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외전 11
그로부터 보름이 지났다.
제인의 아름답고 간교하지만 충실한 종은 손수 앗아갔던 사람들의 시력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이 떨어졌다가 예고 없이 회복된 사내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맞춘 안경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랍에 넣어 둬야 했다.
그 사이 라트올도 기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호엘리반과 맺은 계약서는 남아 있었으므로 그는 서류상의 갑을 관계를 어떻게 파기할지 고민하며 지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지만, 언제나 그랬듯 세상일은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아침부터 제인이 찾아온다거나 하는 그런 불상사 같은.
“라트올, 솔직히 말해봐요.”
“…….”
솔직히 말 못 해요.
“내 다이아몬드, 꿀꺽한 거죠?”
“…….”
그 큰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꿀꺽해요.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요?
“사파이어 진품으로 바꿔줬다고 다이아몬드를 가로챈 거예요?”
“…….”
가로채긴 가로챘는데요, 그건 제가 아니거든요.
“무슨 말이라도 해 봐요.”
“왜…… 대체 왜, 벌써 왔어요? 점심때 뵙기로 했잖아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면서요.”
그의 말에 제인이 조그맣게 하하, 웃었다. 그러고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산뜻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제인, 잠깐만요”
그녀의 광기 어린 미소를 본 라트올은 직감했다. 몇 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지랄 같은 면모가 이 순간 깨어났다고.
“내가, 내가! 멍청했어요. 당신을 안 믿는다고 말하면서 다이아몬드 반지 제작을 맡긴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인간이라고요. 그러니까 누굴 탓하겠어요? 안 그래요?”
“그게 아니…….”
“축하해요, 라트올!”
제인은 이미 귀를 닫아버린 듯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나를 멍청한 인간으로 만들다니! 그 어려운 걸 라트올, 당신이 해냈어요! 너무너무 대단해요!”
“제인, 제 말 좀…….”
“그럼요, 눈 뜨고 있는데 코 베어 간 대단하신 보석사기꾼님의 말씀인데 들어야죠! 그냥은 어림없고 경건하게 한쪽 무릎이라도 꿇고 들어야 할 것 같은데, 기다려봐요.”
“뭐 하는 짓이에요! 무릎 꿇지 마요!”
“놔요!”
“차라리 절 죽여요! 진짜 환장하겠네!”
시계를 본 라트올은 그 자리서 울고 싶었다. 루가 말 한 시간이 되려면 아직 2시간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 * *
그 시각.
멜드니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고 있었다.
“호아아…….”
“…….”
“바타바타케…….”
레스토랑 안쪽에 느긋하게 앉아있던 루는 볼살이 흘러넘치는 자그마한 불청객의 존재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 불청객은 볼살만 흘러넘치는 게 아니라 침도 턱 밑으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 침이 반지 케이스 안으로 떨어질락 말락 한다는 거였다.
루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침이 떨어지기 직전, 그 아래로 손등을 천천히 갖다 대었다. 그는 그렇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걸쭉하고 투명한 침으로부터 침착하게 지켜냈다.
“…….”
“호아아…….”
“…….”
“반탁반탁…….”
루는 자신이 어째서 이 말랑한 것을 맡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이 말랑한 걸 그의 품에 안긴 건 프시오였다.
-왜긴 왭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당신 부탁으로 정신없이 바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바빠 죽겠는데 손 보태지 않을 거면, 멜드니 좀 보고 있으세요.
루가 제법 진지하게 물었다.
-드디어 미쳤나 본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적어도 호엘리반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다니, 미친 게 아닐까 하고요.
-…….
-울리지만 마세요. 그럼 적어도 호엘리반보다는 나은 겁니다. 30분 후쯤 세실이 온다고 하니 그때 안겨주세요.
그러고 가버린 게 20분 전이었다.
처음에는 프시오가 안겨준 그대로 아이를 품에 가만히 안고 있었다.
……안고 있었다? 아니, 그냥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10분쯤 지나자 한 줌 밖에 안되는 몸뚱이를 꿈틀꿈틀 움직였다. 루는 아이를 놓아주었다.
