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신이 만든 세상과 아닌 세상으로 나누어진 세계 간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순리가 생겨났다.
순리는 질서이자 규칙이었다.
천계와 명계가 공존할 수 있는 이유도 순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루는,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고 주물러대면서도 그 순리만큼은 교묘하게 건드리지 않았다.
왜?
건드리면 귀찮아지니까.
놀랍게도 그 이유가 전부였다. 루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던 라트올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주인님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실한 그로서는 루가 나태하다 못해 미친 건지, 아니면 미치다 못해 나태해진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딱 거기까지였다.
루가 구상해둔 그림에는 그레데엘므를 밤하늘의 별로 만들어서 소멸시키는 계획은 애당초 없던 일이었다.
맹약의 조건에 따라 그레데엘므의 운명을 손에 쥐게 되면 그는 제 발가락이나 핥으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인이 묘약의 저주에 걸리게 되면서 계획이 바뀌었다.
그레데엘므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고 하니, 죽여 주는 게 도리 아닌가.
계획이 일정 부분 바뀌면서 손이 더 필요해졌다. 그리고 때마침 그의 눈에 들어온 게 바로 타타였다.
타타는 정말이지, 운이 없어도 지지리도 없는 메 데시안이었다. 불현듯, 연옥에 왔을 때부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제가 정말 서러워서……!”
아무리 그레데엘므가 만든 이공간이 연옥과 가깝다고 한들 이어져 있는 건 아니었다. 각각의 세계에 구멍을 뚫어서 연결해야 했다.
특히 이공간은 미완의 개별 세계였다.
미완의 세계와 완성되어있는 기존의 세계를 연결한 통로가 그리 안락할 리 없었다. 통로라는 길이 만들어지긴 했으나 곳곳에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소용돌이는 통로 안에서 무한대로 헤매게 했다. 자칫 잘못하면 언제까지고 통로 안에 갇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타타가 루를 욕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미친 새끼!
안타깝게도 욕할 거리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소용돌이의 발생이 무작위라는 것이었다.
운이 없어도 지지리도 없는 타타는 무작위성 소용돌이를 피해 한 인간을 이공간에서 연옥으로 데려와야 하는 시련을 안은 셈이었다.
그는 제인을 만나기 전까지 연옥과 이공간 사이를 하루도 빠짐없이 왕복하면서 길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러다 소용돌이가 아주 무작위성이 아니란 걸 체득하게 되었다. 그렇게 미묘한 흐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우웨에에엑!
소용돌이에 깔끔하게 토하면서 걷는 능력까지 겸비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다지 멋진 능력은 아니었기에 타타는 매일같이 루를 욕했다.
미친 새끼!
대체 연옥에 뭘 파놓은 거야!
그러므로, 지금처럼 제인이 있는 이공간까지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기까지는 실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대장정이 있었다.
쉴 새 없이 떠드는 타타에게 붙잡힌 채 여전히 팔랑팔랑 뛰면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제인은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했다.
“그런데 대체 왜 뛰는 거예요! 쫓아 오는 것도 없는데!”
“별빛이요!”
“별빛이라니 그게 뭔…….”
제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타타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잡고 열었기 때문이다.
“다 왔어요, 여기가 연옥 입구예요!”
문이 열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건지 제인은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사이 문 바깥에 있던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공간에서 생과 사의 경계인 연옥으로 발을 들인 순간, 시공간의 뒤틀림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드문드문 들리는 말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리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눈의 깜빡거림도 둔하게 느껴졌다.
졸음인가.
눈꺼풀이 무거웠다.
정신없는 와중에 솜사탕 같은 게 입에 들어와 사르르 녹았다. 달짝지근함이 혓바닥에 퍼져갔다. 제인은 기분 좋은 단잠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에게는 몹시도 생소한 예감이었다.
* * *
한낮의 바다 위.
제인은 아담한 배 안에 서서 자로 그린 듯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잔잔한 물결과 그 위로 잘게 부서지는 햇살을 따라가다가 제 곁의 사람에게로 머물렀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제인은 작게 웃었다.
여긴 꿈속이구나.
당신, 드디어 나를 찾아와 주었구나.
그것도 숨통을 조이는 악몽이 아닌 따뜻하고 밝은 꿈으로.
제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다이애나가 한 걸음 다가와서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컸네. 이제 나랑 키가 비슷해.”
“……비슷하긴, 잘 봐봐.”
제인이 손날을 들어서 키를 재는 시늉을 했다.
“내가 더 크잖아. 당신 키가 작았네.”
“응, 비슷해.”
“내가 더 크다니까.”
“정말 비슷해.”
두 사람은 몇 번 더 제 말만 하다가 키득키득 웃었다.
다이애나가 말했다.
