를 흘리며 걷는 앤드류의 뒤에서 지치지도 않게 앤디, 우리 앤디 불러 댔다. 정말 걸어가게? 그냥 택시 타지 그래? 하는 말을 모조리 무시하는 앤드류는 차라리 자신의 귀를 막고 싶었다.
“앤디! 앤디이!”
그래요. 내 이름이 앤디입니다. 귀가 찢어지게 불리고 있는 이름이 바로 내 이름이라지요. 어쩜 저렇게 다른 앤디일까. 완전 안심되는 앤디네요.
조지와 함께 기숙사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탈력을 느껴서 축 처진 어깨를 하곤 무거운 다리를 쿵쿵 옮기는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는 긴장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같은 이름인데도 누가 부르냐에 따라서 이렇게 달랐다.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여유롭게 고개를 들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제임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앤드류보다 두어 걸음 앞서가던 조지는 가볍게 무시하고는 앤드류에게 달려든 제임스는 걱정 가득한 눈빛을 하고는 상처를 살폈다.
“치료받고 온 거야? 얼마나 다친 거야? 이거 봐. 이거 그 새끼가 때려서 생긴 기스야? 와. 이 개새끼. 그 자식은 어떻게 했어? 관리실에서 뭐래? 아주 족을 쳐 준대? 내가 가서 족을 칠까? 다시는 얼씬 못 하게? 아니 어떤 미친놈이 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너를 건드려?”
쏟아 내는 말을 앤드류는 얌전히 들었다. 얼굴을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고. 기자를 욕하면서 주무르는 제임스를 받아 주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는데 조지의 눈빛이 신경 쓰였다. 표정에 큰 변화는 없지만 눈빛이 걸렸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이 없는데 자꾸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자책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1절을 넘어 4절까지 들어 줬겠지만 빨리 제임스를 진정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 새끼는 네 성격을 알고 그랬대?”
“모르고 그랬대. 그러니까 그만 진정 좀 해. 어?”
“내가 있을 때 마주쳤어야 하는데. 아주 작살을 내 줄 텐데. 빌어먹을 훈련.”
아이처럼 징징거리는 것을 받아 주던 앤드류가 제임스를 떼어 냈다. 괜히 조지 눈치를 쓱 살피는데 앤드류의 시선을 놓치지 않은 제임스가 옆에 서 있는 조지를 보고 인상을 썼다.
“너 원래 안경 썼냐?”
“아! 그거.”
앤드류가 재빨리 손을 뻗어 조지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겼다. 잘 접어서 제임스에게 넘겨주니 상황을 파악한 제임스는 오만상을 다 구겼다.
“이걸 왕자한테 하라고 준 거야?”
“잠깐 빌린 거야.”
“그러니까 이걸. 조지한테…….”
“미안. 말해야 했는데.”
제임스의 시선에 조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방금 전까지 어리광을 부리던 제임스는 이 부분에선 아무런 말도 안 했다. 안경을 우두커니 보다가 뭔가 가만히 생각을 할 뿐이었다. 제임스의 침묵을 자신의 허락도 없이 물건을 가져간 이유라 생각한 것인지 앤드류가 미안한 얼굴로 가슴을 두드렸다.
“미안해. 다음엔 말하고 가져갈게.”
그러나 제임스는 대꾸가 없었다. 앤드류가 넘겨준 안경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는 조지를 향해 퉁명하게 말했다.
“되게 안 어울렸어. 다신 쓰지 마.”
“앤디 반응은 그게 아니던데?”
“그게 아니긴 무… 잠깐. 앤디? 앤디라고 불러?”
“어. 나도 앤디라고 불러.”
“네가 왜 우리 앤디를? 앤디. 조지가 너 앤디라고 불러?”
“응.”
앤드류의 인정에 제임스가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을 했다. 그런 반응에 당황한 앤드류가 다가오는데 거부한 제임스가 조지를 봤다.
