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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63)화 (163/168)

163. 외전 06

그 후로 루는 몇 번 더 제인에게 입을 맞추며 술을 흘려보냈다. 제인은 온통 붉게 물든 몸으로 밀려 들어오는 술을 받아 마시며 악착같이 정신을 붙잡았다.

루가 들고 있던 술병을 비워내자마자 그녀는 어려운 약학 용어를 몇 개 읊더니 눈을 똑바로 뜨고 턱을 치켜들었다. 이것 봐, 나 안 취했어, 라는 말과 함께.

루는 그런 그녀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걸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죄다 풀어내고 말랑한 살결에 코를 묻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평소보다 더 사납게 치켜드는 욕구였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테이블에 놓인 검은 술병에 가닿았다. 명계의 술은 굉장히 독해서 서너 잔이면 루도 취하고 말 것이다.

이대로 취하면 위험하겠는데…….

제인이.

-저거 내가 가져다줄게.

-…….

루의 인내에 대해선 일말의 짐작도 하지 못한 제인은 그가 보고 있던 술병을 친히 가져다주었다.

그가 낮게 웃으며 생각했다.

왜. 술병도 따주지.

-따 줄게.

-…….

루는 어떻게 하는지 보자는 심경으로 가만히 두고 보았다.

그러자 제인이 낑낑거리며 명계의 술병을 따더니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땄어!

어째서인지 신나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루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취했군.

주량에 못 미치는 양이긴 했으나 평소보다 빨리 마셔서 그런 듯했다. 아쉽게도 많이 취한 건 아니고 기분 좋게 알딸딸한 정도.

루는 그것마저도 예쁘게 보여서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마셔.

돌아오는 건 단호한 말이었다.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그러지.

술병을 건네받은 그는 요구받은 대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마셨다. 워낙 독한 술이었기에 순식간에 취기가 올라왔다. 속이 뜨겁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취해도 티가 나지 않는 편이라 겉모습만으로는 진위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인은 멀쩡한 모습에도 그가 취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명계의 술을 마셨고, 그녀 역시도 알딸딸한 상태였으므로.

침대에 누워있던 제인이 제 옆을 툭툭 쳤다. 가벼운 손짓이 팔랑팔랑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보였다.

루는 꽃처럼 슬 웃으며 그녀의 곁에 누웠다. 그리고 어지러운 와중에 생각했다.

위험한데, 정말로.

그때 제인이 루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었다.

그는 머리칼 사이로 느껴지는 그녀의 온기에 불순한 욕구는 잠시 아래로 밀어 넣고 평온함을 만끽했다.

팽팽하던 몸의 근육이 이완되어 갔다.

루는 궁금했다.

어쩌면 이 앙큼한 인간이 마법을 부리는 건 아닌지.

한편으로 그런다고 한들 어떤가 싶었다. 그는 그녀가 제게 마법을 부리든, 종처럼 부리든 뭐든 기꺼웠다. 당장 제 발을 핥으라고 할지라도 기쁘게 순종할 테니.

-있잖아.

그녀가 느릿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나는 네 마음의 문에 들어가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넌 데시안이니까.

루는 잿빛 눈동자를 마주 보며 차분해진 목소리를 잠자코 들었다.

-정신계 치유 마법사는…… 시들어가는 꽃이나 나무를 다시 싱싱하게 만드는 사람이지, 나무를 꽃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야.

검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그녀가 그의 손을 잡고 제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얼음장과 다를 바 없는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서, 루. 네가 말해줘야 해.

-…….

-어째서 사람들의 눈에 손을 대는 건지.

루가 옅게 웃었다. 취기 섞인 그의 미소는 난폭할 만큼 아름다워서 보는 이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제인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루는 좀처럼 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자기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는 인간이, 존재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러니 놓을 수 없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그럴 것이다.

나는 그런데, 너도 그럴까.

침묵이 계속되었다.

마주 보는 시선도 흔들림 없이 서로를 향했다.

루는 이처럼 제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면 마음이 바다로 이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무언가가 가슴께까지 벅차올랐다가 내려갈 때도 있었고, 목 끝에서 알싸하게 일렁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폐가 터질 정도로 숨을 삼켜냈으나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은 다시 파도처럼 밀려들 뿐이었다.

루는 그것이 행복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도 감당이 안 될 만큼 벅차오르는 행복.

제인으로 인해 무엇이 그에게 행복이 되는지 알게 된 데시안은 인간이 느끼는 행복도 천천히 알아갔다. 그때마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점점 가라앉았다.

