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아찔한 룸메이트 1-1화 (1/24)

01

이럴 줄 알았다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 앤드류 스윈턴은 얼마 전부터 몸이 이상하다고 했던 말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은 추호도 몰랐다. 아랫배에서 자꾸 통증이 느껴져도, 뭉치는 느낌이 불쾌했어도 참아야 했다. 허리가 아프고 힘이 축 빠진 것도 모자라 몸살까지 앓았다는 말을 왜 했을까. 오랜만에 기숙사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온 것에 들떠 부모님께 응석을 부리려고 했던 말이 이런 파장을 불러올 줄이야!

“뭐, 뭐라는 거야?”

앤드류는 방금 전에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불렀던 부모님이 하실 말이, 영락없이 자신의 건강에 관련된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다 했다. 아팠다는 말을 한 뒤, 종합병원에 다녀온 집안 분위기는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아, 나 어디 아픈가 보구나.’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서 무슨 어마 무시한 말이라도 들었는지 아버지는 근심 어린 표정을 좀처럼 감추지 못한 채로 앤드류의 어깨를 다독였다.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온 집 안을 가득 채웠고 집 안 분위기는 끝도 없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반응을 보건대 앤드류는 자신의 몸이 어딘가 탈이 나도 제대로 난 게 분명하다 생각했다. 

‘나는 위중하다. 아마도, 죽을병?’

올 6월에 있을 진학을 위한 마지막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다음, 가을 학기부터 대학생이 되는 자신을 수없이 상상했던 앤드류는 혼자 조금 울기도 했고 며칠 잠도 잘 못 잤다. 그러다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단단하게 맞이하자! 그래! 알파답게! 남자답게! 심각하게 아픈 거면 현대 의학의 힘을 빌리면 되는 일 아니던가? 젊고 회복력 좋으니 괜찮을 것이다!

각오를 다진 앤드류는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했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자신 때문에 놀랐을 부모님의 마음이 걱정됐다. 그래서 부모님이 자신에게 말을 할 때 최대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시뮬레이션도 해 봤다. 물론 그때마다 창창하게 남은 앞날이 아까워 욕을 뱉었지만. 신을 향한 원망을 적어 내려간 노트는 벌써 몇 장이었다. 

그렇게 드물게 효자다운 생각을 하던 앤드류에겐, 어쩌면 더한 것일 수도 있는 최악의 단어를 들었다. 어떤 말을 들어도 웃자고 다짐했으나 웃을 수가 없었다.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나 얼굴이 볼품이 없었다. 시뮬레이션은 소용이 없었다. 

“나, 나 잘못 들었나 봐. 그게 그게.”

“맞아.”

“엄마?”

“너…….”

‘에이, 설마. 내가 설마 어떻게.’

“오메가래.”

“오메가야아아?”

거실엔 정적이 맴돌았다.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눈꺼풀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대로 돌처럼 굳어 있던 앤드류는 물기에 젖은 얼굴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네가 오매가래.”

“무슨 그런…….”

“오메가래.”

“…….”

“오메가!”

보란 듯이 뱉어지는 그 단어에, 앤드류는 며칠 전에 검사를 받기 위해 갔던 병원에서 만난 의사를 떠올렸다.

‘남자네요. 알파고요.’

라면서 안경 너머로 바라보는 눈동자에 어쩐지 식은땀이 났던 것은, 동물적 감각이 위험 신호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 뒤돌아보니 그랬다. 제인의 형질 검사 겸 아픈 몸을 검사하러 병원에 함께 갔을 때, 의사는 조심스럽게 제인이 받은 검사를 앤드류도 받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3년 전, 형질 검사에서 알파로 판정이 난 앤드류는 당황을 금치 못했지만 의사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성인지 열성인지 검사를 한번 해 보길 권장한다는 그럴듯한 핑계였다. 확인해 둘 것이 있다는 말에 앤드류는 기분 나쁜 예감을 느꼈지만 설마,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고 단순히 형질에 이상이 있는 줄로만 알고 검사를 받았다.

‘이러려고 그런 거였어?’

잠시의 침묵 뒤에 앤드류는 웃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흘리더니 곧 박장대소를 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에 실성한 것처럼 웃음이 나왔다. 작정을 하고는 열여섯 살에 알파 예정자란 결과를 받은 제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메가래, 오메가. 푸하하.”

“앤디…….”

“엄마도 참.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알파가 어떻게 오메가가 돼? 무슨 농담을 이렇게 하냐? 나 아픈 거 말해 주기 힘들어서 그래?”

“너 안 아파. 건강해.”

“에이,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아. 충격 요법이 조금 심하네.”

“그래 사실대로. 너 오메가란다, 의사가.”

“제인이 오메가래?”

“아니, 네가.”

“제인이 오메가인데 나랑 검사표가 바뀌었구나?”

“아니, 네가 오메가래. 앤드류 스윈턴 네가.”

이쯤 되면 부모님은 잔인했다. 오메가. 네 동생이 아니라 네가 오메가.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말에 현실 부정을 하던 앤드류가 사색이 되었다.

“내가 어떻게 오메가래?”

“하아……. 그렇게 됐대.”

“내가 무슨, 무슨 오메가야아아!”

집 안에 앤드류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앤드류 스윈턴. 19년을 알파로 살아온 앤드류는 하루아침에 오메가가 됐다. 

예상 밖의 재앙이 시작되었다. 

졸지에 오메가라 선포를 당한 앤드류는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의 폭탄 발언은 벌써 며칠 전이었지만 그 순간은 아직도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된다고 격렬하게 저항을 하던 앤드류는 방 안에서 칩거 중이었다. 부모님을 통해 폭탄을 받은 앤드류는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앤디! 너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며칠째 이어지는 하소연이었고 호소였다. 어제는 어머니가 문밖에서 설득을 하더니 통하지 않자 오늘은 아버지 차례였다. 드물게 분노를 담은 목소리로 말하는 아버지가 있을 문 너머를 한번 힐끔 쳐다본 앤드류는 고개를 휙 돌렸다. 

“어떻게 그 학교에 다시 돌아간다고 그래? 앤디. 내 아들. 우리 아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가정교사도 왔어! 앤디! 너 방학 며칠이나 남았다고!”

스윈턴 부부는 마음이 다급했으나 모조리 거부한 앤드류는 이어폰을 귀에 쑤셔 넣고는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얼마 전에 부모님이 가정교사를 데려왔다. 오메가에 대해 알려 준다는 명목이었는데 거부를 했던 앤드류는 인상 좋은 가정교사 앞에서 차마 깽판을 칠 수가 없어서 한 차례 수업을 들었다. 그 내용은 가히 뜨악할 만한 것이었다. 그다음 날부터 모든 것을 거부하며 방에 틀어박혔다. 아마 내일쯤이면 열이 받은 엄마가 방문을 따고 들어올 수 있겠으나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오메가가 됐는데. 눈에 보일 게 뭐람? 

시끄러운 헤비메탈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진정이 안 된 앤드류가 이를 악물었다. 알파로 태어나 알파로 자랐고 친구들도 모두 알파였다. 알파 친구들과 함께 샤워하고 같은 방을 쓰며 살았다. 자신은 알파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갑자기 세상의 지축이 바뀌었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몸에 변화도 없었다. 아직 발현 전이기 때문에 페로몬도 없는 앤드류는 아직 베타에 가까운 몸이었다. 어느 형질도 없이 잠들어 있는 몸이었다. 당장 뭔가 바뀐 것이 없으니 결과가 잘못된 것이라고 행복 회로를 돌리며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으나 부모님은 강경했고 급했다. 

결국 다음 날에 문을 따고 들어온 스윈턴 부부는 예상했다는 듯 팔짱을 끼고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앤드류의 앞에서 최대한 감정을 누르며 말했다. 

“앤디. 강요하는 거 아니야. 우린 부모로서 할 일을 하는 거야.”

“전학 안 해.”

“앤디!”

스윈턴 부부는 아들의 미래가 걸린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알파로 자라 온 사고방식과 생활 습관을 바꿔야 했고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래서 진짜 그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거야?”

학기가 시작하면 돌아갈 학교. 그 학교가 문제였다. 앤드류가 다니는 학교는 일반 학교가 아닌 기숙 학교였다. 그것도 알파 전용 기숙 학교.

설립된 지 100여 년이 지난 학교인데 대체적으로 상류층 자제들이 다닌다. 과거에는 작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입학이 가능했는데 산업화가 되면서 자본을 축적한 이들도 다니게 됐다. 앤드류는 후자에 속했다. 꽤 탄탄한 중견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스윈턴가의 막내아들인 부친은, 형들과 비교하자면 아주 작은 사업체였지만 중소기업 하나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런 특수한 역사를 가진 학교이기 때문에 현재는 왕족, 귀족, 언론, 기업을 물려받을 후계자들이 친목을 도모하며 다니는 학교였다. 이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가 명예였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게 많이 희석이 된 상황이지만 유구한 역사답게 명문 대학교 진학을 위한 커리큘럼도 세밀하게 짜인 학교였고 교사들의 인맥도 넓었다. 

가을부터 새 학기가 시작되는 시스템이라 만 열아홉 살인 앤드류는 현재 이 나라에선 성인이었지만 아직 기숙 학교의 학생이었다. 몇 개월 정도 더 공부를 한 다음에 시험을 보고 대학교에 진학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주 당연하게도 그 학교는 오메가는 다닐 수 없는 곳이다. 앤드류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지만, 단지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수용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왜 마음대로 학교를 옮기려고 그래? 이제 얼마나 남았다고! 몇 개월이면 졸업인데!”

“앤드류… 몰라서 묻니?”

오메가를 상대로 벌어지는 사건 사고는 여전했다. 아직도 사회적 약자였고 약자는 늘 강자보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나라고 모를 줄 알아? 나도 알아. 나 오메가라며. 오메가 됐다며! 그래도 전학은 안 해! 안 할 거야!”

“얘가 철딱서니 없게 왜 이래? 정말! 너 한두 살 먹은 어린애야? 열아홉 살이나 먹었으면서!”

“그러니까! 이제 졸업인데! 여름이면 졸업인데! 조금만 숨기면 되는 건데 왜, 내가 왜 학교를 그만둬? 지금 당장 몸이 이상해진 것도 아니고! 발현해서 오메가가 된 것도 아닌데!”

“…….”

“19년을 알파로 살았는데 갑자기 오메가라면 내가 하루아침에 어떻게 받아들여? 지금까지 살아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어떻게 바뀌어? 내 친구들도 그 학교에 있고, 나도 거기에 있는데! 내 추억도 다 거기에 있는데!”

“…….”

“나는 내가 알파인 줄 알고 자랐는데 엄마가 붙여 준 가정교사가 갑자기 나한테 오메가의 생식 구조나 힛싸를 가르치려 들잖아! 그걸 나한테 가르친다고! 하루아침에 어떻게 바뀌어? 나한테도 시간을 줘야 할 거 아니야!”