“저 자식이…….”
살벌한 제임스의 시선에도 조지는 느긋한 얼굴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어색한 앤드류가 제임스 왜 그래? 하면서 물었지만 대꾸 없이 조지만 노려보던 제임스가 심호흡을 하더니 안경을 꺼내 쓰고는 앤드류에게 물었다.
“어때.”
“뭐, 뭐가. 뭘 물어보는 거야.”
“내가 더 낫지? 내 안경이니 내가 더 잘 어울리는 게 당연하지. 안 그래?”
“…….”
“너 왜 답이 없어? 앤디?”
“그러니까 이게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을 고르라고?”
“그래.”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야. 황당한 표정으로 제임스를 보던 앤드류 눈에 조지가 들어왔다. 조지가 엄숙한 얼굴로 앤드류를 보고 있었다.
조지 너마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제임스와 그 옆에서 아닌 척 시침을 떼고 있지만 제임스와 다를 바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는 조지를 마주하고 있는 앤드류는 어이가 없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하고 답을 달라고 오기를 부리는 제임스야 원래 이런 녀석이니 그렇다 치지만. 말리지는 못할망정 조용히 거들고 있는 조지의 표정에 은근한 기대가 묻어 있었다. 앤드류의 입 안에 쓴맛이 돌았다. 답을 대충 예상을 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굳이 말로 듣고 싶은 거지.
“왜 답이 없어?”
앤드류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자 제임스는 배신당한 표정을 했다. 연극배우를 했어도 훌륭했을 녀석인데 왜 적성에 안 맞는다는 풋볼 선수를 하고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지금 고민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 지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말하는 얼굴은 가만히 두면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누가 보면 앤드류가 엄청 나쁜 짓을 한 것이 분명한 표정이었지만 앤드류는 제임스가 한심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온 제임스는 형제와 다름없는 친구였다. 집도 가까이 살았고 학교도 같이 다녔기 때문에 서로에게 비밀이 없는 관계에 가까웠다.
물론 중간에 제임스가 자신을 피하던 시기가 있기는 있었다. 열네 살에 들어서자 엄청나게 키가 자라기 시작하던 제임스는 갑자기 앤드류를 데면데면 대했다. 말을 걸어도 제대로 답하는 법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졌다가 1년이 지난 뒤에야 제임스는 다시 살갑게 앤드류를 대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으니 항상 좋으리란 법은 없다. 그래도 늘 제 옆에 있어 주는 소중한 친구였고 그래서 늘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임스에게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니까.
오메가라고 하면 넌 날 어떻게 볼까?
인생을 함께하자고 제임스는 종종 말했다. 연애도 같은 시기에 하면 좋겠다면서 결혼식도 되도록 같이 올리고 신혼여행도 부부 동반으로 같이 가자는 말을 하던 녀석에게 사실은 내가 오메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밝힐 일이지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관계가 바뀔 수 있었다. 친구라면서 늘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형질로 인해서 변화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만약 제임스가 자신이 오메가인 것을 알고 태도를 바꾼다면 그건 엄청난 상처가 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제임스를 믿었지만 상황이라는 것이 늘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비밀로 하고 있는 사실에 죄책감이 들어 잘해 주고 싶다가도 꼭 제임스가 이렇게 초를 쳤다.
“당연히 나 아니야? 시간 아깝게 나라고, 아!”
안경을 잡아 벗겼다. 제임스는 테가 눈꺼풀을 찔렀다면서 엄살을 부렸지만 받아 주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장단을 맞춰 줬다간 끝도 없었다. 그랬다간 버릇만 나빠지지.
“배신자. 내가 몇십 년 우정인데.”
“유치하게 굴래. 네가 아홉 살이야? 둘 다 되게 별로야. 별로. 하나도 안 어울려. 둘 다. 멍청해 보여 둘 다. 맹꽁이 같다고 둘 다. 제임스랑 조지. 너네 둘 다.”