아이는 긴 복도 위에서 10분 동안 어떻게 가만히 안겨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로 한 시도 가만있지 않고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그러다 눈을 마주쳤다.
프시오와 똑같은 새까만 눈동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컸다. 그리고 둘 중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
짧지 않은 침묵이 이어지면서 아이의 입술이 슬 벌어졌다.
-호아아…….
-……?
-……바타바타케.
아이는 몇 번이고 ‘바타바타케’를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프시오가 알려준 마법 주문인가 싶었다. 그러다 한 번 ‘반탁반탁’이라고 발음할 때에서야 ‘반짝반짝’이라는 걸 알았고, 자기 눈을 보고 말한다는 걸 깨달았다.
루는 반짝반짝한 거라면 넘치도록 소유한 자였으나, 지금 당장 꺼낼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다이아몬드 반지.
반지 케이스를 열어서 보여주니 아이는 루의 곁에 바짝 다가와서 연신 감탄과 마법 주문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10분은 그렇게 무리 없이 지나갔다.
이제 남은 건 10분.
루가 제 손등에 흐르는 멜드니의 투명한 침을 물끄러미 보며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생각할 때였다.
쿠당탕!
세실이 레스토랑 입구에서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멜드니를 품에 안아 들었다.
“멜드니!!”
“이오!”
“멜드니, 어디 안 다쳤니!”
“세시세시, 세시이오!”
아이는 꺄르르 웃으며 세실의 이름을 불렀다.
세실은 기함했다.
“누가 널 이런!”
“……이런?”
루가 테이블 위에 있던 티슈로 손등 위의 흥건한 침을 닦으며 물었다.
세실은 재차 기함했다.
설마, 저 번들거리는 게 멜드니의 침인가?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추스르며 조카를 향해 어색한 물음을 이어갔다.
“……이런 아름다운 자의 품에 안겨놓은 거니, 멜드니.”
“얘 어미.”
어미라니.
세실은 레스토랑에 들어온 지 1분도 되지 않아 세 번째로 기함했다.
“프시오가…… 미쳤나 보네요.”
“이미 서로 나눈 대화라.”
“…….”
우두커니 서 있던 세실은 멜드니를 안은 채 그의 옆에 앉았다. 멜드니는 세실의 마법사 회중시계를 가지고 놀다가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제인은.”
나직하게 운을 띄운 루는 곧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멜드니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세실은 조카를 향한 루의 시선이 여전히 불편했으나 이전처럼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군.”
“…….”
“그래도 인간은 변하니까.”
루는 계속 열어 두었던 반지 케이스를 느리게 닫았다.
세실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짐작되지 않았다.
이어서 그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그땐…… 나도 같이 변하면 되지 않을까.”
* * *
팡! 팡! 파-앙-!
제인은 멍했다.
종이꽃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어지러이 흩날리는 가운데, 폭죽 소리에 놀란 얼굴 그대로 멍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벽에 가로로 길게 걸린 현수막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경] 정교수가 된 걸 축하합니다! [축]
파-앙! 팡! 팡! 팡!
밝은 곳에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실내용 마법 폭죽이 끝없이 터졌다.
그렇게 잿빛 눈동자만이 소리 없이 깜빡거리고 있을 때였다. 물속에 잠겨서 먹먹했던 귀가 물 밖으로 나온 것처럼, 왁자지껄한 소리가 일순간에 확 밀려왔다.
모두 친근한 목소리들이었다.
세실, 프시오, 호엘리반, 밀리타, 카이, 솜브, 하임, 멜드니,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라트올. 거기에 드호아망 마탑 안에서 맺은 많은 인연까지…….
브리스 레스토랑 안에는 제인이 아는 얼굴들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샴페인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보내며 휘파람을 불었다.
제인은 여전히 멍했다.
그때 호엘리반이 나와서 제인에게 풍성한 꽃다발을 전해주었다.
“축하해요, 제인.”
“…….”
“정식 취임식은 다음 주예요.”
“…….”
“당신 연구실적은 평균보다 4배가량 높아요. 그래서 작년에 승진했어도 무리가 없었는데, 흑마법을 이용한 마법진 연구 때문에 강의까지 소화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서 조금 늦어졌어요.”