앤드류에게는 충격이었다. 이렇게 오메가가 범죄의 표적이 되어 있는 줄 몰랐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알파 자식을 둔 부모들은 딱히 오메가가 받는 차별에 대해서 가르치진 않는다. 오메가들은 사회적으로 이렇게 차별을 당하니까 너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교육을 하는 부모들은 별로 없다.

또한, 러트와 같은 폭력성과 성욕이 뒤엉키는 순간이 위험한지도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어두운 거리를 걷지 말거라. 알파들 무리가 많은 곳은 피하거라. 억제제는 잘 챙기고 있지?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은 알파인 자식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앤드류도 사실 잘 몰랐다. 몰랐던 것을 배우니 혼란에 혼돈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인이 오메가일 거라고 가족들이 추측을 했기 때문에 소중히 대해야 한다는 사명감 비슷한 것은 있었다. 

고로 극단적인 혐오는 없었으나 어쨌든 적응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앤드류는 자신의 일상이 바뀐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졸업은 꼭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 하고 싶다고 완강하게 굴었고 유전으로 이어진 고집인 터라 가족의 대립은 며칠 더 이어졌다.

“와. 그래도 밥은 먹고 똥은 싸네.”

사람이 그래도 매일 방에 틀어박혀 살 수는 없었다. 부모님이 없는 틈을 타 몰래 나와 식사도 하고 바람도 쐬는 앤드류를 보며 여동생이 비아냥거렸다. 앤드류는 무시하면서 그라탱을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먹고 살자고 하는 투쟁인데. 먹어야지.”

그때였다. 차 소리가 울렸다. 이제 막 맛있게 데워진 걸 한 입 먹으려던 앤드류의 동공이 커졌다. 예상보다 이른 스윈턴 부부의 귀가에 허겁지겁 일어났지만 2층으로 사라지기 전에 스윈턴 부부가 들어왔고 정확히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의 침묵이 오고 갔다.

“앤디. 앉아.”

며칠간 자신이 벌인 투쟁의 급이 갑자기 내려간 기분이었다. 스윈턴 부부는 앤드류에게 폭탄 선고를 했던 날처럼 소파에 앉았다. 그때보다 더 우울한 표정에 앤드류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어떤 독설과 회유가 날아와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는, 투사와 같은 마음을 다잡고 그 앞에 섰다. 

“아후. 저 화상.”

“내가 뭐?”

어머니는 누구 닮아 저런 걸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을 했다. 앤드류는 손가락을 가리켜 엄마를 집고 싶었지만 분위기 더 나쁘게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어머니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학교 측에 말해 놨어.”

“뭐? 엄마!”

“이게 어디서 엉덩이를 들어! 말 끝까지 안 들어?”

앤드류가 순간 움찔했다. 

“앤디. 엄마랑 아빠는 네가 정말로 그 학교로 안 갔으면 좋겠어.”

“나는 갈 거야.”

“네가 말을 안 들을 거라는 게 문제지만.”

그 체념 어린 목소리에서 앤드류는 희망을 보았다. 

“네 생각보다 열 배는 더 조심하고 경계해야 해.”

“그 말은…….”

“졸업해.”

“진짜?”

“진짜.”

“그럼 학교는 왜 갔어?”

“독방 신청하러. 자격 조건은 안 되지만 부탁했어.”

왕족이거나 특수한 상황에서만 요청한다는 독방을 부탁했다고 말한 부모님은, 학교 측에서 마침 룸 하나가 남았다면서 앤드류 스윈턴이 사용하게 해 주겠다고 했다. 부모님의 허락을 쉽게 믿을 수 없었던 앤드류는 벌떡 일어났다. 왁왁.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괴상한 소리를 내는 걸 본 스윈턴 부부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지금 좋아할 일이야?”

“응! 좋아할 일이야!”

앤드류는 근심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게 있는 법이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걸 허락받은 앤드류는 부모님의 뜻을 따라 가정교사가 오메가에 대해 가르치는 걸 받아들였다. 시간마다 딴청을 피우기는 했지만 땡땡이는 치지 않았던 앤드류는 2주가 지난 뒤에 짐 가방을 챙겼다. 

데굴.

약통 속의 알약이 굴러갔다. 억제제였다. 하루 한 알을 주기적으로 복용하면 허허벌판에서 페로몬을 흘리며 열병을 앓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에 구입한 약이었다. 힘들게 구한, 알파 페로몬을 흉내 낸 향수와 탈취제도 넣었다. 페로몬과 향수는 엄연히 다르지만 혹시 모르니 뿌리고 다니라는 말에 앤드류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향에 인상을 구기면서도 챙겼다.

하루 한 번 전화를 꼭 하는 조건을 걸었지만 부부는 여전히 걱정이었다. 학교까지 차를 태워 준 부모님은 앤드류를 보내기 전에 말했다.

“앤드류. 몸조심하고.”

울컥한 부모님이 안아 주자 앤드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들어가라고 등을 두드리는 투박한 아버지의 손길을 느낀 앤드류가 발걸음을 옮기다가 교문 앞에 잠시 섰다. 거대한 교정을 바라본 앤드류는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3년 동안 다닌 학교인데도 낯설었다. 

붉은빛의 높은 담장은 변함이 없었다. 얼핏 보건대, 쓸데없이 넓은 후원과 정원도 여전했다. 동쪽으로 보이는 학교 본관의 높은 시계탑도 여전했으며 서쪽 멀리에 보이는 기숙사도 변하지 않았다. 19세기 건축물과 21세기 건축물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학교는 호사스러웠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지만 어마 무시한 토지 위에 세워진 학교는 여전했다. 아마 실내 체육관 1, 2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이제는 폐허가 된 폴로 경기장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낯설었다. 앤드류는 순간 자신이 외부자가 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학교는 스스로의 역사에 자긍심이 높았다. 학생들도 그랬다. 그런 곳은 나쁘게 말하자면 외부에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들은 때때로 오만했고 그것을 굳이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약간, 아주 약간 걱정이 들었다. 학교로 돌아오면 마냥 기쁠 줄 알았는데 ‘오메가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진행된 가정교사의 수업이 효과가 있었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을 것들이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제 옆을 지나가는 수많은 알파들. 너도 알파, 쟤도 알파, 뛰어가는 애들도 알파, 알파, 알파. 그 알파들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눈치를 보는 자신. 앤드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신 차려. 난 얼마 전까지 알파였어! 아니! 지금도 알파야!’

큰 비밀이 있는 것처럼 눈치를 보던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나는 알파다. 나는 알파다. 나야말로 알파다.’ 

이제 정말로 알파들만 득실거리는 곳에서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하려 애를 썼지만 가정교사의 경고가 떠올랐다.

‘앤드류. 알파로 살았으니, 알파들이 어떤 종류들인 줄 알죠?’

그것은 부모님의 어떤 잔소리보다 더 현실적으로 와닿았다. 

또래 알파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알파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혈기왕성한 시기이니 오메가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으며 그만큼 자제심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살면서 입만 열면 오메가만 생각하는 알파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앤드류는 그런 부류를 싫어해서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까지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는가를. 

‘당신의 결정은 무모하기 짝이 없네요, 앤드류. 정말로 페로몬 한 줄도 흘려선 안 돼요. 무리에 홀로 떨어진 오메가 한 명이 그들 입장에서 얼마나 군침 도는 것일지 잊어선 안 돼요. 각오 단단히 해요.’

주의를 주던 것이 왜 이런 순간 떠오를까. 교육을 받을 때에는 나 몰라라 했던 것들이 이제 와서. 최악의 상황들이 사진처럼 스쳐 지나갔다. 앤드류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을 것이다. 나는 절대 안전할 것이다. 그럼! 나는 오늘 하루도 환상적으로 보낼 것이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 줄 모르는 채 앤드류는 아직 떠나지 않은 부모님을 향해 밝게 웃어 보인 뒤 당당히 교문을 넘어갔다. 어떻게든 안 들킬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앤드류는 학교로 돌아왔다. 

기숙사 입소 마지막 날이라 학교는 어수선했다.

앤드류는 익숙한 걸음으로 기숙사로 향했다. 몇 년 동안 생활한 곳이라 낯설지는 않았으나 입 안이 계속 말라 갔다. 친구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올 때마다 대충 받아 주던 앤드류는 곧장 관리 사무실로 향하면서 제 옷에서 희미하게 나는 향기를 맡았다. 부모님이 사 준 알파 페로몬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페로몬이 아니라 페로몬을 흉내 낸 것이기 때문에 발현하지 않은 앤드류도 향을 조금 맡을 수 있었는데 빈말로도 괜찮다고 여길 것이 아니었다. 

‘페로몬은 다들 이렇게 역한가? 이거 문제는 없는 거겠지.’

생각을 하면서 불쾌하고 눅눅한 향기를 몸에 두르고 복도를 걸었다. 넓은 창을 향해 쏟아지는 태양에 먼지가 유난히 선명했다. 그것들을 헤치며 방을 배정받기 위해 사무실로 향하던 앤드류가 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모습에 잠깐 멈칫했다. 다부진 어깨를 소유한 그는, 밝은 금발에 붉은빛 눈동자를 가진 자신의 친구 제임스였다. 

“앤디! 이 새끼야!”

달려와 우악스럽게 목을 쥐어트는 통에 숨이 막혀 왜 이래! 하면서 팔을 툭툭 쳤지만 소용없었다. 방학 사이에 키가 더 큰 것인지 거대한 덩치로 누르면서 목을 조여 대서 숨이 갑갑했다.

“어떻게 전화 한번 없이 잠수를 탈 수가 있어. 어? 뭐 하고 놀았기에? 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앤드류를 쥐고 흔들던 제임스는 이내 뭔가 이상한지 멈칫하더니 앤드류를 놓아줬다. 가장 친한 친구라서 이런 스킨십은 스스럼없었는데 갑자기 장난을 멈추자 긴장이 됐다. 도둑이 제 발 저리고 있었다. 주변을 빙빙 돌면서 묘한 시선을 보내서 식은땀이 났다. 한참 살피던 제임스가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비밀스러운 얘기를 한다는 듯이 물었다.

“발현했냐?”

“어?”

“향기가 조금 나는데. 킁킁. 봐, 이거 알파 향기 아니야?”

앤드류는 순간 대응을 못 했다. 알파 향을 뿌리고 왔으니까 알파 향이 나는데 그게 내 알파 향은 아니고. 그러니까 그게…….

“발현한 거 아니야? 어떻게 보냈어? 헐. 너 설마?”

“서, 설마?”

“오메가랑, 발현을?”

“야. 그런 거 아니야.” 

“정색하기는. 그럼 혼자 보냈어? 킁킁. 아직 형질 제어가 서툰 걸 보니 며칠 전인가 본데?” 

