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조지와 함께 등교를 하는 건 조금 어색했다. 대놓고 보지는 않아도 힐끔 쳐다보는 학생들의 시선을 느낄 수가 있었다. 조지도 분명히 느끼고 있을 텐데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앤드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뭐야? 어제 싸운 거 아니었어?”
조지와 함께 걸어가는 앤드류를 발견한 제임스가 달려와 옆에 서더니 물었다.
“싸우다니?”
“영락없이 싸운 줄.”
“싸운… 거라 하기엔…… 싸운 건가.”
뭔가 좀 미묘하지? 마냥 싸웠다고 하기엔?
뭐라 말을 못 하고 어물거리는 앤드류의 앞에 선 제임스가 조지와 앤드류를 살피며 뒤로 걸었다. 위험하다고 앤드류가 타박했지만 제임스는 턱을 만지면서 둘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제임스와 조지는 접점이 없었다. 앤드류가 301호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 조지와 접점이 없었던 것처럼. 앤드류는 심각하게 둘을 소개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것도 웃길 것 같았다. 제임스, 이쪽은 조지야. 조지. 이쪽은 제임스야. 할 필요가 있나. 한 사람은 비공식 왕자인 조지고 한 사람은 이 학교 풋볼 팀 쿼터백 제임스인데. 어차피 이름은 대충 알 거 같은데? 생각을 하는데 제임스가 말했다.
“왕자. 혹시 앤디를 막 학대하고 그래?”
앤드류가 당황해서 제임스를 보는데 제임스는 어느새 조지의 옆에 가서 서서는 말했다.
“짐, 너 지금 뭐라 하는 거야?”
“학대? 앤드류. 너 내가 학대한다고 말하고 다닌 거야?”
“아니야. 그런 말 안 했어.”
“왜 이래. 내숭 떠는 거 봐라. 욕 많이 했잖아.”
“그래, 욕은 했지만 그게 왜 그렇게 연결돼? 그리고 짐. 그만 안 해?”
“나는 네가 걱정돼서 그렇지.”
“그래 알겠는데. 이제 우리 잘 지내기로 했어. 어제 합의 봤어. 그렇지 조지?”
물음에 조지가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어. 라고 답했다. 어느 대목에서 표정이 그렇게 구겨진 것인지 앤드류는 알 수가 없었고 제임스가 말했다.
“조지 반응이 별론데? 앤디 너 며칠 병든 닭처럼 굴었잖아. 갑자기 감기 걸리고. 체력 하면 빠지지 않는 네가 감기? 그리고 왕자 너는 갑자기 수업 중에 쳐들어와서 앤드류 데리고 나가 버리고……. 내가 저녁에 룸에 갔었는데 아무 소리도 없었고……. 둘 다 룸을 비웠나. 늦게 들어온 건가…….”
앤드류가 뜨끔했다. 그날 제임스가 찾아왔던가? 이성이 없었으니 듣지도 못했다. 제임스의 말에 그날이 떠올라 호흡이 거칠어지려 하는 것을 겨우 참았다. 조지가 눈치챘는지 힐끔 보자, 시선을 얼른 피한 앤드류는 제임스의 입을 꿰매고 싶었다.
“어제도 너 보니까 기겁을 하고. 내가 너희 방에 찾아갔을 때 뭔가 긴밀한 대화가 오고 간 것 같기도 했고…….”
“어제 해결했다니까. 이제 우리 친구 먹기로 했어. 친구.”
조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어색하게 웃는 것을 가만히 보던 제임스가 둘을 몇 번 번갈아 보더니 씨익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에 앤드류는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는데 제임스가 조지에게 물었다.
“그럼 둘이 퍽 친해졌다는 거고. 왕자, 너 뭐 아는 거 있냐? 앤드류가 만나는 오메가.”
“뭐어어?”
“……뭐?”��
앤드류는 기겁했고 조지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바라봤다. 제임스가 자신에게 박힌 두 사람의 눈동자를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뭐 아는 거 있구나? 이 반응은 뭔가 있는 거야. 그렇지? 그렇지?”
“으니르그 해자나 이 자슥아.”
제임스가 앤드류의 목에 팔을 걸고는 말했다.
“얘가 얼마 전에 겨우겨우 발현을 했대요, 얘가. 어엿한 알파가 된 몸이라 이거지.”
“알파?”
“그런데 이 자식이 오메가에 대한 상담을 하더라고. 만나는 사람이 있는 거지. 와, 대단해. 내가 이 얼굴로 사고 한 번 칠 줄 알았지. 오메가가 있는 거야. 아니면 왜 궁금하겠어. 어? 세상에… 힛싸가 터진 오메가를 앞에 두고도 아무 짓도 못 한 알파야 얘가. 얘가 이런 앱니다.”
“아무 짓도…….”
“그래. 고자인 거지. 그게 알파냐? 미친놈이지.”
“헉.”
“고, 고…….”
조지는 고, 라고 외마디를 뱉었다. 덕분에 앤드류의 얼굴은 이미 터지기 직전이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 설명을 좀 해 주실까?
란 질문을 담아 조지는 앤드류를 지그시 바라봤다. 앤드류는 미칠 것 같았다. 이게 다 제임스 때문이었다. 제임스! 그래. 이놈을 죽이자.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앤드류가 제임스에게 그만하라고 팔과 다리로 때리며 발버둥을 쳤는데 이미 목이 제임스의 팔에 감겨 있었다. 요리조리 피하고 어쩌다 맞으면 억, 억 하면서도 제임스는 끝까지 말했다.
“왕자 너도 조심해라. 얘가 이런 애예요. 성질도 더러운데, 억, 보통이 아닌 애지. 내가 정말… 모르는 척 얘기를 들어 줬지만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래서 앤디. 넌 S야 M… 으아아악! 깨물어? 너 S지? 이 쟈닌한 사디스트 같으니라고!”
앤드류가 손목을 꽉 물자 제임스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앤드류가 팔을 걷어붙였다.
“너 이 새끼. 오늘 내 손에 뒤짐.”
결연한 눈빛으로 제임스를 향해 걸었다. 선명한 이빨 자국을 보고 기겁을 하던 제임스가 양손을 들었다. 항복 표시를 들고는 뒷걸음질 쳤지만 코웃음을 친 앤드류가 말했다.
“드루와 드루와.”
“미안. 내가 도가 지나쳤다. 난 네가 정말 S인 줄 모르고.”
“그래 너 오늘 관 짜는 날이구나.”
“그래서 그 오메가에게 차인 줄도 모르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친 듯이 도망가는 제임스를 잡으려고 앤드류가 달리려 하는데 조지가 팔목을 잡았다. 비틀거린 앤드류가 넘어지지 않게 어깨를 잡아 세운 조지가 당황으로 시뻘게진 얼굴을 한 앤드류를 봤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조지가 한숨처럼 말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건지.”
“아니 나는 조언 좀 받을까 해서…….”
“저거한테?”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제임스에게 다시 뭔가를 말하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하고 이를 악물었다. 조지의 시선이 따가워서 고개가 땅을 파고 내려갈 지경이었다. 민망해 죽을 것 같은데 조지가 작게 한숨을 흘리더니 앞서 걸어갔고 앤드류가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사과를 해야 하나? 아니, 나는 누구인지 말한 건 아닌데? 그래도 고, 고자… 막 그런 얘기 들었으니 기분이 나쁘겠지?
