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짓이라니? 도와준 거야. 감사하게 생각해.”
그레데엘므가 바닥에 있던 돌멩이를 발로 툭, 차버렸다.
“내가 예뻐하던 송아지였는데.”
“당신 눈에나 예뻤겠죠. 맹약을 눈치챈 하이데스가 당신과 나, 둘 중 선택한 건 당신이었으니까.”
그레데엘므는 루의 말을 사뿐히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때 돼서 풀리게 손까지 써놨더니 결국 그새를 못 참고 죽였어. 봉인되어 있던 동안 갈고 닦은 인내심은 대체 어디에 처박아 둔 거야?”
“…….”
“초조한 티를 그렇게 내면 못 써, 애송아.”
“…….”
“그게 다 약점이 된다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어르신 말씀이니 새겨들어.”
그레데엘므가 얼마간 더 쫑알거리는 동안 루는 까마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닥치고 있는 게 좋겠군.
옅은 피로감이 묻어나는 루의 생각과는 달리, 그레데엘므는 그에게 짧은 침묵도 허용해주지 않았다.
“솔레리안은 지옥에 떨어질 거야.”
루는 잠시 상념에 잠기는 듯하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쁘지 않네요.”
“불쌍한 솔레리안.”
불쌍하긴.
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죽을 때까지 위악 부리는 기분, 어때요?”
“나빠. 두 번 다신 태어나지 않을래.”
루가 다정하게 대꾸했다.
“잘 생각했어요. 생각을 똑바로 하는 걸 보니 아주 노망 난 건 아닌가 보네요.”
“응, 그리고 네 다음 생은 개구리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어야겠어. 귀엽고 앙증맞은 개구리 말고, 열대 우림에 사는.”
“거기까지.”
루가 말을 잘라내자 그레데엘므는 양팔을 번쩍 들고 더욱 신난 얼굴로 “해가 뜨면 매일같이 강가에서 못생긴 자기 얼굴을 보고 개굴개굴 우는 거야!”하고 꺄르르 웃었다.
루가 눈가를 쓸며 한숨 쉬었다.
“……곱게 미치래도.”
보랏빛으로 수놓아져 있던 하늘이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정적을 메우던 바람 소리 틈으로 그레데엘므의 목소리가 조용히 비집고 들어왔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루는 무의식적으로 그레데엘므 쪽을 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찌꺼기 같은 데시안이 사랑으로 채워지다니.”
그레데엘므가 샐쭉하니 웃었다.
“알고 있지? 네가 그토록 갈구하던 맹목적인 사랑이 올가미처럼 평생 목을 틀어쥘 거란 거. 너는 이제 그 아이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내가 시온에게 묶였던 것처럼.
진창을 굴렀던 것처럼.
“그래요. 심지어는……”
루가 웃었다.
기뻐 보이면서도 어딘가 두려움이 묻어 나는, 이전까지 본 적 없던 기묘한 웃음이었다.
“제인이 그걸 알고 있다는 거죠.”
그레데엘므는 잠시 시간이 멈춘 기분으로 루를 멍하게 응시했다.
그의 앞에 선 데시안은 신이 의도하지 않은 존재이자 신에게 반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 순간, 루의 주변에 신의 가호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신에게 사랑받는 인간이 목숨을 다해서 데시안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비극을 부디 내게 보여주렴.
오래전에 했던 말을 곱씹던 그레데엘므는 루를 감싸고 있는 신의 가호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직이 웃었다.
당신은 이토록 인간을 사랑했구나.
인간이 사랑한 데시안마저 품은 당신을, 나는 결국 처음부터 흠집 하나 낼 수 없었구나.
침묵하는 존재가 되면서까지 인간들에게 영원을 알려주었던 것처럼, 당신의 사랑은 끝이 없구나.
그 사랑은 앞으로도 영원하겠지.
그때였다.
어둑한 하늘에 유성 하나가 길게 떨어졌다.
루가 설계한 대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정확한 위치와 시간이었다.
그는 라트올이 기특했다.
“아…….”
그레데엘므가 낮은 감탄을 뱉었다.
손끝부터 반짝거리는 별빛으로 변하면서 그의 몸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가 벅찬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이제 별이 될 시간인가 봐…….”
그가 무덤을 향해 자박자박 걸어갔다. 다리를 굽히고 애정을 담은 마음으로 사계절의 꽃이 만발한 무덤 위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신이시여. 당
신이 그토록 사랑한 인간을, 나 역시도…….
꽃 향이 실린 바람이 불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 다정한 인사만이 꽃잎처럼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던 비석에는 흔하디흔한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다이애나]
그녀의 무덤 위로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별이 떴다.
그리고 잠시 후, 눈부시게 아름다운 궤도를 그리며 낙하했다.
찬란한 끝이었다.
* * *
제인은 루가 사라진 어둠 속에서 멀뚱하게 앉아있었다.
사랑에 목숨을 바친 절절함이나 홀로 남은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처절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약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암벽이 무너졌을 때를 기점으로 이성의 끈이 다소 끊어져 있었다. 그래서 르젤들에게 칼을 꽂으면서도 죽이고 싶다, 죽여야겠다, 죽이자, 같은 이성적인 사고 또한 없었다.
직관과 본능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솔레리안의 장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칼날 끝에서 르젤이 재가 되어 소멸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죽였다.
