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제인은 마법사 회중시계로 이동의 문을 열고 금세 사라졌다.
“……이상한 인간.”
죽고 난 뒤에 처리해 달라며 그녀가 준 서류를 살펴봤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서류는 호엘리반이 각국에서 회수해 온 돈을 루에게 증여한다는 게 전부였고, 작은 쪽지에 달랑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루와 함께 식사해줘요.]
정말 이상한 인간.
제인이 연옥에서 돌아온 후, 서류는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쪽지는 루에게 전해주었다.
-…….
그때 루의 표정은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뭔가 무척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그런 얼굴.
* * *
1시간 후.
호엘리반의 집무실 안에 모인 몇몇이 소담하게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세실이 파탐을 피우며 제인에게 말했다.
“넌 르젤도, 데시안도 아니야. 하지만 인간도 아니야.”
제인이 해맑게 웃었다.
“와, 욕 같고 좋은데요. 그럼 전 뭘까요?”
제인은 연옥에서 솜사탕 같은 달짝지근한 무언가를 먹은 기억이 있었다.
루는 그게 그레데엘므의 별빛이며,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면 시간이라고 말해주었다. 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루가 짤막하게 말을 덧붙였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레데엘므가 별이 되지 않았으면 살아갔을 시간을, 별이 되자마자 떨어뜨려서 너에게 먹였던 거야.
제인은 지금 이 모습 이대로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수 천 년을 살아갈 수 있는 몸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루의 말이 단박에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다. 별빛을 먹었다고 해도 몸의 변화가 딱히 없었으니 더 그랬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데코토들이 더 이상 제인을 피하지 않았다.
제인은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호엘리반이 말했다.
“당신과 같은 존재를 초월자라고 불러요.”
초월자…….
제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거창한 수식이 붙기에는.”
그녀는 두 주먹을 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밀리타를 슬쩍 보다가 눈을 피했다.
“당장 도끼눈에 찍혀 죽게 생겼는데 어떡하면 좋죠.”
밀리타의 눈매가 더욱 매서워지자 제인은 아예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하하, 날씨가 좋네…….”
호엘리반이 벽을 보고 말하는 제인에게 말했다.
안타깝다는 듯이.
“거기 창문이라도 만들어줄까요.”
“…….”
세실이 재떨이에다 불을 끄며 고개를 저었다.
“만들어주지 마. 뛰어내리면 어떡하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새낀데.”
“…….”
밀리타의 옆에 앉은 카이의 얼굴에서 딱 한 마디가 또렷하게 읽혔다.
유감.
“…….”
공식적인 구박때기가 된 제인은 조용히 라트올을 용서했다.
이제는 그만 갈구자.
라트올이나 나나 충분한 것 같아.
암, 그렇고말고.
제인이 구박받기 시작한 건 연옥에서 돌아오고 이틀 뒤부터였다.
루의 목걸이를 풀게 된 제인은 외출하려면 마법사 회중시계를 사용해야 했다. 루의 거처는 결계가 강해서 이동의 문으로만 오고 가는 게 가능했기에.
회중시계의 가장 불편한 점이라면 단연코 장소를 각인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제인은 늘 루의 목걸이로 이동의 문을 열었던 터라 방법을 따로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라트올이 열어준 이동의 문으로 호엘리반을 찾아갔다. 마침 호엘리반의 집무실에는 그는 물론 프시오, 세실, 밀리타, 카이가 모두 모여 있었다.
제인은 태평하게 인사하고 회중시계를 꺼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들 계셨네요. 회중시계에 장소를 어떻게 각인해요? 모르겠어요.
그러나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아니, 싸늘했다.
제인은 이상한 분위기를 퍼뜩 감지했다. 하지만 연유를 몰라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살얼음 같은 침묵 속에서.
고요를 깨뜨린 건 세실의 청초한 한 마디였다.
-야, 이 개새끼야.
세실은 돌연 호엘리반의 집무실에 있는 모든 집기를 집어 던졌다. 온 힘을 실어서, 정말 대가리라도 깰 것 같은 기세로.
더불어 지금까지 제인에게 차곡차곡 해주었던 욕을 일괄 복습시켜주었다.
제인은 전에 없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아니, 왜!
나 사고도 안 쳤는데!
하지만 세실의 욕과 폭력이 빈틈이 없어서 묻지도 못하고 어버버거리며 날아오는 물건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제인은 확신했다.
저 괴팍한 여자가 드디어 미쳤구나.
그러나 세실보다 더 이상한 건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세실, 그건 안 돼, 옆에 거, 제발 옆에 거.
호엘리반 혼자서만 되지도 않은 말을 지껄여댔고, 프시오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제인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둑한 음영이 그늘진 밀리타가 섬찟하게 중얼거렸다.
-……죽여버리세요…….
그로부터 두 시간 후, 제인은 방금까지 밀리타가 자기의 죽음을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들 어떤 말도 얹지 못하고 오랫동안 정적이 흐르던 참이었다.
그런 와중에 제인이 머리나 긁적거리면서 들어왔으니 다들 복합적인 감정이 든 것이었다.
제인은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설명해야 했다. 저를 죽이려 했던, 그러나 절대로 죽게 할 생각이 없었던 루에 대해서도.
