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그 시각.
프시오는 페브리아 귀빈실에서 펠드툰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불안한 기색을 눈치챈 호엘리반이 따뜻한 차를 따라주었다.
“걱정할 거 없어.”
빈말이 아니었다.
프시오의 초조함이 무색하리만큼 상황은 완벽하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심지어 드래곤 마석과 관련한 중요한 협상안은 이미 호엘리반이 마드리안과의 독대로 마무리 지어 놓은 상황이었다.
비록 쉽지는 않았지만…….
호엘리반은 조용히 진저리 치다가 프시오를 향해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프시오의 표정은 도무지 풀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걱정하는 건 딱 하나였다.
마드리안이 저주에 걸려 있는 사랑의 묘약.
지금 손을 써두지 않으면 언젠가 큰 화가 생기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엘마뉴엘의 사절단 대표라는 명목으로 한 번 더 마드리안 교황과 펠드툰의 일대일 담화 자리를 마련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프시오가 저도 모르게 손톱을 씹었다.
이것까지만 정리된다면…….
그때 호엘리반이 프시오가 앉은 소파의 뒤에 서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내가 따라준 차보다 손톱이 더 맛있나 봐?”
그의 말에 프시오는 찻잔을 잡기 위해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호엘리반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프시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일 때였다.
“!”
호엘리반이 그녀의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프시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서 말없이 입술만 달싹거렸다.
호엘리반이 흡족해하며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나머지는 아버지께 맡겨둬. 능력 있는 분이시니까.”
프시오도 펠드툰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눈앞에서 보았지 않았던가.
마물 정화를 도와주겠다는 말에 흔들리는 마드리안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녀가 페브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그러니 펠드툰은 정신을 파괴하지 않고도 묘약의 저주로부터 그녀를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는 일인데도 고지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초조한 마음이 들끓었다.
프시오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고자 애썼다.
“네, 능력 있는 분이시라는 거 압니다…….”
“그래, 능력만 보자면 ‘지금’의 제인보다는 훨씬.”
호엘리반은 지금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웃었다.
“마드리안 교황이 하고 있던 목걸이는 프시오가 예상한 게 맞았어. 수백 년 전에 방어계열의 대마법사가 만든 유일무이한 마석이야.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프시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호엘리반의 나머지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교황의 몸 안에 방어 마법이 결속돼 있어서 목걸이를 뜯어내는 걸로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을 거란 말이죠. 루도 처음에는 뜯어서 부술 생각이었답니다.”
-그런데 뜯자마자 바로 휘청이더군. 그래서 내버려 뒀지.
프시오는 루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프시오의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는 데 성공한 호엘리반은 가볍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드호아망의 리톨은 마나 측정치가 10할을 기준으로 나타나지. 사실 그건 비율이고 정밀한 계측은 아니잖아?”
“제 생각에도 제인의 잠재 된 마나 수치는…….”
프시오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두고 나지막하게 웃었다.
“측정 불가가 아닐까 합니다.”
* * *
같은 시각.
호엘리반의 비서인 나벨은 집무실로 찾아온 밀리타와 카이에게 난처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세 분 모두 페브리아에서 귀국하지 않으셨어요.”
밀리타가 전에 없이 초조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언제 오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프시오에게 마법 양피지로 물어봐도 답변받기가 어려워서요. 급한 일이에요.”
“어젯밤에 내일 정오쯤 오실 것 같다고는 하셨지만,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는 일정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밀리타는 정신없이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서 빠르게 걸어갔다.
카이가 밀리타의 손목을 잡고 세웠다.
“어쩌려고.”
“구슬 안에 든 그림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야지. 연구실로 쓰던 건물 정원에 펠드툰 아저씨가 타고 오신 드래곤이 묶여있을 거야. 그걸 타고 찾아보는 게 더 빠르겠어.”
밀리타는 품에서 꺼낸 구슬을 초조한 눈으로 보았다.
회색빛의 구슬엔 금이 간 자국이 또렷해져 있었다.
“이건 막을 수 있는 죽음이야…….”
* * *
“……정말, 사람 열받게 하는구나?”
솔레리안은 소름이 끼쳤다.
루에게서 느껴지던 마력이 제인의 온몸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의 힘인가?
잠깐 혼란스러웠으나 아니었다.
데시안의 마력이 아닌 인간의 순수한 마나의 힘이었다. 마나의 강도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월등히 뛰어넘은 상태였고 심지어는 점점 더 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솔레리안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공중에 떠 있는 르젤들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오로지 잿빛 눈동자를 가진 인간만이 르젤들을 올려다보며 편안하게 숨을 쉬었고 고요히 분노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르젤들이 땅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들은 몸이 마비되었는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이 막힌 듯한 괴로운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제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서 솔레리안을 보았다.
“살리고 싶어?”
솔레리안은 겨우 고개만 저었다.
솔레리안의 창백한 안색을 본 제인은 고개를 비스듬히 떨어뜨렸다. 광기 어린 마나 때문에 무감한 표정마저도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왜 그래?”
“수, 숨…….”
제인은 잠시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가 아, 하고 살짝 마나를 낮추었다.