손가락으로 콕 집어 말했다.
만족스러운 답이 아닌지 제임스와 조지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배신을 당했다며 징징거리는 제임스. 살짝 올라간 눈썹으로 기분이 상했다고 표시 내고 있는 조지. 이 둘 때문에 앤드류는 자신이 지금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치원 진학을 앞둔 것은 아닐까 고민이 들었다.
특히 조지의 반응이 의외였다. 이런 거에 신경 쓰는 거 보면…….
“덩치는 산만 해 가지고. 좀생이들인가.”
그 말에 어마 무시한 충격을 받은 듯 제임스와 조지가 굳었다. 뭐? 할 말 있어? 라는 얼굴로 바라보는데 둘 다 대꾸가 없었다. 여기서 반응을 보여 봤자 앤드류에게 더한 말을 들으면 들었지 고운 말을 곱게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얌전히 있자 제임스가 조지의 어깨를 슬쩍 밀더니 말했다.
“봐. 너 또 기대했지?”
“아니야.”
“아니긴. 이거 순 내숭만 떨지 나랑 좀 비슷한…….”
“또?”
제임스의 말이 익숙했다. 순간 점심시간의 일이 떠올랐다.
“뭐야? 뭐가 또야? 나 가지고 내기했냐? 무슨 얘기했어. 어?”
“아니. 그게 아니라. 절대 아니고. 내가 어떻게 너를 가지고 내기를 해. 나와 조지를 가지고. 나와 조지의 옆자리를 가지고 한 내기지.”
“…….”
“네가 내 옆에 앉을지. 조지 옆에 앉을지, 안 할게요. 넵.”
“…….”
“얘도 은근 기대했어.”
“아니야.”
조지가 부정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꼬리 빼는 거 봐라? 치사하게?”
“너 혼자 한 말이잖아.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네 눈빛이 나한테 말했어. 앤드류는 내 옆에 앉을걸? 하고. 자신감에 찼다가 실망한 게 누군데? 너 방금도 되게 기대한 얼굴이었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니야.”
“진짜 아니야?”
“아니야.”
“안경 나보다 네가 더 잘 어울려.”
“아ㄴ…….”
아니라고 부정하던 조지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조지의 침묵에 제임스는 호들갑을 떨었다.
“와. 와아아. 여기선 반박 안 하는 거 봐. 앤디. 조지가 이런 애였어? 와아. 호감인데? 내가 또 앞뒤 다른 애들을 그렇게 좋아해서.”
말하며 조지의 팔을 툭툭 쳤다. 몇 번 받아 주던 조지가 제임스의 팔을 잡더니 말했다.
“짐. 너 여기서 더 하면 앤디한테 맞을 거 같다.”
무뚝뚝하게 하는 말에 장난스럽게 조지를 건드리던 제임스가 굳어서 앤드류를 돌아봤다.
“넵. 우리 앤디 님. 그만할게요. 나 왕자 마음에 들어. 응.”
“왕자라 하지 마.”
“왜? 듣기 싫어? 그러니까 더 하고 싶어. 왕자같이 생겨서 왕자라는데 왜?”
어깨에 올라온 손이 기분 나쁘다고 치우는 조지였지만 제임스는 웃었다. 앤드류는 한숨이 나왔다. 당분간 시끄러울 일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였다. 부디 별일 없기를 바라고 이마를 누르는데 제임스가 다가왔다.
“어디 봐. 주먹으로 때리던데. 내가 영상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그냥 한 대 맞은 건데 뭐.”
“그냥이 아니던데. 그 기자 손이 엄청 커 보이던…….”
“영상? 영상이 있어?”
무심결에 답하던 앤드류가 영상이란 단어에 놀라 물었다.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이 너 맞은 거 찍었다고 보여 줬어.”
자신과 기자가 실랑이를 벌일 때에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떠올랐다. 묘하게 생기가 도는 눈빛으로 조지를 올려다봤으나 조지는 고요했다.