아득한 심해 언저리에 닿을 때까지. 아래로, 아래로.

행복은 모순이 되어 조금씩 그를 괴롭혀갔다. 종종 차라리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럼 인간이 느끼는 행복도 모를 테니.

이를테면, 아이를 갖는 기쁨.

가족을 만들어 평범하게 살아가는 기쁨.

-프시오가 임신했대!

언젠가 밝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너는 알았을까. 그대로 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싶었던, 숨을 고르고 싶었던 나를.

프시오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제인은 해마다 커가는 아이의 몸에 맞는 신발과 옷가지들을 정성스럽게 골라서 선물해주었다.

루는 그때마다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가 가라앉는 사이, 제인은 태양에 비할 바 없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모나 있던 부분이 부드럽게 다듬어지자 반짝거리는 그녀에게 마음을 품은 인간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해는 되었다.

내 눈에도 이렇게 예쁜데, 저 치들의 눈에는 어떨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해가 된다고 한들 용납이 되는 건 아니었다.

루는 손을 뻗었다. 술기운에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만졌다. 고작 뺨을 쓰다듬을 뿐인데 손바닥이 달아서 녹을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너는 내 마음을 바다로 만들어.

술 향이 밴 느릿한 목소리는 어쩐지 아득했다.

-사랑한다는 뜻이지.

이내 그녀의 눈꺼풀 위로 입을 맞췄다. 입술이 떨어지자 다시 잿빛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는 확신했다. 세상에 이 눈동자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으리라고.

그러니.

-아무도 너를 못 봤으면 해.

-…….

-너도 알다시피 내 사랑은 지독하지. 그래서 너를 눈에 담고 마음에 담는 것들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이고 싶어. 그게 아니면…….

루는 제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숨을 골랐다.

-너를 가둬놓고 죽을 때까지 나만 보고 싶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나만…….

그를 가득 채우고 있던 청량한 물살이 채도를 잃어갔다. 그렇게 목 끝까지 차올라 일렁였다. 넘칠 듯, 말 듯.

-내겐 그런 게 행복인데, 너에겐 불행이겠지. 그래서 참아…….

루는 여전히 붉게 물든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골랐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버거웠기에 짓눌리는 심경으로 토로했다.

참고 있다고. 너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평생 가두고 싶은 것도. 그들의 숨통을 끊어내고 싶은 것도. 눈을 파내버리거나 완전히 멀게 하고 싶은 것도. 전부 다.

네가 불행하지 않도록.

그래서 네게 미움받지 않도록 무던히 애쓰고 있다고.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너에게 마음을 품은 인간들이 널 또렷하게 못 보도록 시력이나 떨어뜨리는 것뿐이라고…….

그때, 네 표정이 어땠던가.

루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에게서 떨어져나와 희미한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이 정도 질투는 귀엽게 봐줘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아?

제인은 농담 같이 말하며 멀어지는 그를 붙잡았다. 그녀가 목덜미에 팔을 두르며 당겨 안자 무리 없이 커다란 무게가 품으로 쏟아졌다. 이어서 그의 온기 낮은 두 뺨과 날 선 콧대, 촘촘한 속눈썹이 자리한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곧이어 한없이 낮은 목소리가 제인의 귀에 닿았다.

-나는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다 들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 한 번도 그 생각을 의심해 본 적이 없어. 그런데, 제인…….

-…….

-나는 네게…….

-…….

그날 밤.

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와 함께 기나긴 밤을 나눴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도 아니었다. 그에게 진심을 말한다면 믿어주리란 것도 알았다.

다만, 데시안의 본성이 인간과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말을 아끼고 또 아꼈다.

몹시 긴 밤이었다.

취해줘, 제인.

그날 내가 취해 주었던 것처럼.

제인은 루가 한 말을 끝으로 쓰러졌다.

루가 주문한 술은 사람이 마시는 술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독했다. 살면서 그런 술은 처음이었다. 마시자마자 식도부터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워지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땐 침실이었다.

정확히는 침대 위.

그녀는 저를 포박하듯이 안고 있는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러자 정수리 위에서 익숙한 웃음이 눈송이처럼 떨어졌다.

“깼군.”

제인은 왈칵 성을 내고 싶었으나 사방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에 아무 말도 못 했다. 어느 정도 어지러움이 가라앉고 나서야 한껏 잠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너 나를 죽이려고 그런 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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