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외전 02
제인은 진심으로 루가 드호아망 마탑에 오는 게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막을 방도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조심하는 수밖에.
그녀가 의문스러운 결심을 하며 관자놀이를 꾹 누를 때였다.
“그런데, 뭐가 빠지지 않았나?”
루가 은근슬쩍 물었다.
“물론 늘 선물 받는 기분으로 살고 있지만, 이왕이면.”
손에 쥐어지는 걸 받고 싶은데, 하며 마지막 파이 조각을 입에 넣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제인은 그의 웃음에 동조하듯 따라 웃었으나 곧 어색한 미소로 마무리했다.
“그게…… 준비한 지는 꽤 됐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려서 아직 미완성이야.”
이어서 사뭇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 하고 물었을 때, 루는 어느 틈에 왔는지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고 협탁 위에 앉혔다.
“나는 너의 충실한 종이지.”
그의 목소리가 퍽 즐겁게 느껴졌다.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루는 어처구니없게도 제 말에 말문이 막혔다.
……가라면? 그건 못 할 것 같은데. 죽어도.
루가 말을 잇지 못하고 턱을 쓰는 사이 제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오늘,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릴 거야?”
묘한 침묵이 벌어졌다.
하지만 루는 그 틈을 금세 채웠다.
“그러지.”
“정말?”
“데시안은 거짓말하지 않아.”
루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촉, 가벼운 소리가 떨어졌다.
“기다리라고 하니 순종적이고 유약한 나는 내 주인이 올 때까지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
“생일인데 말이지.”
“…….”
“생일이 뭐 별건가?”
“…….”
“생일에 주인 기다리는 개처럼 기다리는 것쯤이야.”
제인은 순종적이고 유약한 종에게 두 번째 패배를 맞이했다.
“……데리러 와.”
루가 기쁘게 웃었다.
“아무렴, 따라야지.”
이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너의 충실한 종이니.”
그는 그대로 제인의 살결을 맛보았다.
달다.
따끈한 피부에서 사과와 꿀 향이 듬뿍 묻어났다. 몸을 그 속에 넣었다가 뺀 것처럼. 입 안이 아리고 속이 쓰릴 정도로 달큼해서 머리가 어지럽다.
이상한 일이다.
주방은 탄내가 진동하는데 이 인간의 몸은 어째서 이렇게 달아빠졌나. 아닌가. 내 혀가 사과파이에 절여진 건가.
아무렴 어떠한가.
루는 이러나저러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의 내밀한 속살을 자극할 때 흐르는 가느다란 신음을 듣는 순간 귀까지 달아서 녹을 지경이었으니.
한겨울을 닮은 그의 손이 그녀의 상체 속옷 안으로 밀고 올라갔다. 보드랍고 따뜻하다. 잡기 좋게 파인 옆구리살을 살짝 움켜쥐었다가 엄지로 위에 도드라진 뼈대를 쓸어내렸다.
뼈마디마다 단단한 밀도가 느껴졌으나 그에게는 어림없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듯했기에 만질 때마다 인내해야 했다.
인내.
그녀를 만질 때면 늘 그랬다.
한 번도 갈증을 채울 만큼 꽉 그러쥐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제인의 체감은 다른지 말랑한 몸이 움찔거리며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밀착한 두 신체 사이의 온도가 주변보다 올라갔다.
그의 차가운 손바닥이 계속해서 그녀의 파인 옆구리와 뼈대를 천천히 쓰다듬다가 등으로 넘어가 느릿하게 어루만질 때였다.
이제는 부르튼 흔적 없이 보드라운 그녀의 손이 그의 얼굴을 잡고 자연스레 입을 맞춰왔다.
숨이 엉켰다. 봄처럼. 지옥처럼.
루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죽고 싶어질 만큼 따뜻하고 아늑했다. 올가미와 다를 바 없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도,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행복한 고양감이다. 저항 없이 취하다 보면 불안에 숨이 막혀서 목이 졸린다.
그리고 그 모든 걸 한 인간에게 간단하게 들키고 만다.
“루, 그거 알아?”
아름다운 사내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 순간 지독하게 사랑하는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푸른 눈에 가득 들어찼다.
“내 종은 다루기가 조금 까다롭다는 거.”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잿빛 시선 끝에는 언뜻 보면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은 태풍처럼 거센 불안과 질투에 눈이 멀어버린 데시안 하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선 데시안은 기꺼울 뿐이다. 마주 보는 눈동자 속에 유일하게 담긴 것이 자신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런데 왜일까.
이 순간 전혀 달갑지 않은 프시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이유는.
-당신, 진짜 미친 겁니까? 대체 왜 가만히 있는 사람들의 시력을 망가뜨리고 다니는 겁니까?