생각하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조지는 한 층 더 올라가야 해서 2층에서 헤어져야 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앤드류의 어깨를 조지가 두드렸다. 고개를 들었더니 조지가 앤드류의 어깨를 붙잡고는 말했다.
“그게 아닌 건, 네가 잘 알지 않나?”
엉망인 앤드류의 표정을 보며 웃은 조지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앤드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를 벅벅 갈던 눈이 반짝였다.
“짐… 짐 이 자식…… 너 어디에 있어어!”
***
계단 위까지 들리는 앤드류의 고함 소리에 조지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제임스가 말을 꺼낼 때마다 사색이 되어 가던 얼굴이 아른거렸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 영 재주가 없는 것인지 순식간에 붉어지는 얼굴이 재미있어서 킥킥거리고 웃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이렇게 웃게 되는 순간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계단 밑에서 날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며 마저 올라가려는데 순간 반짝, 거리며 플래시가 터졌다.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더니 붉은색 뱀이 보였다.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이. 그건 휴대폰 케이스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 뒤로 한 학생이 당황한 얼굴로 조지를 보고 있었다. 붉은색 앞머리로 얼굴을 반쯤 감추고 안경을 쓴 평범한 학생이 품 안에 폰을 감췄다.
“어. 조지……."
폰 카메라로 조지를 찍었는데 플래시가 켜진 줄 모른 모양이었다.
‘이런 시기가 왔네.’
한숨을 푹 쉰 조지의 표정엔 불쾌가 가득했다. 폰을 달라고 손을 내밀자 잘못을 알았는지 학생은 순순히 넘겨주었다. 조지가 방금 찍힌 자신의 사진을 봤다.
방금 전에 자신이 웃고 있던 순간이 사진에 남아 있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찍혀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 빼고는. 그래서 얼음 왕자란 제법 유치한 별명까지 있었다. 그러니 조지가 웃는 사진을 공개한다면 최초가 될 것이다. 그 사진을 조용히 삭제하면서 조지가 물었다.
“이거 돈 좀 벌었겠다. 아깝겠네.”
“아, 내가 어디 팔려고 그런 건 아니고…….”
“안 팔면 뭐 하려고?”
“그게,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런 짓 해 놓고 미안하다고 해 봤자. 이런 일 처음 겪는 것도 아니라서 사람들이 미안하다고 한 말을 쉽게 믿을 만큼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다. 조지가 한숨을 흘리며 휴대폰 번호를 확인하고 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다신 하지 마.”
“안 해. 안 할게.”
하면서 사라진 학생에 조지가 한숨을 흘렸다. 복도에 가득한 학생들이 조지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늘 이런 식이다.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가방을 고쳐 메고 교실로 향하려던 때였다.
“야! 앤디 내가 잘못했다니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제임스가 계단을 올라오더니 조지를 붙잡아 방패로 삼았다.
“조지 비켜. 오늘 저 자식 관 묻는 날이야. 장례식은 5분 뒤에 시작이니까 너도 구경 와.”
조지의 몸을 방패 삼아서 잘도 피하는 제임스를 잡자고 앤드류가 난리를 쳤다. 가만히 있던 조지가 팔을 뻗더니 제임스의 팔을 턱 잡았다. 조지는 도망갈 수도 없게 몸을 돌려서 당황한 제임스를 끌어안았다.
“조지… 조지 너 뭐 하는 거야? 왕자! 너 이 자식! 배신자!”
왁왁거리는 것을 무시한 조지가 품에서 벗어나려는 제임스를 꽉 끌어안았다. 앤드류가 사악한 눈빛을 빛내며 다가왔다. 넌 오늘 죽어쓰. 라면서 제임스의 머리통을 휘어잡고는 단단히 목에 팔을 걸자 조지가 손을 탈탈 털었다.
“왕자 너 잊지 않겠어! 앤드류의 간신배 같으니!”
“조지가 왜 배신자고 간신배야? 쟤는 내 충신이야!”
앤드류가 제임스의 머리를 쥐어뜯는 것을 실시간으로 구경하면서 조지가 팔짱을 끼었다.
무슨 일이야? 하며 모여든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요란했으나 불편하지 않았다. 죽이겠다. 살려 달라. 배신자다. 충신이다. 소리가 요란하게 얽혀 시끄러웠으나 이상하게 편안했고 느긋한 생각도 들었다.
성질을 보니 S가 유력하지? 잠깐. 그럼 내가 M이어야 해? 아 그건 좀……,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데?
“사과해.”
“그러니까 앤디. 내가 조지한테 뭘 잘못해서 사과를…….”
“해.”
“이거 완전 폭군 아니야?”
“폭군이 휘두른 칼에 목 한번 나가 볼래?”
조지에게 사과하라는 말에 저항을 해 보려던 제임스는 눈을 홉뜨고 바라보는 앤드류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거뒀다. 말을 잘 들어야죠. 하더니 조지를 향해 정말로 미안한 얼굴을 했다.
“미안하다 조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니까 하나쯤은 분명히 실수했을 거야. 미안하다.”
앤드류에게 잡혀 한참을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고 흑역사를 폭로하지 않겠다는 절규 어린 선서를 한 다음에 겨우 풀려난 제임스였다. 자신이 조지에게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생각을 해도 알 수가 없으나 하라니까 한다는 제임스의 말에 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렇게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란 생각은 했지만.
“이제 됐어. 너. 가.”
앤드류는 필요를 다했으니 어서 가라며 제임스를 계단 밑으로 밀었다. 드디어 풀려난 제임스가 환희에 찬 얼굴로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유난히 크게 울리는 발소리가 사라지자 계단 밑을 힐끔 본 앤드류가 주변을 살폈다. 복도에 모여서 앤드류와 제임스의 난동을 지켜보던 학생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눈치를 보며 학생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던 앤드류가 조지에게 속삭였다.
“나 사과했다?”
제임스에게 이런저런 말을 한 탓으로 고자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듣게 만든 것이 미안한 모양이었다. 조지는 앤드류가 이런 부분에서 퍽 성실한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밝게 웃은 앤드류가 조지의 어깨를 쳤다. 친밀함의 표시였다. 때마침 수업 종이 울리자 자신의 교실로 돌아가던 앤드류가 계단 중간 즈음에서 조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수업 열심히 들어라.”
인사를 하곤 난간을 통통 두드리면서 걸어가는 발소리가 가벼웠다. 남겨진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조지는 앤드류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하던 조지가 자신의 어깨를 봤다. 방금 전에 앤드류가 살짝 두드리고 간 곳이었다. 자신의 어깨에서 사과 향이 약하게 퍼졌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겨우 입꼬리를 잡아 내린 조지는 수업 시간 내내 생각했다. 앤드류와 같은 수업을 들었으면 참 좋았겠다고.
유난히 긴 오전 수업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식당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는 학생들 틈에서 조지는 느긋하게 걸었다. 자신도 모르게 후각으로 사과 향을 찾았다. 여기저기 퍼져 있는 향기를 맡으며 식당으로 향했는데 그곳엔 사과가 없었다. 흔적이 없었다. 아직 안 온 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약간 실망을 하는데 자신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밀어 대는 사람이 있어 돌아봤다.
“올. 버티네?”
제임스였다.
“앤디는 교사가 불러서 좀 늦어.”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옆에 선 제임스는 조지와 함께 움직였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 수업은 잘 들었냐. 너 성적 좋지? 앤드류한테 더 혼났는데 내가 잘못한 게 뭐냐? 하는 질문을 쏟아 내는 제임스는 딱히 조지의 답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이 녀석은 사교성이 밝은지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는 통에 질문을 해도 답을 들을 시간이 없었다.
