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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62)화 (162/168)

162. 외전 05

휴일 아침, 잠에 취한 제인에게 루가 장난스럽게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올해 수익으로는 널 위한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은데, 혹시 갖고 싶은 게 있냐고.

그래서 그녀 또한 잠결에 장난스레 대답했다.

-으음, 너……?

-이미 가졌고.

-흐으음, 레스토랑……? 마탑 식당 맛 더럽게 없…… 쿨…….

새벽 늦게까지 야근하고 맞이한 휴일이었기에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비몽사몽이었다.

“그래서 꿈인 줄 알았어.”

놀란 눈을 깜빡거리는 제인을 보며 루는 여상히 웃었다. 이내 그녀의 뺨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주었다. 손길에 다정함이 뚝뚝 떨어졌다.

“점심때마다 여기 와서 식사해. 네 이름으로는 값을 받지 않도록 해두었으니.”

“고마워…….”

제인은 무척 기쁘고 감동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오늘은 루의 생일이었다. 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인데, 어쩐지 자신이 받은 기분이었다.

그런 제인의 생각을 읽어 낸 루가 즐거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렇지. 생일 선물이란 자고로 당일에 받아야 그만큼 기쁜 법이긴 하지.”

“…….”

“비록 내가 사백 년 하고도 몇 년 더 살긴 했지만, 축하를 받은 건 올해로 ‘겨우’ 다섯 번밖에 안 되니 이날 하루가 아주 특별하거든.”

“…….”

“손꼽아 기다렸는데 말이지.”

제인은 저도 모르게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부쩍 피곤해진 얼굴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왜일까. 왜 이렇게 하루가 길게 느껴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사과파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데코토들의 눈총을 받으며 온갖 고난 끝에 완성했던 사과파이를 이 흉악한 피로함의 원인으로 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탓하기 좋은 구실이 떠올랐다.

역시 라트올이 문제다.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눈 밑이 퀭해지고 손을 달달 떨던 병자에게 주문 제작을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제인이 속으로 땅을 치고 후회할 때였다. 루가 종업원을 불러서 도수 높은 럼주 한 병을 주문했다.

“당장 내게 줄 선물이 없다면 제인, 원하는 걸 말해도 될까?”

불길하다. 예감이 좋지 않아.

“아니라고 말하면 서운할 거야?”

“굉장히.”

“선물…… 기다릴 거라고 하지 않았어?”

“서운해하지 않을 거라고도 했던가?”

제인의 두 손이 재차 눈두덩이를 향했다. 그녀는 인정해야만 했다.

오늘 제대로 휘둘리는 날이구나.

“……들어나 볼까?”

“아니, 들어줘야지.”

제인이 체념하며 고개를 든 순간, 루는 자신이 원하는 걸 정확하게 말했다. 황금빛으로 찰랑거리는 술잔을 내밀며.

“취해줘, 제인.”

그린 듯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그날 내가 취해 주었던 것처럼.”

그날이라면…….

제인의 얼굴에는 여러 생각이 드는 듯 그늘이 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온몸이 새빨개져 버렸다.

그날 그가 귓가에 속삭인 말이 떠올라서.

루가 웃었다.

그날은 제인이 라트올에게서 명계의 술을 받은 날이었다.

‘게을러 빠진 데시안이 사람들의 시력을 성실하게 떨어뜨리는 이유’라는 주제로 정신계 치유 마법사 하나와 정신이 피폐해진 메 데시안 하나가 열띤 토론을 펼쳤다.

토론은 길었다.

루의 간악한 행동이 반영된 ‘성실함’과 ‘우울’이 접목된 적신호에 마땅한 사례와 대응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가 성실하게 움직이다니.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긴 논의 끝에 나온 건 우습게도 일차원적인 결론이었으니.

술을 먹이자. 취하게 만들어서 대체 왜 그러는지 들어보자.

하여, 라트올은 제인에게 명계의 술 중에서도 지독하다고 소문난 술을 한 병 구해왔다.

-알죠? 루는 인간들이 마시는 술로는 안 취한다는 거. 이 정도는 돼야 취기가 오를 거예요. 당신은 마시지 마세요. 명계로 놀러 가고 싶지 않으면.

-이거 마시면 나 죽어요?

-죽긴 뭘 죽어요. 당신은 이런 걸로 안 죽어요. 숙취가 지옥 같다는 거죠. 루는 하루 이틀이면 괜찮아지겠지만 당신은 최소 열흘은 고생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마시지 마요.

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병을 받았다.

받긴 받았는데, 어떻게 루만 마시게 할지 고민스러웠다. 이런저런 계책을 세웠으나 머리만 아플 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밤.

다 집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루. 네가 취한 모습을 보고 싶어.

-…….

침실 안.

루의 벽안이 테이블에 놓인 두 개의 술병과 술잔을 훑었다. 하나는 검은 병에 담긴 술이었고, 하나는 평소에 마시던 포도주였다.

그의 시선이 제인에게로 향했다. 이윽고 청명한 푸른 눈이 가늘게 접혔다.