-좋아하니까.
-……?
-그자들이 제인을 좋아하니까. 눈이 잘 안 보이면 덜 좋아하지 않겠어?
-……마음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당신도 이제는 아실 텐데요. 그건 둘째치더라도 뒤에서 이런 짓을 한다는 걸 제인에게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째서?
-……?
-내가 어째서 숨겨야 하지?
-……어지러우니, 대화는 이쯤에서 그만두죠. 대신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세요. 만약 당신이 제인이 아닌 다른 인간을 사랑했다면, 루.
프시오가 그때 뭐라고 했더라.
-그 인간은 진작에 미쳐 돌아버렸을 거라는 걸 말입니다.
생각날 듯 말 듯 했던 힐난이 떠오르자 입술 새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프시오의 생각은 틀렸다.
그의 세상에 만약에 따윈 없다.
백 번, 천 번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제인이 아닌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없을 테니.
그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의 삐뚤어진 사랑에도 미치거나 돌아버리지 않는. 오히려 자신을 미쳐 돌아버리게 하는 유일한 한 사람.
제인.
오직 그녀뿐이었다.
* * *
라트올은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폐했다.
그의 쇠약함은 루가 제인에게 호감을 느끼는 남자들의 시력을 교묘하게 떨어뜨리고 다닐 때부터 시작되었다.
오래전, 탐욕의 데시안에게 시력을 빼앗겼을 때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탓에 도저히 루의 거처에서 지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울면서 집을 나와버렸다.
라트올의 사정을 알게 된 호엘리반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심신미약 상태인 라트올에게 ‘드호아망 전속 세공사’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당시 거처를 알아볼 상태가 아니었던 라트올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약서에 사인했다.
조건은 매우 훌륭했다. 개인 작업실뿐만 아니라 급여와 대우까지도 모두 최상급이었다.
다만 계약서상으로 호엘리반에게 명백한 ‘을’이 되어버린 게 서러웠다.
그러나 서러움도 잠시.
루의 거처에서 나오니 시력을 잃었던 순간의 공포에서 차츰 벗어났다. 그런 그에게 간접적으로 심신미약을 유발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언제 완성돼요?”
바로 제인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재촉하러 온 건 아니고 점심시간이라 식사하고 오는 길에 잠깐 들린 거예요. 알다시피 제 연구실이 여기서 가깝잖아요.”
“후, 거의 다 됐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제가 요즘 루만 생각하면 심장이 눈알에서 뛰는 것 같아서 작업이 느려요.”
“그래서 다른 데서 주문 제작한다니까. 괜히 고집부려서는.”
제인은 사실 라트올의 심신미약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중요한 물건’의 주문 제작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고집을 부린 건 라트올이었다.
루의 눈에 차는 세공사를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았고, 누가 제작하든 완성된 물건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리란 걸 알고 있던 탓이었다.
그러니 기껏 피하고 있는 루에게 ‘이 부분만 더 다듬어 봐.’라는 명령을 직접 듣는 것보다 처음부터 제인에게 주문받는 게 훨씬 나았다.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누가 제작하든 어차피 제가 다시 다듬게 될 거라니까요. 저보다 완벽하게 세공하는 인간은 없어요.”
“손이나 떨지 마요.”
심신미약 상태인 라트올은 제인의 말을 못 들은 척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건넸다. 잔을 받아 든 제인은 더 이상 왈가불가하지 않고 조용히 커피를 홀짝거렸다.
미완성인 건 선물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한 손으로 주머니에 있는 마법 구슬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린단 말이지. 선물도, 그것도.
그때 라트올이 물었다.
“그래서, 왜 그랬는지 루가 말해줬어요?”
“음…….”
“음? 지금 음이라고 했어요, 음?!”
라트올은 울컥했다.
“설마 나한테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는 거예요? 루가 도대체 왜 그러고 다니는지 얘기라도 들어보라고 명계 술까지 구해줬는데!”
“……그게.”
머리를 쥐어뜯던 라트올의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혀있었다.
“그게 벌써 반년 전인 건 알아요? 술이 부족해요? 더 구해줘요?”
“라트올. 제가 마탑에서 근무하면서 병가를 낸 적이 없었는데요, 그 술을 받은 다음 날 처음으로 병가를 냈어요.”
“설마, 그거 당신이 마셨어요?”
“차라리 제가 마셔서 병가를 냈으면…….”
“됐어요! 그만 말하세요!”
거기까지였다.
심신이 미약한 라트올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귀를 틀어막았다.
그는 자신이 준 술로 다음 날 제인이 병가를 낸 이유 따위, 정말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