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64)화 (164/168)

164. 외전 07

“너 나를 죽이려고 그런 술을…….”

제인은 진심으로 자신이 마신 술이 독보다 더 위험한 살인용 술이 아닐까 싶었다.

“그럴 리가.”

“있어. 너라면 있다고…….”

루는 제인이 살짝 밀어낸 간격을 다시 좁히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무래도 누가 도수 높은 술을 준다면 마시지 않는 게 좋겠군. 그 정도로 바로 취할 줄이야.”

작정하지 않는 이상 보통은 그렇게 독한 술을 주지 않아. 게다가.

“취했던 거 맞아……?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

제인은 술로 죽이려고 든 건 라트올이 아니라 너였다는 말을 웅얼거리면서 어지러운 머리를 베개에 묻었다.

“어떻게 그런 걸 마시라고 나한테……. 너 정말 나를 어쩌려고…….”

다시 까무룩 잠들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루는 잠들게 둘 생각은 없다는 듯이 베개 속에 파묻힌 그녀의 얼굴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그림자가 제인에게 포개졌다.

“이러려고.”

아직도 독한 술맛이 남은 입안으로 차가운 혀가 깊게 들어왔다. 제인은 저항할 새 없이 받아들였다.

취기에 데워진 몸이라 그의 체온이 더 낮게 느껴졌다. 머리가 쭈뼛할 정도로 차갑고 야릇한 감각이 전신을 훑자 머리가 몇 배는 더 어지러웠고 발이 곱아들었다.

늘 그렇듯 집요할 만큼 느리면서도 숨 쉴 틈 없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자연스레 호흡이 가빠지면서 체온이 올라갔다.

제인의 아랫입술을 깨물 듯이 빨다가 상체를 일으킨 그가 찬찬히 아래를 응시했다.

어느새 가슴께에 묶여있던 리본이 풀어 헤쳐져 가슴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한껏 달아올라서 온몸이 빨갛게 젖은 그녀는 정말이지 미치도록 예뻤다.

“알고 있어, 제인? 지금 네가 얼마나 예쁜지.”

그는 취기가 낙낙한 그녀와 보내는 밤을 유독 좋아했다. 온기 가득한 몸이 더 뜨겁게 데워지는 것도, 그렇게 땀에 젖은 살결이 손에 달라붙는 것도 정신이 나갈 정도로 좋았지만.

가장 웃음 짓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지그시 누르며 쓸어내렸다.

입맞춤으로 젖어있던 터라 쉽게 밀려들어 갔다. 촉촉한 혀가 닿자 두 뺨의 홍조가 짙어지면서 취기에 풀린 눈동자가 점점 더 흐려지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예뻐서 어떡하지.”

젖은 손가락을 천천히 빼내자 제인이 홀린 듯 일어나 그의 위에 올라탔다.

루는 예상이라도 한 듯이 요요히 웃으며 자연스레 쏙 파인 옆구리에 손을 얹었다. 흐려진 잿빛 눈동자가 묘한 흥분으로 차오른 채 몸을 숙이는 순간.

툭.

그녀의 옷가지에서 작은 구슬 하나가 떨어졌다.

“…….”

“…….”

호엘리반이 발명한 마법 구슬이었다.

마법 구슬의 종류는 다양했는데, 제인의 옷가지에서 툭 떨어진 건 암호를 ‘은밀’하게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종류였고, 루는 그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문제는 ‘무엇’을 뺀 나머지 육하원칙이었다.

침실의 공기가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덩달아 제인의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가면서 술에서 깨기 시작했다.

그녀는 떨어진 구슬을 얼른 품에 다시 넣고 싶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루가 제 옆구리를 단단하게 붙잡고 있는 데다가 어쩐지 은근한 압박마저 느껴졌으므로.

“알아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

제인은 술이 완전히 덜 깨서인지, 아니면 너무 착잡해서인지 ‘알아서 하라는 게’ 설명이 아니라 차라리 그의 몸에 올라타던 걸 말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제인.”

하지만 그의 손길은 매정할 정도로 다정해서 가슴께에 풀어진 그녀의 옷가지를 정돈해서 리본까지 손수 묶어주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반듯하고 예쁘게.

“…….”

술기운이 얕게 남은 제인은 아찔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안 돼. 아직 미완성이란 말이야. 라트올에게 주문 제작을 맡겼던 생일 선물보다 훨씬 힘들게 준비한 일이라고.

몇 개월간 야근하며 나름대로 잘 숨겨왔기에 이대로 밝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이렇게 황당하게 구슬이 굴러 나올 줄이야.

오늘 뭔가, 되는 일이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자꾸만 아침에 만든 달아빠진 사과파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제인은 서러웠다. 그 사과파이는 제인이 만든 요리 중에서 유일하게 요리로 보이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다려.”

술이 덜 깨서 그런 건지, 한 번 서럽기 시작한 감정은 흐르는 강물처럼 번져서 끝끝내 시야를 묽게 만들었다.