셋이서 보드게임이라도 하면서 놀자고 달라붙는 제임스를 피로를 핑계로 겨우 물리치고 301호로 돌아온 앤드류는 침대에 앉아 검색을 시작했다. 영상을 찾아볼 생각으로 유튜브를 뒤지는데 조지가 앞에 섰다.
“옷 안 갈아입어?”
“이따가.”
“안 씻어?”
“이따아가.”
“얼마나 있다가?”
“이이따아아가아.”
대충 답하면서 검색을 하던 앤드류가 말했다.
“아직 올라온 건 없네…….”
혼자서 한 말이었지만 같은 방에 있는 조지가 듣는 것이 당연했다. 안 그래도 앤드류가 뭐 하나 구경하고 있던 조지는 영상의 존재를 곱씹는 앤드류의 앞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조금 가까운 거리에 당황한 앤드류를 가만히 바라본 조지가 물었다.
“영상은 왜?”
“누가 올렸을 수도 있잖아. 그럼 우리한테 유리한 상황이니까. 내일 가서 확인을 해 봐야겠어. 혹시 이상한 기사 올리면 반박할 자료잖아.”
“반박할 자료라고?”
조지는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앤드류를 눈에 담았다. 유난히 깊어 보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앤드류는 말했다.
“그냥 물러갈 것 같지가 않아, 그 기자. 나한테 그 망신을 당했는데.”
“그건 나도 동의하는데…….”
“그러니까. 자료가 필요하지.”
앤드류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사소하게 기자를 망신 주기는 했지만 그뿐이다. 누가 한낱 기자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사람들 모두 저마다 비밀이 있고 상처가 있지만 흥밋거리가 되느냐 아니냐는 차이가 있었다. 그걸 이용해서 타인의 사생활을 알 권리를 빙자해 가십으로 팔아넘기는 인간이었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것들이 있음에도. 숨기고 싶기에 더욱 값비싸게 팔린다면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조지가 아무리 전 공주의 아들이라도 모든 것이 중계될 필요가 없다. 게다가 그들은 조지의 생활을 위협하면서도 뻔뻔했다. 자신이 나선다고 그들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앤드류는 작게나마 조지에게 힘이 되고 싶은 마음에 말했다. 어쨌든 이번 사건에서 발생한 유일한 피해자가 자신이 아니던가.
“진단서도 끊어 놨어. 함부로 기사 쓰기만 해 봐. 라이벌 언론사랑 인터뷰해 줄 거야.”
앤드류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이를 벅벅 갈고 있었다. 빈말이 아니라는 것은 조지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앤드류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 마. 앤디. 하지 마.”
조지의 이런 반응은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잘한다며 응원해 주지는 않을지 몰라도 하지 말라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하지 말라고?”
“하지 마. 관리실에서 처리하게 둬. 그걸로 충분해.”
당황한 앤드류를 앞에 둔 조지는 단호했다.
“네가 타깃이 돼. 그러다가.”
“기자가 날 뭐 어쩌겠어. 내가 엄청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나에 대해 악성 기사를 쓴다고 누가 신경을 쓰겠어.”
조지는 타이르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앤디. 네가 숨기고 있는 것을 저들이 알아 버리면?”
“…….”
“사실은 네가 오메가란 것을 저들이 알아 버리면?”
“…….”
“너한테 안 좋은 감정은 이미 생겼을 거야. 그건 어쩔 수 없지만… 여기서 더 하면 안 돼. 너까지 건드리고도 남아.”
“그게, 그 사람들이 그걸 알게 된다고.”
“알게 되면 이렇게 기사를 쓰겠지. 조지 하트. 알파 전용 기숙 학교에서 오메가와 룸메이트.”
“…….”
“난도질당할 거야.”
“…….”
“너를. 너를 비난하게 몰아갈 거야.”
조지는 확신했다.
