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외전 04
“옷은 안 젖어서 다행이네요. 여기, 이걸로 손 닦으세요.”
세실은 루에게 손수건을 건네준 뒤 티슈로 테이블을 닦았다. 동시에 머리가 쭈뼛 설 만큼 위협감을 느꼈다.
왜지? 제인 외에는 어떤 인간에게도 무관심한 저자가 왜 멜드니 이름 하나에 이 정도로 큰 반응을 보이는 거지?
이해하기 힘든 와중에 제인의 말이 벼락같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도 전혀 짐작하지 못한 부분이라 저조차 얘기를 꺼내기 어렵다고…….
“!”
세실이 크게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은 순간이었다.
오싹.
지독한 냉기가 세실의 전신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상념을 떨친 그녀가 고개를 들자 루가 슬며시 웃으며 창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제인이 있었다.
돌계단을 올라가는 그녀를 누군가가 불러세웠다. 몇 발짝 뒤에 짙은 갈색 머리카락의 한 남자의 모습이 창을 통해 보였다.
세실은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이안.
그는 호엘리반의 끈질긴 설득 끝에 마탑의 연구교수로 임용된 북방에서 온 흑마법사였다.
한편 그의 능력을 높이 사는 호엘리반은 그를 따로 불러내어 몇 번이나 애원 같은 경고를 했었다.
제발 부탁이니 제인에게 반하지 말라고.
호엘리반은 그때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노라고 고백했다.
-오랜만이었어. 너랑 프시오 말고 날 그렇게 미친놈으로 보는 건……. 근데 납득이 되더라고. 나라도 웬 미친놈인가 하고 봤을 것 같거든.
세실의 시선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서 루에게로 옮겨졌다.
루는 웃고 있었다.
“……제인은 내가 아니라.”
분명 웃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주변에 먹구름이 가득한 분위기였다. 그는 창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평범한 남자를 만났다면 아이를 가졌겠지.”
“…….”
“그리고 평범한 가족을 만들었을 테지.”
“…….”
“안 그래, 세실?”
세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침묵에 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직하게 웃었다.
추를 매단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 이질감이 들 만큼 선명한 노크 소리가 울린 건 그때였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호엘리반이었다. 그는 루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평소와 다름없이 점잖게 웃었다.
“손님이 계신 줄은 몰랐네.”
“넌 또 뭐 하러 왔어.”
“지나가는 길에.”
하며 운을 띄우던 그가 자리에 앉으며 머쓱하게 말을 이었다.
“멜드니가 이모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여기서 멜드니 얘기하지 마, 이 새끼야. 네가 지금 누구 덕분에 고자가 안 됐는데!
세실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까이 앉았으면 종아리라도 차버릴 텐데 하필이면 사선에 앉아서 다리가 닿지 않는 게 원통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쥐뿔도 모르는 호엘리반은 머쓱하게 뺨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못생긴 이모가 뭐가 좋냐고 했더니 종일 울더라. 달래느라 살이 빠진 것 같아. 자식 다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별일 없으면 휴일에 집에 와.”
“어, 갈게. 꺼져.”
“서운하게 왜 이래?”
꺼져, 꺼지라고!
세실은 앞에 놓인 재떨이라도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꾸역꾸역 참으며 꺼지라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호엘리반은 동생의 상스러운 욕설을 백색소음 정도로 생각했으니.
“루, 좋은 소식이 있어요.”
그대로 루에게로 대화의 방향을 틀었고.
“안 그래도 먼저 말씀드릴까 말까 고민했는데, 뵌 김에 전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는 불행 중 다행으로 멜드니를 가뿐히 넘길 만한 이름을 꺼냈다.
“제인을 정교수로 임용할 예정이에요.”
* * *
“여긴 미쳤어.”
제인은 심각한 얼굴로 루에게 속삭였다.
“당근 수프가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
이어서 수프를 연거푸 떠먹으며 계속해서 감탄했다.
이 레스토랑 정체가 뭐야?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이건 정말 혁명이야.
그녀가 당근 수프의 바닥을 드러내는 사이, 이번에는 루가 속삭이며 웃었다.
“언제든지 오면 돼.”
“그러자.”
“내가 이곳의 소유자니까.”
“응. 응?”
“네 것이기도 하지.”
“뭐어?”