“네가 나의 충실한 종이라면, 기다려. 내가 말할 때까지.”

* * *

이안은 고도의 흑마법으로 마법진을 설계 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재촉하는 건 아니에요.”

자기의 행동을 부정하는 동료 교수 한 명이 남의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흑마법이 음지에 있었을 때부터 원리원칙주의자였던 이안은 그녀의 잘못된 부분을 친절하게 정정해주었다.

“제인, 당신은 지금 세 시간째 말없이 제 마법진 설계 작업을 지켜보고 있어요. 사람들은 보통 이런 걸 재촉이라고 불러요. 또 다른 말로는 독촉, 종용, 압박이라고도 하죠. 참고로 지금 전 숨이 막힐 지경이고요.”

“오해예요. 저는 진심으로…….”

당신을 닦달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거든요.

이 말을 굳이 하지는 않았다. 이건 좀 재촉 같아 보이니까.

“진심으로 당신을 응원하고 있어요.”

이안은 호엘리반이 어째서 제인에게 반하지 말라고 얼토당토않은 경고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 보자마자 예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알면 알수록 능력도 출중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지금도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언으로 재촉하는 게 조금 귀엽긴 하…….

“…….”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마법진 설계는 첫째도 정교함, 둘째도 정교함이다. 정교함이 생명인 작업이기에 옆에 있는 이 여자의 재촉을 가장한 응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드려야 할 것 같네요.”

이번에는 제인이 고개를 저었다.

“쫓아내지 마요.”

“맞아요. 그거예요. 당신의 응원이 쌀알만큼도 도움이 안 되고 있단 말입니다. 저번에 마법 구슬 드렸잖아요, 완성되면 그걸로 호출하겠다고. 도대체 왜 여기 붙어있는 거죠?”

“뺏겼, 잃어버렸어요.”

“다시 맞춰 드릴게요.”

제인이 휘휘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감금당하기 직전이긴 한데, 그래도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라서요. 지금 감금당하면 최소 2년은 밖에 못 나올 것 같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종이고 누가 주인이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 여자가 뭐라고 하는 거지?

이안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녀의 말에 황망한 얼굴을 할 때였다.

“이안.”

담백한 부름에 제인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뒤늦게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몇 시간 내내 제 옆에 붙어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제 생각에는 아마도.”

이 여자는 아무 의미 없이 이 자리에 있던 게 아니라.

“구도를 보니 앞으로 네다섯 시간이면 완성될 걸로 예상되는데, 맞나요?”

겹겹이 쌓인 복잡한 내구도의 커다란 마법진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인의 말에 이안은 경악했다.

네다섯 시간이라니.

그건 얼추 계산한 시간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쉬지 않고 최대한 집중력을 끌어 올려서 미친 듯이 작업해야 가능한 시간이었다.

북방의 흑마법사 이안은 잠시 잊고 있었다.

제인.

드호아망의 유일무이한 정신계 치유 마법사인 그녀가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호엘리반과 프시오도 질색하는 독종이라는 걸…….

* * *

타타는 루가 어려웠다.

일단 그의 미모 앞에 서는 것부터가 곤혹스러웠다.

가히 사악한 미혹이라 여겨질 만큼 아름다운 그를 마주할 때마다 멍하게 침이나 질질 흘리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하지만 열에 아홉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럴 때면 흐르는 침을 닦으며 자연스럽게 라트올을 떠올렸다.

보기만 해도 혼이 쏙 빠질 것 같은데 어떻게 제정신으로 옆에 있었던 거야? 설마, 일 중독이 미감을 이긴 거야?

……소름인데?

이렇듯 보기만 해도 정신을 잃기 쉬웠기에 5년째 루를 모시면서도 그의 기분을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정신이 흐려지는 미형은 둘째치더라도, 그는 기본적으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거기에다 항상 나른하게 풀어진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있어서 더 그러했다.

미소의 의미는 모호했다.

어느 날은 정말로 기분이 좋았고, 어느 날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후자가 확실한 날은 있었다. 예를 들어 루의 거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비틀리는 공기의 감각이 느껴지는 오늘처럼.

타타는 오금이 저렸다.

X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월말마다 각종 사업의 결산을 보고하러 와야 했는데, 하필이면 그게 오늘이었다.

타타는 찔끔 나는 눈물을 닦으며 루의 거처 안으로 들어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래, 죽여라! 명계로 돌아가든 사멸하든 그게 나을 것 같…….

“컥, 흐컥, 사, 살려주…….”

아니다. 사멸보다는 하루라도 더 사는 게 낫고 명계보다는 인간계가 낫다.

무릎을 꿇은 채 헐떡거리며 빌자 비틀린 공기 흐름이 전보다 안정을 되찾았다. 타타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사악한 미혹이 눈앞에 있었다.

정신, 차, 차려야…….

“…….”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침의 감각이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