그동안 기자들을 상대하면서 몇 가지 패턴을 익혔다. 그들은 조지를 비롯해 조지의 옆에 있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몰아가는 것을 좋아했다. 조지의 친구가 사실은 인격 파탄자다. 폭력범이다. 마약범이다. 하는 기사들도 많았다.
확인도 거치지 않고 쏟아 내는 기사들은 조지를 고립시켰다. 그러더니 이번엔 조지가 성격 파탄자다. 외톨이다. 하는 기사들이 나왔고 그 기사들은 크게 흥행하진 못했다.
조지가 우울증이다. 조현병을 앓고 있다. 라는 기사들은 차라리 호응이 있었다. 전 공주의 죽음이 그 아들에게 미친 그늘에 흥미를 느끼는 이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조지의 슬픔을 동정하길 원했다. 조지에 대한 비난은 없었다. 전 공주에 대한 애정과 슬픔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조지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지는 차라리 고립이 편했다. 마음을 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었다. 쏟아지는 비난에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사람들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약점이 가득한 조지는 그래서 기숙사에서도 독방을 쓰고 싶었다. 가능했다면. 가능해야 했는데 조지의 앞에는 앤드류가 있었다.
“난 사랑받았던 전 공주의 아들이니까.”
“…….”
“아직도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공주니까.”
그리고 그 사랑은 조지를 외롭게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많은 애정을 받은 전 공주의 아들이지만 조지는 외톨이였다. 부모님의 보호가 필요했던 어린아이의 삶과 그 후는 완전히 달랐다. 호두 파이 냄새가 가득한 주방에서 아버지의 등에 매달려서 애교를 부리던 그 시절의 조지는 그날을 기점으로 변했다.
나쁜 말을 쏟아 내는 기자는 한둘이 아니다. 처음에는 화를 냈는데 곧바로 전 공주의 교육 방침에 대한 뒷말이 나왔다. 조지가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범죄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전문가들이 나와 분석을 시작했다. 겨우 열 살 넘은 아이가,
‘네 어머니 시신은 봤니? 형태가 어땠니? 알아보겠어?’
묻는 기자의 질문에 화가 나서 달려들었는데 저런 말들을 했다. 어떤 이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사고 후 조지가 정신 불안에 시달릴 수 있다면서 좋은 의사를 만나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한동안 방송으로 외쳤는데 분석가 모두가 유명한 심리학 의사들이었다.
한쪽에선 결혼 생활에 대한 추측성 기사를 마구 쏟아 냈다. 조지가 보인 성향이 공주 탓은 아니니 분명히 부친 문제라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 전 공주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으며 조지의 아버지는 전 공주의 부귀를 노리고 접근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얘기였다. 순진한 공주가 사랑을 속삭이는 말에 넘어가 결혼을 했고 깊이 후회를 했다는 말이었다.
이웃이다. 정말 친한 친구다.
라면서 사실처럼 말을 쏟아 내는 얼굴의 대부분을 조지는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조지의 집에 자주 초대되어 저녁도 같이 먹었다는 점을 강조했음에도 조지의 기억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정말로 저녁 식사에 초대된 적이 있던 사람들은 인터뷰에 나온 적이 없었다.
숨겨진 애인을 자청하는 사람도 많이 나타났다. 전 공주의 숨겨진 내연남이었다면서 관계를 가졌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조지의 친아버지 같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몇 있었다. 이제는 그런 얘기들은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지와 친자 검사를 하겠다고 주장을 하던 이가 있었을 정도며 또 나타날지 몰랐다. 난리도 아니었다.
그때까지 조지는 자신의 사진을 1면에 찍어서 내보내는 기사들에 울었다. 회의감이 몰려왔고 무기력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도 자신의 말에는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자신들의 목적대로 조지가 말하고 행동해 주길 바랐다. 서로 조지에게 다른 것을 강요하는 이들 틈에서 그 어떤 보호도 없이 혼자 버텨야 했던 조지는 자신을 키우겠다고 나선 친척 집에서도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친척이었다.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자청해서 조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친척은 한동안 조지에게 친절했다. 그는 작은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자였는데 조지를 빌미로 왕실과 다리를 만들어 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조지를 맡아 키우는 대신 보상을 원했지만 그가 원하던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는데 문제가 터졌었다.
