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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52)화 (152/168)

152.

제인은 시선을 거두고 익숙한 천장을 보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거운 몸을 돌려서 팔을 디디며 침대에 앉았다.

그러다 핑, 도는 감각에 이마를 짚었다.

누워있을 땐 괜찮았는데 막상 일어나 앉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곁에 있던 검은색 로브가 그녀 앞으로 쏟아졌다.

늘 그랬듯, 다디단 목소리로.

“아파?”

아픈 건 아니었다.

그래도.

“죽다 살아났으니 그런 걸로 해도 되겠지.”

제인은 문득, 루의 코끝에 손을 가져가 보고 싶었다.

숨을 쉬는지 궁금해서.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도리어 숨이 막혀왔다. 제인은 벽에 기대어 앉으며 저도 모르게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르도록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루도 기울였던 상체를 뒤로 물렸다.

제인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응시했다.

“넌 내 목숨을 기만했어.”

눈이 닿은 세상이 온통 푸르렀다.

그의 눈도, 새벽도.

“너는 죄악을 일삼는 존재니까 기만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거야.”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루가 순순히, 그리고 낮게 대답했다.

“그래.”

“사람은 목숨을 바친 일에 기만당하면 괴로워해.”

“……그래.”

“미워하고, 원망하고, 마음 아파해.”

차가운 손가락이 제인의 턱에 닿았다. 힘을 싣지 않은 루의 손이 제인의 뺨을 감싸고 자신을 보게 했다. 제인은 저항하지 않고 그의 눈길을 받아냈다.

푸르다.

눈을 돌려도, 감아도, 떠도, 온통 푸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물었다.

“너를 미워하느라 내가 아프고, 원망하느라 괴로워한다면, 그러면 네가 한 짓, 후회하겠어?”

제인의 물음에 아직도 겨울에 머문 듯한 손이 그녀의 목을 가볍게 쥐었다. 엄지로 부드럽게 피부를 어루만지다가 목걸이 안에 감춰져 있던 자상을 문질렀다.

“달라지는 건 없어.”

“…….”

“시간을 되돌려서 다시 똑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래도 나는 네 죽음을 원했어. 내 선택은…… 몇 번이고 똑같아.”

루는 가냘픈 목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몇 번이고.”

목소리의 진동이 제인의 피부를 타고 들어왔다.

피와 뼈 마디마디 안으로.

“후회 안 해.”

제인의 가슴께가 한 번 더 올라갔다.

숨을 깊게 들이켜며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그러자 너무나 쉽게 밀려났다.

그녀의 목을 느슨하게 감싸고 있던 그의 손마저 풀어지려 할 때였다.

제인은 그 손을 잡으며 푸른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후회할 짓이었으면.”

이어서 루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용서 안 했어, 정말.”

루는 제인의 말을 바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인 것 같았다.

그의 머리가, 귀가, 눈이 모든 게 어지러웠다.

오직 그의 손.

차가운 손에 머무는 그녀의 입술만이 생생하게 느껴질 뿐.

그는 손바닥이 녹을 것 같았다.

손바닥에서부터 심장이, 머리가, 모든 게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러다 제인의 한 마디에 온 세상이 멈췄다.

“내 선택도 몇 번이고 똑같으니까.”

루는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손바닥에 머문 그녀의 입술과 온기마저 거짓처럼 느껴졌다.

루는 제인의 팔을 잡았다.

만져진다.

고작 그 단순한 생각 하나가 숨통을 미약하게 틔워주었다.

그래도 숨이 막혔다.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목을 조였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제인을 꽉 잡고 있는지도 몰랐다. 제인은 하얗게 질려가는 팔을 그대로 두고서 한 손으로 툭툭 떨어지는 루의 눈물을 훔쳐냈다.

루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이내 불규칙한 숨을 쉬며 정돈되지 않은 말을 했다.

“가지 마, 제인.”

“…….”

“가지 마.”

숲의 새들을 수없이 많이 보냈다.

그 부름에 익숙해지게 하고, 결국 곁에 두었다. 원하는 순간까지 제게로 걸어오게 했다. 그렇게 공허가 채워졌다.

공포로.

루는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내 곁에 있어……. 네가 원하는 건, 전부 다 줄 테니…….”

루의 손에 힘이 자꾸만 들어갔다.

그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전부 다……. 그러니, 제발.”

가지 마.

루는 그 말만 되풀이했다.

여유도, 느긋함도 모조리 증발했다.

그녀를 잡은 손을 놓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은 막역한 두려움이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응. 네 곁에 있을 거야.”

제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언제까지나.”

루는 끔찍했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렸다는 사실이 온몸을 관통했다.

몸이 속절없이 떨렸다. 떨림이 그의 옷깃과 머리카락 끝에 여실히 드러났다.

공포에 잠식된 데시안은 붙들고 있던 무언가를 부서지도록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제인의 팔이라는 건 조금 더 느리게 인지되었다.