앤드류는 입술을 깨물었다. 향수를 뿌린 것이 패착이었나? 고민을 하는 앤드류는 멋쩍게 아, 어. 어. 하면서 겨우 장단을 맞췄다. 

제임스는 네가 드디어 알파가 되었구나, 하면서 러트는 아직이냐 뭐냐 질문을 쏟아 냈고 대충 대답을 하면서 앤드류는 방 키를 받으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제일 친한 친구가 이렇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니. 자괴감도 들고 착잡함도 들었다. 일단 피하고 싶어서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제임스가 앤드류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

놀란 앤드류가 돌아보자 제임스가 더 당황했다.

“뭘 그렇게 놀라?”

“아니, 키, 키 받아야지.”

“내가 받아 놨지. 짜잔.”

앤드류는 제임스가 내민 열쇠를 어색하게 웃으며 받았다. 제임스의 눈초리에 의아함이 깃들자 얼른 호수를 확인했다.

301호.

어서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은 생각뿐인 앤드류는 룸으로 향하면서 제임스가 옆에서 하는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네가 그 녀석 얼굴을 봐야 해. 개싸가지가 정색을 하더라고. 담당 찾아간다고 아까 올라가던데, 킥킥. 글렀어.”

301호에 도착한 앤드류가 제임스를 돌아봤다. 뭔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앤드류의 반응을 살피던 제임스는 곧 실망한 기색을 했다.

“너 아무렇지도 않아?”

아니, 그래서 좀 쉬고 싶어.

속으로 생각하면서 앤드류는 최대한 제임스에게 설득조로 얘기했다.

“짐, 나 좀 쉬고 싶어. 사실 며칠 몸이 아팠거든.”

“그래서 들어간다고? 대책도 없이?”

“어. 너도 네 방으로 가.”

실망하는 제임스의 얼굴을 뒤로하고 문을 닫은 앤드류가 그때야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알파들만 있는 곳이라 다들 형질 제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제임스가 옆에서 저 새끼 향이 어쩌고저쩌고 구구절절 말했으니까. 

오메가와 관계를 가진 후 몸에서 나는 잔향에 대해서도 제임스 덕분에 이론으로 독파한 앤드류에게 다행인 것은 아직 발현 전이라서 알파 향을 맡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극을 느낄 수도 없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앤드류를 굉장히 안도하게 만들었다. 

알파 향에 이성을 잃고 달려들 일도 없었고 뒤가 젖을 일도, 오메가 향이 퍼질 일도 없었다. 한층 수월하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제발 발현이 오지 않기를 빌었다. 아니, 평생 안 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애써 생각을 치워 버리고는 방을 정리할 생각을 했던 앤드류는 곧 방에 침대가 두 개, 책상이 두 개, 서랍장이 두 개. 모든 것이 짝을 맞춰 두 개씩 놓여 있는 것을 봤다. 

‘분명 독방이라 했는데? 아직 방을 안 치웠나…….’ 

둘러보니 방은 꽤 넓었다. 독방을 준다 했지만 왕족도, 대기업 총수 아들도 아닌 자신에게 뭐 얼마나 좋은 방을 줄까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좋은 방이었다. 창도 넓었고 햇빛도 잘 들었다. 

긴장했던 몸이 쾌적한 방을 보자 쉽게 풀어졌다. 이곳이 앞으로 유일한 쉼터가 될 것이다. 편하게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공간이 넓고 깨끗하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방은 합격!”

가벼운 마음으로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방이 마음에 드니까 어쩐지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 같았다. 알파에서 오메가가 된 것도 별일 아니지, 아니야. 생각하며 서둘러서 짐을 풀 작정으로 캐리어를 여는 순간이었다.

끼익.

그건 분명 문소리였다. 방금 전에 혹시 제임스가 따라 들어올까 싶어서 문을 잠갔음에도 문소리가 울렸다. 누군가가 열쇠를 따고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앤드류가 굳어서 뒤돌았다. 문고리는 거침없이 돌아가더니 앤드류가 허리를 마저 피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

“……?”

잠긴 문이 열렸고 그가 있었다. 그가.

앤드류는 당황스러웠다. 누군가 방에 들어와서 놀랐고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라 더 놀랐다. 얼굴을 보고 멍 때리다가 자연스럽게 그가 들고 있는 열쇠를 보았고 다음에는 검은색 작은 캐리어가 보였다. 앤드류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여긴 왜?”

여긴 분명 독방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독방에 너는 왜 들어왔느냐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지만 그는 놀랍도록 변화가 없었다. 

그는 조지 하트였다. 

얼빠진 앤드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차가운 얼굴의 주인공은 푸르게 빛나는 눈을 감았다 뜰 뿐 별다른 감정 표현이 없었다. 조용히 들어와 조용히 주변을 살펴보고는 약간 인상을 쓰는 게 전부였다.

앤드류는 마치 없는 사람이라는 듯 시선도 주지 않았다. 조지는 앤드류가 차지하려던 책상에 제 책들을 올려 두고는 벽에 붙어 있는 침대 위에 제 재킷을 벗어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먼지가 신경 쓰이는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신선한 바람이 볼을 간지럽혔지만 앤드류는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건 조지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그 모든 동작은 몹시 우아했으나 정적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있었다. 손길 하나하나가 소음이 없었다. 꼭 귀신을 보는 것처럼 조지를 올려다보던 앤드류는 조지의 태도에 불쾌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내가 쓰겠다, 하는 말도 없이 책상과 침대를 저 좋을 대로 골라 버린 조지였음에도. 

“왕자?”

확인하려는 듯이 묻자 조지는 힐끔 앤드류를 바라보더니 커프스단추를 느리게 풀었다. 소매 걷는 걸 멍하니 보던 앤드류는 그제야 숨을 토하는 듯이 급하게 물었다. 

“와, 왕자, 왜 여기 있어?”

“누가 왕자야?”

“아, 그래, 네가 왕자는 아닌데… 왕족이니까.”

조지는 전 공주의 아들이었다. 전 자가 붙은 이유는 그녀가 결혼을 하기 위해서 가문의 성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족은 아니었으나 별명은 왕자인 조지 하트가 이 방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 너 여기 왜 있어?”

질문에 조지는 짜증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내 방이니까.”

“여기 내 방인데. 너 301호 들어온 거 맞아? 잘못 들어온 거 같은데?”

앤드류의 말에 그는 허리춤에 팔을 올리고는 앤드류를 골똘히 바라봤다. 조지는 분명 앤드류를 알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는 하도 유명해서 학교는 물론 모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앤드류는 무명에 가까운 학생이다. 그러니까 지금 저렇게 무슨 이상한 고철물을 보듯이 보고 있겠지. 현재 이 학교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뿌리는 왕족이나 왕족은 아니라는 그가 앤드류를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여기, 내 방이야.”

그 말에 잠깐 생각을 한 앤드류는 인상을 썼다. 그의 손에 든 열쇠고리엔 <301>이라고 새겨 있었다. 조지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서 가방을 열었다.

“방을 잘못 찾은 거 아니야?”

“네가 잘못 찾은 거지.”

“…….”

“내 거라고.”

저 봐. 싸가지.

왕자라는 별명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특별한 배경에 어울리는 시선을 끄는 외모, 그리고 그에 걸맞게 그 뒤를 따라다니는 수많은 미디어들. 그런 특별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란 것과 별개로 학교에서 그가 왕자라고 불리는 것은 그 녀석이 개싸가지이기 때문이다. 저 오만한 표정을 보라. 

정말로, 이 방은 한 치의 의문도 없이 자신의 방이라는 듯이 우아하게 말하고는 짐을 정리하는 조지를 앞에 둔 앤드류는 대꾸할 수도 없었다. 상대방이 너무너무 태연하니까, 정말로 뭔가 착오가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그게 믿을 만하게 느껴졌다. 그럴 만한 태도였다.

“어… 그래. 뭔가 잘못됐나 보네. 그래.”

너무 당당한 태도에 뭐라 말을 못 꺼내겠는 앤드류가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당장 사무실에 가서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려고 성나게 복도를 걷고 있는데 제임스가 앤드류를 잡았다. 

“오, 벌써 쫓겨났어? 4분. 이야, 난 5분은 갈 줄 알았는데.”

“뭐야, 너 뭐 알아? 왜 내 방에 쟤가 있어? 나 분명히 독방 신청했는데 왜 저, 저, 저…….”

“저 왕싸가지랑 너랑 같은 방이냐고? 앤디, 너 내가 아까 했던 얘기 어디로 들었어?”

“뭐… 뭘? 네가 아까 무슨 얘기를 했다고!”

짜증을 내는 앤드류를 보며, 제임스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것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사용할 B동 독방 수도관이 어제 터졌대. 수리하려면 바닥을 다 들어내야 하는데 그럴 바에는 그냥 리모델링하자는 말이 나와서 갑자기 공사가 예정됐어. 그래서 독방 신청자들 짝지어서 한방에서 머물게 한다는데? 너 독방 신청했다며.” 

“…….”

앤드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앤디?”

“바, 방. 다른 방. 다른 방은?”

“없어, 다른 방. 기숙사 꽉 찼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저 지랄 맞은 성깔의 왕자도 결국 301호 키를 받으신 거지.”

“…….”

“생각해 봐. 저 자식이 얼마나 지랄을 떨었을지. 그런데도 들어갔잖아? 그 이유가 뭐겠어?”

앤드류가 복도 끝에 있는 방문을 바라봤다. 제임스는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지의 거부권도 먹히지 않았는데 그냥 평범한 학생에 불과한 앤드류가 뭐라고 난리를 친들 학교 측이 들어줄 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앤드류는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그건 바로 온 국민이 모두 잘 알고 있는 조지의 형질 때문이었다.

“저 녀석 알파지……?”

“뭔 소리래. 당연히 알파지.”

“…….”

“그것도 우성.”

“…….”

“재수 없게 우성이지.”

남에게 굳이 허리를 굽힐 필요도 없는 사람이라 늘 고고하고 고상한 조지는 형질도 우성 알파였다. 앤드류의 머리가 빙빙 돌았다. 우성. 우성 알파인 조지. 그리고 나는. 나는.

‘우성 오메가네요.’

정밀 검사를 받고 결국 진료실에서 울음을 터트렸던 자신이 떠오른 앤드류는 갑자기 집이 그리워졌다. 스스로도 의문이 들었다.

‘괜찮을까?’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두 형질이 같은 방에 있을 때 벌어지는 일들은 대부분 19금을 넘어서 24금이었다. 19금 동영상도 ‘우성’ 자가 들어가면 다운로드 수가 압도적이었으며 로맨스 소설들의 주인공들도 대부분은 우성 알파였다. 

최고의 조건을 넘어서 최고의 형질까지 부여해 주는 것이다. 번식을 향한 억누를 수 없는 본능은 오감을 자극시키기 충분했다. 게다가 자신의 오메가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은 우성 아니고선 알 수 없을 지경이라 했으니까 흥미롭기도 했다. 

