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외전 01
루가 잠에서 깬 건 이른 아침이었다.
데시안의 생체리듬은 인간과 반대로 돌아가지만,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서서히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을 바꾸었다.
그렇게 5년쯤 되니 이제는 그녀의 생활 리듬에 꼭 맞춰졌다. 그의 사랑은 유난히 성실했으므로 나태와 권태를 즐기는 데시안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는 그걸 해냈다.
몇 년에 걸쳐서.
그래서 거짓말처럼 비슷한 시간에 함께 눈을 뜨곤 했는데.
“…….”
오랜만이었다.
눈을 떴을 때 혼자 있는 건.
루는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휑한 빈자리를 보고도 웃을 수 있는 건 집안에 제인의 기척이 명백한 덕분이었다.
기척뿐일까.
아침부터 부엌에서 뭘 하는지 의뭉스러운 탄내가 방 안까지 스멀스멀 풍겨오고 있었다.
그린 듯한 그의 미소에 곤란한 기색을 덧칠했을 때였다.
투명한 데코토들이 침실 안으로 삼삼오오 기어들어 왔다.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눈썹을 아래로 떨어뜨리곤 루를 올려다봤다.
지금 부엌에 악마보다 더한 여자가 있어요. 제발 처리 좀…….
“…….”
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달력에 가닿았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다.
그건 곧 제인이 부엌을 초토화하는 연례행사를 치르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데코토들은 매년 돌아오는 이날을 재앙의 날이라 불렀다.
루는 그녀가 곁에만 있다면 한눈을 팔지 않는 이상 무엇을 하든 지지해주었지만, 요리만큼은 결코 환영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는’ 것보다는 ‘먹는’ 것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냐며 잘 타일러 보려고 시도는 했으나.
-……안 돼?
-…….
제인이 주방을 어떻게 쓰는지, 또 그렇게 완성한 요리가 어떤 꼴인지 봤다면 누구든 ‘돼’라고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서운함이 비치는 그녀의 표정에 루는 ‘안 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의 생일 한정으로 부엌을 사용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랬었지.
회상하는 와중에 탄내가 더욱 진동했다.
동시에 데코토 하나가 투명한 손길로 루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가서 어떻게 좀 해보시라고.
“…….”
5년.
괴상한 요리를 보아도 아찔함을 감추는 데는 도가 트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비장한 심경으로 흑발을 쓸어 넘기며 침실을 나섰다.
루는 조금 놀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식탁 위에 놓인 건 예상 밖의 멀쩡한 사과파이였다.
그러나 개수대에는 멀쩡한 사과파이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희생양, 솔직히 석탄이라고 봐도 무방한 무언가들이 높이 쌓여있었다.
한발 더 나아가 개수대 주변에는 오만 가지 조리 도구들을 다 꺼내어 알뜰살뜰 사용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뭐랄까.
조리 기구마다 쓰임의 기회를 평등하게 주려는 그녀의 고결한 신념까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루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기구들이 아주 기뻐했겠어.”
“응, 뭐라고?”
손을 씻고 온 제인이 그의 말을 놓쳤다는 듯 되물었다.
루는 제 곁을 스쳐서 맞은 편에 앉으려는 제인의 손목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녀가 그의 품에 알맞게 쏙 들어왔다.
그는 제인을 품에 안을 때마다 확신했다.
제 품에 이렇게 딱 들어맞는 인간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없으리라.
그사이 돌연 넓은 품에 안겨버린 여자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금세 꽃향기 나는 웃음을 머금었다. 이내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축하해, 루.”
목덜미에서부터 퍼지는 기분 좋은 소름을 음미하던 루가 뭐를? 하며 시치미를 뚝 뗐다.
제인은 여유롭게 장단을 맞춰주었다.
“네가 태어난 거. 그리고…….”
“그리고?”
“나를 만난 거.”
어느새 상체를 떨어뜨린 제인이 루의 허벅지 위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그렇지. 축하받아 마땅하지. 그리고 네가 나를 이렇게 내려다보는 것 또한.
루가 말없이 입꼬리를 올리자 제인이 상응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뺨에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이어서 그가 힘주어 당겨 안으려 하기 직전, 그녀는 약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홀랑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가벼워진 무게감에 루는 마른 갈증을 느꼈다. 하지만 품에서는 빠져나왔을지언정 그녀의 손목은 여전히 그에게 잡혀 있었다. 그러니 한 번 더 당기면 그대로 끌려오리란 걸 알았다.
알고는 있지만.
“나 사과파이 열심히 만들었는데?”
예쁘게 웃는 저 얼굴을 보면 그로서는 그녀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루는 당기려는 욕구를 누르며 슬쩍 놓아주었다. 제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몸을 돌려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여전히 긴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었다.
진짜 사파이어가 박힌 머리끈이었다.
언젠가, 제인은 루에게 되돌려 받은 머리끈의 보석이 가짜라는 걸 알게 되었다.
루가 아닌 라트올을 통해서.