설명을 마친 후에는 프시오와 세실에게 차례대로 불려가서 혼이 났다. 두 사람이 제인에게 지적한 잘못은 하나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의논하지 않고 혼자서 결정한 것.
특히 프시오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서너 시간 내내 올바르고 바람직한 설교를 했는데 세실의 폭력과 욕설보다 더 곤혹스러웠다.
한참을 혼나고 나서야 프시오는 제인에게 회중시계에 장소를 각인하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제인의 자세는 어느새 경건해져 있었다.
프시오에게서 겨우 풀려났을 무렵,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제인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며 생각했다.
하아,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야…….
그렇게 제인은 참회와 회개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그러니까.
“밀리타, 그만 노려봐. 눈알 빠지겠어.”
“안 빠져요.”
“카이,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밀리타 사시 되겠어요.”
그러자 카이가 마지못해서 설렁설렁 말했다.
“그 정도면 됐어.”
저 새끼 지금 대충 말했어.
내가 딱 봤어.
괜히 아무 잘못 없는 카이에게 짜증이 나려 할 때였다.
호엘리반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다들 저녁에 시간 되나요? 오늘 프시오 생일이라.”
그제야 제인은 이 자리에 왜 프시오만 없는지 이해했다. 모두 시간이 된다고 하자 호엘리반의 입꼬리가 더 깊어졌다.
“그럼 시간은 7시, 장소는 세실 집으로 오면 됩니다.”
세실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도 모르는 파티가 내 집에서 열릴 예정인가 본데, 너 정말 죽고 싶니?”
“난 지금 프시오랑 같이 지내니까 깜짝 파티가 쉽지 않잖아.”
“레스토랑을 빌리던가.”
“몰랐구나? 프시오는 유난 떠는 거 싫어해.”
“아, 내가 그걸 몰랐네?”
세실은 몇 분가량 질펀하게 욕을 했고, 호엘리반은 싱글싱글 미소 지으며 들어주었다. 마치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듯한 태도였다.
사실 호엘리반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저녁에는 프시오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생일 파티를 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갔을 때 프러포즈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프시오가 ‘그날 아주 행복했었지.’라고 기억하게 해주고 싶었다.
호엘리반은 파티 준비부터 청소까지 할 대행인들을 고용했다는 말과 함께 값비싼 술 몇 병을 들고 가기로 하면서 세실과 타협을 보았다.
세실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런 건 미리 말해.”
“왜? 어차피 내 계획대로 되는데.”
호엘리반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세실이 대뜸 물었다.
“너 자녀 계획이 어떻게 되니?”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벌써.”
“계획 세우면 꼭 말해줘.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네 자녀 계획이 끝나는 날.
그날이 네 인생 종 치는 날이니까.
* * *
루는 정오가 지날 때쯤,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집에 제인의 기척이 없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시선을 두었다. 미약하게 떨리는 손끝을 우습다는 듯이 보다가 창문을 열었다.
정원에 물을 주던 라트올이 그가 묻기도 전에 제인이 드호아망에 갔다고 알려주었다.
루는 그래, 대답하고는 책상에 앉았다.
이어서 깃펜을 쥐고 턱을 괸 채 느긋하게 무언가를 썼다.
그러자 떨리던 손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양피지 위에 내려앉은 햇살과 그 위에 사각거리는 깃펜의 감도,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 한낮의 새의 울음소리까지 모두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태양의 이동에 따라 그림자의 위치가 조금 바뀌었을 무렵, 깃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는 작게 웃었다.
시를 쓰다니.
그것도 데시안인 내가.
살아오는 동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을 하게 만든 건 그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한 사람, 제인이었다.
타타에게 녹니스에 대해 들은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그런 걸 만들어서 이미 죽은 사람을 두 번이나 죽이냐고.
루가 태연하게 설명해 주자 제인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맹약은 끝났으니까 만들 필요가 없겠네.
루가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
-제인, 데시안은 데시안으로서의 역할을 유지해야만 존속할 수 있어. 나는 현혹의 데시안이야. 인간의 영을 현혹하지 않으면 사라져버려.
진실과 거짓이 섞인 교묘한 말이었다.
루는 오래전부터 너무나 많은 영을 현혹했기에 앞으로 몇백 년은 아무것도 안 해도 존속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현혹은 루의 본능이었다.
지금껏 그가 살아있는 인간들을 현혹하지 않고 본능을 억누를 수 있었던 건 녹니스를 제조하면서 욕구를 해소해 온 덕분이었다.
욕구가 쌓이면 언젠간 터질 테고, 그렇게 폭발하는 건 루도 제어하기 힘들었다.
위험해지는 건 제인이었다.
그때였다.
제인이 끊임없이 입을 맞춰오는 그의 두 뺨을 잡고 잠시 멈추게 했다.
-그게 꼭 녹니스여야 할 필요는 없잖아.
루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녹니스를 계속 제조할 생각이었다. 조금씩이라도.
제인이 덧붙이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시를 써.
루가 조금 멍하게 제인을 보았다.
이어서 조용히 되물었다.
-……시를?
-응. 시를 좋아하잖아. 너처럼 아름다운 시를 써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