「조지를 맡은 친척. 사실은 의절한 사이였다?」
「조지의 교육 이대로 괜찮나?」
그들이 조지를 맡아 키울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기사가 났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고 원하던 사업 확장도 실패한 친척은 슬슬 조지를 부담스러워했는데 사건은 나중에 터졌다.
‘너야, 조지? 네가 말했어?’
‘아빠. 아빠 하지 마. 이거 또 기자한테 말하면 어쩌려고?’
그는 분노로 조지를 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조지를 데려온 것을 후회하는 그는 조지에게 손은 못 대고 괜히 옆에 있던 물건들을 집어 던지며 분풀이를 했다. 작은아버지를 말리던 그는 이 집 아들이었는데 얼마 전에 저질렀던 탈선이 언론에 보도되어 원하던 상류 학교 진학이 좌절됐다고 했다. 후회와 증오가 가득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들의 시선에 익숙해질 즈음에 조지는 기숙 학교로 진학을 했다.
모두가 조지를 부담스러워했다. 버거워했다. 그에게 다가온 이들은 자기 편한 대로 동정을 하다가 조지가 생각만큼 불쌍하지 않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떠나기도 했다. 조지는 타인들이 요구하는 자신의 수많은 모습에 절대 부합할 수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달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지를 안타까워했지만 정작 조지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다. 돌아갈 곳이 있다면 왕실 측과 실랑이 끝에 결국 왕실 묘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일반 공동묘지에 안장된 부모님의 곁일 뿐이다.
관심을 끊고. 마음을 끊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스스로를 고립하고. 오늘 이 순간을 스스로 버리고. 내일을 외면하고. 그렇게 살았다. 눈을 감고 자신이 돌아갈 유일한 단 한 곳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만든 자신의 방에 들어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감히 누가 자신이 있는 곳에 들어와 옆에 있겠다고 버틸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지금 눈앞에 앤드류가 있었다. 아주 이상하고 특이한 앤드류가. 오메가면서 알파로 살고 있는 앤드류가.
“자신들의 애정을 지키고, 나를 동정하기 위해… 너를 나쁜 존재로 몰고 갈 거야.”
조지는 확신했다. 그냥 물러설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이번 타깃은 분명하게도 앤드류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앤드류를 추적하는 것이.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앤드류가 상처 입기 전에 301호를 나가는 것이 옳은 일일 수 있다. 늘 그래 왔으니까.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내일 당장 나가는 것이 옳다. 가능하다면. 그래, 가능하다면.
“너한텐… 이런 게 일상이야?”
얼마 만나지 않은 오메가. 자신에겐 절대 알파일 수가 없는 앤드류가 물었다.
아무 말 안 하고 골똘히 생각하는 말을 뱉는 목소리가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물기 어린 따뜻한 목소리였다. 긴 속눈썹 아래에 있는 눈동자는 잘 익은 밤과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자신을 한가득 담아 보고 있는 앤드류의 품에선 상큼한 사과 향이 가득했다.
“오해받고. 아픔이 들쑤셔져도. 해명도 못 하고 비명도 못 지르고.”
“…….”
“그냥 이렇게 너는.”
앤드류가 위험할 수 있다는 말에 정작 앤드류는 조지가 살아온 지난날을 되짚고 있었다. 이제는 억울함도 느끼지도 못하는 조지 앞에서 앤드류는 대신 억울해하고 있었다. 분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면서 입술을 꾹 다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분명했다.
조지는 문득 앤드류를 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품에 당겨서 안고 싶었다.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어 사과 향을 잔뜩 맡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마음을 눌렀다.