“앤디는?”
“앤드류는 어디 가고?”
그리고 이상하게 제임스에게 인사를 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앤드류의 부재를 물었다. 착실하게 답을 하는 제임스는 식판 가득히 음식을 쌓아 올리더니 조지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왕자. 우리 내기할래?”
“무슨 내기?”
“앤드류가 누구 옆자리에 앉나.”
물을 마시려던 조지가 굳어 제임스를 봤다. 빵을 손으로 자르던 제임스가 웃었다. 악의는 없는 얼굴이었다. 말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사이 제임스가 말했다.
“궁금하잖아. 넌 안 궁금하냐?”
“그게 왜 궁금해.”
“난 궁금해서. 넌지 난지.”
얘, 뭘 아나?
경계가 들어서 보는데 앤드류만큼 태평한 얼굴로 제임스는 말했다.
“친구와 룸메이트.”
“…….”
“아니지. 기저귀 메이트와 룸메이트인가? 과연 앤드류의 선택은?”
조지는 식욕이 사라졌다. 집었던 샌드위치를 내려놨다. 우유를 마신 뒤 입을 닦고 있는 제임스는 조지의 시선을 느낄 텐데도 반응이 없었다. 자신의 식사를 묵묵히 하고 있었다.
“많이 친한가 보다?”
“앤디랑? 당연하지. 보통 친한 게 아니지. 그냥 기저귀 메이트도 아니고 똥기저귀 메이트인데.”
앤드류와 있을 때와 달랐다. 한없이 가벼운 녀석인 줄 알았는데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놈은 가벼운 표정과 태도를 유지했지만 무거웠다. 살짝 날카로운 느낌도 들었다. 얼빠진 녀석은 아니었다.
“앤디가 몇 살까지 화장실을 가리지 못했는지… 알고 싶냐?”
“그런 취미는 없어.”
“걔가 살짝 늦었어. 뭐든. 걷는 것도 말도 늦었지. 내가 빨랐다고 부모님들이 그래.”
“…….”
“발현도 내가 먼저지. 나는 열일곱 살 겨울에 했으니까. 원래 그렇게 걔는 뭐든 느려. 성장도 조금 느렸어. 지금도 왜소한 편이지만 앤드류 열네 살까지만 해도 진짜 작았어. 엄청 귀여웠어.”
“…….”
“자기는 그게 콤플렉스였지. 그래서 운동도 열심히 다녔어. 꼬마일 땐 꿈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다. 하계든 동계든 종목 상관없이 메달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불태웠는데… 안타깝게도 체력은 좋지만 운동 실력은 영 꽝이라서 포기했어. 걔가 몸치야. 그래서 둔치고.”
“…….”
“무사태평하고 안일한 주제에 촉은 또 좋아요. 마음은 여리면서 상처는 잘 안 받고… 손해는 안 봐. 그게 뭐든 간에.”
“…….”
“그래서 내가 앤드류랑 꼭 결혼을 하려 했지. 어린 시절에 내 꿈은 앤드류 신부였거든.”
“……그래? 안 됐네. 둘 다 알파라.”
“그런 게 장애가 될 거 같아?”
같은 형질을 지닌 사람들끼리 사랑에 빠지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아직은 혼인 신고가 불가능했다. 동일 형질의 혼인 문제는 현재 입법부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기는 했지만 뿌리 깊은 차별의 벽이 허물어지려면 몇 년은 더 걸릴 거라는 예측이 많았다.
“나는 지금도 하고 싶어. 농담 아니고. 앤디가 나한테 장가오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지만 않았다면……. 와… 내가 열한 살에 걔 입술에 입 한번 잘못 맞췄다가 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맞았어. 앤디한테. 다시 얼굴 못 보는 줄 알았어.”
“…….”
“나는 진짜 같이 살고 싶었는데. 내 맘도 모르고. 나는 앤디가 그렇게 예뻐 죽었거든. 다른 애들과 노는 것도 싫고. 나만 앤드류랑 놀고 싶었는데 앤드류는 그게 안 되는 애더라고. 걔는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좋아하는 사람… 그런 게 너무 많은 애라.”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의도가 뭐야?”
물음에 제임스가 의자에 편하게 앉더니 말했다.
“사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앤디가 너 마음에 들어 했거든. 그러더니 결국. 나는 사실 너 그다지 별로지만 어쩌겠어. 우리 앤디가 너가 좋다는데. 넌 내 원수야. 너는 모르겠지만. 내 일평생 너는 내 원수였어. 알아? 내가 열한 살에 걔한테 입을 맞춘 건 너도 지대한 영향을…….”
“덜 맞았지? 아주 그냥. 더 맞아야지? 어?”
싸늘한 목소리에 제임스가 들고 있던 빵을 떨어뜨렸다.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살벌한 기운에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고는 말했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겠습니다.”
“도대체 언제 다물려고?”
“너도 조지랑 친구를 먹었겠다. 나도 그래야 한다는 의무가 있잖아. 자고로 비밀은 공유하고 창피한 짓도 같이 해 보고 해야 진정한 우정이.”
“너랑 조지랑 우정이 싹틀 일이 없다.”
앤드류가 귀를 잡아당기자 아프다고 투덜거린 제임스가 조지를 보며 말했다.
“봤지? 얘가 이렇게 말보다 손이 먼저 가는 애랍니다. 조심해라 너도.”
“끝까지 정말.”
앤드류가 귀를 놓고는 앞에 서자 제임스의 눈이 반짝였다. 귀가 아파서 문지르면서도 앤드류가 어디에 앉을지 집중해서 바라보는 제임스라 조지도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앤드류는 조지의 옆도 제임스의 옆에도 앉지 않았다. 의자를 끌어와 가운데에 앉았다. 오른쪽엔 제임스. 왼쪽엔 조지가 있었다. 약간 김빠진 얼굴을 하는 제임스와 조지의 시선이 마주쳤다.
“얼. 관심 없는 척하더니 너 기대했지?”
“아니야.”
“아닌 게 아닌데? 아. 아깝다. 이번에 서열 정리 했어야 하는데.”
“아니라니까.”
이해할 수 없는 조지와 제임스의 대화에 앤드류가 물었다.
“서열 정리 그게 무슨 말이야?”
“아 그게… 와 눈빛 봐. 조지한테 암살당할 듯. 그냥 그런 게 있어. 넌 모르는 그런 거.”
뭐야? 내가 모르는 게 뭐야? 궁금해서 물어보는 앤드류를 무시한 제임스는 다음을 기약했고 조지는 무심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신경을 쓰다가 포크를 드는 앤드류의 손을 보고는 말했다.
“손은?”
“조금 불편하지만 괜찮아.”
“병원에 갈 거지?”
“병원에? 뭘 그렇게까지. 됐어. 괜찮아.”
별일 아니라며 일축하는 앤드류에게 조지는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뗐다가 앤드류가 제임스와 수다를 떨자 입을 다물었다. 조지의 시선에는 계속 앤드류의 손이 걸렸다.
마음이 편안했다. 이렇게 마음 편안하게 샤워를 한 적이 얼마 만인가. 밖에 조지가 있어도 이렇게 편안하게 씻을 수가 있다니! 이렇게 마음 편안하게 샤워를 한 적이 얼마 만인가!
