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55)화 (155/168)

155.

제인은 멍한 루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너는 시가 마음의 파편이라서 좋다고 말했었지만, 사실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예술에 조예가 깊다면 그림이나 음악도 있잖아.

제인의 말이 옳았다.

루는 시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을 깊게 탐미했었다.

그런 그가 시를 각별하게 더 좋아했던 건 봉인되었던 이후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그가 보고, 듣고, 읽어왔던 모든 예술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림과 음악, 그리고 긴 서사의 문학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져만 갔다.

떠올릴수록 또렷해지는 건 오직 시였다.

그가 그때 후회했던 것 역시도.

-더 많은 시를 읽어둘 걸, 하고 말이지.

루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제인이 그의 뺨과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귓가에 다정하게 소곤거렸다.

-시를 써.

루는 고개를 저었다.

-제인, 예술을 창조하는 건 인간들의 산물이야. 그게 순리야.

-순리구나…….

제인이 뺨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그런 건 누가 정해?

루는 대답하지 못했다.

누가 정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때 제인의 손가락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부드럽게 들어와서 쓸어내렸다. 항상 그가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던 것처럼.

-그리고 네가 따라야 하는 건, 나 아니야?

명령이 아니었다.

그의 운명을 틀어쥔 인간의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주문이었다.

루는 기꺼이 웃으며 그렇지, 하고 입을 맞췄다.

데시안은 신에게 반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눈앞의 여자를 만든 신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어쩌면 신에게 감사하는 최초의 데시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러니까, 루. 시를 써. 시를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해. 너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우니까 아름답게 사람을 현혹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사랑스럽게 웃는 제인을 보는 순간, 루는 인정해야 했다.

이미 최초의 데시안이 되었다고.

신께 감사하다고…….

“이거 오늘 쓴 거야? 읽어봐도 돼?”

언제 왔는지 제인이 루의 등을 안으며 양피지를 가리켰다.

“돼.”

그러나 대답과는 다르게 루는 제인을 무릎에 앉히고 품에 안았다. 제인이 팔을 그의 목에 둘러서 손에 쥔 양피지를 보기가 불편했다.

“일찍 왔군.”

“응, 잠깐 차 한잔 마시고 왔어.”

제인이 시를 읽으려고만 하면 루가 여기저기 천천히, 그리고 집요하게 입술을 눌렀다.

결국 제인은 양피지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 루에게 입을 맞추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회중시계 말이야, 꽤 괜찮은 것 같아.”

그럴 리가.

루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으나 평온한 대화를 이어 나가고자 했다.

“어디가 어떻게?”

“각인된 장소까지 걸어가야 하잖아. 처음에는 귀찮고 불편하다고만 생각했거든? 그런데 덕분에 주변 풍경을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아.”

루는 역시나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인이 좋아하는 걸 구태여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좋다면야.”

하지만 심드렁한 얼굴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인은 그의 반응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여서 킬킬거렸다.

웃긴다니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 손으로 목걸이를 없앴으면서.

그러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돌렸다.

“저녁에 프시오 생일 파티하는데 같이 갈래?”

“아니.”

루는 제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팔에 들어간 힘이 그녀의 허리를 바짝 조였다.

“다녀와.”

가늘게 떨리는 루의 머리카락 끝이 제인의 뺨과 어깨에 닿았다.

그는 그날 이후로 제인이 밖에 나간다는 말만 하면 몸을 떨었다.

하지만 가지 말라고 말리지는 않았다.

“너무 즐겁게 있지는 말고.”

물론 좋은 마음으로 보내주는 게 아니라는 걸 숨기지도 않았지만.

제인이 잘게 떠는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음, 가지 말까?”

루가 아무 말이 없자, 제인이 재차 물었다.

“그냥 아무 데도 못 가게 묶어 둘래?”

그럼 떠는 게 조금 나아지려나…….

조용히 생각할 때였다.

자조적인 미소마저 아름다운 그가 고개를 들고 제인을 바라보았다.

“네가 날 묶어 놓는 게 더 이상적이지 않겠어? 누가 봐도 주인이랑 떨어지고 싶지 않은 개처럼 구는 건 나니까.”

제인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슬에 묶여있던 루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루는 제인의 허리에 감았던 팔을 풀고 상체를 일으켰다. 이내 손끝이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그녀의 잔머리를 정리해주었다.

“12시까지는 들어와.”

제인은 바로 응, 하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안 가면 안 갔지, 가면 분명 술을 진탕 마실 게 뻔했다. 그러다 보면 12시는 금방 넘어간다.

제인은 긁어 부스럼 같은 말을 꺼내는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응.”

“대답에 진심이 안 담겼군.”

루가 언뜻 서늘한 얼굴로 제인의 옆구리를 잡으려 했다.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난 제인이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를 팔랑거렸다.

“어, 이거, 나 이거 읽는다?”

그래, 라고 대답하면서 느릿하게 일어난 루가 제인의 등 뒤로 달라붙었다.

“……읽으라며.”

“응, 읽어.”

말과 다르게 그의 입술이 제인의 목덜미를 야릇하게 삼켰다.

