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외전 08
그는 속으로 갖은 욕을 하며 침을 닦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준비해둔 서류를 주섬주섬 꺼내어 그의 곁에 두고는 늘 그랬듯이 짧게 보고했다.
오늘처럼 루의 기분이 안 좋을 때 가장 좋은 태도는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듯 할 말만 하고 돌아서면 된다. 그렇게 오금이 저리는 걸 참으며 보고를 마친 타타는 얼른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기다리라고 하는데.”
타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기다리라고…… 하셨……?”
언제? 언제 기다리라고 하셨는데요? 혹시 제가 당신의 아름다움에 눈만 멀기 직전인 게 아니라 귀도 먹은 건가요?
벌벌 떨면서 뒤를 돌았으나, 루의 시선은 제게 닿아 있지 않았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서서 정원을 보고 있을 뿐.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기다리든, 다 알면서 기다리든, 똑같이 기다리는 거라면.”
그랬던 그의 고개가 차츰 움직였다.
타타에게로.
“알면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네.
무조건 네, 라고 대답해야 한다.
본능이 그랬다.
타타는 맞다고, 당신 말씀이 옳다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비틀림이 남아 있던 공기가 일순간 가벼워졌다. 타타는 다시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정답이었나보다, X발.
타타가 5년 차의 짬밥을 벅차게 느낄 때였다. 사악한 미혹이 달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참, 그리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타타에게 새로운 일거리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이날은 레스토랑 전부를 비워 놓도록.”
* * *
이안은 제인이 신경 쓰였다.
그것도 미치도록.
그는 사실 설계 중인 자신의 마법진을 무려 3시간 내내 아무 말 없이 관찰하다가 생선 뼈 발라 먹듯이 샅샅이 분해하고 파악하기 전부터 그녀가 신경 쓰였다.
하지만 당사자는 이안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몸만 이곳에 있지 정신은 다른 데에 가 있는 듯했다.
당장만 해도 그랬다.
마치 이안은 투명 인간인 것처럼 혼자 무언가를 집중하는 듯 팔짱을 끼고 발끝을 까딱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건 그것대로 또 눈길이 갔다. 어쩐지 습관처럼 보이는 듯한 태도에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오만함이 묘하게 묻어나와서.
그때 제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안은 제인의 시선이 지금 미완성의 마법진에 닿아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날 선 투로 말했다.
“제 마법진은 허술하지 않아요.”
“당연하죠. 호엘리반이 그렇게 열심히 찾아낸 인재인데 그럴 리 없어요.”
다만 이 마법진이 과연 루를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거죠.
제인은 이안이 한창 작업하고 있는 마법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설계는 그가 하고 있지만, 구성 요소를 찾아서 모은 건 그녀였다.
드래곤의 그림자…….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연구실 책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품에서 꼬깃꼬깃한 마법 양피지를 꺼내고는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깃펜을 쥐었다.
[안녕, 밀리타.
잘 지내?
마법 양피지로 소식 묻는 건 오랜만이네.
생각해보니까 너랑 카이가 엘마뉴엘에 정착한 지도 벌써 4년이더라? 시간이 정말 빠른 것 같아. 물론 휴가 때마다 가서 만나긴 하지만 자주 보는 건 아니니까 아쉽고 그래.
어? 입에 발린 말 하지 말라고? 이번에는 뭘 부탁하려고 편지 썼냐고? 어떻게 알았어?
드래곤의 그림자가 필요해.
루에게 마법진을 쓸 때 사용할 거라 이왕이면 화신인 솜브의 그림자가 좋을 것 같아. 그 녀석 그림자가 다른 드래곤 보다 강도 높지 않겠어? 조금만 긁어서 보내줘.
아주 ‘조금’이면 돼.
-감금의 위기에 놓인 제인이-]
밀리타로부터 즉각 답장이 왔다.
[오랜만이에요, 제인.
저희는 잘 지내요.
당신에게 감금의 위기는 매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요.
부탁하신 솜브 그림자는 마법 구슬에 담아서 마탑의 마법함 6-2471호에 넣어뒀어요. 암호는 당신 생일이니 가서 확인해 보세요.
필요한 게 또 있으면 언제든 양피지로 말씀해 주시고요. 마법함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부탁하셔도 괜찮아요. 조만간 드호아망에 갈 일이 생겼거든요.
-당신의 이해할 수 없는 애정전선을 지지하는 밀리타가-]
이제 이안은 신경이 쓰이다 못해 뾰족하게 곤두섰다.
제인이 제 연구실처럼 책상 앞에 앉는 소리도, 주머니에서 꺼낸 꼬깃꼬깃한 마법 양피지를 펼치는 소리도, 그 위에 자신의 깃펜으로 뭔가 사각사각 적는 소리도.
종국에는.
“흠…….”
하고 골똘히 생각하는 희미한 음성까지.
하나하나가 모두 그의 신경을 곤두세우기에 충분했다.