감격이 몰려왔다. 밖에 조지가 있어도 편안하고 느긋하게 샤워를 즐기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매번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혹시 오메가인 것을 들키면 어쩌나 문을 주시하며 도둑 샤워를 했던 앤드류는 오메가인 것을 들킨 것이 어쩌면 더 나은 오늘을 위한 일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느긋했고 여유로웠다. 치열했던 사투 끝에 얻은 안락함은 달고도 달았다.
다친 손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주의하며 씻고 나온 앤드류의 피부가 반질거렸다. 영상을 틀어 두고 리듬을 주며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는데 앞에 조지가 앉았다. 조용히 다가와 맞은편에 앉는 조지의 태도가 어제라면 화들짝 놀랄 종류였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순수하게 의문을 담아 보자 조지는 챙겨 온 봉투를 부스럭거리더니 몇 가지를 꺼내 가지런히 정리를 했다. 조지는 신기한 것을 구경하듯 바라보는 앤드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
마치 애완동물한테 손을 달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근엄한 목소리였다.
‘설마 소독해 주려고?’
조지가 가져온 물건들은 명백한 의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 상대가 조지였기 때문에 앤드류는 잠시 생각을 했다. 그러곤 손을 들었다. 항복 표시를 하듯이 손을 올리고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앤드류를 조지는 이해가 안 되는 얼굴로 보다가 한숨을 작게 쉬었다. 그러곤 붕대를 감고 있는 앤드류의 손을 잡아 내렸다.
“소독해야지.”
자신이나 제임스나 활동적인 성격이라서 같이 놀다 보면 몸 어디가 깨지고 다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다. 손도 다를 바 없었고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꼭 그런 일만은 아니라도 꼼꼼하지 않은 성격 때문에 가만히 있는 책상에 무릎을 찧는 게 부지기수라 앤드류는 자신의 상처나 흉에 그다지 예민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병원에 가 보는 게 어떻겠냐는 조지의 말을 별생각 없이 흘려들었는데 조지는 아닌 것 같았다. 붕대를 푸는 조지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상처를 꼼꼼히 확인하면서 조지는 소독약을 발랐다. 꽤나 집중한 얼굴이었다. 앤드류는 자신의 손바닥에 시선을 집중했다가 멋쩍어서 말했다.
“괜찮은데. 엄청 많이 다친 것도 아니고.”
“그날, 네가 흘린 피를 보고도 그래?”
뭘 말하는지 알았다. 그 주제는 껄끄러웠다. 오늘 하루를 같이 보내며 제법 친구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조지와 자신 사이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넘길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굳이 지금 그걸 후벼 파서 겨우 찾은 안정적인 일상을 파괴할 생각은 없었다. 앤드류는 침묵했고 조지는 소독약을 바른 뒤 후 하고 바람을 불며 말했다.
“파상풍 걸리면 어떡하려고.”
“옛날에 예방 주사 맞았어.”
“예방 주사 효과를 유지하려면 주기적으로 주사 맞아야 하는 건 알아? 네 성격상 그런 걸 찾아서 맞았을 것 같진 않은데.”
“…….”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하는 조지는 생각과 아주 많이 다른 녀석이었다.
어느 누구와 다를 것 없이 앤드류도 조지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가 있었다.
이 학교에 합격했을 때에 어쩌면 조지 하트와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입학식에서 조지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물론 조지는 자신을 전혀 모르는데도. 이제 와 생각을 해 보니 자신이 뭘 알아서 조지를 판단하고 반가워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반가웠던 마음은 단 며칠 사이에 깨졌다.
단지 언론을 통해 마주했을 뿐인데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란 걸 조금 시간이 지난 뒤 깨달았다. 조지 자신은 그런 관심을, 그것이 호의라 할지라도 전혀 반가워하지 않았으니까.
불행한 과거사를 가지고 있는 배경만 조금 알 뿐이지 조지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지는 하나도 몰랐다. 입학 초에 동급생 사이에서는 조지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다들 조지와 친해질 생각을 하거나 조지를 구제해 줘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조지가 뜻을 받아 주지 않고 냉혈한처럼 굴면 적잖이 충격을 받은 애들이 많았다. 얼음 싸가지라는 별명을 그때 얻었다.
전 공주는 워낙 국민들에게 친밀했던 이미지였던 터라 조지도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 탓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니 조지는 아마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 라며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뒤로 앤드류에게 조지는 말 한번 제대로 할 필요가 없는 녀석이었다.
다행히 자주 부딪칠 일이 없는 녀석이었고 앤드류는 조지를 알아도 조지는 앤드류를 알 필요가 없는 사이였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였다가 룸메이트가 되면서 말 안 통하는 벽창호에 사람 약점을 가지고 흥정을 시도하는 야비한 녀석이 됐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절대 바뀌지 않을 줄 알았다. 바로 얼마 전까진.
그런데 오늘의 조지는 자신이 대수롭지 않게 넘긴 상처를 신경 써서 치료해 주고 있었다. 서툴지만 섬세한 손길로.
“의외로 이런 일에 섬세하다, 너.”
“그러게. 내가 위험한 것도 아니고, 내가 다친 것도 아닌데.”
“말투가 뭐 그래? 내가 여기 남기로 한 거 이제 더는 이의 없는 거 아니었어? 판결 내린 거 아니었냐고. 이제 와 딴말하기 없기다. 저기 서약서 서명 보여?”
“누가 뭐래.”
방수 밴드를 붙이는 것으로 상처 소독은 끝이 났다. 일부러 약을 사 온 것이 분명한지 봉투를 뒤지더니 구급상자에 정리해서 넣는 조지를 낯설게 보던 앤드류가 말했다.
“우리 부모님이 너랑 나랑 룸메이트인 줄 알면 기겁을 할 건데.”
“그러시겠… 아. 부모님은 아셔? 네 형질.”
“모르실 리가.”
“어떻게 허락을 하셨어?”
“내가 고집을 부리면 당할 사람이 없다는 걸 우리 부모님도 잘 아시거든.”
“그래. 그건 나도 잘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야. 왜? 왜 그렇게 봐?”
“아니. 아니야.”
제법 친구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비밀에 관해서도.
자신이 위급할 때에 알아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댈 곳이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초반에는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발현과 히트 사이클을 거치면서 조지는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모습에 믿음이 생겨서 많이 의지가 됐고 그 말은 곧 알파 전용 기숙 학교라 나름 긴장을 했던 앤드류가 그 최소한의 긴장마저 풀어 버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오늘도?”
“오늘도. 미안하다. 내가 아직 몸이 별로 안 좋아.”
“뭐… 어쩔 수 없지.”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앤드류를 잡은 제임스와 친구들은 오늘도 이어지는 거절의 말에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농구나 한판 하자는 말을 며칠째 거절당하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전과 같으면 당연히 응했던 앤드류는 오메가가 된 뒤로는 공부나 건강을 핑계로 알파 녀석들과의 사교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있었다.
알파의 사회에 남고 싶어서 이 학교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남기는커녕 자체적으로 감금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억울했다. 억울했지만 혹시 새어 나올지 모르는 페로몬 걱정에 자신을 꾹꾹 눌러 담던 앤드류의 머리에 페로몬이라는 단어가 박혔다.
페로몬… 페로몬. 잠깐. 어차피 페로몬을 맡지 못하니까 상관없는 거 아니야? 아니, 알파들 페로몬을 내가 못 맡고 다른 알파들도 내 페로몬을 못 맡는다며. 이건 그냥. 나 그냥.
“완전 알파잖아.”
위험 요소가 사라진 수준이 아니라 위험이란 단어가 소거된 수준 아닌가?