-진짜 별 거지 같은 걸 다 하고 다니시네요.
-거지 같다뇨, 말이 심하네. 이래 보여도 삼백 온트 짜…….
-삼백 온트 짜리 사기였겠죠.
-?
-이리 주세요. 갖다버리게. 뭐예요, 그 불순한 눈빛? 설마 날 보석사기꾼으로 보는 거예요? 안 버려요. 안 버릴 테니까 일단 줘봐요. 진품 사파이어로 다시 맞춰 드리려고 하니까. 와, 환장하겠네. 루! 지금 제인이 절 보석사기꾼으로…….
그렇게 작고 소박한 소동이 지나간 후.
제인은 진짜 사파이어가 박힌 머리끈을 갖게 되었다.
그제야 루는 그녀에게 어쩌다가 가짜 머리끈을, 그것도 순진하게 삼백 온트씩이나 주고 사게 됐는지 물어볼 수 있었다.
실은 내내 궁금했었다. 그가 아는 제인은 딱히 순진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화려한 치장에는 더더욱 관심 없는 인간이었기에.
-나한테 주는 선물이었어.
-선물?
-응. 약제사 수석이 된 날이었는데 누구에게도 축하를 못 받았거든. 하임도 발령지에 있었을 때니까. 그날따라 유독 기분이 꿀꿀 해서 산책하던 길에 기념으로 샀던 거지. 그러니까 나한텐 의미 있는 거야.
그녀는 이제 ‘진짜’가 된 보석 장식을 만지며 웃었다.
-여러모로.
지금, 그녀의 머리끈에 박힌 사파이어가 아침 햇살에 유난히 반짝거려서일까.
루의 짧지 않은 상념을 눈치챈 제인이 식탁 위를 노크했다.
“……먹기 싫어?”
“그럴 리가.”
루가 고개를 저으며 진득한 사과파이를 한 입 먹었다. 그가 올해 먹은 요리 중 가장 달았다. 조금 심하게. 당분으로 치사량을 책정할 수 있다면 딱 그 정도로.
“맛있군.”
그의 말에 제인도 한 입 베어 먹었으나 미간이 슬 좁아졌다.
“……뭐야, 너무 단데? 왜 이렇게 됐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제 손으로 창조해낸 여자는 매년 그러하듯 그만 먹으라고 만류했다. 올해는 성공할 줄 알았다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하지만 루는 그녀의 호소를 들어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사과파이를 사수했다.
얼마간의 옥신각신 후, 제인은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두 손을 들었다.
“저녁은 맛있는 거 먹자.”
루는 사과파이를 느긋하게 먹으며 물었다.
“드호아망에 새 레스토랑이 생겼던데, 가볼까.”
“좋아.”
“저녁에 데리러 갈 테니 천천히 나오도록 해.”
“아, 데리러…….”
제인의 투명한 민낯에 난처함이 한 겹 씌워졌다.
드호아망 마탑의 마법학부 2년 차 연구교수인 그녀는 다년간의 진료를 통해 많은 임상 실험 실적을 냈으나 아카데미를 수료하지 않은 학력 탓에 승진이 더뎠다.
그래서인지 매일같이 자진해서 야근하기로 유명했고, 정시에 퇴근한 적은 손에 꼽았다. 그건 모두 루가 데리러 온 날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당장 난처함을 느끼는 이유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음, 내가 일찍 올게.”
제인이 에둘러 사양했으나 루는 그녀의 사양을 사양했다.
“어차피 세실에게 문의할 것도 있어서 마탑에 가려던 참이었어.”
문의라니.
제인은 자신과 미학을 제외하고 세상만사 하등 무관심한 데시안이 세실에게 뭘 문의하려는지 덜컥 염려스러웠다.
“뭔데? 내가 대신 물어봐 줄게. 집에 편하게 있…….”
“제인.”
루는 이가 녹을 것 같은 사과파이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제인의 말을 잘라냈다. 입꼬리에 걸려있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으나 어쩐지 서늘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
“숨겨둔 사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제인은 기가 막혔다.
“내가 그런 게 어딨어? 네 양심은 어딨고.”
실로 그녀는 ‘그런 게’ 있을 수 없었다. 목에는 루의 새 목걸이를 걸고 있는 데다가 핍과 핍의 자식들은 언제부턴가 루에게 홀려서 그의 수족이 된 지 오래였다.
-너는 위험해져도 나를 부르는 관성이 없으니 그것들이라도 붙일 수밖에.
보통 사람이라면 진절머리를 낼 만한 집착이었고 감시였으나 제인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분명 그랬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 주변에 ‘안경 쓴 남자들’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늘어간다는 걸 눈치채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인, 데시안은 양심이 없어.”
“있는 척이라도 해봐.”
“그래, 그럼 7시에 연구실로 데리러 가지.”
“…….”
그녀는 루가 품위 있게 먹는 사과파이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달아빠진 사과파이만큼이나 형편없는 대화 흐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