-그게 왜 보고 싶지?

약간의 의심과 기꺼움이 뒤섞인 눈웃음에 제인은 술렁이는 심장을 다독여야 했다. 그 사이 루가 코앞에 다가왔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예상치 못한 거리감에 그녀는 숨을 훅 들이켰다.

해롭다. 이 얼굴은 정말이지, 너무 해롭다.

루는 제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른하게 웃으며 대답을 채근했다.

-응?

-어, 그게…….

뒤로 물린 발꿈치가 벽에 닿자 머리가 아찔했다. 제인은 당혹스러웠다.

나 언제 뒷걸음질 친 거야. 미치겠네.

그녀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은 순간.

입술 틈으로 온기 하나 없는, 말캉하고 익숙한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더 벌리자 부드럽게 밀고 들어오던 혀가 진득하게 엉켰다.

어째서인지 숨이 찼다. 거칠 것 없는 황홀한 입맞춤인데도 숨 쉴 틈이 없이 집요해서 가슴께가 눈에 띄게 오르내렸다. 호흡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잇새로 실낱같은 신음이 흘렀다.

루의 커다란 몸이 등을 맞대고 선 제인을 기분 좋게 압박했다. 이어서 그의 입술이 떨어져나와 목덜미에 머물렀다.

입맞춤으로 인해 온기가 덧칠된 입술이었으나 그럼에도 제인의 온도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시원한 입술이 뜨끈하게 달아오른 목덜미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이내 삼키듯 핥다가 치아로 살짝 긁어내자 제인의 몸이 크게 떨려왔다.

그녀는 도무지 막을 수 없는 신음을 애써 삼켜냈다. 그렇게 억눌린 숨소리가 상대의 귀에 더 자극적으로 들릴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한 채.

루의 입술이 느릿하게 목덜미 위로 올라갔다.

-내가 취하면…….

그가 제인의 허리춤을 한 손으로 잡으며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

대답하려던 제인은 귓가의 자극에 결국 참아내지 못한 신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나직한 웃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만질 줄 알고.

그의 입술과 치아가 귓바퀴를 물고 빨았다. 제인은 정신이 흐려졌다. 숨이 가쁘고 다리의 힘이 빠져서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허리춤을 쥔 루의 손아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긴, 내 주인은 겁이 없지.

귓가가 그의 웃음으로 재차 채워졌다.

이내 제인의 몸이 붕 떠올랐다.

루는 가볍게 안아 든 그녀를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눕히고서 테이블 위에 있던 포도주병을 잡고 쭉 들이켰다.

-……그건 내 술인데.

힘이 풀려서 거의 숨으로만 채워진 그녀의 목소리에 루의 눈가가 전보다 더 가늘게 휘었다.

곧이어 성큼 다가온 그가 다시 입을 맞췄다. 그녀의 입안으로 미지근한 술이 단숨에 차올랐다. 막을 새도 없이 밀려오는 액체를 꿀떡꿀떡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알아.

입술을 뗀 그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명계의 술까지 애써 가져왔으니 취해줘야지. 하지만 제인, 너도 어느 정도는 어울려 줘야 하지 않겠어?

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홧홧해졌다.

-줘, 내가 마실게.

-그냥 받아먹어.

-멀쩡한 술잔 두고 왜.

루는 가만히 웃다가 대답 대신 한 번 더 술병을 들이켰다.

제인은 입술 사이로 흐르는 술을 삼켜내야 했다.

-멀쩡한 나를 굳이 취하게 만들려는 네가 할 말인가.

제인은 이제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그녀는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최대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노력했다.

-궁금할 수도 있잖아. 너는 내가 취한 모습을 봤는데 나는 네가 취한 걸 한 번도 못 봤으니까.

-나야말로 궁금한데.

루는 제인이 훔쳐낸 손등에 묻은 술을 핥았다.

-네가 진짜 궁금해하는 게 그건가?

-…….

그가 꿀이 흐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웃었다.

-거짓말이 늘지를 않아.

루가 흐트러진 제인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끝에 베여있던 색기는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담백한 손짓이었다.

-네가 얼마나 고약한 술을 가져왔는지 알긴 할까. 어쩌면 라트올이 날 죽이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어.

-그 정도야?

-그럴 리가. 라트올이 준 건 확실하군.

-…….

미안, 라트올. 아무래도 넌 한동안 루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어.

제인이 속으로 라트올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할 때였다. 다시금 술병 채 들이킨 루가 재차 입을 맞춰왔다. 술은 전에 비해 느리게, 아주 천천히 술을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취기는 전보다 더 짙어졌다.

-그냥 예쁘게 받아먹어. 그럼 아무것도 묻지 않고 취해 줄 테니.

-이러다 내가 먼저 취할 것 같아서 그래.

-내겐 고마운 일이지.

-그게 뭐가 고마운 일이야?

의아한 물음에 루는 즐거운 듯 킬킬거리다가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조용히 귀 기울이던 제인은 발끝까지 빨개져 버렸다.

-너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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