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오늘 인원이 일곱 명이었던가?”
커다란 케이크를 식탁에 내려놓던 호엘리반이 준비된 식기 개수에 의아해하자 세실은 멸시가 듬뿍 담긴 시선을 보내주었다.
“네 놈이 붙여놓은 이웃이 바로 옆집이거든? 제인이 오는데 초대 안 하면 오며 가며 머쓱하지 않겠니?”
“뭐, 그렇겠네.”
세실은 태평하게 대꾸하는 호엘리반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었으나 인내심을 가졌다.
“이건 뭐니? 케이크에 초는 왜 한 개만 꼽았어? 프시오 우리랑 동갑인 거 몰라?”
“프시오는 요정이라 나이를 안 먹어.”
“……별 미친.”
세실은 오늘 하루가 빨리 가길 진심으로 염원했다.
* * *
철커덕.
“제가 분명 안 간다고…….”
현관문을 연 하임은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제인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와 그가 손에 든 담배를 번갈아 보다가 조소를 그렸다.
이내 그의 손에서 담배를 가져와 입에 물고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다가 턱을 쓸며 현관문을 닫았다.
하임이 제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새 걸로 꺼내 주면요.”
“……제인.”
“이거 되게 익숙한 그림 아니에요? ”
제인이 재떨이에 재를 털며 킬킬거렸다.
“입장만 바뀌었지.”
“…….”
열다섯 살쯤.
제인은 하임의 담배를 종종 몰래 피우다가 제대로 딱 걸렸던 적이 있었다. 그녀는 유령이라도 본 듯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하임은 그때까지 제인을 혼낸 적이 없었다.
잘못한 것조차도.
그러나 그날은 무언가 달랐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이 명료하게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통 떨어질 것 같지 않던 그의 입술이 겨우 움직여졌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어째서인지 이어지지 않았다.
-왜…….
-…….
-왜 그걸…….
하임은 다시 입을 다물고 굳어 버린 제인의 손에서 담배를 가져와 불을 껐다. 호기심이었냐고 부드럽게 물었지만 당혹스러움까지 떨쳐내지는 못한 목소리였다.
-하임이 그걸 피울 때…….
제인은 멋쩍게 말을 이었다.
-……보여서요.
그는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마치 그녀의 말을 속으로 재차 곱씹는 것처럼.
편안해 보여서요.
하임은 얼굴을 쓸다가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뿐이야.
그리고 서랍을 열어서 담배 상자를 꺼내고 한숨을 쉬었다.
제인은 입을 꾹 다문 채 눈알만 도로록 굴리며 가만히 숨을 죽였다.
-마약성 식물은 편안함과 쾌락을 줘. 하지만 결국은 모래성처럼 사람을 무너뜨리고 망가지게 해. 그러니까, 해서는 안 돼.
이어서 작게 중얼거렸다.
-이론으로 배웠을 텐데.
-하임도…….
하임도 배웠을 텐데 하잖아요, 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제인은 하임에게 혼나는 중이었다.
처음으로.
그녀가 입을 닫은 사이, 하임이 담배 상자를 두드리며 짧게 반복했다.
-안 돼.
그러다 상자를 열어서 안에 든 담배를 휴지통에 쏟아부었다.
-나도 안 피울 테니, 하지 마. 이것만큼은 절대 안 돼.
하임을 물끄러미 보던 제인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어주 조금은 이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는 건지도…….
하지만 그 생각에 자신이 없었다.
그저 눈길을 돌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릴 뿐. 그녀는 그날 이후부터 담배에는 손도 대지 않았었다.
제인이 열린 창가에 기대어 서서 물었다.
“저도 그런 얼굴이었어요?”
하임이 사뭇 목소리를 낮췄다.
“넌 더 꼴사나웠어.”
“말도 안 돼. 방금 얼굴 되게 못생겼었는데요.”
“못생겼었어.”
하임은 테이블에 앉았고 제인은 말없이 재를 재차 털었다.
그러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리 다시 절기 시작했네요.”
“…….”
“짜증 나게.”
하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깊게 쉬었다.
이깟 다리가 뭐.
너는, 네 목숨이 위태로웠었는데.
세실을 통해서 제인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들었던 그였다. 그래서 그녀의 말이 더 버겁게 들렸다.
헤아리기 어려운 많은 감정이 그에게 휘몰아칠 때였다.
“제가 몇 살 때였더라…….”
침묵 속에서 제인이 조용히 운을 띄웠다.
“열두세 살쯤이었던 것 같은데, 당신이 당신 아버지 장례식을 다녀왔을 때요. 저는 봤어요.”
제인이 재떨이에 꽁초를 짓이겼다.
“당신 웃고 있는 거.”
아마 그때부터였으리라.
자기 죽음에 슬퍼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제인은 내내 의문스러웠다.
그래도 아버지 아닌가.
하임은 그의 죽음에 왜 웃고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밖에 짐작되지 않았다.
“다리요, 그 사람이 그런 거예요?”
침묵이 그들을 무겁게 덮쳤다.
제인은 협탁 위에 올려진 담배 상자를 열고 한 개비 더 피웠다.
이어서 건조하게 물었다.
“다이애나가 학대당했던 사실도 알고 있었어요?”
하임이 네가 그걸 어떻게, 라는 표정으로 제인을 보았다.
제인은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마음이 갔던 거구나.”
“…….”
“당신은 아픈 흔적을 질질 끌면서 살아가는데 당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자는…… 너무나 밝고 예쁘게 웃으니까.”
곁에 있으면 나도 밝은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임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사랑했던 여자가 나 때문에 죽어서, 당신은 내가 정말…… 정말 미웠겠다.”
