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외전 10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차고 말캉한 이물감이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제인은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눈이 풀어졌다. 청량한 물기로 젖은 살덩이가 말라 있던 그녀의 속살을 훑었다.
순식간에 정신이 몽롱해진 제인은 그가 깊게 밀고 들어올수록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급급한 모양새가 되어갔다. 그렇게 달뜬 호흡을 겨우겨우 몰아쉬며 생각했다.
어떻게 매번, 입을 맞출 때마다 이토록 저항할 수 없는 걸까. 혀에 미약이라도 발라 놓은 걸까.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 존재 자체가 미약보다 더 지독하다.
루는 제인에게 숨이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잠시 틈을 주며 떨어졌다. 그는 춥, 떨어지는 입술 끝에 딸려가는 실선을 혀로 핥으며 웃다가 다시 입술을 포개었다.
제인은 눈앞이 빙글 돌았다.
이상하다.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쉴 틈만 주고 다시 버겁도록 파고드는데도 도망가거나 밀어내고픈 마음이 일지 않는다. 되레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매달리게 된다.
그러자 느릿하고 집요하던 압박감에서 천천히 풀려났다. 루는 매달리는 그녀의 모양새가 만족스러운지 젖은 입술로 붉어진 잿빛 눈가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제인.”
그의 부름에 밭은 숨을 내쉬던 그녀가 흐릿한 눈으로 시선을 맞췄다.
“더.”
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설탕보다 단 목소리로 애원하듯 속삭였다.
“더 나를 원해줘.”
제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얼마나 버거운 감정을 일으키는지. 그래서 제멋대로 구는 듯한 그가 사실은 제 곁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인내하고 견디는지. 인간인 저는 이해하지 못하는 욕구를 누르며 살아가는지.
그런 그를 가만히 보고 있을 때면 애틋한 마음이 솟구쳤다.
나는 너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세상으로부터 영영 단절되어 너만 바라본다면 그걸로 만족할까.
이대로 계속 갇혀서 네가 요리해주는 음식을 먹고, 네가 씻겨주는 손길을 받으며, 밤과 낮의 경계를 허물고 황홀한 쾌락만 누린다면.
그렇게 너 하나만을 바라보는 내가 되면.
그러면, 그것은 분명 그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제인은 인간이었다.
초월적인 시간을 살아가게 되었다 하더라도 데시안과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인간.
인간은 너무나 유약해서 쉽게 변한다. 루와 함께 다섯 손가락이 넘는 봄을 맞이하면서 제인도 많이 바뀌었다.
그녀는 이제 한겨울의 마른 나뭇가지보다 새싹이 돋아나고 꽃을 피우는 봄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발버둥 치는 벌레보다 날갯짓하는 나비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것을 오롯이 사랑할 수 있게 된 건, 루.
바로 그 덕분이었다.
하루하루가 충만하게 행복했다. 이대로도 괜찮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건 제인의 오만이었다.
루가 제게 영영 줄 수 없는 한 가지를 말했을 때.
제인은 그가 홀로 얼마나 아득한 감정 속에서 지냈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어쩌면 넘치도록 행복했던 건 그녀 혼자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너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나를 위해서 많은 것을 견디는 너를, 인간의 행복을 알아가면서 괴로워하는 너를, 그러면서 늘 내게 웃어주었던 너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채워줄 수 있을까.
“루.”
제인이 루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다가 눈을 감고 그의 이마에 이마를 맞댔다.
“보여줄게. 내가 얼마나 너를 원하는지.”
그 순간.
루와 제인의 주변으로 둥근 마법진이 떠올랐다.
챙……!
가벼운 파열음과 함께 마법진이 서너 겹으로 분해되면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공전했다. 곧 푸른 불꽃이 화르륵 솟아나면서 이안이 완성한 마법진이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심지어 불길이 조절되어 어디에도 불이 붙지 않았다.
루는 저와 제인을 둘러싸고 있는 마법진을 훑어보다가 모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인이 몸을 일으켜 앉으면서 그를 향해 웃었다.
“영혼을 묶는 마법이야.”
“…….”
“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다 진심이야. 잘 들어.”
“…….”
“첫째, 나는 아이를 별로 안 좋아해.”
루는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잠시 거두었다. 그러고는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다가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멜드니.”
“멜드니! 너무 예쁘지.”
제인은 두 손으로 그의 뺨을 잡고 저를 바라보게 했다.
“그런데 잠깐 만나서 예뻐하는 거랑 키우는 건 완전히 다른 거야. 그리고 모르나 본데, 나 사실 멜드니가 울 때마다 도망간다고.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등 토닥임 수법 같은 게 전혀 안 먹힌단 말이야.”