몸에서 힘이 풀린 제인이 잠시 휘청거리자 루는 쓰러지지 않도록 한 손으로 품에 안으면서 다른 손으로 블라우스 끈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거짓말처럼 자연스러운 몸짓에 제인의 블라우스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읽으란 거야, 말란 거야?”

“읽으래도.”

제인은 풀어진 블라우스를 여미며 물었다.

“이거 음탕한 시야?”

“…….”

“아니지? 그럼 그냥 읽게 둬.”

루는 짧게 한숨을 쉬고 제인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다시 의자에 느슨하게 앉은 그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생각했다.

다음에는 외설적인 시를 써야겠다고.

다음이 아니라 앞으로는…….

루의 머릿속에 온갖 음탕한 영감이 떠오르던 때쯤, 어느 틈에 제인이 그의 무릎 사이에 들어와 앉았다.

이내 그의 한쪽 허벅지에 두 팔을 올려둔 채 망연한 얼굴로 그를 올려보았다.

“나는 글렀어. 아직도 시를 잘 모르겠어. 아마 영영 모를지도 몰라.”

제인은 사랑하는 이의 시를 이해하지 못해서 좌절하는 동시에.

“그런데 마음이 막 몽글몽글해. 이상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이 이럴 수 있어?”

의아해했다.

무구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그녀가 루는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앞으로는 외설스러운 시만 쓰리라 다짐했던 그는 몇 분 전의 결심을 말끔하게 지워내고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이 시는, 제인.”

그의 입술에 아름다운 미소가 걸렸다.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야.”

제인은 확신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 고백은 없으리라고.

“앞으로 내가 쓰는 모든 시는 너야.”

* * *

마드리안 교황은 집무실 창가에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날씨가 유난히 맑았다.

나무마다 피어있던 봄꽃은 거의 다 떨어져서 듬성듬성 달려있었고, 초록의 푸르름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녀가 입술을 떼었다.

“말렌.”

“예, 예, 교황님…….”

마드리안 교황의 뒤에 있던 초라한 형색의 말렌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자세로 대답했다.

“잠적했던 이유는요.”

말렌은 침음을 흘리다가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쓸모가, 제가 쓸모가 없어져서…….”

당신이 날 죽일까 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말렌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러자 마드리안이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곱씹었다.

“쓸모.”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곁에 두는 가장 큰 이유가 그의 마법인 건 사실이었다.

쓸모가 있으니 곁에 두었고, 없어지면 버리는 것 또한 그녀의 방식이었다. 특히 말렌은 마드리안 교황의 행적을 고스란히 봐온 인물이었다.

그러니 버릴 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하는 게 옳았다.

의심이 갈 만한 것들은 싹을 잘라내 버려야 불안하지 않으므로.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말렌. 저는 이번에 참패했습니다.”

“…….”

“그런데 왜일까요. 어째서인지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녀는 페브리아를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늘 시달렸다. 불안하고 초조한 의심이 그녀의 심장을 옥죌 때가 많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엘마뉴엘의 사절단에게 참패한 후부터는 그런 것들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그저 사랑만이 온전히 남은 듯했다.

말렌이 말없이 바짝 엎드려만 있자 그녀가 몸을 틀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일어나세요.”

“……예? 아, 예, 예.”

말렌은 며칠간 꼭꼭 숨어 있던 자답게 꾀죄죄한 몰골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몸이 달달 떨렸다.

이제 어떻게 되려나. 목숨은 부지할 수 있으려나.

암담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였다.

“환복하고 오세요.”

“예?”

마드리안은 말렌이 재차 어리벙벙하게 대답하자 작게 한숨을 쉬며 잠시 고민했다.

그냥 치워버릴까.

그러다 고개를 젓고 차분하게 말했다.

“말렌. 당신을 제 곁에 둔 이유가 마법이라는 쓸모가 가장 큽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저는 늘 이 자리에서 많은 것을 파악하고, 예측하고, 대비하고, 생각해왔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요.”

그녀의 신경은 항상 곤두서 있었다. 그건 몹시 피곤하고 고단한 일이었다.

“그 일을 온전히 혼자서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손과 발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알다시피 제가 당신에게 지시한 일은 외부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일이 대부분이었죠.”

말렌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당신의 성정은 가볍고 교만합니다. 게다가 겉으로 티가 나요. 그것도 매우, 노골적으로.”

“…….”

“저는 오히려 생각이 다 읽혀서 피로도가 낮았습니다. 게다가 외부로는 교만한 태도 덕분에 지시한 일의 본질과 의도가 자연스럽게 숨겨졌어요.”

말렌은 그게 욕인지 칭찬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마드리안 교황이 이어서 말했다.

“무엇보다 당신은 일을 잘합니다.”

칭찬인가 보다.

말렌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번 소문의 출처를 파악하라는 지시 외에는 대체로 실수 없이 처리해 왔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실망스러웠습니다.”

칭찬이 아닐 수도 있겠다.

말렌이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마드리안 교황은 다시 몸을 돌려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외부에 드러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말렌, 당신도 제 기대에 상응하세요.”

말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마드리안 교황을 바라보았다.

“어서 환복하고 오세요. 추기경 복장으로.”

“교황님……!”

창가에 선 마드리안은 뒤에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 저도 모르게 야트막한 웃음을 흘렸다.

“어서요.”

쏟아지는 햇살 속.

그녀의 에메랄드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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