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솔레리안은 자신이 어쩌다 망할 마왕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되짚어 보았다.
제인에게 봉인구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던 날, 그녀는 고위급 르젤들의 몰살에 대한 심판을 받았고, 예상대로 지옥에 떨어졌다.
그리고 루가 찾아왔다.
-이 지옥에서 구해줄 테니 옥좌에 앉아, 솔레리안.
그건 명령이었다.
솔레리안은 기가 찼다.
그녀는 그레데엘므를 별로 만들어주기 위해 보좌를 자처했고 동시에 낙하하는 그의 유성을 받아서 제인에게 먹였다.
그렇게 그레데엘므의 마지막 원을 이뤄주면서 오랜 세월 동안 갚지 못했던 루에게 진 빚까지 탕감했다.
그런데 여기서 루가 내민 손을 또 잡게 된다면 다시 빚을 지게 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건 지옥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내가 이 마귀한테 또 빚을 지면 머저리지.
솔레리안이 대답했다.
-싫습니다.
-내 손을 덥석 잡는 게 좋을 텐데.
루가 여유로운 미소를 흘렸다.
-그자가 소멸하기 전에 아주 쩔쩔매면서 부탁하더군. 네가 지옥에 떨어지는 게 마음 아파 죽겠으니 어떻게 좀 하라고.
-……!
솔레리안은 그제야 그레데엘므의 말을 기억해냈다.
명계에 내 자리가 있다더니, 설마.
루가 빙글거렸다.
-나는 그자의 유언을 들어주러 온 거니, 잘 생각해.
-하…….
-데시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솔레리안은 루를 노려봤다.
-문장은 비틀죠.
-본질은 같아.
한 마디를 안 진다.
그녀는 아주 잠시, 그레데엘므 님의 유언이라는 말에 흔들렸으나 그와의 대화를 왜곡 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원한다면.’
솔레리안은 마왕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거절이 답이었다.
-당신이나 하세요, 마왕. 애먼 허수아비 찾지 말고.
-싫은데.
그가 장난치듯 말을 이었다.
-귀찮아.
솔레리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루는 겉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표정 변화를 보란 듯이 무시했다.
-나는 번거로운 일을 너무 오랫동안 해왔어. 게을러질 틈 없이. 그러니 이제 진탕 늘어져서 살아 보려고 해.
직역하자면 네가 뒤치다꺼리 좀 해, 였다.
솔레리안은 기가 차다 못해 막혔다.
게을러질 틈 없이?
루는 여태까지 연옥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 녹니스와 관련한 모든 일은 그의 수족인 라트올이 일일이 확인했다.
과연 연옥에서만 그랬을까.
안 봐도 뻔했다.
온갖 일은 죄다 라트올이 했을 거다.
그런데 뭐? 게을러질 틈이 없었다니, 아무리 데시안이라지만 이만큼 뻔뻔해도 되나 싶어서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솔레리안이 대차게 어이없어하는 동안에도 루는 그녀에게 마왕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권한다는 표현이 맞을지는 의문이지만, 일단은 그랬다.
솔레리안은 루가 마왕을 직접 고르는 이유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가 가진 힘이 독보적이라 역대 마왕들은 항상 그를 곁에 두길 탐냈고, 그의 힘을 갈취하려 들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천계에서도 심심찮게 들리곤 했다.
루는 마왕들의 예뻐함이 귀찮았으리라.
차라리 제 손으로 직접 골라 앉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건 그의 사정이다.
솔레리안이 재차 대답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싫습니다.
-앉아.
-…….
-얘기 안 끝났으니, 말 듣도록 해.
최악이었다.
솔레리안이 앉으면서 질색했다.
-앉으라 마라 명령하지 말고 차라리 현혹의 힘을 쓰세요.
그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기분 좋은 듯이.
-뭐 하러. 앉을 건데.
솔레리안은 은연중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연이어 빙글거리는 그의 낯짝을 보아하니 정말 뭐가 있는 게 확실했다.
그때, 루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뱉었다.
-네가 옥좌에 앉는다면 앞으로 녹니스 제조는 관두도록 하지.
무척이나 즐거운 투로.
-영원히.
-……!
-솔레리안, 똑똑하게 굴어. 지금 천계에서는 고위급 르젤들이 모두 소멸했어. 새로운 장막이 열린 거야. 잘 생각해봐.
그가 의자에 몸을 느슨하게 기대었다.
-그럼 명계는 어떨까?
-…….
-지금 옥좌라면 네 신념을 지킬 수 있어.
그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솔레리안은 진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둥둥 울리는 고동 소리가 더욱 커져만 갔다. 마주 앉은 데시안의 존재를 자각하려 애썼다.
저자의 손을 잡으면 안 된다고.
저자는 데시안이라고.
하지만 심장은 그 생각이 들리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더 크게 둥둥 울렸다.
-그만한 힘이 있는 자리야.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귀찮게 오라 가라 부르지만 않으면 되는 게 조건이고.
-…….
-게다가 더 이상 명계에 발붙일 일도 없으니 네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일 따위는 없을 테지.
-왜……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이 마귀야.
-난 네가 여전히 헛똑똑이라고 생각해.
진짜 한 대 칠까.
솔레리안은 저도 모르게 그레데엘므의 장검을 부를 뻔하다가 그만두었다. 그저 이어지는 그의 말에 잠시 멍했다.
-그래도 네 신념은 꽤 마음에 들거든.
루가 검붉은 내핵을 손에 쥐여주었다.
솔레리안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네 옳음을 지켜내 봐.
어디 한번.
루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솔레리안의 시선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옳음…….
내 손으로 그것을 지켜 낼 수 있을까.