“…….”
그녀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렇게 울보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호엘리반도, 프시오도 어렸을 때 그 정도로 울진 않았을 것 같다고 재잘재잘 떠들다가 다시 본래 주제로 돌아왔다.
“둘째, 지금은 그렇지만, 사람은 변하고 나도 언젠가 아이를 갖고 싶어질지도 몰라.”
루는 이 상황이 조금, 아니 몹시 힘겨웠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붙잡은 손을 끌어내리고 싶었으나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다. 정신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녀의 목소리만 들었다.
“그땐, 입양을 고려할 거야. 물론 아이는 혼자 키우는 게 아니니까 네 동의를 구할 거고. 하지만 이건 확률이 굉장히 희박해.”
“…….”
“나도 나지만…… 네가 과연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야. 게다가.”
제인이 말을 이었다.
“셋째, 나는 네가 나 말고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게…….”
“…….”
“싫어.”
루는 이게 꿈이 아닐까 싶었다. 싫다는 말이 어떻게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지독하게 벅찰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이게 꿈이라면, 그렇다면 루는 차라리 이 꿈에서 영영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꿈이 아니라면…….
“알아? 살면서 너한테 처음으로 싫다고 말한 거.”
만약 꿈이 아니라면.
그는 자신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발아래에서부터 숨이 막힐 듯이 벅차오르는 감정에 잠식되어서. 혹은 심장이 터져서. 혹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제 심장을 꺼내어 쥐여주고 싶어서.
“루, 한 번 묶인 영혼은 평생 돌이킬 수 없게 돼.”
“…….”
“기회는 지금뿐이야.”
……기회?
루는 느릿한 사고로 제인의 말을 뒤늦게 이해했다.
그러니까 내게 거부할 기회라도 주려고…….
그가 의미 모를 미소를 흘리는 사이, 자신이 언젠가 망망대해 위에서 제인에게 했던 말이 겹쳐왔다.
지금이라도 도망가라고.
자유로운 두 다리로.
그 말이 돌고 돌아서 이렇게 제게로 온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때 루는 제인을 보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제인 역시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주는 기회를 기꺼이 박탈하려는 그처럼.
“……제인.”
루가 제인의 한 손을 잡고 제 가슴께로 가져갔다.
제인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평소와 다르게 느긋하지 못했다.
“내 심장 가장 안쪽에…… 돌멩이처럼 딱딱한 핵이 있어. 데시안들은 내핵을 부숴야 죽어. 날 죽이고 싶으면, 그걸 부수면 돼. 네가 부순다면 나는 네 손끝 하나도 태우지 않을 테니…….”
“……지금 너, 무슨.”
“나는…….”
루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그대로 제인의 가슴팍에 무너지듯 기댔다.
“네가 이러면 나는 정말…….”
“…….”
“내가 살아있는 한, 널 놓아줄 수가 없어서.”
그레데엘므의 시간을 먹은 제인은 저만큼이나 아주 오래 살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뼛속까지 인간이다. 인간들이 느끼는 행복은 다 달랐지만, 비슷하기도 했다.
그러니 언젠가.
그녀도 자신의 아이를, 가족을 원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당장이라도 그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만큼은 들어줄 수 없는 존재였다.
만일.
만에 하나 제인이 보통의 가족을 원하게 된다면. 가족을 이루고 싶을 만큼 그녀의 곁에 근사한 남자가 나타나게 된다면.
그런 생각 자체가 루에게는 자해와 다름없었으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도저히 그럴 자신은 없으니 그때가 되면 자신을 죽이는 방법을 알려주어야겠다고.
“……내가 너 몰래.”
그때, 제인이 왈칵 눈물을 쏟아내며 루의 가슴팍을 퍽퍽 내려쳤다.
“몇 개월간 얼마나 개고생해서 마법진을 만들었는데!”
“…….”
“넌 날 놓을 생각을!”
제인은 기가 막혀서 화도 나지 않았다.
충실한 종이니, 뭐니 그런 것도 죄다 거짓말이다. 무슨 종이 주인이 가라고 하기도 전에 갈 생각을 하냔 말이다.
괘씸함에 눈물이 펑펑 나서 그의 가슴팍만 칠 때였다.
“제인, 이 불길에 나랑 같이 타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루가 그녀의 두 손목을 잡고 입을 맞췄다.
“……묶어줘, 영혼.”
세상 모든 푸름이 들어찬 벽안에 물빛이 어려 있었다. 제인이 살면서 보아온 어떤 보석보다도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지독한 아름다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