“…….”
“참. 보름 넘게 결근한 건 병가처리 했…….”
호엘리반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인이 꽃다발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떨어서.
그렇지 않아도 아들을 울리기만 하고 달랠 줄은 모른다는 타박을 달고 사는 호엘리반이었다. 그는 걸음을 주춤주춤 뒤로 물렸다.
“이거 준비한 거, 루예요. 그러니까.”
내가 울린 거 아닙니다.
말하며 서둘러 2층을 가리켰다.
제인의 시선이 그의 손끝을 따라갔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1층과 달리, 위층에는 루 홀로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가 웃으며 입 모양으로 제인에게 말했다.
‘와.’
제인은 그대로 달려갔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눈앞이 자꾸만 흐려졌다. 굵은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사이, 어느새 두 팔을 벌린 루의 앞에 섰다.
그녀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힘차게 디디며 루의 품에 푹 안겼다.
루는 그녀를 안고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마법 종이꽃과 폭죽.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의 꽃잎이 아름답게 흐드러졌다.
“축하해, 제인.”
제인은 그의 품에 더 매달린 채 안겨 있고 싶었으나, 루는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이내 품에서 작은 케이스 하나를 꺼내어 열어 보였다.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제인이 라트올에게 주문 제작했던 루의 생일 선물. 그리고 그 옆에는 제인이 준비했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반지가 하나 더 있었다.
그건 그녀가 준비했던 반지가 아니었다.
루가 웃으며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내 것만 준비했길래.”
“……반지 도둑이 여기 있었네.”
“도둑이라 싫어?”
장난스러운 그의 물음에 제인은 싫다는 말은 못 하고 애꿎게 제 손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와서. 아무리 눈을 질끈 감아도 다시 뜨겁게 차올랐다.
“도둑이 내 계획까지 다 훔쳐 갔어. 내가 짠, 하고 놀라게 해주고 싶었는데.”
“……걱정 마. 충분히 놀랐으니.”
루는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눈물에 입술을 눌러 닦아주었다.
“네가 보석을, 그것도 다이아몬드 반지를 준비할 줄은 몰랐으니까.”
“다 의미가 있다고…….”
“의미?”
“응, 의미.”
제인은 들고 있던 꽃다발을 아래에 두고 반지 케이스에 남아 있던 반지를 꺼냈다. 이내 루의 손가락에 끼워주고는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는.”
그런 의미.
루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제인을 바라볼 때였다.
1층에 있던 사람들이 전보다 더 크게 환호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루는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제인을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살짝 돌렸다.
루는 그대로 벽을 등지게 된 제인에게 커다란 몸을 천천히 기울였다. 이어서 그녀의 이마, 뺨, 코끝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스치듯 입맞춤했다.
그렇게 입맞춤하며 조용히 그녀에게 속삭였다.
제인, 넌 한 번도 신을 믿은 적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늘 신께 감사하고 있다고. 너를 만나고, 사랑하고, 함께할 수 있게 해주어서. 그렇게 이미 넘치도록 감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고. 방금 하나가 더 늘었다고.
그의 느릿한 속삭임 끝에 제인이 물었다.
그 하나가 무엇이냐고.
루의 입술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영원.”
“영원?”
루는 제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언젠가, 그녀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 이어서 흘러넘치는 행복을 눌러 담아 마음을 고했다.
나 역시 너를 사랑하노라고.
영원히…….
* * *
“루, 있잖아. 다음 네 생일 때는 말이야.”
제인의 정교수 승진을 축하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브리스 레스토랑 안.
모두에게 축하를 듬뿍 받고 나서 겨우 메인 요리를 먹게 된 제인이 주변을 쓱 훑다가 루만 들을 수 있도록 몸을 기울였다.
“여기 레스토랑 주방 써도 돼? 잠깐 보고 왔는데 엄청 넓더라? 써보고 싶어. 그때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사과파이를 만들어 줄게.”
“써도 돼.”
루가 제 쪽으로 기울어진 제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맛없으면 가둬도 좋다는 전제하에.”
“…….”
“마음껏.”
결국, 제인의 사과파이는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