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12시 정각.
현관에서 파동 같은 울림이 들려오자, 마법사들은 누가 찾아왔는지 단박에 눈치채고 얼굴을 굳혔다.
그저 즐겁게 웃고 있는 제인을 제외하고서.
세실이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데리고 왔다.
제인을 끝까지 죽음으로 몰아붙였던, 그러나 결단코 죽게 두지 않으려 했던 데시안의 방문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루는 그들을 가볍게 무시하고 제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서늘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말하며.
“내 주인님 모시러 왔지.”
제인은 시계를 한 번 보고 킬킬거렸다. 12시가 되자마자 나타난 지독히도 아름다운 데시안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서.
그녀는 빈 포도주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노래하듯이 대답했다.
“나는 네 주인 아닌데.”
이어서 무척 즐거운 어조로 덧붙였다.
“강아지인데?”
제인은 취하지 않았다.
그건 애교였다.
“……푸흐.”
밀리타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양마저도 제인답다는 생각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밀리타의 웃음을 기점으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한층 풀어졌다.
세실이 인사치레로 앉으라고 권유했고, 루도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듯 제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만 갈까.”
몹시도 여상하고 느긋한 몸짓으로.
“널 위해 음탕한 시를 썼어. 그러니 읽어 줘야 마땅하지 않겠어, 제인?”
미혹에 절인 미소를 지으며.
“되도록 침대에서.”
모두가 쩍 굳었다.
단 한 사람.
아니, 한 명의 초월자만이 유쾌한 웃음을 팡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루는 제 품에 안기는 제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루를 따라가던 제인이 고개만 겨우 돌린 채 손을 방방 흔들었다.
“프시오, 생일 축하해요!”
프시오는 차마 제인을 보지 못했다.
그때 하임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옆에 서 있던 세실이 빠르게 그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제인을 볼 엄두는 못 내고 애먼 곳을 응시하며 얼른 가라는 듯 손짓할 뿐이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정적이 싸늘하게 포진했다.
하임의 손에 쥐어져 있던 포크만이 맑은소리를 내며 앞접시에 떨어졌다.
땡그랑…….
그리고 하임보다 더 창백해진 한 사람.
호엘리반은 생각했다.
망했다고.
프러포즈고 뭐고 다 끝났다고.
오늘은 그 어떤 프러포즈로도 ‘음탕한 시’를 지워낼 수 없을 거라고.
루는 정말 악마가 맞다고.
* * *
루와 손을 잡고서 거리를 거닐던 제인이 그를 타박했다.
“오늘 프시오 생일이라고 했잖아. 왜 그렇게 짓궂게 굴어.”
“예쁘게 받아주고선 딴소리군.”
“딴소리는 네가 했지. 이렇게 여유롭게 산책하고 있잖아? 침대가 아니라.”
루가 걸음을 뚝 멈췄다.
이내 문제없다는 듯이 느슨한 미소를 흘렸다.
“나는 어디서든 너와 할…….”
수 있는데. 라는 말은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제인이 그의 두 뺨을 잡고 당긴 탓에 기꺼이 끌려가 주었다. 그녀가 가볍게 입을 맞추고 소곤거렸다.
“9월 마지막 날. 그날로 할래.”
루가 무엇을, 이라고 묻기도 전에 대답이 돌아왔다.
“내 생일.”
“…….”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거든.”
제인은 생일이 있는 사람이 부럽지 않았다. 부모가, 형제자매가, 가족이 있는 사람이 부럽지 않았다.
거짓말이다.
제인은 그들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 열심히 연민했다.
하지만 제인은 이제 진정한 연민이 무엇인지 알았고, 슬프거나 아플 때 울 줄도 알게 되었으며, 사랑을 배워가고 있었다.
다소 독점욕이 과도하게 넘실거리는 사랑이긴 하지만.
사랑을 하나씩, 천천히 배워가는 그녀는 이제 세상에 태어났음에 축하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때였다.
루가 난처함이 깃든 미려한 얼굴로 말했다.
“……어쩌지.”
“응?”
“그날만큼은 도저히 양보 못 할 것 같은데.”
허리를 숙인 루가 제인을 품에 안았다.
제인의 목덜미에 그의 목소리가 뭉근하게 울려 퍼졌다.
“네 생일은 내 것이길 바라. 평생.”
“…….”
“제인.”
대답해야지.
은근한 압박과 처연함이 깃든 독촉에 제인은 그에게 현혹되었던 여름날의 님프를 떠올리며 은은하게 웃었다.
이어서 현실을 받아들였다.
내 인생에 시끌벅적한 생일 파티는 없으리라.
기쁜 생일날, 루에게 현혹된 인간들이 이지를 잃고 집으로 기어들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그와 단둘이 보내는 게 나을 테니.
제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루의 등을 토닥였다.
“응, 가져. 다 줄게.”
루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확인하듯 제인을 응시했다.
제인이 재차 대답했다.
“다 네 거야.”
루는 고개를 젖히고 밤하늘을 보았다.
조금 더 산책하려 했으나 당장이라도 이동의 문을 열어서 침대를 데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문, 열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제인이 그의 손을 잡으며 앞으로 걸었다. 보기 좋게 타이밍을 놓친 루가 살짝 미간을 좁힌 채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초조함이 그의 목을 태웠다.
같이 있어도 이렇게 목이 타게 하다니,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인간이지 않은가.
“루, 나한테 생일선물 미리 줘도 돼.”
루가 제인을 힐끔 보며 미소 지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봐. 생일이 아니더라도 네가 원하는 건 언제나, 무엇이든 다 갖다 바칠 테니.”
