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60)화 (160/168)

160. 외전 03

“절 믿고 조금만 기다려봐요, 라트올.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요.”

라트올은 제인의 말에 손톱만큼도 위로받지 못했다.

“그 생각! 나도 알자고요, 말라 죽겠다고요!”

“그건 안 돼요. 난 당신 못 믿거든.”

“돌겠네!”

라트올은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세상 나태한 데시안이 고작 ‘제인을 좋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시력을 떨어뜨리고 다니는 간악한 ‘성실함’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 전혀 없지는 않겠지. 질투가 나긴 했겠지.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제인 역시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루에게 왜 그러는지 묻는 건 다른 영역이었다.

묻기 조심스럽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리라.

루는 흡사 먹구름처럼 보였다.

어딘가 낮게 가라앉아 고인, 다소 흐린 우울함이 뭉쳐있는 먹구름.

무고한 사람들의 시력을 교묘하게 빼앗는 기이한 행패를 부리는데도 그보다 더 어울리는 말은 없었다.

그런 루의 행동을 세실은 깔끔하게 한 단어로 정의 내렸다.

-염병.

* * *

소파에 앉아있던 루는 붉게 타오르는 태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완벽한 원형이 산등선에 처박히고 나면 제인이 제게로 올 시간이 될 테니.

루는 애가 탔다.

태양의 움직임이 느려터져서.

그에게도 제인이 저렇게 눈 부신 태양 같았던 때가 있었다.

한 줄기 햇살이 구원처럼 느껴지던 순간이 지금까지도 너무 생생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태양 따위가 어떻게.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데시안인 그는 인간을 현혹하고 타락시키는 것만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이제 그녀는 그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고, 기쁘게 미소 짓는 이유였으며, 아름다운 시를 쓰게 하는 이유였다. 어느새 그녀 자체가 그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매일 잠에서 깬 그녀가 눈을 뜨고, 그 눈 속에 저를 담으며 짓는 미소가 더 중요했다. 그러니 태양 따위가 제인에게 비할 바가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시간이 루의 맹목성을 단단하게 만드는 사이.

제인은 변했다.

때로는 죽음에 맞닿는 경험이 사람을 바뀌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녀의 경우는 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변한 게 아니라 천천히 변해갔다.

물론 그레데엘므의 별빛을 먹었기에 외모는 스물둘의 모습 그대로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바뀐 것은 내면이었다.

제인은 이전처럼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충분히 가시를 드러낼 만한 상황에서조차 담담한 얼굴로 속내를 감출 줄 아는, 제법 어른스러운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갔고, 애석하게도 그건 루에게만큼은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평소 그는 제인에게 소중한 몇 명의 인간들을 예의주시하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인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조용히 살의를 견뎠다. 그것도 언제나, 항상.

그럼에도 그들을 해치거나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두는 이유는 명백했다.

잠재적 인질.

언젠가 제인이 이유를 불문하고 제 곁을 떠나려 한다면 최대한 좋게 붙잡아 볼 구실 정도로 남겨놓은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제인은 그의 의중을 눈치챘으나 영리하게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를 떠날 일이 없을뿐더러 괜히 그의 속내를 아는 척 해봤자 좋을 게 없으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종종 불현듯 불안이 물결치는 그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루, 내 생의 모든 사랑은 너야.

5년간 제인은 변했고 앞으로도 변해갈 테지만 루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정말로 조금도.

그래서 루는 그녀와 그녀의 마음을 믿었다. 저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변치 않으리라. 하지만 자신이 순진하게 느껴질 정도로 믿고 있음에도 하나만큼은 장담하지 못했다.

저보다 그녀에게 더 걸맞은 사랑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장담.

고질적인 문제였다.

그는 인간이 아닌 데시안이니까.

그러므로 그녀가 변하는 건 그에게 좋은 현상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제인은 객관적으로 봐도 예쁘지 않나, 세실?”

“…….”

세실은 바빴다.

5년 전에도, 지금도, 별일 없으면 향후 50년간 계속 바쁘게 살아갈 인생이었다. 더불어 그녀는 호엘리반이라는 작자 덕분에 사랑에 빠진 남자의 팔불출에는 이골이 날 대로 난 인간이기도 했다.

고로, 그녀는 이 대화의 만족도가 정확히 마이너스 100%에 달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사정이었다. 당연하게도 루는 그녀의 사정 따위에는 단 한 톨도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실은 생각했다.

사랑에 빠진 얼간이들의 모임을 만들어볼까. 그래서 그들끼리 팔불출 나눔을 하게 두면 어떨까. 세상이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그녀가 세계평화라는 원대한 꿈을 그리는 사이 루는 웃음기 하나 없이 말을 이어갔다.

“눈에서 독기가 넘쳐흐를 때도 예뻤는데 독기가 빠지니까 빠진 대로 예뻐.”

