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탁, 도르르륵…….
엔니오가 손에 들고 있던 조각칼이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돌리고 그레데엘므를 보았다.
정말이냐는 얼굴로.
“재능은 네 쪽이고. 노래는 영.”
그레데엘므는 멍하게 서 있는 엔니오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걸터앉아있던 작업대에서 일어나서 엔니오가 작업 중인 작품을 감상했다.
“그 아이는 사랑받고 자랄 거야. 너희들 아이니까.”
“…….”
그래서 딸기를 샀나?
로안나는 봄철 과일 중에서 체리를 가장 좋아했다.
이 시기에 시장에 있는 체리란 체리는 모두 먹겠다는 목표 의식을 가진 사람처럼 따뜻한 봄이 오길 기다리던 그녀가 철이 끝나버린 딸기를 사 온 건 의외였다.
기쁨이 터져 나오려 해서 입을 막고 한 손으로 작업대를 짚었다. 감당할 수 없는 행복이 심장을 짓눌러서 아플 정도였다.
그러나 그 소식을 전한 이는 그레데엘므였다.
“내내 생각했어요.”
엔니오는 넘쳐흐르는 기쁨을 억누르고 이마를 짚었다.
“당신이 사랑의 묘약으로 우리에게 장난을 친 이유가 뭘까. 왜 하필 우리였을까. 분명 계기가 있었을 텐데 도무지 짐작 가는 게 없었어요.”
그가 이마에서 손을 내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우리를 힘들게 했던 거죠? 우리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그레데엘므의 시선은 여전히 엔니오의 작품에 머물러 있었다.
“난 네 작품을 좋아해.”
“…….”
“특히 페브리아의 아낙시오니아상은 정말 아름답지. 네가 어떤 인간인지 궁금해서 보러 갔었어. 그리고 너와 네 아내를 보자마자 알았어.”
작품에서 눈을 뗀 그레데엘므가 엔니오를 보며 말했다.
“신이 사랑한 본질적인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다면…… 딱 너희일 거라는 걸.”
엔니오는 그의 다음 말에 허탈함을 느꼈다.
“심술 나더라고.”
심술. 정말로 단지 그래서…….
엔니오가 두 주먹을 꽉 쥔 채 다시 그를 보려고 할 때였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레데엘므의 손바닥 사이에서 동그란 빛이 일더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빛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새의 품처럼.
그레데엘므의 목소리가 먼 듯, 가까운 듯 신비롭게 울려왔다.
“그대와 그대의 가족에게 신의 가호를.”
* * *
제인은 동굴 안으로 걸음을 내딛자마자 직감했다.
여긴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라고.
뒤를 돌아보자 한 걸음 뒤에 있던 암벽과 흙바닥, 봄 햇살은 존재하지 않았다.
밖에서 거대한 암벽이 내려앉고 터졌을 때도 이곳은 고요했을 것만 같았다.
제인은 앞을 보았다.
몸만 돌렸을 뿐이지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암흑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걸어가면서 어둠이 시야에 익숙해져 갈 때였다.
제인은 발걸음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나는 데시안이 온몸이 사슬에 묶인 채 앉아있었다.
그는 그 모습조차도 아름다웠다.
“……왔네.”
그가 웃으며 재차 말했다.
“정말로, 나한테…….”
왔어.
작은 목소리가 꿈결처럼 흩어졌다.
제인은 사슬에 묶여있는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가볍게 입을 맞추고 인사했다.
“안녕, 루.”
푸른 동공이 아름답게 접혔다.
제인이 또다시 몸을 기울였다. 서로의 입술이 느릿하게, 깊이 맞물렸다. 차고 따뜻한 혀가 얽혀들면서 온기를 나누던 순간, 맑은소리가 공진했다.
어느새 깨진 사슬의 파편이 그들 주변에서 별처럼 반짝거렸다.
“……이것 봐. 너랑 있으면 그게 어디든, 전부 다 아름다운 밤하늘이 돼.”
이런 너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살며시 입술을 뗀 제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한다는 뜻이야.”
데시안의 푸른 눈동자는 더는 초승달처럼 접혀있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그런 표현은 루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제인이 이곳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소리가 울렸을 때부터 그는 절절하게 느꼈다.
감당할 수 없는.
그 표현이 온 마음에 새겨졌다.
공허는 메워지다 못해 차올랐고, 차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당장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감정들이 그의 심장을 터트릴 기세로 넘쳐흘렀다.
벅찬 감정에 어떤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떤 말로든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마음을 함부로 표현하고 싶지 않아서 더더욱 말을 하기 어려웠다.
“제인…….”
그래서 이름을 불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뇌듯 불렀다.
제인.
세상의 모든 언어 중에서 그가 가장 사랑하는 단어였다.
제인이 작게 탄식했다.
루는 손톱 끝부터 투명해져 갔다. 다행히 투명해지는 속도가 몹시 더뎠다. 제인의 이름만 줄곧 부르던 그가 겨우 다른 말을 꺼냈다.
“사랑한다는 말이…….”
그러나 이어지지 못하고 무겁게 끊겼다. 너무 많은 말들이 목에 걸렸다. 루는 어떤 말을 골라내야 할지 몰랐다.
