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죽을힘을 다해서.
제인은 그 말을 몸소 깨우치는 중이었다.
아무리 집중해서 마비력을 날려도 르젤들의 방어진 화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동굴 안은 고사하고 그 앞으로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마비력을 끌어올려서 르젤들이 쏘는 방어진 화살을 날려버릴수록 체력이 뚝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인은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죽는 것까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앉아있으니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명줄이 긴 게 확실한데.
제인은 허튼 생각을 집어치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솔레리안의 말처럼 르젤들이 최대한 그녀들을 상처 입히지 않고 방어진을 친다는 것이었다.
그때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제인이 앞을 주시한 채 물었다.
“저것들, 동굴 앞 주변만 피해서 방어진을 치는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이야?”
솔레리안이 제인을 힐끔거렸다.
감이 좋네.
“네가 본 게 맞아. 그레데엘므 님의 결계가 이 주변에 넓게 퍼져있긴 하지만 뼈대는 동굴 앞에 있어. 뼈대를 훼손하는 건 그분을 배반하겠다는 의미라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거야.”
“네 말대로라면 이미 배반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래.”
“……쟤들 바보야?”
“…….”
“하…….”
솔레리안의 침묵에 제인이 새벽안개처럼 짙은, 그러면서도 서늘한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
솔레리안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떨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제인이 앞을 직시한 채 키들키들 웃으며 작게 읊조렸다.
“머저리 새끼들한테 지는 거.”
“…….”
“나는 그게 죽는 것보다, 더 싫어.”
솔레리안의 눈동자에 황망함이 깃들었다.
도대체 뭐 이런…….
루도, 그레데엘므도 미쳤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바였다.
거기에 제인이라는 인간까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 솔레리안은 예상치 못한 탈력감에 휩싸였다.
고개를 위로 젖혔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쏟아졌다.
저 하늘.
지금 저곳에서는 해밀이 카샤를 잡고 인질극을 펼치고 있으리라.
솔레리안이 새삼스레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구나…….
나는 미쳐 돌아가는 세상 한가운데 있구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다시금 그녀의 이름이 불린 것은.
“솔레리안.”
솔레리안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어느새 라카엘이 그녀들 앞에 내려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나는 그대의 생각을 도통 모르겠구나. 그대는 누구보다도 그레데엘므 님을 충직하게 따랐던 르젤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
그의 등 뒤로 화살들이 둥글게 도화선을 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어째서 찌꺼기 따위의 봉인을 풀어주려 하는가?”
솔레리안이 날아드는 화살을 베려 검을 들었다. 하지만 라카엘의 손이 더 빨랐다. 그가 손을 드는 순간 화살들이 공중에서 그대로 멈췄다.
화살들은 방어진을 그리기 위해 원형으로 떨어진 모양이 아니었다.
일제히 제인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제인은 화살이 날아오는 것 따위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라카엘을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찌꺼기, 그 한마디에.
짧은 침묵 끝에 솔레리안이 말문을 열었다.
“제가 그렇게나 뵙길 간청했는데, 오늘에서야 뵙습니다.”
“이해해주길 바라네. 그레데엘므 님의 동향을 파악하느라 바빴어. 그 미천한 것과의 맹약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을 줄은 몰랐거든. 솔레리안, 네가 그 맹약에 이런 식으로 손을 보탤 줄은 더더욱 몰랐고.”
솔레리안은 얕지 않은 한숨을 뱉었다.
제인에게로 향한 화살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시선이 라카엘에게로 옮겨졌다.
“르젤이 명분 없이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대 역시 알지 않는가.”
라카엘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왔다.
“천계는 오래전에 신을 잃었다는 걸. 희미하게 남아 있는 신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는 건 제1 대리자인 그레데엘므 님이 유일하다는 것까지.”
“…….”
“그러니 그레데엘므 님까지 잃을 수는 없어. 그분께서 소멸하지만 않는다면 나 라카엘, 지옥쯤은 얼마든지 갈 수 있다네.”
솔레리안이 고개를 떨구었다.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얼굴에 어둑한 그늘이 졌다.
“침묵하는 존재가 된 신의 언어를 그레데엘므 님만이 유일하게 해독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신의 제1 대리자니까.”
솔레리안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울컥거리는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그레데엘므가 천계에 있을 때, 그는 몇 번이나 르젤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의 움직임, 모든 계절의 바람, 범람하는 강물, 나고 지는 잎사귀와 풀벌레 소리, 한겨울의 눈송이까지 모두 신의 언어라고. 세상에 귀를 기울이라고.