“너무 신기하다. 그렇게 작았던 네가 나랑 키도, 나이도 비슷해지다니.”
제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은 이제 나이를 먹지 않는구나. 살아있는 나만 이렇게 컸구나.
나만…….
다이애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부드럽게 좁혔다. 그리고 제인을 살펴보듯 고개를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와아, 네가 울 줄도 알아?”
“…….”
“울지 마. 나는 기쁜걸.”
“기쁘긴.”
제인이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며 퉁명스레 말하자 다이애나가 눈가에 남아 있는 물기를 닦아 주었다.
“드디어 너랑 친구가 됐잖아.”
제인은 조용히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생각했다.
이 여자가 저를 울리기로 작정한 게 틀림없다고.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슬쩍 기울이자 고여있던 눈물방울이 눈치도 없이 냉큼 바닥에 떨어졌다.
“누가 마음을 녹여줬나 보다. 이렇게 잘 우는 걸 보니.”
다이애나가 제인을 안아 주었다.
“좋은 사람인가 봐.”
제인이 엉엉 울면서 다이애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거 사람 아니야. 사람 새끼 아니라고. 나이도 많아. 나보다 삼백 살은 더…… 빌어먹을…….”
제인의 서러운 울음이 더 커졌다.
“그래도…… 그래도 내가 많이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제인은 그렇게 말하며 울다가 느릿하게 그녀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당신 말이야, 그레데엘므의 어디가 좋았어? 그 새, 아니, 그거…… 아니, 아무튼 대체 어디가 좋았어?”
순 미친놈이던데…….
제인은 뿌옇게 번지는 시야 속에서 그 말만은 삼켰다.
“그렇지. 사람도 아니고, 나이도 엄청 많은 데다 이름도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는데.”
다이애나는 제인의 뺨을 잡고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재차 닦아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석양을 알아.”
“…….”
“세상 어디든 내가 좋아하는 색의 석양이 있다는 걸 알려줬어. 그레데엘므를 만나고 매일매일 다른 장소에서 좋아하는 색의 석양을 봤어.”
그녀가 물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제인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겠네.”
“응, 맞아.”
제인은 계속해서 울었고, 다이애나는 그만큼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등을 다독여 주었고, 안아 주었다.
토닥토닥.
그렇게 등을 두드려 주면서.
“……미안해.”
제인의 말에 다이애나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러다 곧 다시 둥글게 말린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제인이 말을 이었다.
“당신을 두고 도망가서…… 미안해. 당신이 날 살리려다가 바다에 빠졌다는 걸 숨겨서…… 정말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
잘못했어…….
다이애나의 목소리에 엷은 한숨 소리가 엮였다.
“그런 마음으로 시간을 견뎠구나. 나는 네가 살아줘서, 잘 자라줘서 고마운데…….”
“당신은.”
제인이 꽉 막힌 목을 애써 열었다.
“당신은 못 될 필요가 있어. 그렇게 착하기만 하니까…….”
무리였다.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제인을 몸에서 떨어뜨리고 눈을 맞추었다. 그러나 제인의 초점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끊임없이 흐려지기만을 반복했다.
“제인, 나는 너랑 동료가 되고 싶었어. 한 번 알려준 약초를 잊지 않는 아이가 자라면 얼마나 훌륭한 약제사가 될지 기대됐거든. 그런 너와 함께 일하면 즐거울 것 같았어.”
“…….”
“그런데 내 욕심이었나 봐.”
다이애나가 제인의 손을 만졌다. 거칠고 부르튼 두 손이 맞물렸다.
“네가 즐거운 일을 해.”
“…….”
“즐겁게 살아. 많이 웃으면서 지내. 행복해야 해. 오래오래.”
제인은 괴로운 듯 시선을 떨어뜨렸다. 마주 잡은 두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돼?”
침묵이 맴돌았다.
고작 몇 초가 지났는데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다이애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하면서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녀가 이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야 해.”
“…….”
“약속해. 그러기로.”
제인은 제 앞에 있는 새끼손가락과 부드럽게 웃고 있는 다이애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다시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응. 행복할 게.”
다이애나.
어린 날에 닫혀있던 내 마음을 처음으로 열어주었던, 소중한 나의 다이애나.
“행복하기로 약속할게.”
* * *
제인이 잠에서 깬 건 새벽녘이었다.
방안에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제인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희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그녀 앞에서 닿을 듯 말 듯 멈춰있다가 물러갔다.
허락받지 못했다는 듯.
새삼스럽게.
제인의 시선이 거둬진 손을 따라갔다. 손에서 손목으로, 팔과 어깨로, 그리고 아름다운 푸른 눈까지 천천히.
고요하게 눈을 맞췄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방안에 시계 초침만이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