“난 괜찮아.”
이게 지금 앤드류의 머리를 채울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에게 적당한 말일까? 하면서도 조지는 그렇게 말했다.
“……이젠 괜찮아.”
그 말에 앤드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조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씻고 싶다며 욕실로 들어가는 것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밤은 깊었으나 잠자리에 들어서도 앤드류도 조지도 잠들 수가 없었다. 생각은 끝이 없었다.
***
한 언론사 사무실의 불은 늦게까지 켜 있었다. 황색 언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이 언론사는 얼마 전에 경영진들이 바뀌면서 사훈을 바꿨다.
「품격 있는 언론!」
사무실 벽면에 걸린 액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보도방침이 바뀌면서 많은 기자들이 물갈이가 됐다. 가십성 기사를 찍어 내던 이들 대부분이 옷을 벗었고 젊은 기자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 모든 변화를 우습게 여기는 그가 이곳에 있었다.
‘언론에 품격이 어디 있어? 철없는 것들이 하는 소리지. 품위 찾으면 특종이 굴러와?’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었다. 사무실 벽면에 걸려 있는 액자에 새겨진 사훈이 보이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 기자가 앉아 있었다. 그 기자는 오늘 앤드류에게 망신을 당한 사람이었다.
한때는 그가 이 언론사에서 가장 넓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도 밀리고 밀려 이제는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들 다음 해고 차례가 이 기자라고 예측했다. 그는 특종에 목을 매며 너무 많은 구설수에 휘말렸고 고소당한 것만 몇 건이었다.
그래도 기자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특종을 만들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에겐 조지가 있었으니까. 동료들 사이에서도 조지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다는 말을 듣고 있는 그는 오늘 당한 굴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앤드류.”
중얼거리던 기자가 폰에 저장된 앤드류의 사진을 보다가 책상을 쾅쾅 두드렸다. 늦은 밤이거늘 아직 사무실에 남아 있던 다른 기자들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봤지만 그는 상관이 없었다.
“감히… 감히…….”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자신에게 망신을 안겨 줬다. 뭐라도 되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앤드류를 생각하며 이를 벅벅 갈던 그는 자신의 기자 수첩을 꺼내 앤드류 스윈턴의 이름을 적었다. 알고 있는 정보들을 작게 적어 갔다.
「이름: 앤드류 스윈턴. 조지의 룸메이트. 조지와 친구.
형질: 아마도 열성 알파
가족 관계: 스윈턴 부부, 여동생 하나.
교우 관계: 좋음. 풋볼 쿼터백과 유난히 친함. 크리스. 토마스. 그 외 다수.
출신 학교: 조사 예정
특이 사항: 특이… 특이… 사항… 특이……」
적던 기자가 수첩에 동그라미를 크게 그렸다. 앤드류의 이름 위로 먹구름이 그려졌다. 기자는 오랜만에 날 선 감각을 느꼈다. 앤드류에 대한 자신의 적대적인 감정과 다른 기자로서의 감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기자가 시선을 올려 데스크 벽면을 가득 채운 조지의 사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뚝뚝한 조지의 얼굴을.
“어떻게 한 거지?”
앤드류는 그 대단한 조지를 움직였다.
‘너. 맞았어.’
‘나 때문에.’
‘그래 우리 앤디. 많이 아파?’
기자는 조지가 보인 반응을 곱씹었다. 그 어떤 악담을 쏟아부어도 단 한 번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조지였다. 한번 울려 보겠다고 부모님에 대한 비방을 해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조지가 처음으로 감정을 내보였다. 자신의 룸메이트 때문에. 그 대단한 조지를 이렇게 감정적이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이 뭘까?
기자가 입꼬리를 말며 웃었다. 그의 눈은 전에 없이 반짝였다.
“너의 뭐가 그렇게 특별한 걸까?”
앤드류의 특별함이 자신을 다시 사무실 중앙에 데려다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