“우리 취향이 같은 게 있다며?”
제인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걸로 줘.”
루는 제인의 사랑스러움을 손으로 헤아릴 수 없었다.
스물아홉 번이나 틀렸던 취향에 관해 기어코 알고자 하는 방법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머리가 다 어질했다.
어지럽고, 곤혹스러웠다.
이동의 문을 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러야 했기에.
“그건 못 줄 것 같은데.”
“뭐든 줄 수 있다며.”
“이미 너한테 줬어, 제인.”
제인이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뭐냐고, 하며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그가 자신을 가리켰다.
“나.”
제인이 두 눈을 끔뻑거리며 루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서로가 취향이잖아. 네가 내 취향이고, 내가 네 취향이니까. 이미 네게 날 다 주었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주지?”
제인이 멍한 얼굴로 타박타박 걷다가 말을 더듬었다.
“……아. 그, 어, 되게 로맨틱한 거였네.”
그녀는 패배를 인정했다.
아마 이 방면에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을 것 같다고. 백전백패해도 기분 좋은 게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잡은 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루가 말했다.
“말해봐, 정말로 갖고 싶은 거. 생일이 생긴 기념으로.”
“……정말로 뭐든?”
“약속하지. 무엇이든 주겠다고.”
즐거운 듯한 그의 목소리는 이어지는 제인의 대답에 멈춰버렸다.
“목걸이.”
그의 심장이 툭, 내려앉았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라도 들은 듯, 못 박힌 듯 서서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바람에 흐트러지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다 다시 제인을 바라보며 조소가 묻어나는 소리로 물었다.
“……목걸이?”
“응, 목걸이.”
루가 낮은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딘가 위압적인 걸음에 제인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이윽고 그녀의 등에 담벼락이 닿았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져 어둑한 길목이었다.
“내가…….”
한기가 잔뜩 서린 느슨한 목소리가 어둠을 채웠다.
“내가 어떤 목걸이를 네 목에 채울 줄 알고.”
제인이 어, 하고 눈을 도로록 굴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화려한 거보단 깔끔한 게 내 취향이야.”
“…….”
“레이스 없이 검은색으로 된 넓은 띠에 마석도 검은색인 게 좋을 것 같…….”
루는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제인의 몸이 그의 무게에 지그시 눌렸다.
질척한 입맞춤 사이로 루의 음조가 낮게 울렸다.
“제인, 그 목걸이는.”
그건 구속이다.
제인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응, 알아.”
제인의 대답에 루는 터질 것 같은 욕망을 억누르며 그녀를 천천히, 그리고 품에 꽉 안았다.
“내 집착이…… 네 목을 조를지도 모르는데.”
제인이 조용히 웃었다.
그녀는 회중시계로 짧게 산책해서 좋다는 말을 기억하는 그를, 당장이라도 저를 데려가 뒹굴고 싶으면서도 손을 잡고 함께 새벽 거리를 걷는 그를 사랑한다.
사랑은 상대의 면면을 살피게 한다.
그러니 알 수 있다.
저를 향한 사랑의 기저에 들끓는 그의 집착이 얼마나 어둡고, 음침하고, 위태로운지.
그리고 그 위태로움을 혼자서 감당하려는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제인은 루를 그렇게 혼자 둘 생각이 없었다. 그의 마음을 온전히 함께해 주고 싶었다.
그의 집착이 목을 조른다고 할지라도.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어.”
제인의 대답에 루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내 그녀 어깨에 이마를 올리고 숨을 골랐다.
루는 그녀를 짓이겨버리고 싶었다.
부수고 싶었다.
언젠가는 드러날지도 모를 끔찍한 집착으로부터 달아나지 못하게, 어디로든 숨지 못하게, 그녀의 마지막 숨 하나까지 완벽하게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순간순간이 그랬다. 이 순간처럼.
하지만…….
“그게 나를 사랑하는 네 마음이라면, 그렇다면, 루.”
루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기꺼이 받을게.”
제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갛게 웃어주었다.
“나는 네 사랑에 질식해도 좋아.”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짓이길 수도, 부술 수도, 가둬놓을 수도 없다는 것을.
절대로.
“네 모습 그대로 날 사랑해도 돼. 흘러넘치는 마음을 억누르지 않아도 괜찮아. 마음껏 나를 사랑해.”
그녀는 그의 공허를 채운 미학이므로.
어떤 시, 어떤 구절, 어떤 단어보다도 아름답게 빛나는 미학.
“나는 그거면 돼.”
그런 그의 미학은 언제나 믿을 수 없는 말들을 너무나 태연하게 하고, 심지어 믿도록 만든다. 그에게 믿음을 가르쳐 준 인간답게.
마치 신처럼.
“나를 죽도록 사랑해줘.”
그녀가 환히 웃는다.
“이 모든 게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야.”
그 웃음이 비현실적으로 환해서, 그는 고개를 들었다.
달을 가렸던 구름이 지나간다.
그의 머리칼을 지나 콧대와 눈가, 목선을 타고 달빛이 번졌다. 밤하늘에 머물러 있던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곳에도 빛이 있다.
아득한 공허를 채워준 잿빛이, 바로 눈앞에.
“……제인. 누군가 내게 시를 쓰는 이유를 묻는다면.”
마디조차 아름다운 손이 거칠고 따뜻한 손을 잡는다. 혹여나 녹진 않을까, 깨어지진 않을까,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할 거야.”
이윽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경건하게.
가진 사랑을 모두 바치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로, 너를 향한 내 사랑을 영원히 고하기 위함이라고.”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