앤드류가 복도를 내려가는 이들을 돌아봤다.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이 맛이지. 이 맛이야. 사서 고생할 이유가 없다. 나의 간절함을 알아주신 것일까?’
앤드류의 팀이 지는 것으로 경기는 끝이 났지만 기분은 전에 없이 개운했다. 페로몬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경기 도중에 알파들과 몸을 부대끼면서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땀을 흘린 것과 더불어 페로몬 영역에서 자유롭다는 확신에 앤드류는 전에 없이 기분이 좋았다.
형질 때문에 주눅 들었던 삶은 이제 안녕이었다. 희망에 가득한 상상을 하면서 앤드류가 덥게 껴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땀으로 젖은 속 티를 펄럭이면서 가방을 챙긴 앤드류가 가벼운 발을 통통 굴리며 길을 걸었다.
“빨리 가서 샤워하고 밥 먹자.”
“그러자.”
일행의 말을 들으며 걷었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런 상황이라면 전처럼 위축된 생활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예전처럼. 알파였을 때처럼 생활해도 별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드디어 자신의 생활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앤드류는 마음이 조금 후련했다.
형질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페로몬 때문이다. 성적 흥분을 유발시켰고 그건 이성보다 본능을 우선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선 자신의 페로몬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다. 흥분되지도 않았고 흥분시킬 일도 없었다. 페로몬이 맡아지지도 않았다. 수많은 알파 학생들이 이곳을 채우고 있었지만 앤드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몸 상태 관리만 잘하면 되는 문제였다. 앤드류는 그렇게 생각했다. 며칠 전에 일어난 히트 사이클 같은 경우는 조금 특수한 경우라 치고. 다시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주의만 하면 되는 일 같았다.
‘조지한테도 말해 줘야지! 예전처럼 생활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정말로 별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들뜬 마음에 생각하는데 제임스가 물었다.
“앤디, 너도 같이 씻을 거지?”
그 물음에 조지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앤드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원래 항상 같이 씻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답을 했던 앤드류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 나는,”
자신의 룸에서 씻겠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앤드류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에 시야가 가려졌다.
“이게 뭐야야?”
당황해서 손을 허우적거리는데 곧 시야가 트였다. 앞에 있는 것은 조지였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앤드류에게 입힌 조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앤드류가 당황해서 올려다봤다. 앤드류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갑자기 벌어진 일에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보고 있었다.
“너 아직 감기 기운 있어. 잊었어? 며칠이나 지났다고.”
“…….”
“지난번처럼 앓아눕고 싶어?”
옷을 다 입혀 준 조지가 앤드류의 팔을 잡고 제임스와 일행들에게 말했다.
“너희들끼리 씻어.”
말을 남기고 앤드류를 데리고 방으로 향하는 조지는 말이 없었다. 조지는 조금 화가 난 듯했다. 앤드류는 침묵이 불편했다. 바다 향이 은은하게 스며든 조지의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신경 쓰였다. 방에 도착해 문을 닫은 조지는 앤드류를 앉히고는 분을 삭일 듯 잠깐 숨을 고르더니 말을 쏟아 냈다.
“도대체. 너 생각이 있어, 없어?”
앤드류가 눈동자만 데굴 굴렸다.
“냄새나?”
“당연히 나지! 내가 네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아왔겠어?”
“킁. 킁. 그렇게 심해? 나는 몰랐지. 다른 애들도 몰랐고…….”
“너 도대체.”
“잠깐 풀어져서 그랬어 잠깐.”
운동을 하다 형질이 조금 풀린 모양이었다. 조지는 어이없는 얼굴을 했고 앤드류는 힐끔 눈치를 보다 말했다.
“근데 조지. 생각해 봐. 어차피 아무도 몰라. 내 페로몬을 맡을 수 있는 애들이 없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잖아.”
“…….”
“그럼, 다른 알파들이 보기에 나는 그냥 베타란 얘기 아니야?”
“뭐어?”
“생각해 봐. 이렇게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가 전처럼 행동하지 못할 이유가 뭐야. 오히려 내가 너무 위축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잖아. 평소랑 다르면 이상하지. 안 그래?”
“앤드류, 너…….”
조지는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막막했고 앤드류는 의기양양했다. 조지에겐 앤드류가 오메가 룸메이트였지만 앤드류는 바로 얼마 전까지 알파로 살았기 때문에 심적으론 알파에 가까웠다. 앤드류는 자신이 알파 같았지 오메가 같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한심하다는 듯 보지 말고. 너 말고 밖에 있는 누가 날, 날 오메가로 알겠어? 오메가로 보겠어. 바로 옆에서 알파가 러트 터져도 나는 아무렇지 않을 텐데? 내가 지금 틀린 말 해?”
“…….”
“그러니까, 더 이상 이 기숙 학교가 나에게 위험 지대는 아니란 얘기지!”
“…….”
“난, 안전해.”
조지는 이쯤 되면 안전이란 단어가 앤드류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래. 그래서 같이 씻기라도 하시게?”
“그건 말실수로. 내가 설마 거기까지 하겠어?”
“그러다가 지난번처럼 힛싸도 터지고. 그래도 그러려니 해야지. 그렇지?”
“그건, 실수로!”
“실수가 몇 번이야 지금까지?”
앤드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단지 실수라고 치부하기엔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이 발현과 히트 사이클이었다. 그냥 덮어 놓고 아무 문제 없길 바라고 싶은데 조지가 자꾸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건… 그건! 그 일엔 너도 좀 책임이 있어! 내가 누구 때문에 밤마다!”
“밤마다?”
“됐어. 너한테 구구절절 말하고 싶지 않고! 페로몬 영향 없으니까 나는 베타야! 아니야, 아니다! 알파야! 그것도 거친 알파!”
앤드류는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자신이 오기를 부린다는 것을 알았으나 굽힐 수가 없었다.
“알파?”
조지가 되물었다. 앤드류는 자존심이 상했다. 꼭 조지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오메가가 된 뒤부터 형질에 대한 자격지심이 생겼다. 오기로 한마디 쏘아 대려는 순간에 조지가 앤드류와 눈을 맞춰 왔다. 그 눈빛에 앤드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앤드류. 예고하고 터지는 사건 사고는 없어. 불행은 늘 짐작할 수 없는 순간에 닥쳐. 그 뒤에 후회하는 것보단 미리 조심하는 게 좋지 않아?”
“…….”
“네가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도… 현실은 바뀌지 않아. 아무리 간절히 바래도.”
마치 경험에서 묻어 나오는 말 같았다. 그 말에 조금 냉정을 찾은 앤드류가 조지의 고요한 눈동자를 보다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
“…….”
“나는 아직 혼란스러워. 너는 네가 갑자기 오메가가 된다면, 내일 당장 네가 사실은 오메가였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하루아침에 받아들일 수 있겠어?”
“…….”
“내가 너무 달라졌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어.”
그래서 더 고집스럽게 자신의 처지를 외면하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수용하기엔 변화가 너무 컸는데 막연히 오메가가 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단 지금이 더 혼란스러웠다.
히트 사이클이 터진 날에 정신이 나가서 조지를 받아들이려고 했던 자신의 몸은 이성이 돌아오자 낯설었다. 뒤가 젖어 들어가던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조지를 맹렬히 원하며 그 몸을 더듬었던 자신. 그저 알파가 자신을 원해 주길 바라면서 조지의 몸을 만졌다. 조지의 손길이 기뻐서 앤드류는 허리를 더 들었었다.