그 우성 알파가 있다. 그것도 내 방에. 

이 학교에 존재하는 단 한 명의 우성 오메가 예정자 앤드류는 휴게실을 서성였다. 방금 사무실에서 독방에 관한 문제로 한바탕 소란을 피웠지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조지 하트도 어쩌지 못한 문제이니 앤드류가 나선다고 바뀔 리가 없었다. 사정하는 앤드류에게 담당자는 공사는 이미 시작됐고 아주 대대적으로 손볼 계획이라며 신이 나서 말했다. 

‘두 달이면 돼. 두 달만 참아.’

“두 달.”

그것도 두 달. 하루 이틀, 일주일도 아니고 달이었다, 달. 두 달은 꼼짝없이 조지와 함께 방을 쓰게 된 것이다. 

“미치겠다.”

어쩌면 욕심을 부린 것일까. 이 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이 그렇게 큰 욕심이었나. 부모님께 철없다는 소리를 듣고 걱정을 끼치며 여기까지 왔는데. 

첫날부터 이런 난관에 봉착할 줄 몰랐던 앤드류에게 기숙 학교는 일종의 자격 심사대이다. 24시간 알파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에서 오메가임을 들키지 않는다면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도 형질을 숨기는 일이 가능할 것 같았다. 

평생 알파로 살고 싶었기에 각오 단단히 하고 온 참이었지만 그 의미가 영혼이 다치는 것까지 감수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는 일은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앤드류는 두 손을 모으고 고민했다. 오메가로서의 삶과 알파로서의 삶의 기로에서.

항복을 선언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301호>

결론적으로 문 앞에 섰다. 2시간 만이었다. 

‘항복은 개뿔! 하는 만큼 해 보는 거야! 알파답게! 자신 있게! 당당하게!’

알파 기숙 학교라도 학생들은 러트 억제제를 주기적으로 복용하는 게 규칙이었고 그걸 믿어 보기로 했다. 자신도 발현 억제제를 먹었으니 높은 확률로 무사히 두 달이 흘러갈지 몰랐다. 운이라는 게 따라 주면 조금 더 쉬울지도 몰랐다.

행복 회로를 돌리며 각오를 다진 앤드류가 방문을 열었을 때 그를 반긴 것은 수증기와 향기였다. 살짝 열린 욕실 문 사이로 뿌옇게 올라온 수증기는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샤워코롱인가?”

욕실 입구를 잡아먹은 향기는 좋았다. 인위적이지 않고 날것의 청명함을 그대로 담아내 상쾌했다. 가슴에 차오르는 상쾌함에 앤드류는 절로 크게 숨을 들이마시었다.

수증기에 색이 있을 리 없음에도 푸른색이 보였다. 잔잔한 파도가 흘러들듯 넘실거리는 수증기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향기가 몽글거렸다. 비현실적인 감각에 드디어 시신경이 미쳤나 싶어서 눈을 꾹꾹 누른 앤드류는 타이밍이 별로라는 생각을 했다. 

아주 당연하게 조지가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뚱한 얼굴로 자신을 반겼으면 자연스럽게 대화라도 했을 텐데 욕실에서 몸을 씻고 있으니 표현할 수 없는 민망함이 몰려왔다. 따뜻한 차라도 마신 것처럼 속이 노곤노곤해져서 손끝으로 얼굴을 훔친 앤드류는 자신을 다잡았다. 

나는 알파다. 조지가 씻는 게 당황할 일은 아니다.

생각하며 열기가 잠식한 곳을 벗어나려던 앤드류가 불현듯 몸을 돌려 욕실 문을 바라봤다. 

욕실!

조지와 자신이 이 방을 배정받은 이유를 알았다. 욕실 문제였다. 일반 룸에는 별도의 샤워실이 없었다. 전통을 고수한다는 학교 측은, 함께 목욕하는 문화를 유지한다는 이유로 백여 년째 공동 샤워실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독방에 샤워실을 만든 것은 예전에 한 학생이 왕족의 알몸을 몰래 찍어 유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성기 크기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왕실은 놀림거리가 되었고 그날 바로 독방이 신설됐다. 이 방은 원래 독방이었다가 앤드류와 조지가 배정받은 것이니 욕실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신경 써서 배치한 거야.’

기숙사 사무실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부모님은 앤드류의 건강을 핑계로 독방을 부탁했고 학교 측은 어쨌든 최대한 나은 환경을 제공하려고 노력을 한 것이다. 룸메이트가 조지인 건 실패였지만 앤드류로선 방을 떠나지 못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한 명의 우성 알파와 대다수의 알파들 중에 고르자면 우성 하나를 고르는 게 차라리 현명해 보였다. 도긴개긴이지만.

‘아. 난 이 방을 절대 떠날 수 없구나.’ 

다시 한번 깨닫고 각오를 다지는데 샤워 호스를 잠그는 소리가 났다. 앤드류는 숨을 골랐다. 지금부터 까칠한 왕자를 설득해야 했다. 조리 있게 말을 할 자신은 없었지만 감정에 호소해 볼 작정이었다. 몸이 아프다는 걸 최대한 부각시키면 아무리 싸가지 없는 인간이라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까?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단어를 고르는데 욕실 문이 열렸다. 마른침을 삼켰다.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저기, 조.”

그런데, 넌 왜 그 꼴일까요? 

수건으로 아래만 두르고 나온 조지 덕분에 예상치 못한 반라를 마주한 앤드류는 당황했다. 훈기로 약간 열이 오른 상태였는데 난데없이 조지의 젖은 몸을 보게 되었다. 조지의 뒤로 수증기가 여전히 몽글거리며 퍼지고 있었다. 파란 물감이 뿌려진 것 같았고 앤드류는 정말로 시신경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짧게 고민을 했다. 돌팔이 의사가 자신의 몸에 생긴 문제를 오진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 보이는 조지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조지의 몸은 생각보다 단단해 보였다. 건강 체질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알몸을 보니 어깨도 넓었고 골격은 컸다. 당황한 와중에도 빠르게 1차 스캔을 끝낸 앤드류는 정처 없이 조지의 몸을 배회하던 눈동자가 조지의 젖은 얼굴을 마주하자 침착하려 애썼다.

‘침착해. 침착하자 앤드류. 나도 알파였어. 늘 보던 알파의 몸이야. 근데 내가 알파일 때 어떻게 했더라? 어떻게 했지? 뭐가 자연스러운 거지? 제임스 그 녀석이 알몸으로 끌어안았을 때 나는 뭘 했더라? 징그럽다고 했던가? 나 뭐라 해야 함?’

이미 자연스러움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평소의 자신을 부르짖던 앤드류는 애써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한 최고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오, 옷 좀 입고 나오지. 문도 좀 닫고 씻고…….”

젖은 머리를 한 조지는 앤드류를 무시했다. 

“안 돌아갔네.”

“가긴 어딜 가. 내 방인데.”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러나 너무 어색하게 웃던 앤드류는 조지가 서랍에서 옷가지를 챙기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에 들린 것은 분명 브리프였다.

“야! 야야야야!”

세상 다급한 목소리에 조지가 돌아봤다.

“우리 매너는 지키자.”

“매너?”

“처음부터 막 알몸 까고 그래야 할까? 물론 너도 알파 나도 알파. 둘 다 알파니까 이상한 건 아니야. 아니지. 알파끼리니까.”

“…….”

“나 여기서 공동 샤워실에서 샤워도 했는걸. 알파끼리. 시설 꽤 좋아. 아니, 사실 되게 낡았어. 넌 모르지? 아니, 이게 아니라. 근데 너는, 너는 민간인인 내가 네 몸을 막, 막 그래도 돼?”

횡설수설에 조지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돌아.”

“어?”

“…….”

“아! 아, 뒤로. 그 방법이…….”

약간의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니 툭, 하고 수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무 생각도 안 하려 했지만 얄미운 뇌가 따단, 하고 알궁둥이를 자체 합성해서 보여 주었다. 자신의 재빠른 사고 체계를 탓하며 앤드류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미칠 것 같았다. 

‘알파의 몸뚱이를 몇 명이나 봤는데 이렇게 유난스럽게 굴어! 난 이성의 노예다. 노예다. 이성의 노예다. 저놈은 그저 왕족 끄나풀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난 왕족의 엉덩이가 궁금할 뿐이다. 지금 나의 머릿속을 채우는 상상은 그저, 그저… 그래! 웰시코기의 동실동실한 귀여운 엉덩이다. 귀여운 웰시코기 엉덩이. 음란함을 퇴치해 줄 빵실한 엉덩이!’

필사적으로 생각하는데 옷을 다 갈아입은 조지가 앤드류를 불렀다. 

“야.”

“어?”

돌아보지 못하고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내가 남이랑 같이 자는 거 못 해.”

그 말에 노곤해졌던 몸에 긴장이 확 몰려와 앤드류는 고개를 돌렸다. 알몸과 판판한 가슴 따위가 방해할 일이 아니었다. 옷을 다 입은 조지는 아직 물기가 가득한 얼굴에 짜증을 띄우고는 팔짱을 낀 채로 고깝게 앤드류를 보고 있었다. 앤드류는 방금 전에 자신이 했던 다짐을 상기하며 최대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자신의 미소가 꽤 친절해 보이길 믿어 의심치 않으며.

“침대 두 개잖아. 넌 거기서 자고, 난 여기서 자고.”

“…….”

“물론 내가 벽에 붙어 있는 침대를 쓰고 싶지만 배려를 해 주겠어.”

“같이 있는 것도 못 해. 남이랑.”

“…….”

“말귀 못 알아먹어?”

좋게 넘어가려 했던 앤드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대화를 해 보려고 했는데 나오는 태도가 밥맛이라 순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방 빼야 할지 몰랐다. 

“아니. 알아먹어. 지금 나 쫓아내려는 거잖아.”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혼자 쓸 거니까 나보고 방 빼라는 거잖아.”

“아니라고.”

“…….”

“이런 경우엔 네 쪽의 고마운 친절이지.”

“뭐?”

“고맙게 받을게. 사양 없이.”

“뭐… 뭘 받아? 사양을, 뭐?”

“난 결코 사람을 쫓아내지 않아. 네가 알아서 비켜 주는 거지. 아주 고맙게도. 네가.”

한마디로 꺼지라는 말을 돌려 하고 있었다. 앤드류의 인상이 구겨졌다. 조지는 이상했다. 표정이랑 태도, 말투와 목소리가 전혀 맞지 않았다. 차가웠다. 아무것도 관심 없는 얼굴로 싸가지 없는 말만 하면서 어투는 또 정중했다. 

“심기에 누가 되지 않게 알아서 물러나라?”

조지는 답하지 않았고 앤드류는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기가 찼다. 싸가지라는 소문만 들었지 직접 겪으니 가관이었다. 후, 하고 얼굴로 바람을 분 앤드류는 오기가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 안에 잠깐 자리를 비켰던 전 알파로서의 자존심이 불타올랐다. 