솔레리안은 막혔던 숨구멍이 터지기라도 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그사이 제인은 솔레리안이 손에 들었던 장검을 가져갔다. 이어서 가까이 있는 르젤들을 하나씩 푹, 푹, 찔렀다.
그레데엘므의 마력이 깃든 검에 찔린 르젤들이 재가 되어 소멸했다.
솔레리안은 그 광경을 얼마간 멍하게 지켜보다가 제인에게 다가갔다. 이어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장검을 다시 가져오고는 어깨를 툭 쳤다.
“물러나.”
“…….”
제인이 힘없이 밀려났다.
솔레리안은 마력의 파동에 날을 세우고 장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 일격에 숨이 붙어있던 르젤들까지 모조리 소멸했다.
주변이 적막했다.
솔레리안이 후련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나 나나 둘 다 지옥행 확정이야.”
“지옥이든 어디든 상관없어. 루한테 가야 해. 무너진 암벽 좀 어떻게 해봐.”
솔레리안이 제인의 안색을 살폈다.
조금 멍하긴 했지만 아주 정신을 놓은 얼굴은 아니었다. 솔레리안은 가만히 서서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표정을 지었다.
제인이 솔레리안의 곁에 왔다.
이어서 무너진 암벽 쪽으로 가볍게 등을 밀었다.
“길을 열어줘.”
솔레리안은 고개를 젖혔다. 눈부신 봄 햇살이 석양에 물들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녀는 장검을 들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이내 조절할 수 있는 마력을 그러모아서 무너져버린 암벽을 향해 날카롭게 날렸다.
콰광!
굉음과 함께 암벽이 터지면서 막혔던 입구가 드러났다.
제인은 솔레리안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나, 슬퍼 보여?”
“아니.”
“미련은?”
“딱히.”
솔레리안의 간결한 대답 끝에 제인의 미소가 싱그럽게 피어났다.
“좋아. 완벽해.”
제인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느 인간의 그림자가 데시안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주고자 음습한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삼켜졌다.
좋아. 완벽해.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서.
솔레리안은 어쩐지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순간에 저런 말을, 저런 얼굴로 하는 인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
루는 도대체.
저 인간은 도대체.
솔레리안은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손에 든 장검을 사라지게 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긴장감이 풀려서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밤이 내려오면 그레데엘므 님은 별이 되실 테지.
별빛을 받아내러 가야 해.
솔레리안이 장검을 거두고 나무 정령이 있는 입구를 빠져나왔을 때였다.
하늘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떨어졌다. 손바닥을 펼치자 회색빛의 조각난 유리 파편이 놓여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위로 젖히려던 찰나, 거친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드래곤……?”
인간이라면 나무 정령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구역이었다. 그 위에서 인간을 태운 드래곤이 하늘 위를 뱅뱅 맴돌다가 빠르게 하강했다.
하지만 드래곤을 타고 있던 여자는 하강하기도 전에 몸을 날려 뛰어내렸다.
그리고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 나무 정령이 닫아 놓은 입구로 맹렬히 달려갔다.
탁!
솔레리안이 그녀의 팔을 붙잡기 전까지는.
멈춰선 여자의 눈동자에는 죽음이라도 본 듯한 참담함이 가득 차 있었다.
* * *
“엔니오!”
로안나가 방긋 웃으며 엔니오의 작업실 문 앞에 서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시장에서 장을 봐왔는지 종이봉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엔니오가 손을 털고 로안나에게 다가갔다.
돌가루가 남아 있는 손을 등 뒤로 하고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어서 로안나가 안고 있는 종이봉투와 돌가루가 묻은 손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다가 다정하게 물었다.
“들어줘?”
“괜찮아, 가벼워.”
“시장 갈 거면 나랑 같이 가지 그랬어. 그렇지 않아도 성가대 연습 시간이 지났는데 안 와서 데리러 가려던 참이었어.”
“저기요, 조각가 아저씨.”
로안나는 몸을 틀더니 산등선 사이로 넘어가는 붉은 태양을 가리켰다.
“보세요. 아직 해도 안 졌답니다. 자꾸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팔불출이라고 수군거린다니까?”
“당신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는 전부 아름답다는 찬양이거나 천사가 아닐까? 혹은 날개는 어딨지? 같은 말일…….”
로안나가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딸기! 갑자기 딸기가 너무 먹고 싶어서 시장 갔다가 저녁거리도 사 온 거야. 작업 마무리하고 들어와.”
“응.”
문을 닫고 몸을 돌린 엔니오는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돌아서자마자 불청객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축하해.”
어느 틈에 들어온 건지 그레데엘므가 너른 작업대 위에 엉덩이를 깊숙이 넣고 앉아서 어린아이처럼 발끝을 달랑거리고 있었다.
엔니오는 마치 불청객을 맞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조각칼을 손에 쥐고 작업을 이어 나갔다.
석상을 정교하게 다듬는 그의 움직임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레데엘므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딸이야.”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엔니오는 제 귀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었다.
“예쁘게 자랄 거야. 제 어미를 빼닮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