솔레리안은 마력이 폭발할 것 같은 내핵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에 넣고 삼켰다.
솔레리안이 마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당장 내핵을 게워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내핵과 이미 하나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뜯어내면 소멸하리라.
“미친 새끼……!”
솔레리안은 하루가 멀다고 루가 벌려 놓은 짓들을 수습하기에 바빴다.
중심부인 광장 지옥은 어쩌다가 통째로 날아간 것이며, 거기에 있던 죄지은 영들과 벌을 내리던 데시안과 메 데시안들은 어째서 하나도 남김없이 소멸한 것인가?
명단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다.
황망하게 사라진 지옥 하나를 복원하는 데만 해도 신경을 쓸 여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 일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각계에 뿌리 깊게 박힌 녹니스를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서, 최대한 깨끗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연옥에 유통한 어마어마한 양의 녹니스를 회수해서 처분하고, 뚫어놓은 통로를 복구할 인력도 파견해야 했다.
거기에 녹니스를 주입하고 천계로 올라간 영들도 추적해서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야 했다.
하루는 라트올이 와서 수습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짚어주었다.
솔레리안은 그의 설명을 듣자니 현기증이 다 났다.
명계 곳곳마다 루가 은밀하게 손을 댄 흔적이 계속 나왔다. 정말 계속, 끊임없이.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빠를 지경이었다.
-루에게 수하가 대체 얼마나 많은 겁니까? 이건 도무지 적은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라트올이 마왕으로 신분 상승한 솔레리안에게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아뇨, 마왕님. 루의 거처에 구속된 데코토들을 제외하면 저뿐입니다.
옆에 있던 해밀이 경악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이렇게까지 손을 뻗칠 수 있었죠?
-녹니스 덕분이에요. 그걸 한 번이라도 투약하면 루의 수족이 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래도 녹니스를 통한 현혹은 이지가 없어져서 크게 복잡한 일은 못 해요. 해봤자 단순노동 정도.
솔레리안은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이 모든 게…….
-네. 루에게 와줄 누군가를 위해서예요.
솔레리안은 그의 집요함에 넌덜머리를 내면서 명계부터 지옥, 연옥까지 수습해야 할 일들을 낱낱이 둘러보았다. 그리고 망연자실했다.
일복이 터져도 대차게 터졌다.
-네 옳음을 지켜내 봐.
솔레리안은 책상에 머리를 쿵 박았다.
“그 말에 홀랑 넘어간 내가 머저리지!”
몇 번 더 쿵쿵 박다가 깃펜을 손에 쥐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다시 처리하기 시작했다.
* * *
라트올은 루가 봉인에서 풀려나서 기뻤다.
분명 기쁜데…… 기쁘지 않았다.
루는 녹니스부터 마석 가공까지 전부 깔끔하게 그만둬 버렸다. 마석과 관련한 지분과 권리도 라트올에게 모두 위임했다.
나는 이제 쓸모없어진 건가?
루와 계약도 안 했고 그동안 녹니스 때문에 마석을 세공하던 그였다. 이제 그에게 충성할 수 있는 이유나 연결고리가 하나도 없으니 필요 없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수통 잡고 뭐 해요? 나 목마른데.”
“아, 깜짝이야!”
제인이 비죽거렸다.
“죽었다가 살아돌아온 사람 보는 것처럼 놀라네.”
“……사과했잖아요.”
“이상하네. 사과 안 받아 줬었는데. 닥치고 꺼지라고 했던 것 같은데.”
“…….”
그랬다.
제인은 루를 위해서 속일 수밖에 없었다며 사과하는 라트올에게 중지를 펼치며 상냥하게 응, 닥치고 꺼지세요, 라고 했다.
“수통은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예요? 나 목마른데.”
라트올이 수통을 밀었다. 아무렇지 않게 물을 따라 마신 제인이 돌아서려 할 때였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전 이제 필요 없을까요.”
몸을 돌린 제인이 라트올을 지그시 보았다.
“밖에서 그런 소리 듣고 왔어요?”
라트올이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제인이 초연하게 그를 비꼬았다.
“죽어 달라는 말보다는 나은데.”
“…….”
“저런, 몰랐구나. 제가 속이 되게 좁거든요.”
제인은 저를 가리키며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밴댕이 소갈딱지.”
라트올은 저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인간이 루에게는 이러지 않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사랑의 힘인가?
사랑을 나눠 받고 싶은 건 아니지만 언제까지 이럴 참인지 막막해서 얼굴을 쓸었다.
“당신 이건 몰랐죠? 저 무릎 되게 잘 꿇는데. 볼래요?”
제인은 무릎을 굽힌 라트올의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소중한 거랑 필요한 건 다른 거예요.”
무심한 목소리를 덧붙이며.
“물론 나는 당신이 전-혀 소중하지 않고요.”
그녀의 말을 느리게 이해한 라트올이 어정쩡하게 서 있던 무릎을 바닥에 찧었다.
소중하다니, 내가?
누가 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런 허황한 이야기보다 차라리 쓰임이 확실했으면 했다.
그런 속내가 얼굴에 묻어났는지 제인이 얕게 한숨 쉬었다.
“오늘 장보러 안 가요? 식자재 거의 떨어졌던데.”
얼떨떨하게 제인을 보던 라트올이 일순 입술을 살짝 벌렸다.
“……아.”
“부엌 요정님, 연옥에서 죽다 살아 돌아온 인간은 잠깐 외출합니다. 루가 일어나서 저 찾으면 드호아망에 갔다고 전해줘요.”
제인이 주머니에서 마법사 회중시계를 꺼냈다.
“일찍 올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