‘그래! 나도 알파였다! 자존심과 성질이라면 지지 않는 알파!’

앤드류는 자신의 기준으로 아주 괴상한 조지를 앞에 두고 의지를 다잡았다. 이렇게 나온다면 소리 없이 조용히 살자고 마음먹은 걸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설득도 사람을 봐 가며 하는 것인데 조지는 설득이 먹힐 사람이 아니었다.

“어이 왕자, 좋아. 확실히 하고 가자. 너도 지랄해 봐서 알겠지만, 안 된대. 방금 나도 사무실에서 개지랄을 떨었거든. 근데 안 된대. 두 달은 여기서 지내래. 내가 몸이 너무 안 좋다고 사정을 해도 안 된다고 싫으면 학교 그만두래.”

“…….”

“여기가 이런 학교더라고. 아주 냉정해.”

여기서 감히 조지의 심기를 거스르는 선택을 하게 되면 함께 지내는 두 달이 아주 피곤해질 것이다. 지나치게. 하루하루가 인내와 위기의 순간이 될 것이 뻔했다. 조지 저놈은 작정하고 속을 벅벅 긁어 놓을 것이고, 자신은 혹시나 발현이 올까 봐 피 말리며 지내야 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난 이 학교를 꼭 졸업할 거야.”

단호하게 말한 앤드류가 조지의 굳은 얼굴을 보다가 생글 웃었다.

“미안, 내가 배려심이 이렇게 없어요. 알파들이란 다 그렇지 뭐. 우주가 자기중심이잖아. 나도 내 세상의 주인이라. 너도 알지? 쏴리.”

네 심기를 제대로 거슬러 주마. 작정을 하고는 약 올리며 웃는 앤드류를 조지는 잠시 바라보더니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쿠션을 정리하고 누워 책을 펼쳤다. 경계를 풀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는 앤드류를 향해 조지가 말했다.

“후회할 텐데.”

“장담하는데… 절대로 나 혼자 후회할 일은 없을 거야.”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조지의 표정에 불쾌가 스쳐 지나갔다. 짧은 시간에 감정이 쓸고 지나가는 것을 본 앤드류는 희열을 느꼈다.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한 앤드류가 보란 듯이 짐을 풀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책을 읽던 조지가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던 조지가 책 정리를 끝내고 서랍장을 열어 옷을 정리하는 앤드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인상을 썼다. 등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무시하려던 앤드류가 사납게 고개를 돌렸다. 왜? 뭐? 할 말 있어? 전투적인 눈빛으로 보자 조지는 이제 대놓고 인상을 쓰며 물었다.

“너 사과 가지고 왔어?”

“뭐? 뭔 소리래?”

앤드류의 황당한 표정에 조지는 잠깐 생각을 하더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굴었지만 앤드류는 방금 전에 조지의 표정을 본 뒤였다. 이상했다.

“사과가 왜?”

“이 방은 사과 출입 금지야.”

질문에 답은 없고 다시 책을 읽는 조지를 황당하게 보던 앤드류가 말했다.

“왕자라 이거지? 사과 기피증이야? 아니, 독 사과 기피증인가? 내가 무슨 마녀야? 별거로 다 시비야?”

다분히 들으라며 하는 혼잣말에 조지는 아까의 감정만이 보일 것의 전부인 듯 반응이 없었다. 그게 얄미워서 앤드류는 짐을 정리하며 다짐했다. 절대 저 녀석과 친해지지 않겠다고.

그다음 날에 학기가 시작했다.

약간 들뜬 학교 분위기와 상관없이 앤드류는 정신이 없었다. 이걸 아무 일 없다고 봐야 하는 건지 스스로 가늠이 안 됐다. 어젯밤 조지에게 선전 포고 아닌 선전 포고를 한 다음에 별일은 없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수면 문제였다. 망할 조지 녀석이 독서 등을 계속 켜 놓고 있었기 때문에 잘 수가 없었다. 밤도깨비인지 잠도 안 자고 책만 보니 짜증이 나 죽는 줄 알았다.

자신이 가진 비밀 때문에 조지가 자야 잘 수 있었다. 지금은 알파인 줄 알 테니까 조지가 자신에게 허튼짓을 하지는 않을 테지만 긴장을 아주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조지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덩달아 앤드류도 잠을 못 잤다. 

어수선한 분위기와 동떨어져서 연신 졸린 눈을 비비는 앤드류는 자신이 수면 시간에 예민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이대로 책상에 누워 숙면을 취하고 싶어서 축 늘어진 어깨로 좀비처럼 수업이 있는 교실을 향해 걷고 있던 때였다.

“앤디, 어제 왕자랑 동침했다며?”

“앤드류, 첫날밤 어땠냐?”

땅까지 파고 들어갈 기세였던 앤드류가 별안간 허리를 세웠다. 졸음으로 흐리멍덩했던 눈이 반짝였다. 오늘 아침에 등교해서 지금까지 계속 들리는 질문이었다. 그 조지 하트와 앤드류의 동침 아닌 동침이 학생들에겐 꽤나 흥미로운 일인 게 분명했다.

“앤디, 조지랑 잤다며?”

“잘 해주냐?”

“뭔 개소리야? 너네 지금 일부러 이러냐? 어? 그게 궁금하면 네가 조지랑 처자든가!”

반나절을 시달린 탓에 짜증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답을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꽥 소리를 지르자 질문을 한 녀석들이 낄낄거리며 사라졌다. 씩씩거린 앤드류가 이를 갈며 말했다.

“저게 도대체 왜 궁금해?”

짜증을 가득 담아 말했더니 옆에 있던 제임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앤드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이게 뭐 그렇게 소란스러워야 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모든 이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궁금한 게 뭔데, 대체!”

“뭐긴 뭐겠어.”

옆에 있던 제임스가 말했다.

“몰라서 묻는 거거든? 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이 난리인 건데?”

“조지와의 첫날밤이.”

“이 자식이, 너까지!”

“아, 깜짝이야. 나 완전 심쿵. 왜, 왜 짜증이야?”

“하루 종일 달라붙어서 묻는데 그럼 내가 짜증이 안 나?”

정신적인 피로도 상당했는지 머리가 멍해 죽겠는데 난데없이 시선을 받자니 피곤해 죽을 노릇이었다. 결국 터져서 성질을 꽥꽥 부리면서 제임스에게 화풀이를 하던 앤드류는 순간 시원한 바다를 느꼈다. 

한 번 맡았던 조지의 샤워코롱을 후각이 벌써 각인했는지, 발길을 사로잡았는지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조지가 책을 읽으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왕족을 위해 길을 비켜 주었고 그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걸어가는 조지의 뒤통수에 달라붙는 시선들을 바라보던 앤드류는 억울했다

자신은 이렇게 고생하는데 저에게 질문을 하던 이들이 조지에게는 접근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게 왠지 자신은 호구고 조지는 아니라는 것 같아서 짜증도 나고 억울하기도 했다. 요즘은 세상만사가 불만인 앤드류라 조지가 사라지자 다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복도에서 소리를 질렀다.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건데? 쟤도 그냥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앤드류가 폭발하자 상황을 수습한 것은 제임스였다. 

‘다 죽여 버릴 거야아아아아아!’ 

하는 것을 붙잡고는 대신 사과하며 앤드류를 끌고 가던 제임스는 결국 복부를 아프게 얻어맞았다. 저항할 수 있었지만 이럴 때에는 얌전히 맞아 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제임스는, 이 새끼와 저 새끼를 찾아 가며 구타하는 앤드류를 향해 ‘알았어! 안 물어볼게!’ 하며 맞아줬다. 그 말에 씩씩거리던 앤드류는 제임스를 노려봤다. 

“아씨, 성깔만 더러워 가지고.”

“시끄러! 너 가. 가! 나 혼자 있을 거야! 가!”

앤드류는 한계였다. 증오의 눈길과 분노의 발길질로 제임스를 보내고 겨우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아. 피곤해.”

어제오늘 완전 피곤했다. 고독이 간절해서 혼자 있을 곳이 없나 생각하면서 복도를 돌아 나온 앤드류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서 있자 멈췄다. 지금 가장 보기 싫은 인간이 서 있었다. 바람이 잔잔하게 스며드는 창가에 기대어 책장을 넘기고 있는 것은 조지였다. 

앤드류의 파도치던 감정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풍경이 그랬다. 사라락. 책이 넘어가는 소리마저 고상하기 그지없는 풍경이 고요했다. 그 소리가 이렇게 귓가를 간질일 수 있다는 것을 앤드류는 조지 하트를 통해서 깨달았다. 책장을 하나 넘기는 손길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것이 무슨 영화에 나오는 장면 같았다. 고전 드라마에 나오는 귀공자나 하이틴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떠올랐다. 앤드류도 인정했다. 이래서 더 관심의 중심이라는 것을. 누가 봐도 아름다웠다. 덕분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왕자와 공주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았고 그래서 불행한 기억도 얻은 것을 안다. 

‘그건 좀 안타까웠지…….’

조지의 성격을 알고 있는 이 학교의 학생들조차도 조지의 인생 한 부분에선 애틋함을 보였다. 앤드류도 다르지 않았다. 이름을 치면 게시물이 한가득 뜨는 존재인 조지는 파파라치에게 찍힌 수많은 사진 중에 웃으며 찍힌 것이 단 한 장도 없었다. 유난스럽게 벽을 치는 성격임을 모두가 다 알았으나, 국민들에게 조지가 유독 아픈 손가락인 이유는 바로 전 공주의 죽음 때문이었다. 

조지는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

국민들이 사랑했던 전 공주는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사망 소식은 며칠 동안 방송이 됐기에 이 나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 조지 하트는 열한 살이었고 그 뒤로 친척의 집에서 자라다가 꽤 어린 나이에 기숙 학교로 진학한 것은 이 나라에 사는 누구나 다 알았다. 비통함에 물들기엔 열한 살의 나이는 너무 어렸고 그때의 이미지는 쉽게 떨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뉴스에 나왔던 어린 조지 하트의 얼굴을 떠올리던 앤드류가 뒤돌았다. 얼굴 마주치면 싸울 것이 분명했고 방해할 생각은 없어서 돌아가려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허튼소리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

잠깐의 연민도 사라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뒤돌았더니 조지는 여전히 책을 보고 있었다. 앤드류는 조지의 낮은 목소리를 복기했다. 둘이 아닌 누구도 들을 수 없게. 그러나 그 고상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뱉는 단어들은 늘 사나웠다. 

“뭐? 허튼소리?”

“들었잖아.”

“그래, 들었어. 무슨 허튼소리?”

“네가 그렇게 멍청한 거 같지는 않은데.”

“아! 아하! 그런 거? 내가 막 너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떠들고 그런 거?”