너무 놀란 바람에 큰 소리를 낸 제인이 황급히 두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렇지 않아도 화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루와 함께 할 때면 어디서든 시선이 집중되는 편이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던 그녀였으나 이번에는 대실패였다. 이미 실내에 있던 모두가 제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멋쩍은 미소로 레스토랑 전체를 빙 둘러보다가 진짜냐는 얼굴로 루를 보았다. 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인은 뒤늦게 벽면에 걸린 간판을 다시 보았다.
『브리스 레스토랑』
브리스! 왜 이제 봤을까.
루는 ‘브리스’라는 필명으로 해마다 두 번 시집을 냈다. 그렇게 10권의 시집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동안에도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은 여전히 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 생의 나는 글렀어……. 아마 죽을 때까지 네가 쓴 시를 한 편도 해석하지 못할 거야…….
문학적 사고와 요리 실력이 비등하게 하찮은 그녀는 연인의 시를 읽다가 번번이 좌절했고, 그럴 때마다 함께 사는 아름다운 시인은 매번 한결같은 해석을 들려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너를 사랑한다는 의미야.
다정하기 짝이 없는 손길로 그녀에게서 시집을 거둬가며.
-외에 다른 뜻은 없어.
-……그런데 왜 뺏어가?
-그런 모습으로 바닥에 엎어져 있을 거면 내 위에 엎어져 있는 게 더 좋으니까?
-나 왜 그건 알아듣는 거야? 내가 어쩌다…….
-올라와, 위로.
-아니야,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미리 힘 빼지 말고.
-대체 왜 알아듣는 건데, 왜…….
하지만 그의 시를 이해하지는 못할지언정 그 시들이 모여서 한 권의 시집이 되고, 순식간에 절판되는 일련의 과정을 매해 지켜보며 두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나는 이 세상에 돈이 따라붙는 자가 확실히 있다는 것.
수석 약제사와 명예연구원, 그리고 연봉이 높다고 소문난 마법학부 정교수 월급보다 루가 한 해에 두 번 벌어들이는 돈이 수십 배는 많다는 사실에 기함했다.
또 하나는 유명세가 돈을 부른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 시인, 브리스.
사람들은 브리스라는 시인이 등장할 순간을 고대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브리스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매년 주기적으로 두 번의 시집을 출간할 뿐이었다.
브리스의 신비주의 행보에 가장 관심을 드러낸 건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여러 나라의 황제들이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브리스를 황성으로 초청했으나 놀랍게도 초대받은 이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루는 권태와 나태를 쫓는 데시안이었으므로.
이 의도치 않은 신비주의에 사람들은 더욱 열렬히 환호했다.
황제까지 홀리는 시인!
권력이라는 술잔에 취하지 않는 진정한 예술가!
오해로 살을 불린 유명세가 걷잡을 수 없이 높아갈 무렵, 브리스를 사칭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루는 자신의 미학에 손대는 벌레들을 끔찍하게 여겼으나 그의 사랑이 살생을 더 끔찍하게 여긴다는 이유로 그들의 처치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고민 끝에 각국의 수도마다 성을 지어서 브리스 아틀리에를 열었다. 아틀리에는 주인이 공석인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주인 없는 아틀리에라니.
전무후무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압도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의 주인인 브리스의 신비주의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대다수였다.
예상대로 사칭범은 뚝 끊겼다.
이후 루는 시집을 낼 때마다 돈을 갈퀴로 쓸어 담았고, 수익으로 다양한 예술 사업을 벌이면서 경영자의 자리에 타타를 앉혔다.
타타는 마석이나 보석 보는 눈은 형편없었지만, 일꾼 보는 눈 하나는 탁월했다.
탁월함의 비기는 하나였다.
세상에는 라트올 같은 녀석이 몇 있기 마련이었다. 녀석을 기준 삼아 비슷하게 지독한 놈들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루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이리로.”
“……아, 네!”
제인의 회상을 끊어낸 건 종업원을 향한 루의 목소리였다.
메인 요리를 가져오던 한 종업원이 루의 얼굴을 멍하니 보느라 쟁반을 들고만 있었다. 요리를 내려놓은 종업원은 레스토랑의 실소유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는 촉촉하게 구워진 거위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서 제인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한 입 먹자마자 미간이 절로 좁아지는 맛이었다. 재차 요리를 맛보던 제인이 루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레스토랑을 열 줄은 몰랐는데.”
“내게 레스토랑을 운영해보라고 권유한 건 너였어, 제인.”
“……내가?”
“네가.”
내가 언제? 라는 표정을 짓던 제인이 뒤늦게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랬다. 그런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