“…….”

세실은 대답 따위 하지 않았다.

루 역시 그녀의 대답 따위 필요치 않았으므로.

“내 눈에도 이렇게 예쁜데 한미한 인간들 눈에는 얼마나 예쁘게 보일지.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어.”

“…….”

“가만히 있기만 해도 예쁜데 입꼬리를 살짝 올릴 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래서 가끔 화가 나. 밖에서 그렇게 웃는다고 생각하면 속에서…….”

세실은 맹세할 수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들으려 노력했다고.

정확히는 수 분간 이어지는 제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들으며 ‘염병할!’하고 대뜸 욕을 하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썼다고.

그러나 결국.

루의 입에서 ‘웃는 게 너무 예뻐서 큰일이니 밖에서 웃지 못하게 만드는 마법이나 마법 약’에 대한 문의가 나왔을 땐 한 줄기 인내심이 툭 끊어져 버렸다.

염병할!

세실은 곧장 서랍에서 파탐 상자를 꺼내어 신경질적으로 한 개비 물었다.

그러고는 ‘침착하게 돌아버린 당신의 머리통을 열어서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버릴 약은 있다.’라는 말을 초인적으로 삼켰다.

아무리 경지에 다다른 마법사라 할지라도, 그보다 더 높은 경지에서 태어난 데시안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머리통은 고사하고 그의 검은 머리카락 한 올에도 손을 대지 못할 테니.

생각 끝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난 십수 년간 루의 언행에 다소 피로함을 느끼긴 했어도 이토록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써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 옛날이 되어버렸다. 지킬 게 생겨버린 탓이다.

멜드니.

프시오와 호엘리반의 세 살배기 아들이자 세실의 조카였다. 그녀는 멜드니가 세상에 태어난 날을 잊을 수 없었다.

멜드니는 태어난 순간부터 예뻤다.

뱃속에서부터 뭘 그리 잘 먹었는지 산달 전에 태어났는데도 살이 오를 대로 올라서 피부도 탱탱한 데다가 프시오와 판박이라 눈이 아주 컸다.

예뻤다.

그냥 다 너무너무 예뻤다.

갓 태어나서 초점도 안 잡힐 게 분명하거늘, 눈이 마주쳤다는 감각이 들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세실의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는 자리에 선 채로 맹세했다.

너를 지켜주겠노라고.

살면서 구해낸 모든 강아지와 고양이를 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벅찬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랬던 그녀였기에 진심으로 루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루는 위험하다.

멜드니를 생각하면 존재 자체가 유해하고 위험한 데시안이지만, 그걸 떠나서 요즘 들어 특히 더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다.

프시오는 루가 사람들의 시력을 떨어뜨리는 것 자체를 몸서리치며 질색했지만, 세실은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말로 딱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를 제인은 정확하게 비유했다.

-세실이 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요. 저도 비슷한 느낌이 들거든요. 더 큰 폭풍우를 만들지 않으려고 먹구름을 조금씩 흘려보내는 완화 작용 같다고 해야 할까요.

-……완화 작용을 무슨 사람 시력 떨어뜨리는 걸로 하니?

-하더라고요…….

-…….

-…….

-……저러는 이유는 알고?

-네. 그런데 전혀 짐작하지 못한 부분이라…… 얘기를 꺼내기가 좀 어려워요. 대화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일까 싶기도 하고.

-뭔지 모르겠지만, 그럼 저대로 둘 거니?

-해결할 방법이 있어요. 단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지만요.

-내가 도와줄 건?

-아직은 없어요. 보아하니 루는 다시 시력을 회복할 수 있을 만큼만 떨어뜨리는 것 같거든요. 원인을 해결하고 사람들 시력도 되찾을 수 있게 노력해볼게요.

-염병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니?

-적절하다고 봐요.

-염병.

회상을 끝낸 세실이 짧아진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새 파탐을 물었다.

“그런 약 따위는 없어요.”

“만들어 볼 생각은?”

“만들어 볼 시간이 있어야 말이죠.”

루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건 세실이 바쁜 인간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인지만 한다는 거였다.

세실은 조용히 혀를 찼다.

“슬슬 일을 좀 줄일까 싶어요. 멜드니가 하루하루 커가는 게…….”

아쉬워서 말이죠.

그 말은 마침표를 잃고 말았다.

세실은 평소에 루 앞에서 최대한 조카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신경 썼다. 그러던 와중에 툭 튀어나와서 놀란 것도 있었으나.

“…….”

“……루, 괜찮아요?”

그녀보다 루의 눈동자가 훨씬 더 많이 흔들리면서 동요한 탓이었다. 찻잔을 잡으려다 손이 미끄러지면서 전부 엎을 만큼.

고작 멜드니 이름 하나에.

그건 전혀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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