숨기지 않는 앤드류의 불쾌를 대면하면서도 조지는 태연했다.

“그래, 그런 거.”

“그게, 애들이 엄청 묻더라. 너랑 보낸 첫날밤이 어땠냐고.”

“첫날밤?”

“그래, 첫날밤. 동침이 어땠냐고 묻던데?”

“…….”

“…….”

“그래서. 뭐라고 말했는데.”

“뭐라고 말했을 거 같은데?”

“궁에 초대될 말은 아니길 바란다.”

“와, 이거 지금 공권력을 이용한 협박이야?”

“너 하는 짓에 따라.”

“걱정 마. 허튼소리는 안 했어.”

안심하라는 듯 말한 앤드류가 미소 지었다.

“개소리는 조금, 했을지도?”

“뭐?”

앤드류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그러나 호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마. 네가 공권력으로 민간인 협박하는 개싸가지인 거 애들도 다 알 거야. 아. 혹시 몰랐다면 지금 가서 말해 주지 뭐. 근데, 사실 내가 너에 관해 뭐라고 말해도 별 상관도 없을걸. 네 싸가지를 다들 잘 알아서.”

“…….”

“내가 뭐라고 말하는 걸 걱정하기 전에, 네 태도나 신경 써. 이런 식이면 내가 정말로 없는 말도 지어낼지 모르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조지가 책을 덮었다. 소리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너, 너나 허튼소리 하지 마. 알았어?”

불쾌해 보이는 얼굴을 캐치한 앤드류가 부러 시끄럽게 조지의 앞을 걸어갔다. 

‘장담하는데… 절대로 나 혼자 후회할 일은 없을 거야.’

혼자 남은 조지는 지난밤에 앤드류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후회할 일이라.”

그건 일종의 도발처럼 들렸다. 도발과 같은 말을 뱉은 녀석은 신기했다. 

조지가 만난 사람들 중 이런 사람은 없었다. 체구는 작은데 다부진 성격을 가진 앤드류는 많이 이상했다. 자신에게 이토록 성질을 내보인 사람은 앤드류가 처음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약을 올리는 솜씨가 가히 프로였다. 자신의 앞에서 조금의 비굴함도 없이 스스로 당당한 앤드류. 

“약점이라도 찾아야 하나.”

그러나 앤드류가 어떤 사람이든 조지는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301호가 온전히 자신의 공간이길 바랄 뿐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머문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 조지는 경험으로 배웠다. 

‘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건 너무 치사해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내로 앤드류가 떠나지 않는다면, 제 발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쩔 도리가 없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굴 줄이야. 

단언컨대 동거인을 쫓아내기 가장 좋은 방법은 수면 방해다. 

“어째 몰골이 어제보다 더 헬이다?”

제임스가 눈이 퀭해선 병든 닭처럼 비틀거리는 앤드류에게 말했다. 앤드류는 대꾸할 기력이 없었다.

“야, 앤디. 앤디?”

“시끄러…….”

“왜 그래? 어디 아픔?”

“잠, 잠이 부족해! 잠! 잠!”

간절함을 담아 부르짖으며 테이블에 고개를 묻고 바동거리는 앤드류 때문에 쓰러질 뻔한 우유를 사수한 제임스가 빵을 뜯어 먹었다. 

앤드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까칠하고 예민한 것에 걸맞게 싸가지까지 없는 조지와 맞지 않을 거라는 건 예측 가능한 범위였다. 같은 룸에서 생활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제임스가 생각하기로 앤드류는 어릴 때부터 적응력이 뛰어났다. 

한마디로 조지가 아무리 싸가지 없게 굴어도 앤드류는 콧방귀도 안 뀌고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게 조금 이상했다. 

이건, 반드시 뭔가가 있었다. 

잠이 부족하다고 울부짖고 있는 앤드류와 대비되게 조지는 창가에 앉아 너무나 멀쩡하고 여전히 고고한 자태로 우아하게 식사를 끝마치고 나갔다. 이쪽의 앤드류는 말 그대로 병든 닭인데. 제임스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혹시 너, 학대당하냐?”

“이걸 학대라 부른다면… 그래, 학대야.”

“정신적인 학대, 신체적 학대. 그런 거?”

“그래. 그런 거.”

별생각 없이 답하자 제임스는 심각한 표정이 됐다. 먹던 빵을 내려 두고는 앤드류의 손을 잡은 제임스는 무척이나 믿음직한 얼굴로 말했다. 

“싸가지가 공주의 아들인 걸 무기로 너한테 이상한 거 시켜?”

뭔 소리래? 하고 바라보는데 제임스가 손을 가볍게 쥐고는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나한텐 말해도 된다. 우리 우정이 몇 년인데.”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다, 이해한다. 원래 얌전해 보이는 새끼가 까 보면 변태라고 그랬어.”

“이해할 수 있게 얘기 좀 해 줄래?”

“이런 거, 이런 거 시켜?”

말하며 제임스는 주먹을 가볍게 쥐고는 손을 흔들었다.

“뭐 하는 거야? 그게 뭐… 야.”

의미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던 앤드류가 노골적으로 손을 흔드는 제임스의 손을 보다가 인상을 팍 구겼다. 피유- 하면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까지 손가락으로 재연한 제임스가 말했다. 

“알파들만 우글거리는 소굴에서 왕자가 금욕하지 못하고 설마 혹, 어어, 잠깐, 내 아침!”

앤드류는 제임스의 식판을 뒤엎을 기세였다. 얼른 자신의 아침을 사수한 제임스가 말했다. 

“네가 며칠 동안 비실거려서 그랬지. 합리적 의심이랄까?”

“합리적은 무슨 합리적! 넌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어? 어?”

“뭐가 들었긴. 어제 본 야동이 재생 중이지.”

오랜만에 걸작을 만났다고 눈을 반짝이다가 선심 쓴다는 듯이 ‘너도 빌려줄까?’ 했다. 앤드류는 고개를 저었다. 이 나이 때의 알파들이란 어쩜 이렇게 특별함이라고는 없는 것인지 한심했다. 그러는 자신도 불과 얼마 전까지 그런 것들을 궁금해했으면서.

“그럼 왜 그러는 건데? 어디 아프냐?”

방금까진 장난이었는지 제임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들이밀며 물어 왔고 앤드류가 답했다. 

“잠을 못 자서 그래.”

“잠을 못 자? 왜 잠을? 헐…….”

“이 자식아 그만해애. 진짜 화낸다.”

“왜? 나 아무 말 안 했다?”

“그래. 말을 말자, 말아.”

앤드류는 말 그대로 잠이 너무 부족한 얼굴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이대로 쓰러져 잠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계속 하품을 하던 앤드류가 음식을 도통 못 먹자 제임스가 말했다.

“같은 방 쓰기 많이 불편해? 나랑 바꿔 달라고 사무실에 말해 볼까? 내가 301호로 가서 조지 그 녀석을 박박 긁어 줘?”

걱정으로 하는 말에 앤드류가 고개를 저었다. 샤워실 때문에 방을 옮길 수도 없었으니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짐, 사람이 하루에 한 시간씩 자면서 살 수가 있나?” 

“그랬다간 죽지 않을까.” 

“그렇지?” 

앤드류가 한숨을 푹 쉬면서 테이블에 볼을 댔다. 시원했다.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자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앤디? 부르는 제임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렇게 깜빡 잠이 들었던 앤드류는 점심시간이 끝났다고 제임스가 깨울 때 겨우 일어났다.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와 앉은 몰골에 제임스는 다시 한번 심각하게 방을 바꿔 줄까 물었지만 앤드류는 고개를 저었다. 욕실. 욕실만 아니면 301호를 진작에 탈출했겠지만 저 이유가 너무 거대했다.

그날 저녁. 301호실 앞에서 앤드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신의 볼을 열심히 꼬집었다. 안에 조지가 없길 바라면서 방에 들어갈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요 며칠 사이에 앤드류는 방을 사수하기 위해 몇 가지 결심을 했었다. 

조지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게 노력하고, 혹시 마주치면 당당하게 굴 생각이었다. 이 방에서 지낼 권리가 자신에게도 있다는 걸 피력할 생각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당당함이었다. 당당함.

그러나 이틀 동안 수면 시간이 여섯 시간도 안 됐다.

뭐 그렇게 볼 책이 많은지. 조지는 밤새 책만 붙잡고 있었고 이건 고문과 다름이 없었다. 삼대 욕구 중 하나가 처참하게 무시당하고 있어서 미칠 것 같았다. 조지가 자야 자신도 잘 수 있는데 이 녀석은 도통 자는 법이 없었고 덩달아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수면 부족의 부작용으로 당당함은 사라지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이성을 놓아 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피곤했어도 밥 먹다 말고 제임스 앞에서 그대로 잠깐 잠을 자 버린 것이 신경 쓰였다. 자신의 체력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걸 의미했고 그럴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저 안에 악마가 있다. 먹히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멍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방 앞에서 얼굴을 아플 만큼 새게 주무르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 

‘만세! 조지가 없다! 없다!’

빈방에 속으로 쾌재를 부른 앤드류가 숨을 푹 내쉬었다. 아 좋아, 독방이야. 하면서 룰루랄라 서랍장에서 속옷을 꺼냈다. 조지가 있어서 샤워도 마음대로 못 했기에 기쁜 마음으로 샤워실로 들어갔다. 몸을 깨끗하게 하면 정신도 맑아질 거란 기대를 하면서 샤워를 하던 앤드류가 문득 깨달았다. 마음이 붕붕 떠서 알파 페로몬을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다. 

페로몬을 뿌려야 마음이 편안했던 앤드류가 욕실 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가서 가져올까 생각을 했는데 그러다가 조지를 마주치는 것이 걱정이었다. 곰곰이 생각을 하던 앤드류는 급격히 기분이 내려갔다.

‘내가 어쩌다가! 예전엔 이런 거 신경 쓰지 않았는데.’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져서 느리게 샤워 볼을 문질렀는데 거품이 풍성하게 나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거품 잘 난다. 아, 시원시원. 그래. 조지가 금방 들어오겠어? 페로몬 없어도 돼. 발현한 것도 아닌데 상관없지. 뜨거운 물 겁나 잘 나와. 완전 좋다.’

뜨거운 물도 잘 나오니 행복하기까지 했다. 수면 부족으로 감정이 널뛰고 있었으나 앤드류는 자각이 없었다. 따스한 물에 몸은 더욱 나른해지고 있었고 열이 올라 정신이 몽롱했다. 약이라도 한 것처럼 해롱거렸다. 몸이 개운해지기보다는 무거워져서 반쯤 내려온 눈꺼풀을 비비면서 머리를 말리며 나왔을 때 조지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헉.”