알파의 성기를 입에 물고는 그게 좋아 눈앞이 흐려질 자신은 정말 생각도 못 했었다. 그때는 정말 눈앞의 알파를 온몸으로 맞이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는데, 그게 자신에게 닥쳤는데 다행인 것은 삽입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고 불행인 것은 그 행위 과정에서 자신이 느낀 것 전부였다. 그건 받아들이기가 버거웠고 조지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건 도중에 형질이 바뀐 자신 혼자서만 감당할 문제였다.
“내가 생각했던 미래의 내가 하루아침에 바뀌었어. 내 미래를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감도 안 잡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무 변화 없이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어.”
“…….”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조지는 별말이 없었다. 그저 침묵하다가 조용히 방을 나갔고 앤드류는 답답한 상황에 한숨을 흘렸다가 문득 올라오는 익숙한 페로몬에 자신의 옷을 살펴봤다. 자신이 입고 있는 조지의 겉옷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페로몬에 안정을 찾았다. 곤란했다. 모든 것이.
다음 날이었다.
앤드류와 조지는 태연한 척 아침을 맞았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감출 수가 없었다. 도통 집중할 수 없었던 수업이 모두 끝난 다음에 기숙사로 향하며 괜히 죄 없는 바닥을 발로 툭툭 찼다. 자신도 약간 억울했다. 조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잘 안다. 조심하라는 말은 자신을 걱정해서 해 주는 말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자신을 제대로 돌아볼 용기가 없었던 앤드류에겐 그런 조지의 태도가 부담스러웠다. 마치, 마치…….
‘오메가로 대하잖아, 조지 녀석.’
조지는 앤드류를 오메가 대하듯 대하고 있었다. 이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태도가 부담스럽다는 말을 하자니…….
“그것도 좀… 그렇,”
“저기, 학생?”
생각에 빠져 있던 앤드류가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옆을 돌아봤다. 처음 보는 사람이 앞에 있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앤드류가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살폈다. 말끔한 인상으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학교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학교에 있는 모두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느낌이 그랬다.
“맞구나. 맞네.”
나이는 한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사람은 앤드류의 얼굴을 폰 화면과 대조하듯 살피더니 확신에 차서 말했다.
“긴가민가했는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앤드류는 어쩐지 비위가 상했다. 딱 봐도 수상해 보여 경계를 하는데 그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니까 안심해.”
“완전 수상해 보이시는데요?”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는지 잠깐 당황한 사내는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하하. 그래 보이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고는 어느새 앤드류와 다섯 걸음 정도 차이 날 만큼 다가온 그가 말했다.
“나는 기자야.”
“기자.”
“그래. 자 여기 내 명함.”
받은 명함엔 신문사 이름 밑에 이름과 메일, 폰 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신문사 이름이 익숙했다. 익히 알고 있던 곳이었다.
전 공주 내외의 사고 현장을 모자이크 없이 보도한 곳이었다.
참혹한 사고 현장을 필터링 없이 보도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한 언론사. 언론사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곳이었다. 여론의 질타를 받았으나 그해 최고의 부수를 넘기고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곳이었다. 그 뒤로 문제가 있는 사진을 단독이란 이름으로 보도하고 있는 곳이었고 앤드류가 기억하기론 이곳은 조지의 사진 또한 필터링 없이 걸었던 곳이다.
‘그래. 기억하지. 왕의 품에서 혼절했던 어린 조지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었지.’
「과연 조지는 아픔을 견디고 살 수 있을까?」
「어린아이가 감당하지 못하는 충격에 혹시 최악의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베르테르 효과는 조지를 비껴갈 것인가? 어쩌면 시작이 조지인가?」
자극적인 제목의 말도 안 되는 기사와 함께. 명함을 보던 앤드류가 고개를 들었다. 선하게 웃고 있는 사내가 말했다.
“우리 얘기 좀 할까?”
첫째. 발을 깐다.
둘째. 머리를 박는다.
셋째. 중요 부위를 깐다.
아니지. 발도 까고 넘어지면 중요 부위를 잘근잘근 밟아 주자. 머리는 정신 못 차릴 만큼 패는 것이 좋을 듯. 정신 나간 놈이니 맞다 보면 정신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눈앞에서 선한 얼굴로 웃고 있는 저 기자 양반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에 사내는 선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했다.
“조지와 같은 룸을 쓴다고?”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앤드류는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기자를 쏘아봤다. 선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얼굴에 가득한 기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겨우 참고 있는 앤드류는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기자가 폰을 몇 번 보던 것을 생각했다.
“아닌데요.”
“아니긴. 맞는데. 앤드류 맞잖아. 조지의 룸메이트.”
“내 이름 어떻게 알아요?”
“맞네.”
아닌 척하기는, 하며 웃는 기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앤드류가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것을 지웠다. 이름을 알고 얼굴을 알고 있다. 룸메이트란 사실도.
“네. 제가 맞긴 한데.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지, 앤디? 공부는 잘하니? 공부하는 데 방해되는 건 없고?”
“방해라니 어떤 점을 말하시는 건지?”
“독방 신청자들이 2인실 쓰는 게 처음이라고 하던데. 공부하는 건 어때? 생활하는 건 괜찮니?”
“네… 뭐… 사람 마음처럼 되나요. 불편해도 괜찮은 척 해야죠…….”
기자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그래? 그랬겠지. 불편하지? 불편하겠지. 어떤 점이 불편하니?”
“졸업반이라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는데. 뭐 그런 불편함이죠.”
말을 할 듯 안 하는 앤드류가 조금 갈등 어린 표정을 지었다. 기자는 월척이다 싶었는지 한 걸음 더 다가오더니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그래. 아저씨도 충분히 이해한다. 마음 안 맞는 사람과 같은 방을 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안 그러니?”
“그렇죠.”
“그래서 넌 어떤 점이 불편하고 힘이 드니? 조지의 어떤 점이 널 힘들게 하는지 말을 좀 해 볼까? 나한테 말을 해 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저씨가 뭘 어떻게 도와주시게요?”
“고민도 들어 주고, 상담도 해 주고. 그리고 네가 조지와 방을 따로 쓰게 될 만한 계기도 만들어 주고.”
독방. 그토록 원하던 독방을 들고 나온 기자였다.
“계기요?”
물음에 기자는 앤드류가 흥미를 보인다 생각했는지 웃으며 말했다.
“니가 독방을 쓰고 싶다면 그럴 수 있단 말이지. 조지 성격이 얼마나 유명하니. 게다가 아저씨가 듣자 하니… 둘 다 독방을 쓰게 해 달라고 난리도 피웠다면서. 관리 사무실에 가서. 둘 다 그렇게 독방을 쓰고 싶어 했으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겠다 싶은 거지.”
“그건 맞는 말인데, 근데 우리가 관리실에 가서 난리 친 건 어떻게 알아요?”
“아저씨가 학교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어. 이거 봐. 출입증. 원래 외부인 출입 금지인데 나는 이렇게 들어왔잖아.”
“그래서 절 도와주신다?”
“그렇지.”
“그럼 그 대가로 바라는 건 뭐예요? 기자시면… 보도에 필요한 정보랑 사진인가?”
앤드류의 말에 기자는 굳이 돌려 말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웃었다. 적어도 앤드류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미 이 학교에서 몇 명의 학생과 접촉한 경험이 있는 기자에겐 그들과 앤드류는 다를 것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래. 조지에 대한 약간의 정보와 사진.”
“…….”