그런데 아무도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거였다.
아무도.
“제발…….”
그녀가 괴로운 듯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제발 태초의 신도, 신의 대리자인 그레데엘므 님도 의지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결정할 순 없습니까? 아, 녹니스. 그거 하나 스스로 결정했죠. 제가 정말 한심하고 창피해서…….”
라카엘은 그녀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솔레리안, 생각해 보게나.”
곧 다시 반듯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찌꺼기나 다름없는 데시안이 불순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겠나? 그가 만든 녹니스만 있으면 천계는 더 깨끗하고, 순수하고, 맑은 영들만 받을 수 있어.”
“…….”
“거래를 수용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솔레리안은 신물이 났다. 벽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답답했다. 이런 것들을 수천 년을 데리고 있었던 그레데엘므는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솔레리안이 검의 마력을 높이 올렸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레데엘므 님의 마지막 원을 들어 드려야겠습니다.”
직전까지 수십 개의 방어진을 끊어낸 솔레리안은 처음보다 마력의 파동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제인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 명확하게 검을 휘두르려 마력에 온 신경을 모으려 할 때였다.
“그만 솔직해지는 게 어떤가?”
라카엘이 조롱 섞인 투로 말했다.
“실은 그레데엘므 님의 위해서가 아니라, 동굴 안에 봉인된 찌꺼기 같은 데시안에게 빚을 져서라고.”
“야.”
그 목소리는 솔레리안의 것이 아니었다.
마주 서 있던 두 르젤의 시선이 한 인간에게 닿았다.
“찌꺼기, 찌꺼기, 찌꺼기…….”
제인이 무감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 누구보고 그러는 거야?”
“지금 무어라…….”
야, 라는 부름에 라카엘이 말을 잇지 못하고 내려다보자 제인이 쏘아붙였다.
“말귀도 못 알아듣고 지껄이는 버러지만도 못한 유충 같은 게 누구보고 찌꺼기라는 거야, 빌어먹을 새끼가.”
라카엘의 동공에 분노가 붙은 건 순식간이었다. 그가 공중에 멈춰있던 화살들이 제인에게 향하도록 손을 들어 올리려 할 때였다.
“……!”
라카엘은 거짓말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두 르젤이 대화하는 사이, 조용하게 마나를 올리고 있던 제인이 마주치는 시선만으로 그에게 마비력을 걸어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그가 눈알만 굴려서 제인을 보았다.
설마, 이 계집애가.
제인은 라카엘의 찢어질 듯한 눈길을 무시하고 석상처럼 굳은 그의 등허리를 퍽, 소리 나게 발로 차버렸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버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제인은 주먹 쥔 손으로 그의 머리를 두어대 더 때렸다.
“찌꺼기는.”
퍽!
“네가 찌꺼기지.”
퍽!
그사이 제인에게로 향했던 화살들을 향해 장검을 휘두른 솔레리안은 그대로 멈춰서 눈앞의 광경을 경악스럽게 보았다. 그녀는 눈을 끔뻑거리며 생각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암벽 위에 있던 르젤들 역시도 솔레리안과 다름없이 입을 떡 벌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제인은 옷을 툭툭 털더니 동굴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뒤돌아서 솔레리안에게 말했다.
“뭐해? 검 제대로 잡아.”
“……어?”
제인이 굳어버린 라카엘을 가리켰다.
“네가 그 검으로 저 새끼 죽이니 마니 패악을 부리고 있어야 내가 방해받지 않고 동굴로 들어갈 거 아니야.”
“……아.”
인질극.
그거 나도 해야 하는구나.
솔레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망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이 혀를 차며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쾅!
천지가 뒤틀리는 듯한 폭발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제인은 몸을 휘청거리면서도 다급하게 동굴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뿌연 흙먼지로 뒤덮여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불길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들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앞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발을 디딜 때마다 빨라졌다.
쿵쿵쿵.
심장이 고막에 들어찬 기분이었다.
쿵쿵쿵. 쿵쿵쿵.
아니, 손끝까지. 온몸이 심장이 된 감각이었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공기 중에 떠올랐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모든 정황이 드러났다.
제인이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와.”
동굴의 입구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암벽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하지 못할, 몹시도 거대한 암벽이었다.
제인이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희고 우아한 날개를 펼친 르젤들이 제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절대로 안에 들여보내 줄 수 없다는 듯이.
“너희, 정말…….”
제인은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는 얼굴을 하고서 낮게 중얼거렸다.
“……정말, 사람 열받게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