그때까지 콧노래를 부르며 행복 회로를 돌리던 앤드류가 귀신 보듯이 조지를 바라봤다. 의자에 앉아 있던 조지가 일어났고 앤드류가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바로 욕실로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당연하게도 조지는 욕실로 들어갔다. 느리게 돌아가는 머리임에도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방금 씻고 나온 곳에 누군가가 들어간다는 것이 이렇게 민망한 것이었나? 아직 훈기가 남아 있을 텐데. 씻을 때 뭐 실수한 것은 있나 생각했다. 가짜 페로몬 향수가 걸렸다. 혹시나 뭔가 걸릴까 초조해하는데 곧바로 나온 조지가 인상을 썼다.

“너 일부러 그래?”

목소리에 누를 수 없는 화가 있었다.

“뭐? 뭐가?”

“바디워시인지 샤워코롱인지, 일부러 사과 향 쓰는 거야?”

“아닌데? 내 거 무향이야. 가서 확인해 보든가. 너 왜 자꾸 사과 타령이야?”

조지의 짜증이 앤드류는 황당했다. 자신이 쓰는 것은 무향에 가까운 바디워시라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됐는데 조지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할 말은 많으나 하지 않는 것이 빤히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제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이네…….”

정말로 너무 피곤해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앤드류는 새삼 방이 좁다는 생각을 했다. 시비를 걸고 말다툼을 해도 피할 곳이 따로 없었다. 방 밖이 아니고서야. 그래서 더 피곤했다. 

잠이 간절했고 어김없이 밤은 찾아왔다.

이쯤 되면 인정해야 했다. 조지는 정말 독한 놈이라는 것을. 이불을 뒤집어쓰고 졸음과 사투를 벌이던 앤드류가 결국 폭발했다.

“너 안 자? 너 나 엿 먹이려고 안 자는 거지? 신종 고문법이야? 진짜 이렇게 치사하게 굴래?”

“정말 사과 향 아니야?”

“아 정말! 가서 확인해 보든가. 내 거 파란색 통에 있는 거니까 보면 될 거 아니야! 너 뭐 사과랑 원수졌어? 어?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이 꼴 보기 싫은 네가 나가든가.”

“뭐? 너 일부러 안 자는 거 맞구나.”

“난 원래 잠이 없어. 맘에 안 들어? 그럼 나가.”

“이게…… 됐어! 어디 두고 봐. 너는 얼마나 안 자고 버티나 보자고!”

‘같이 죽는 거야, 같이.’ 

중얼거리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앤드류는 미칠 것 같았다. 사라락거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에 노이로제 걸리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왜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이 있었는지 절절하게 깨달았다. 마음과는 다르게 이미 눈꺼풀은 반쯤 감기고 있었다. 최대한 눈을 크게 뜨며 버텼지만 몇 분 후에 스르륵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고 곧 멀어졌다. 

‘자면 안 돼! 안 돼! 안 돼돼돼돼…….’

잠과 사투를 벌이면서 잠에 들었다가 빠져나왔다가 반복을 하던 앤드류는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 아, 나는 패배자야. 하는 의식을 끝으로.

그러나 잠은 길지 않았다.

꿈도 없이 자던 앤드류가 놀라서 일어난 것은 새벽 2시 즈음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커헉… 큭…….”

숨이 막히는 소리에 깨어나 비몽사몽간에 돌아보니 독서 등을 켜 놓은 조지의 자리가 보였다. 책을 바닥에 떨어트린 조지는 몸을 둥글게 말고는 시트를 붙잡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란 앤드류가 벌떡 일어나서 조지에게 다가갔다.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파르르 떠는 조지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조지? 야. 조지?”

“크흑… 흐윽…….”

반응이 없었다. 앤드류가 급하게 손을 뻗어서 조지의 이마를 감쌌다. 발작과 비슷하게 몸이 요동치듯 튀어 올랐다. 놀란 앤드류는 최대한 침착하게 조지의 두 손을 잡았다. 시트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저어 대는 조지의 이름을 불렀다. 

“조지, 정신 차려. 조지. 조지 하트.” 

소용이 없었다. 앤드류는 당황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놀라서 어디든 도움을 청할 생각으로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나가려던 앤드류가 멈췄다. 조지가 앤드류의 옷을 잡고 있었다. 덜덜 떨면서도 힘을 주어 잡고 있었다. 

그 손길이 너무 떨고 있기에 뿌리칠 수가 없는 앤드류는 일단 조지의 옆을 지키는 것을 택했다. 먼저 깨워야 할 것 같았다. 옷을 붙잡은 손을 감싸 쥐자 조지가 이끌리듯 앤드류의 손을 있는 힘껏 잡아 왔다. 두려움에 빠져 엄마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의 손과 같았다. 하도 힘을 주어 잡힌 손이 아팠지만 빼지 않은 앤드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지, 조지. 괜찮아? 좀 일어나 봐, 응?”

말하는데 조지가 부지불식간에 발버둥을 멈췄다. 앤드류를 붙잡고 있는 손에도 힘이 풀어지더니 추욱 몸을 늘어졌다. 뭔가 잘못됐나 싶어 당황한 앤드류가 조지의 얼굴을 살피다가 꾹 감긴 눈꼬리를 타고 느리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는 멈췄다. 

툭, 하고 베개를 적시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렇게 조용히 떨어지던 눈물이 모이고 모이더니 곧 울음으로 번져 갔다. 조지는 턱을 덜덜 떨면서 악문 잇새 사이로 서러운 숨소리를 토했다. 한번 눈물길이 나자 눈물은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흐으으윽…….”

울음소리는 너무 작았다. 보기 힘들 만큼 턱을 떨면서 쏟아 내는 눈물임에도 불구하고 젖은 숨소리는 너무 조용했다.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잠결에도 이를 악물어 소리를 삼키는 조지의 모습에 앤드류는 충격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조지가 울었다. 그것도 어린아이처럼. 그 얼굴은 무척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온 나라가 침울했던 날, 장례식장에 서 있던 열한 살 조지의 울음과 닮아 있었다.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고 묘지 앞에서 울던 얼굴과 같았다. 조지는 어쩌면 사고와 관련된 악몽을 꾸고 있는 걸까? 

앤드류가 조지의 손을 힘을 주어 잡아 쥐고는 허리를 살짝 숙였다. 조지에게 조금 더 다가가 악몽에서 헤매고 있는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경련하듯 요동치는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찔거리는 게 안쓰러워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자신의 손이 따스하길 바라며 앤드류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숨을 골랐다. 

“조지, 괜찮아. 괜찮을 거야…….”

“……흐으윽…….”

“여기는 안전해. 괜찮아.”

“흐으…….”

“괜찮아. 아무 일 없어. 여긴 안전해. 그러니까 돌아와.”

꿈을 헤매지 말고 돌아오길 진심으로 바라며 말하자, 조지의 들썩이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흐느낌이 사라져 갔다. 관자놀이가 요동칠 만큼 꽉 물고 있던 턱에 힘이 스르륵 빠졌다. 평소에는 얄밉게 느껴졌던 깔끔한 얼굴로 다시 돌아와 앤드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금 더 부드럽게 젖은 볼을 쓸어 줬다. 

앤드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눈앞의 조지가 너무나 안타까워 최선을 다해 조지를 위로해 주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조지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에도 그저 기뻤다. 머리 색보다 조금 진한 젖은 금색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느리게 열렸다. 눈동자엔 물막이 처져 있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뒤에야 눈물이 모두 사라져 선명한 푸른빛이 떠올랐다. 아직 현실감이 없는지 초점 없는 눈동자를 마주하다가 앤드류가 물었다.

“괜찮아?”

순전히 안부를 묻는 그 목소리에 허공을 떠돌던 조지의 시선이 앤드류에게 박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지 조지는 가만히 앤드류를 바라봤다. 

“괜찮은 것 같다.”

이제 조지가 괜찮아 보여서 가볍게 웃은 앤드류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붙잡고 있는 손을 비틀면서 일어나려는데 그때였다. 

“억!”

일어나려던 앤드류가 잡아당기는 힘에 순간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조지의 몸 위에 엎어져서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놀라 쿵쿵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며 항의를 할 생각이었는데 조지와 시선이 닿았다. 앤드류는 숨을 삼켰다. 

“…….”

“…….”

조지는 고요했으나 사나웠다.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쏟아지는 푸른 눈동자는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앤드류는 본능적으로 숨소리도 죽이고 있었다. 맞닿은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은 오직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 소리뿐이었다. 

조지의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고 앤드류의 손목을 붙잡은 손마저 얼음장 같았다. 그렇게 얼음 같으면서도 이토록 바라보는 시선 하나에 가시가 촘촘하게 돋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너… 너 뭐야?”

그리고 앤드류는 알았다. 

‘아… 나는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되겠다. 확실하게.’

상처를 들킨 짐승의 사나운 경계는 날카로웠기에 목덜미가 금방이라도 뜯길 듯이 서늘했다. 조지는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와 같았다. 단번에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죽이고는 가장 여린 뱃가죽을 뜯어 내장을 씹어 먹기 위해 침묵의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앤드류의 본능이 빨간불을 켜고 시끄럽게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여기서 달아나. 그에게서 달아나. 안 그러면 먹히고 말 거야.

안광이 푸르게 빛나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상처를 들킨 짐승의 경계는 사나웠다. 목덜미가 금방이라도 뜯길 듯이 서늘했다. 여기서 피해야 했다. 저 상처 입은 짐승이 자신을 물어뜯기 전에. 

그러나 숨 하나도 맘대로 쉴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았다. 팽팽한 긴장이 흐트러지면 안 됐다. 마주친 시선이 어그러지는 순간, 그는 수풀 속에 숨었던 몸을 일으켜 단번에 달려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래서 맹수 앞에서 최대한 몸을 웅크린 소동물이 된 것처럼 떨리는 숨만 내쉬고 있었다. 

“이게 뭐야.”

형식적인 물음이었다. 앤드류는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이건 탐색전에 가까웠다. 

“나는, 나는 자는데 소리가 들려서…… 무슨 의도가 있던 건 아니고.”

스스로도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앤드류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네가 너무 고통스러워해서 사람을 부를까 했는데 날 잡아서. 날 잡더라고.”

그건 변명이었다. 네가 날 잡았으니 잘못은 너에게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조지는 한쪽 입술을 이죽거리며 비웃을 뿐이었다. 방금 전에 서러운 울음을 삼키던 조지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의 비웃음엔 질책이 담겨 있었다. 

‘그러게 나가라고 할 때 왜 안 나갔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내용이 보였다. 

‘네가 고집을 부려서 이렇게 됐잖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알았다. 어정쩡하게 조지의 침대에 앉아 있던 앤드류는 판단했다. 여기서 나가야 했다. 그것도 빨리. 

“미안. 내가 실수했다. 정말 미안해. 나는 오늘 휴게실에 가 있을게.”

그렇게 말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일어나려 했으나 반쯤 일어났던 몸이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조지는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야, 조지.”