“다들 조지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해. 너도 알다시피 조지가 참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니? 그래서 모두 걱정해. 잘 자랐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 공주의 죽음이란 그늘에서 벗어났는지. 벗어나지 못했는지. 벗어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쁜 취미를 가지진 않았는지.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
“그걸 주면, 나도 널 도와주마.”
“대가는요? 설마 내가 조지와 같은 방을 쓰지 않게 해주겠다. 그걸로 끝이에요?”
“사진 몇 장만 주면 너는 제법 큰 용돈 벌이도 할 수 있으니 손해 보는 건 없지 않겠어?”
“용돈? 이 아저씨 날로 드시려 하네…….”
방금 전의 호의는 어디 가고 경멸을 담은 앤드류의 시선에 기자가 잠시 당황했다.
“조지랑 같은 방을 쓰나 안 쓰나 이제 상관없어요. 내가 넘겨드린 정보로 보도가 되면 당연히 조지 룸메이트인 나를 의심할 게 뻔한데. 제가 정학을 당할 걸 감수할 이유가 뭐예요? 퇴학일 수도 있겠네. 왕실이 날 가만히 두겠어요? 그걸 다 감수하고서 내가 제공할 정보들에 대한 보상이 고작… 독방? 용돈? 고작 용돈 벌이?”
“계산을 하네.”
“계산을 안 하면 내가 아저씨랑 이러고 있을 일이 없지.”
“……그에 상응하는 만큼 보상해 주마.”
“얼마나 줄 건데요?”
“얼마나 필요한데.”
“엄청 많이 줘야 할 텐데?”
“그럼 넌 나한테 그만큼의 사진과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데.”
“어떤 거요?”
“제대로 된 사진. 허울뿐이지만 작위를 가진 이들의 자식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립 학교. 그것도 알파 전용 학교니 알 만하지. 약 같은 건 안 해? 이상한 모임들도 있을 텐데. 혹시 조지가 한다면 현장을 찍어 주고. 오메가들과 파티 같은 것도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짧게나마 동영상이면 좋겠고. 왜. 알잖니. 별일 다… 있을 거 아니야.”
“아. 그런 거.”
“그래. 그런 거. 제대로 된 사진을 찍어 오면… 네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돈을 주마. 평생 용돈 걱정 없이 살 만큼의 돈을.”
앤드류가 씨익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아저씨. 폰이요. 연락처 입력하려고요.”
그는 이미 앤드류가 넘어왔다 생각을 했는지 별 의심 없이 폰을 주고는 자신이 초소형 카메라를 구해 줄 테니 방에 설치를 하라는 지시까지 했다. 조용히 듣고 있는 앤드류가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것치고는 조금 오랜 시간 폰을 들고 있자 한참 대박 사진을 건질 수 있다는 흥분에 취해 있던 기자가 의아한 듯 물었다.
“폰 번호 적는 거 맞아?”
“메일도 적느라."
“아. 그러니?”
“아. 그러니? 되게 바보 같다.”
“뭐?”
“내 사진 보낸 사람이 네 명이나 돼요? 얼마나 준다고 했는데 얘들이 이런 짓을 해.”
“너 지금 뭐 해.”
“나를 어떻게 알았나 궁금해서요. 우리 학교 애들을 매수했네요. 근데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들어서 넘어가지. 이렇게 멍청한 놈한테. 얘들도 덜떨어졌나. 동기화 설정은 풀어 두셔서 다행이네요. 아이고. 고마워라.”
“야. 야. 야. 너 뭐 하는 거야?”
“근데 아저씨. 걔들이 최신 정보는 업데이트가 안 됐나 보다. 중요한 정보를 놓치셨네.”
험악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기자를 보고 앤드류가 전에 없이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지금은 조지랑 같은 방을 쓰는 게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뭐?”
“그래서 너 이 새끼 엿 한번 제대로 먹여 주려고. 쓰레기 자식아.”
앤드류가 몸을 돌려 학교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기자가 곧바로 쫓아오는 소리가 요란했다. 야! 야 이 자식아! 새끼야! 너 죽는다! 내가 누군 줄 알고? 하는 소리를 들으며 전속력으로 달리던 앤드류가 쫓아오던 발소리가 느려짐에 멈춰 섰다. 기자가 숨이 찬지 무릎을 짚고는 헉헉거리고 있었다.
“달리기 겁나 느리네요, 아저씨. 운동 좀 해요. 그래서 어떻게 파파라치 짓을 해요? 윤리 의식도 없는 사람한테 직업 의식을 기대하긴 좀 그렇긴 하지만.”
“이 새끼! 너! 잡히면! 헉! 헉. 너 잠깐, 헉. 폰 이리 내. 헉.”
“아저씨, 야동 사이트 뒤진 기록은 좀 삭제해요. 이게 뭐야. 헐… 아저씨 그래도 이런 거 보는 건 그렇지. 이런 거 취향이에요? 으억! 저게 들어가?”
검색 기록을 뒤지며 하는 말에 숨을 고르던 기자가 다시 달려들었다. 터질 듯한 얼굴로 죽일 듯이 뛰어오는 기자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 말에 달리던 앤드류가 멈추며 말했다.
“기자가 날 뭐 어쩔 건데? 내가 정치인이야? 연예인이야? 왕족이나 재벌 집 아들이야? 나 그냥 민간인이야. 일반인이야. 보도로 사람 잡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네가 뭐. 날 어쩌게. 어떻게 가만 안 둘 건데?”
따라오던 기자가 멈춰 걸어오며 이를 벅벅 갈았지만 앤드류는 멈추지 않았다. 일부러 화를 돋우고 있었다.
“어르신…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보셔 봤자 상관없는 거 아시죠? 나를 뭐. 어쩌시게요?”
분을 이길 수 없는 기자가 주먹 쥔 손을 들었다. 피하지 않은 앤드류가 눈을 질끈 감았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이를 악물었는데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는지 피 맛이 돌았다. 휘청거린 앤드류가 고개를 돌려 기자를 노려봤다.
“어린 새끼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이번에는 발로 앤드류를 찰 기세였다. 그래. 몇 대는 더 맞아 줄 수 있다. 그리고 소송까지 가 보자. 이를 악물고 각오하는데 발을 휘두르던 기자가 앤드류에게 다가오기는커녕 뒤로 넘어갔다.
“어어?”
자신도 당황했는지 쿵 소리와 함께 뒤로 나자빠진 기자가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앤드류를 걷어차려고 휘둘렀던 다리가 잡혔다. 조지였다. 기자의 발목을 아직 잡고 있는 조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조지?”
“나 하나로 모자라?”
화를 누르지 못하는 조지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렸다. 기자에 대한 적대심을 감추지 않는 조지에 앤드류가 당황했다. 일부러 보안실이 있는 학교까지 기자를 유인했는데 학생들 틈에 조지가 있을 줄 몰랐다. 기자의 발목을 잡아 쥐고 있는 조지의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기자는 조지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놀란 기색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화색이 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본 앤드류는 기자의 생각을 쉽게 읽었다. 흥분한 조지를 막아야 했다.
“조지. 일단 진정해.”
“너, 맞았어.”
“그래. 내가 맞기는 맞았는데.”
“나 때문에.”
“그건 아니고. 조지. 일단 내가 설명을 할 테니까… 이거 놓자. 내가 설명할게. 어?”
앤드류가 조지를 말리려 했지만 좀처럼 듣지를 않았다. 만약 조지가 저 발목을 비틀어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조지가 기자를 폭행했다는 기사가 도배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전후 사정을 중요하게 살피지 않을 테고, 뇌리엔 오직 타이틀만이 남을 것이다.