두 번째 꽁초도 재떨이에 비벼 끈 제인이 하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어서 무릎을 굽히고 그의 손을 잡았다.
하임은 저를 올려다보는 제인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다.
제인이 자신의 늪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들어왔다는 걸.
“그리고 당신.”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제 손을 잡아주었다는 걸.
“혼자서 많이 힘들었겠다.”
하임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열 살짜리 아이가 어른이 되는 동안 자라지 못한, 덩치만 커다란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끅끅 소리를 내며 울었다.
꼴사납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는 터진 울음을 막아내지 못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사랑스러운 애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못 이기는 척, 나를 미워만 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라.”
“……제인.”
“그렇게 당신을 괴롭히는 아이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아니야, 제인.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어.
하임은 목에 걸린 말들이 나오지 않아서 더욱 괴로웠다.
“내가 너무 어려서 요령이 없었어.”
“아니, 아니야, 제인.”
하임은 고개를 내저으며 잠긴 목소리로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너는 너무나 잘 자라 주었다고.
그렇게 그는 한참을 울었다.
숨이 넘어갈 듯이.
울음이 잦아들 때쯤, 제인은 조용히 하임, 하고 이름을 불렀다.
“그러니까 그만둬요.”
그녀는 애써 고친 다리를 재활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짓, 하지 마요.”
제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장난스레 말했다.
“나도 이제 안 해.”
하임은 궁금했다.
이 아이는 누구에게서 사랑을 배운 걸까.
처음부터 이 아이에게 있었던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흘러넘치는 사랑이 있는데도 자신이 방파제처럼 막고 서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미안…….”
그가 재차 말했다.
“미안해, 제인…….”
“미안하면 두 다리로 똑바로 걷는 거 보여줘요.”
제인이 하임의 다리에 손을 올렸다. 깃털처럼 가볍게, 따뜻하게.
“이런 상처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하임은 그저 막막했다.
이 아이에게 나는 무슨 짓을 했던 건가.
대답을 기다리던 제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라고 하세요.”
하임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래.”
다시 웃음을 되찾은 제인이 협탁으로 돌아가 앉았다.
“페브리아 쪽 일은 이제 마무리됐어요. 언제든 돌아가면 예전처럼 다시 궁정에서 일할 수 있을 거예요.”
프시오와 호엘리반은 돌연 잠적한 게 되어버린 하임의 신변과 제인과 밀리타의 사망 서류까지 모두 깔끔하게 원상 복귀되도록 도와주었다.
하임도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네 재산도 정리해 뒀어. 기다려봐.”
“와, 대단한데요?”
제인이 코웃음을 쳤다.
“하라는 재활은 안 하고 집구석에 처박혀서 헛짓거리나 하고 있었나 봐요?”
“너는 말버릇이…….”
누굴 탓할까.
저리 키운 게 하임이었다.
“아무튼, 네 재산은.”
두 사람은 잠시 재산으로 실랑이를 벌였으나, 승자는 제인이었다. 말다툼에서 압도적으로 진 하임은 형용할 수 없는 수치심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제인이 수줍게 말문을 열었다.
“있잖아요. 나 연애해요.”
거듭 말하자면, 수줍게.
하임은 조금 전까지 신랄하게 말하던 제인이 떠올라서 살짝 소름 끼쳤지만 의연하게 물었다.
“좋은 사람이니?”
그러나 제인의 대답은 무릇 그렇듯 예상을 빗나갔다.
“아뇨. 성격도 안 좋고, 사람도 아니고, 나이는 되게 많아요. 사백 살. 게다가 사는 이유가 사람 홀리는 거예요.”
“…….”
그게 뭔데.
다 떠나서 최악인데?
하임은 대체 뭘 만나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동시에 알고 싶지 않은 양면적인 감정이 들어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이어서 하는 말들을 듣자 우습게도 안심되었다.
“제가 많이 사랑해요.”
“……애인은? 많이 사랑해줘?”
“네. 그래서 행복해요.”
제인이 진심으로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거예요.”
* * *
제인이 하임을 데리고 세실의 집에 갔을 땐 파티가 무르익어가던 중이었다. 모두에게 하임을 인사시킨 후, 자리에 앉자 밀리타가 물었다.
“어디 갔었어요?”
“하임의 집에 있었어. 저기 바로 옆집.”
그러자 호엘리반이 포도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해했다.
“세실이 옆집에 아무도 없었다던, 윽.”
세실이 호엘리반의 발가락을 부서져라 밟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읍쯤득츠르즈블(입 좀 닥쳐라, 제발.).”
30분 전.
세실은 파티는 다 같이 해야 한다는 호엘리반의 지랄맞은 성화에 못 이겨 하임의 집 앞에 갔었다.
그러다 다 큰 남자가 꺽꺽거리며 우는 소리에 질겁했다.
세실은 곧장 자기를 세뇌했다.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
나는 귀가 먹었다.
그런 주문을 되뇌며 도망치듯 돌아왔던 터라 호엘리반의 입을 한 대 치고 싶었다.
넌 진짜 자녀 계획만 끝나 봐, 아주.
“으…….”
그녀의 속내를 알 리 없는 호엘리반이 신음을 삼키며 식탁에 이마를 박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프시오는 한 번은 처맞을 줄 알았다는 듯이 그를 한심하게 보다가 잔을 들었다.
“짠, 할까요.”
즐거운 파티가 이어졌다.
세실과 호엘리반은 끊임없이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으며 가족애를 과시했다.
프시오는 어느새 이기는 편이 내 편이라며 두 사람의 싸움을 응원하기에 이르렀고, 나머지 네 사람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다툼과 응원 속에서 마치 다른 일행인 양 술잔을 기울였다.
제인은 모든 게 마냥 즐겁고 좋아서 깔깔거리며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12시가 된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