조지는 아무 말 없이 붙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삐삐.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앤드류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보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미였다. 악몽에서 그가 깨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의 대가였다. 

“나는 너 도와주려고 한 거야.”

이를 악문 앤드류가 억울함으로 말했다. 한방을 쓰니 신경을 안 쓸 수도 없었다. 앤드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고통으로 점철된 사람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가면 아래에 감춰진 조지의 얼굴이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앤드류의 옷자락을 잡은 조지였다. 절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얼굴을 하고 자신을 잡았다.

“이렇게 화낼 일이야?”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을 어떻게 외면하는가. 그것이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같은 방에 있는 자신을 철저히 무시했던 이유가 악몽 때문이라는데. 그렇게 지키려던 것이 악몽을 헤매는 자신이라니. 

그래서였다. 그래서 순간 다정한 말 한마디 하고 싶었는데 조지는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앤드류에게 공포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앤드류는 지금 공포에 물들고 있었다. 

조지는 아주 느리게 굳게 다문 입술을 열었다. 유독 붉게 보이는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게 왜 고집을 부려.”

“…….”

“나가라고 했을 때 나가야지.”

“그건…….”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머물기만 했다. 조지가 잡은 손목에서 열이 올라오는 듯했다.

“넌 나한테 사과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도 알아.”

“아, 아니야. 그건 정말로, 엇!”

정말로 모른다고 말하기 전에 조지가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시야가 반전됐다. 볼에는 식은땀으로 젖은 시트가 쓸렸다. 팔이 뒤로 꺾인 앤드류가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아!”

저항할 순간도 없이 민첩하게 앤드류를 잡아 누른 조지가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았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심장이 쿵쿵거렸다. 조지에 의해 완전히 통제된 몸에 공포가 몰려왔다. 예감이 좋지 못했다. 

조지의 분노는 그렇게 크고 높았다.

앤드류의 입장에선 이해가 안 갈 만큼이기도 했다.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 그의 비밀 하나를 알아 버렸다는 이유가?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처사 같았다. 겁에 질려 무방비하게 엎드린 앤드류는 이를 악물고는 말했다.

“놔, 놔, 조지! 말로 해!”

“이제 알겠어? 네가 나가야 했던 이유를?”

“젠장, 놓으라고!”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앤드류.”

조지는 고개를 숙여 앤드류와 시선을 맞췄다. 

“후회할 거라고.”

자비라고는 없는 눈길. 비릿한 조소까지 섞인 눈동자를 본 앤드류가 발버둥을 쳤다. 

벗어나야 했다.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다. 

“놔! 저리 꺼져! 꺼지라고! 저리 비…….”

소리를 지르던 앤드류가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오싹함에 소리를 삼켰다.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고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등 뒤에서 바다 향이 쏟아졌다.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것은 바다 향이었다. 며칠 전에 맡았던 시원한 바다 향. 그때의 상큼함은 어디 가고 거대한 파도가 되어서 쏟아지는 바다 향은 페로몬이었다. 이건 페로몬이 분명했다. 

등이 불타는 것처럼 아팠다. 피가 모두 그쪽으로 쏠리는지 등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앤드류가 입술을 꽉 깨물며 더운 숨을 뱉었다. 발현 전이라 단 한 번도 알파 페로몬을 맡아 본 적이 없었지만 앤드류는 알았다. 이건 알파 페로몬이 확실하며 자신은 이미 며칠 전에 이 페로몬을 맡았었다. 

그리고 페로몬의 근원지는 조지였다. 조지에게서 바다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황은 앤드류의 예상보다 더욱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건 본능적인 긴장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그럴수록 페로몬은 쏟아졌다. 이제는 앤드류의 등도 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앤드류는 놓으라고 몸을 바둥거렸지만 그럴수록 조지가 몸을 바싹 붙여 왔다. 조지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눌렀다. 등과 허리, 엉덩이와 허벅지로 느껴지는 조지의 단단한 몸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마치 돌덩이 같았고 앤드류는 떨리는 숨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자신이 조지의 페로몬을 느끼는 것도 문제인 마당에 조지는 아예 페로몬을 쏟아 내고 있었다.

“너, 너 설마?”

“그래. 그 설마.”

“너, 너 미쳤어? 지금 장난쳐?”

“이게 장난이 아닌 건 너도 알 텐데?”

조지는 지금 서열을 정리하기 위해 마운팅을 할 생각이었다. 알파들 사이에선 우성이 형질로 열성을 무릎 꿇리고 굴복시켰던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자체로 선택받은 존재라 여겨지는 우성만이 할 수 있는 행위. 조지는 그것을 하려 하는 것이다. 앤드류가 알파인 줄 알았기 때문에 조금 거칠더라도 훌륭한 제압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보다 형질이 떨어지는 알파에게 굴욕감을 주어 서열을 정리하는 것은 야만적이지만 그만큼 효과가 좋았으니까.

“야, 이 새끼야! 개새끼야! 이게 무슨 짓이야!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비켜, 비키라고!”

바동거리며 말했지만 사납게 퍼지는 알파 향이 죽일 듯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무지막지하게 퍼지는 형질은 치명적이게 거칠었다. 정말로 형질로 누르고 눌러서 굴복시킬 작정인 것이다. 숨통을 조여서 죽일 작정으로 풀어 대고 있었다. 폭풍우를 머금은 잔인한 향기는 우성 알파의 것이었다. 그만큼 자극적이고 농도가 진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앤드류는 조지가 알고 있듯이 알파가 아니었다. 열성 알파가 아닌 오메가였다. 그게 문제였다. 알파가 오메가에게 서열 정리를 위한 페로몬을 뿜어 봤자 원하는 효과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그 페로몬 모두가 성적 자극이 된다. 알파를 받아들일 몸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앤드류는 오메가 중에서도 우성이었다. 아직 발현 전이라 믿고 싶었지만 상대도 우성이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오메가의 몸이 깨어날지 몰랐다. 아니, 이미 반쯤 깨어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알파 페로몬이 맡아졌고, 느껴졌다. 이건 불길한 징조였다. 억제제를 먹고 있어도 형질이 반응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페로몬이 이만큼 쏟아지는데 억제제는 우스웠다.

더 머물면 안 됐다. 이곳에 있으면 자신의 형질이 터질지 몰랐다. 그랬다간 굴욕적인 마운팅이 아닌 다른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어쩌면 그게 더 최악일지 몰랐다.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던 앤드류가 자유로운 팔을 휘젓는데 조지의 거친 숨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있는 힘껏 페로몬을 풀던 조지가 허리를 숙였다. 앤드류의 등과 조지의 단단한 상체가 맞붙었다. 앤드류는 패닉이었다. 등 뒤로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아, 젠장! 야! 개새끼야!”

조지는 반응하지 않았다. 몸을 딱 붙이더니 그대로 엉덩이를 밀어 올렸고 앤드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피할 작정으로 납작 엎드렸지만 역부족이었다. 괘씸하다는 듯이 더욱 몸을 누르는 조지 때문에 얇은 바지 사이로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봉긋한 둔덕 사이에 느껴지는 것은 분명 조지의 성기였다. 발기하지 않았음에도 엉덩이 위로 분명히 느껴졌다. 조지는 아주 작정을 했는지 하체를 딱 붙인 채로 치대 왔다. 

“넛, 이 개자식.”

숨소리가 끊어졌다. 매트 스프링이 삐그덕 소리를 낼 때마다 앤드류는 헐떡거렸다. 굴욕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마운팅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알파였어도 충격이겠지만 오메가라서 더 충격이었다. 성적인 흥분 없이 서열 정리를 위한 저급한 행위였고 그것에 충격이 심했다. 

“이 나쁜, 잇, 새끼! 개새끼!”

말을 할수록 조지는 더욱 빠르게 몸을 흔들었다. 끊어지는 자신의 말과 숨소리가 듣기 힘들어서 결국 소리 내는 것을 포기한 앤드류가 시트를 꽉 부여잡았다. 몇 번 그렇게 몸을 밀어 올리던 조지가 앤드류가 잠잠해지자  말했다. 

“이제 알겠어?”

조지는 숨도 거칠어지지 않았다.

“나쁜 새끼, 나쁜 새끼…….”

“네가 나가야 할 이유.”

거만한 목소리였다. 이쯤 하면 알았겠지. 하는 말투였다. 앤드류가 저항의 의지를 상실하고 파르르 떨고만 있자 목표를 달성했다 싶은 조지가 몸을 일으켰다. 자유로워진 앤드류가 베개를 잡아서 조지를 향해 던졌다. 더운 숨을 내쉬면서 붉어진 눈을 한 앤드류가 협탁에 있던 책들도 잡아서 조지를 향해 던졌다.

“넌 진짜 또라이야! 또라이 새끼라고!”

“진짜 끈질기네. 열성이면서 정말로 끝까지 해 보자는 거야? 내가 더 해 주길 바래? 옷 벗고 해?”

“뭐? 뭘 더 해! 뭐를 더 해 이 개새끼야!”

“나간다는 한마디 하면 될 일이야. 이만하면 그냥 나간다고 할 법하잖아. 아니야?”

“그렇다고 형질로 사람을 눌러?”

“알파끼리 그딴 거 따져?”

“그딴 거 따져서 이딴 짓을 한 거잖아, 이 개새끼야! 그리고 이건 인간 대 인간으!”

순간, 아래에서부터 물기가 도는 느낌에 앤드류가 놀라 이를 악물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까지 조지의 성기가 비비고 간 자리가 유난히 더워지는 것 같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단순히 천 위로 마찰이 있었음에도 자극이 됐는지 엉덩이에 싸한 느낌이 맴돌았다. 설상가상이었다. 

앤드류의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렸는데 이때 조지의 얼굴엔 의문이 스쳤다. 굽히지 않는 열성 알파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던 얼굴엔 이젠 낯설음과 의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너…….”

앤드류는 조지의 그런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신의 몸이 이상 신호를 보냈기에 당황해서 다리 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힉!”

낯선 감각에 놀란 앤드류가 아랫배를 손으로 덮으며 진저리를 쳤다. 충격이 몰려왔다. 방금 전에 왈칵 하고 자신의 밑에서 쏟아진 것은 분명 점성이 있는 액체였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예측이 가능했다. 엉덩이 사이 구멍에서 밀려나온 것은 애액이다. 앤드류는 그야말로 사색이 됐다. 애액이 나왔다. 최악이었다.

앤드류의 눈동자는 가엾을 만큼 떨렸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약을 먹었는데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패닉에 피가 날 만큼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들었을 때 조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야. 너…….”

놀란 앤드류가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려 모았고 그 움직임이 조지의 시선에 잡혔다. 조지는 비밀스러운 것을 보는 듯 앤드류의 가랑이 사이, 정확히는 방금 젖어 들어간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세운 무릎 안. 손으로 더듬어 가리고 있는 그 안. 그곳을 시선으로 더듬는 눈빛은 집요했다.

“사과 향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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