그러나 재가 되어 사라진 탓에 크게 실감이 되지 않아서 더욱 멍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머릿속에는 르젤들의 현실감 없는 소멸보다 루의 마지막 말만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기다려. 그리고…….
제인은 여전히 멀뚱멀뚱했다.
차라리 기다려, 그런 세 글자만 들었다면 이렇게까지 정신 빠진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리라.
오히려 분개했겠지.
사랑해 마지않는 빌어먹을 데시안이 마지막까지 희망 고문을 하는구나. 절망하는 제 모습을 지독히도 원하는구나, 하고.
하지만.
“두꺼비를 따라가라니.”
화가 나기에도 애매한 말을 진지하게 곱씹다 보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덕분에 어둠 속에 혼자 있는데도 두렵지 않았다.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주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등골이 오싹거렸다.
여기에 누가 또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있나?
나 말고 또 아름다운 데시안에게 홀려서 목숨까지 내다 바치려는 인간이 또 있으려나?
생각하는데,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제인은 도리질했다.
그것만큼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다른 쪽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이런 무의 공간에 갇히면 언젠간 미칠 거라고 예상했기에 차라리 자신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게 심신에 이로울 듯싶었다.
환청이 들릴 만큼 미친 건가? 하지만 벌써? 이건 너무 빠르지 않나? 아니면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미쳐 있었나?
……그럴싸한데?
그녀는 열 손가락을 펼쳤다. 이어서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가 펴면서 가장 어려운 이름의 약초와 독초를 읊어나갔다.
막힘 없이 술술 나왔다.
다행이다.
아직 정신은 똑바로 박혀있나 보다.
그럼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달음박질 소리는 뭐지?
몸이 움츠러드는 그 순간.
아…… 두꺼비.
제인은 루가 말한 두꺼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물도 아닌 것이, 두꺼비처럼 생긴 무언가가 헐떡거리며 짧게 신세를 한탄하며 말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그러고는 가타부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제인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고서 부리나케 앞으로 달려갔다. 제인은 종이 인형처럼 팔랑팔랑 딸려가듯 뛰며 물었다.
“당신, 누구……!”
“제 이름은 타타! 은혜를 갚는 중입니다!”
무슨 은혜를 갚는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타타가 알아서 소리쳤다.
“루는 미쳤어요!”
* * *
루가 백 년간 봉인되어 있던 공간은 인간계도, 명계도, 천계도 아니었으며 지옥도, 연옥도 아니었다.
그레데엘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개별적인 이공간을 만들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듯 루를 처박아 두었다.
언 백 년을.
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완벽하게 창조하기에는, 그레데엘므는 신이 아니었다.
그가 만든 이공간은 새로운 공간은 맞았으나 연옥과 가까웠고 완벽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루는, 봉인 구역에 갇힌 1세기 동안 그 사실을 감지했다.
연옥은 생과 사의 경계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영역이었다.
완전한 생(生)도, 사(死)도 아닌 영역.
루는 생각했다.
만약, 이곳을 나간다면 연옥부터 지옥, 명계, 천계까지 하나하나 제 손이 닿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만약일 뿐이었다.
그는 생이 다할 때까지 그 이공간에 갇혀있는 신세였기에.
하지만 그레데엘므는 그 ‘만약’이라는 가능성을 기꺼이 펼치는 변덕을 부려주었고, 루는 그렇게 일시적으로 봉인에서 풀려났다.
루는 욕망과 욕구를 기민하게 파악하는데 타고난 데시안이었다.
질보다는 양적으로 많은 영을 바라는 명계와 양보다는 질적으로 순수한 영을 원하는 천계의 바람을 알아챘다.
그 야욕을 밑바탕으로 만든 게 녹니스였다.
이후에는 모든 게 순차적이었다.
그는 녹니스를 완성하자마자 하이데스에게 천계를 설득하라고 부추겼고, 천계에서는 녹니스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녹니스의 유통으로 인해 루는 연옥을 손바닥 위에 놓듯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행위의 목적은 하나였다.
제게 올지도 모를, 저를 목숨 바쳐 사랑해 줄 인간을 위해서.
루가 봉인되어 있던 시간 동안 깨달은 건 그레데엘므가 만든 공간의 정체만이 아니었다. 하루살이 같은 인간의 목숨이 그들에게는 퍽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도 소중하다면, 지켜주어야지.
루는 그 인간의 생을 지켜주기 위해 연옥에 길을 뚫어서 지상으로 돌려보내고자 했고, 길을 뚫는 조건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녹니스를 연옥에 납품한 상태였다.
연옥도 모자라서 혹시라도 목숨을 잃게 된다면 어디든 손을 뻗쳐서 다시 데려올 수 있도록 지옥부터 천계까지 모조리 파고들어서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이공간과 이어지는 연옥 외에는 길을 내는 게 아니라 구멍만 뚫는 것이었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지옥과 명계에는 그의 녹니스에 현혹된 것들로 빽빽했으며 천계 역시도 그런 것들이 적지 않게 포진되어 있었다.
루는 그렇게 연옥을 기점으로 모든 세계를 손아귀에 거머쥐었다.
아주 조용히, 천천히.
뱀처럼.
그의 수족인 라트올이 그에게 복종하면서도 미쳤다고 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몹시 고요하고 평화로웠기 때문이었다.
섬뜩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