그는 훨씬 더 넓고 으리으리한 연구실을 가진 그녀가 대체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가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사람 좋게 웃으며 여기서 평생 살건 아니라고 저를 도닥거리며 안심시키는데, 나쁜 사람인 건 모르겠고 뻔뻔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마탑의 연구교수로 임용되자마자 주변에서 저 여자를 요주의 인물로 지목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드호아망의 집권자이자 마탑의 탑주인 호엘리반도 종종 쩔쩔매는 실세라고 했었지.
당시엔 저렇게 어리게 생긴 여자가? 하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왜 그런 소문이 도는지 알 것도 같았다.
얼굴 예쁘지, 능력도 좋지, 귀엽……. 미쳤구나, 내가.
생각하는 와중에 그녀의 숨소리 섞인 음성이 다시 한번 더 그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흐음…….”
분명, 소리는 훨씬 더 희미한데 오히려 전보다 또렷하게 들리는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마법진 설계는 첫째도 정교함, 둘째도 정교함이 생-.
“이안.”
“-명, 예?”
이안의 멍청한 대답에도 제인은 골똘한 표정을 짓다가 이안과 눈을 맞추었다.
“저 잠시 마법함이 있는 구역을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다녀…… 오다뇨?”
“네,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요, 아시다시피 그 구역은 절도나 분실위험이 있어서 이동의 문을 사용할 수 없어요. 그래서 좀 걸릴 거예요.”
“아니, 왜 다시 오시는 건지?”
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제가 다시 오는 사이에요, 만약에 말이죠. 당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흑발에 벽안의 미남이 나타나면요.”
“……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딱 한 마디만 하세요.”
어지럽다. 대화가 이렇게 어지러울 수 있나?
하지만 이안은 놀랍게도 더 어지러울 수 있다는 경험을 바로 할 수 있었다.
“호엘리반이 이상형이라고.”
“…….”
이안, 25세.
원리원칙주의자인 흑마법사.
문득, 그의 머릿속에 제인에게 제발 반하지 말라고 호소하던 호엘리반이 떠올랐다. 이내 그는 닭살이 오소소 일어나는 팔뚝을 쓰다듬으며 진심으로 고민했다.
퇴사할까…….
* * *
그 시각.
라트올은 제인이 주문 제작을 맡긴 제품을 완성하자마자 그녀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그러다 문 앞에서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루.
뒤통수도 아름다운 데시안, 루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쿵쿵쿵. 쿵쿵쿵.
라트올은 목구멍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을 벌릴 수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척 몰래 돌아가는 건 이미 텄다. 루는 라트올이 오기 전부터 이미 그의 기척을 알아챘을 터였다.
라트올은 벽에 기대었다. 이윽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몸이 아래로 주르륵 떨어졌다. 그대로 쪼그려 앉은 채 생각했다.
젠장, 젠장. 어떡하지? 너무 무서운데.
라트올은 인간들의 시력을 ‘성실하게’ 빼앗고 다니는 루의 현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소 돌아있는 그의 신경을 거스르면 그가 나눠주었던 시력을 빼앗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몽말 안경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진다.
라트올은 또다시 앞이 안 보이는 세상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양팔 아래로 얼굴을 떨어뜨렸다.
왜 하필 눈인데. 차라리 그냥 죽여버리시지.
“라트올.”
“!”
익숙한 낮은 저음에 라트올은 몸을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역광의 그림자를 짙게 쏟아내는 루가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여기서 왜 울고 있지?”
라트올은 자신이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질질 짜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는 얼굴을 뒤덮은 물기를 벅벅 닦아 내리며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애썼다.
“…….”
애는 썼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뿐.
루가 여상히 웃었다.
“다 울었으면, 라트올.”
라트올의 품에 무게감 있는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뭔가 보니 빨간 불빛이 반짝거리는 마법 구슬이었다.
“이 구슬과 연결된 자를 찾아봐.”
“…….”
“핍은 마력이 없어서 못 찾더군.”
* * *
다행이었다.
제인이 마법함이 있는 구역에서 이안의 연구실로 돌아왔을 때 아무 일도 없었다. 제인은 혹시 루가 찾아와서 이안의 시력을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터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안의 시력만큼은 보호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가 안경을 맞춰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호엘리반처럼 천재적인 연금술사가 아닌 이상 안경사들이 안경을 제작하는 기간은 평균적으로 한 달.
마법 구슬까지 들킨 마당에 그렇게 긴 시간을 미룰 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완성되길 바라는 마음에 한시가 급한 건 당연했다.
이미 시간이 꽤 흘러있었으므로.
제인은 문득 지난날을 곱씹었다. 프시오의 도움을 받아서 데시안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마법진 구성 요소를 찾아 모으는 데만 3개월.
이후 호엘리반의 도움으로 제인이 모은 요소를 설계할 수 있는 흑마법사를 찾아냈다.
그게 이안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이안이 완성한 마법진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