푸른 동공이 흩날리는 봄꽃을 보듯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인, 나는…… 사랑한다는 말이 작게 느껴질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겨우 이어지던 말이 또다시 멈추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공허가 메워지면서 그의 심장을 압박하는 듯했다. 심장은 터질 것 같은데, 누군가가 그의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생경한 통증이었다.
미혹적인 얼굴에 괴로움이 언뜻 스칠 때였다.
“사랑해, 루.”
제인이 그의 뺨을 잡고 이마를 맞대었다.
“사랑하고 있어.”
“…….”
“나는 이제야 네 곁에 있는 기분이 들어.”
제인은 어째서 루가 아득하게만 보였는지 알 듯했다.
루는 내내 여기 있었던 거다.
아무도 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와 주길 바라며 마음만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슬에 묶여있었던 거다.
그러니 곁에 있어도 멀게만 느껴졌던 것이리라.
“사랑은 곁에 있어 주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이제는 곁에 있는 것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겠어.”
제인이 조용히 웃었다.
그녀의 웃음과 웃음에 딸려오는 말들이 루의 피부를 예민하게 스쳐 갔다.
“너를 향한 내 사랑이 얼마나 지독한지도.”
루는 목덜미부터 등허리까지 오싹거렸다.
정신이 아찔했다.
이 순간이, 그녀의 손끝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미치도록 달아서 영원히 박제하고 싶은 강한 욕구에 휩싸였다.
제 심장이 터지거나 그녀의 심장을 터트리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만 욕구가 해소될 것 같았다.
아니면 함께 죽으면 이 순간이 영원해지지 않을까.
그사이 루의 팔다리가 투명하게 사라져버렸다. 제인을 품에 안을 수도, 만질 수도 없었다.
그는 안도했다.
사슬에서 풀린 몸으로 제인의 마지막 숨마저 독식하려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 마음을, 나는 네게 끝까지 말하지 못하겠지. 인간인 네게는 사랑이라 부르기엔 그저 끔찍하기만 할 테니.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너는 늘 녹슨 덫에 일부러 걸려서 숲의 새를 보냈어. 나는 그때마다 가서 덫을 풀어주었지. 그런데 그거 알아?”
그의 목덜미에 양팔을 두른 제인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네 마지막 덫이 나야.”
제인은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리고 이 순간의 기억만으로 죽을 때까지 포만감이 들것 같았다.
“가여워.”
루의 귓가에 작은 웃음이 깃들었다.
“하필 나란 인간에게 걸려서는.”
진심이었다.
제인은 루가 가여웠다.
수천, 수만 번 생각해도 이 죽음을 누구에게도 양도하고 싶지 않았다. 지독하리만치 사랑하는 데시안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유일한 인간이길 바랐다.
“이곳에 묶여있던 네 마음은 앞으로 내게 묶일 거야.”
제인은 루의 목덜미에 두르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이내 고개를 기울이며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애틋한 그리움, 끔찍한 악몽,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되어서 널 속박하고, 구속하고, 가둬버릴 거야. 죽을 때까지 나밖에 사랑할 수 없게 될 거야. 그렇게 넌…….”
미소에 웃음이 더해졌다.
“내게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게 될 거야. 영영.”
그러므로 이 죽음은 사치다.
“실은, 너도 알고 있겠지. 알면서도 내가 오길 바란 거겠지. 이게 유일하게 널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이니까.”
제인은 목덜미까지 투명하게 사라져가는 그를 잠시 보다가 다시금 이마를 맞대었다. 꼭, 기도하듯이 눈을 감고서.
“나는 네가 선택한 지옥이야.”
그러다 살짝 이마를 떼고 소곤거렸다.
“마음에 들어?”
그때까지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루가 입술을 떼었다.
기묘하고도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큰일이군. 내가 선택한 지옥이…….”
제인은 홀린 듯이 멍하게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너무 달아서.”
루의 형체가 머리끝까지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착하게 굴면 사탕이라도 쥐여줄 것 같은 목소리를 남겼다.
“기다려. 그리고…….”
* * *
사계절의 꽃이 핀 무덤에 온 그레데엘므는 먼저 와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에 기분 나쁜 조소를 흘렸다.
바스락.
그레데엘므의 인기척에 앞에 있던 자가 뒤를 돌았다. 유유히 나부끼는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넘실거렸고, 푸른 눈동자와 입술이 완만한 곡선을 그려냈다.
루가 말했다.
“여기가 별 구경하기 좋은 자리라.”
그의 곁에 선 그레데엘므가 보랏빛으로 물든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웃지 마. 징그러워.”
“언제는 웃으라더니. 그리고 당신 웃음이 더 징그러워요.”
“나는 귀엽고 사랑스러워.”
“……최악의 유언이네.”
그레데엘므가 한숨을 폭폭 쉬었다.
“불쌍한 하이데스. 피도 눈물도 없는 데시안의 손에서 가엾게 소멸했겠지. 눈치껏 굴렸으면 그래도 목숨은 부지했을 텐데.”
루가 살짝 고개를 틀어서 그레데엘므를 힐끔거렸다.
이윽고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역시 당신이 벌인 짓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