그가 제인에게 몸을 쏟았다.

어깨와 목덜미에 물기 어린 입맞춤을 이어가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인.”

제인이 목소리를 내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루가 말을 이었다.

“언젠가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눈물을 버렸다.

“나를 불쌍히 여겨.”

그의 젖은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너는 연민을 알잖아, 제인.”

울음 섞인 숨소리가 제인의 귓바퀴에 머물렀다. 잘근, 깨무는 감각에 솜털이 바짝 선 그녀가 달뜬 호흡을 내뱉었다.

그가 몸을 눌렀다.

“그러니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지루해지고, 지겨워지고, 날 버리고 싶은 날이 오면…… 그땐 나를…….”

제인이 루의 젖은 눈가를 닦아주려 했으나 그는 두 손목을 너무나 쉽게 포박했다.

“나를 동정해. 가여워해.”

그가 그녀의 몸을 더 짓눌렀다.

제인은 손목이 잡힌 채 얕은 신음을 내며 그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곁에 있어.”

느릿하게 물리는 귀가 아픈 건지 좋은 건지 모를 정도로 흐물거리는 사이, 흐트러진 옷가지 틈으로 그가 파고들었다.

“내 곁에.”

피부를 어루만지는 차가운 손끝이 무참히도 떨렸다.

그의 눈가는 마를 틈이 없이 젖고 또 젖었다.

저 눈물을 닦아 줘야 하는데.

막지 못한 신음을 흘리면서도 제인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제인, 나를…….”

온몸이 질척거렸다.

그가 데워진 몸으로 달아오른 살결을 쉼 없이 밀어붙였다.

제인은 나오는 신음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낮게 신음했다.

“……더 불러. 계속.”

제인은 그의 이름 대신 몸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채근했다.

“내가 이렇게 애원하잖아, 제인.”

제인이 앓듯이 신음하며 그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다. 루, 그 짧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몸이 더 크게 흔들렸다.

“흐으…….”

제인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절정이 연달아 지나간 자리에 깊이 파고드는 게 감당하기 버거워서 그 목덜미를 잡고 입술을 눌렀다.

그만, 제발.

그러나 도리어 온몸이 삼켜지듯 그에게 더욱 짓눌렸다. 머리가 어질할 만큼 사나운 절정이 재차 들이닥쳤다.

간격은 점점 더 좁아졌다.

제인은 금방 다시 밀려들 감각에서 벗어나고자 허리를 비틀었다.

“……가지 마.”

하지만 그는 달아나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몸을 휘감았다.

“내 품에 있어.”

쿵, 쿵 부딪히는 힘에 제인은 또다시 신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다시 느릿한 몸짓으로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아파?”

축 늘어진 제인은 어지러운 가운데 본능처럼 생각했다. 아프다고 해야겠다고. 아니, 해야 한다고.

“우흐…… 으응.”

“……인간들은 참 좋겠군.”

그가 천천히 제인의 몸에서 떨어졌다.

“거짓말을 잘해서.”

“…….”

“그런데 제인, 너는 요령이 없어서 좋아.”

루가 제인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젖어있던 그의 눈가는 다행히 붉은 기만 맴돌았다.

다만, 그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어서 제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를 안아 주려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루가 그녀의 허리를 당겨서 다시 파고들었다. 제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나는 안, 아 주려, 흐…….”

“그래, 안고 있잖아.”

온기가 덧대어진 그의 손이 질척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만졌다.

제인은 다시 그에게 갇혔다.

이윽고 그녀가 얼마간 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바르르 떠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도 낮은 신음을 흩트리며 깊게 눌렀던 허리를 놓아주었다.

아득한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골라낸 제인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금방 잡혔다.

제인은 말할 힘도 없어서 고개를 저으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루는 밀어내는 제인의 손을 잡고 깨물었다.

애원하듯 그녀의 품에 파고들면서.

“……밀어내지 마.”

또다시 쓰러진 제인은 조금 전보다 더 아득해져 버린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아아.

기어이 날 죽이려는 건지도…….

* * *

며칠 후.

솔레리안은 팔꿈치에 올려둔 깍지 낀 손 위로 이마를 대며 음산하게 앉아있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으나 앞에 무엇이 있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녀는 루를 떠올렸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들이 천사라 부르던 그녀는 속으로 한참을 욕을 지껄이다가 눈을 치떴다.

처리해야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솔레리안은 다시 눈을 감았다.

“……개새끼.”

내 인생의 파탄자.

내 인생의 재앙.

내 인생의 고리대금업자.

눈앞의 모든 서류는 바로 그녀 인생의 파탄자이자 재앙이며 고리대금업자인 루가 준 똥이었다. 더불어 명계의 혼돈인 마왕의 승인으로만 처리할 수 있는 업무들이었다.

마왕.

솔레리안의 새로운 수식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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