「조지 하트! 충격! 기자를 폭행」
이것만 남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지를 비난할 게 불 보듯 뻔했다. 앤드류가 이를 악물었다.
‘이게 통할까? 통해야 하는데……. 제발. 제발 효과가 있어라. 있어라.’
간절히 바라며 앤드류는 각오를 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모인 곳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위험한 걸 알았다. 그러나 흥분한 조지를 말리자면 달리 방도가 없었다. 조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준 앤드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곧, 죽일 듯이 기자를 노려보던 조지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 효과가 있다!’
다행히 조지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적을 향해 거칠게 퍼지던 페로몬도 누그러들었다. 갑자기 풍기는 사과 페로몬에 조지는, 더운 숨을 내쉬며 혼란스럽게 앤드류를 바라봤다. 쏟아지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앤드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조지의 손을 잡아당겼다. 툭, 하고 기자의 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앤드류는 잘했다는 듯 조지의 손등을 토닥였지만, 조지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어이가 없었다.
“야… 너…….”
쏟아지는 사과 향기에, 조지는 다른 의미로 자신을 제어해야 했다.
“너…….”
앤드류가 쏟아 낸 페로몬은 알파를 진정시키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알파를 유혹하는 성질에 가까웠고, 그건 다시 말하자면 흥분을 유발하는 것에 탁월했다. 게다가 앤드류는 우성이기까지 하니 조지가 주의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분히 성적 의도가 가득한 페로몬이라 순식간에 열이 오른 조지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허리가 뻐근해질 만큼 노골적인 페로몬에 앤드류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숨이 떨렸다. 손끝에 열이 번졌다.
지금 당장 발가벗고 뒹굴자고 들어도 이상할 것 없는 페로몬에 온 정신이 앤드류에게로 향했다. 앤드류의 붉은 귀 끝, 민망한 듯 오물거리는 입술, 소리가 날듯이 데굴 굴러가는 눈동자. 그 모든 것을 새길 듯 바라보는 조지는 숨을 크게 쉬었다. 앤드류의 페로몬이 폐부 깊숙한 곳에 스며들어 왔다.
앤드류도 자신이 얼마나 노골적인 페로몬을 풀었는지 잘 알기에, 조지가 자신에게로 주의를 돌리자 서둘러 페로몬을 닫았다.
“앤드류, 너.”
거친 숨결 때문에 목소리도 떨렸다.
“알아. 잔소리 나중에 들을게.”
“너, 진짜.”
“알아. 안다니까.”
“…….”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를 곁눈질로 확인한 앤드류는 생각보다 더 많이 흥분한 듯 보이는 조지에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래도 너, 아무 짓도 하지 마. 알았어?”
“하아-”
그 숨소리에 심장이 팔딱 튀어 올랐다.
“네가, 네가 나서면 일이 커져.”
기자가 노리는 것은 앤드류가 아니라 조지니까. 조지를 진정시킨 것인지, 아니면 더 흥분시킨 것인지 혼란스러운 앤드류가 기자를 돌아보려 하는데 그때였다.
“으억! 발목이! 골반이! 나 허리 디스크도 있는데! 조지가 기자를 때렸네! 때렸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거는 기자를 보는 조지의 인상이 살벌했다. 정말로 한 대 치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진 않지. 기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다. 안 그래도 성적 흥분에 차 있던 몸에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르자 폭력성이 꿈틀거렸다. 관자놀이가 꿈틀거릴 만큼 이를 꽉 물면서 기자에게 다가가려 하는데 앤드류가 다급하게 조지의 팔을 끌어안았다.
“조지!”
“놔.”
“조지! 나, 나 맞은 데 엄청 아퍼. 아퍼, 이거 봐!”
그 말에 움찔한 조지가 앤드류를 돌아봤다.
“이거 봐. 입 안 살이 다 까졌나 봐. 이빨 나간 거 같아. 흐어어어. 어떻게 기자가 학생을 때릴 수가 있지? 그것도 학교에서? 내가… 우리 학교에서 기자한테… 따귀나 맞고… 내가…….”
차분히 말하던 앤드류가 서러움이 몰려오는지 울먹였다.
“네 사진 찍어 오라고 날 협박하더니 내가 안 찍는다고 하니까 나를 이렇게 때렸어. 조지 네가 안 왔으면 나 엄청 맞을 뻔했어. 흐어어.”
“…….”
“내가 자기보다 작다고 나를 만만히 보고. 아파. 으어어. 퉤. 어어! 피 피 맛 나아아! 나 입 안이 다 터졌나 봐 저 기자 새끼 때문에! 엄마아아! 아들이 여기서 맞고 다녀요! 내가 우리 학교에서! 외부인한테!”
통곡을 하는 앤드류의 얼굴엔 눈물길이 가득이었다. 앤드류의 울음소리가 높아지자 기자의 어설픈 소리가 사라졌다.
‘저… 미친 또라이가. 진짜 미치겠네.’
라는 듯 앤드류를 바라보는 기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앤드류는 더 크게 목소리를 높여서 울었다.
‘엿 먹어라 새꺄. 어? 어딜 감히.’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억울하고 서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듯 우느라 온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저러다 큰일 난다는 생각이 날 정도로 몸으로 울었다. 일단 이렇게 상황을 모면할 작정으로 오스카 연기 주연상이라도 탈 듯이 영혼으로 울어 댔다. 혹시나 조지가 기자에게 튀어 나갈까 걱정이 되어 조지의 옷을 꽉 붙잡았다.
“어떻게, 히끅, 학교에서, 히끅, 학생을, 어른이라는 사람이,”
히끅, 소리를 내면서 앤드류는 최대한 처연한 얼굴로 어깨를 들썩였다. 누가 보아도 악당 기자와 선량한 피해자 학생처럼 보여야 했다. 서러움과 억울함에 물든 순한 눈동자를 유지하며 입술까지 벌벌 떨면서 손등으로 거칠게 닦는데 순간 시야가 휙 돌아갔다.
연기에 한참 심취해 있던 앤드류의 턱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린 조지는 피가 배어 나오는 앤드류의 입술을 살피더니 인상을 구겼다. 이제 슬슬 이 연기를 끝낼 생각을 하던 앤드류가 우느라 벌게진 얼굴로 조지를 올려다봤다.
앤드류의 입술에 머물던 조지의 시선이 느리게 올라오더니 눈동자를 담았다. 물에 젖은 눈동자를 빤히 보는 조지 때문에 흠칫, 놀란 앤드류가 약간 불편함에 고개를 피하려는데 조지가 말했다.
“그래 우리 앤디. 많이 아파?”
“응. 나 많이 아… 엉?”
우리 앤, 앤 뭐요?
조지가 붉어진 앤드류의 볼을 쓸었다. 그 움직임에 숨이 떨렸다. 방금 전에 페로몬을 풀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별것 아닌 조지의 태도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당황한 앤드류가 눈알을 굴리다가 연기를 끝낼 수가 없어서 말했다.
“저, 저 빌어먹을 기자가 반지 낀 손으로 때렸어. 여기. 여기 봐. 여기 긁혔어?”
“어. 긁혔다. 아프겠다 우리 앤디.”
조지는 앤드류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졸지에 품에 안긴 앤드류가 엉거주춤 선 채로 생각했다.
이런 건 각본에 없었는데? 이거 완전, 완전 부부 사기단 같잖아?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