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하임은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이 정말로 제 것인지 현실감이 없었다.
“제인이 불행하길 원한 건 아니지만 행복하길 바라지도 않았어요. 저는…… 미워하고 원망할 존재가 필요했어요.”
그러니 이제와서 자신이 바라기엔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인이 우는 얼굴을 본 순간부터 마음에 한 가지 바람이 떠나가지 않았다.
염치없게도.
“이제는…….”
하임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차마 뱉지 못하고 삼켜냈다.
……이제는 제인이 행복했으면 해요.
많이 웃었으면 해요.
* * *
제인은 한참을 서서 울었다.
서럽게, 엉엉.
멈추지 않을 서글픔이 그칠 때쯤 제인은 눈물을 마저 닦아내고 자신이 서 있는 길을 보았다. 이내 머릿속에 한 가지 물음이 띄워졌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누군가 이 죽음이 옳은지 묻는다면 제인은 대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숨을 터부시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제인은 몇 방울 맺혀있던 슬픔을 털어내듯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진 절망과 두려움, 상처까지 오로지 제 것이 되기를 바라다 못해 그녀의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그에게로.
기꺼이.
붉었던 눈가가 가라앉은 무렵, 제인은 거대한 암벽을 마주했다.
그 아래 어둑한 동굴이 있었다.
새 떼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걸 알리듯 얼마간 하늘 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뿔뿔이 흩어져 날아갔다.
제인은 손바닥으로 눈을 꾹 찍으며 열기를 확인했다.
뜨겁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대로 동굴 쪽으로 걸어가던 찰나, 등 뒤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인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
하지만 수십 개의 화살이 땅에 꽂히는 게 더 빨랐다.
화살은 그녀를 중심으로 넓은 모양의 원을 그리며 꽂히면서 삽시간에 강렬한 빛을 파생시켰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손등으로 빛을 가렸다.
잠시 후.
겨우 눈을 뜨자 빛으로 일렁이는 장막이 그녀를 포위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갇혔다는 뜻이었다.
제인은 몇 걸음 걸어서 벽처럼 생긴 빛의 장막을 발로 찼다.
퉁퉁.
“이게 뭐야?”
꼭 두꺼운 유리를 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얼핏, 장막 너머 암벽에 시선이 걸렸다. 암벽 위에 무언가가 쭉 늘어져 있었다.
거리가 그리 멀지도 않았으나 장막에 일렁이는 빛이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았다.
제인은 시야를 좁히며 그곳을 뚫어져라 보았다.
흰옷을 입고, 등에 흰 날개가 달린…….
“……천사?”
제인이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정확히는 르젤.”
아, 르젤.
누군가의 말에 자연스럽게 주억거리던 제인은 퉁퉁 치던 장막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장막 바로 옆에는 구불거리는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흰 날개가 달린.
제인이 그녀에게 누구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먼저 암벽 위에 있던 르젤들의 목소리가 연달아서 들려왔다.
“자네는 솔레리안 아닌가.”
제인이 그 목소리에 재차 옆을 돌아보았다.
솔레리안.
그레데엘므가 보여주었던 책에서 본 이름이었다.
암벽 위에 있던 르젤들이 솔레리안에게 말했다.
“자네도 그레데엘므 님을 지키기 위해서 왔나 보군.”
“이쪽으로 오게나. 해가 저물면 봉인 입구가 닫힐 거라네. 그때까지만 저 인간을 잡아두면 돼.”
제인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르젤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아두려 한다는 거였고, 그레데엘므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그를 위해서라는 거였다.
제인의 속내를 읽은 듯 솔레리안이 말했다.
“그레데엘므 님의 의도가 아니야. 저들의 독단이지.”
제인이 솔레리안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조소를 그린 얼굴로.
“그래? 그럼 네 역할은 뭔데?”
솔레리안의 시선이 천천히 제인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그레데엘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레데엘므 님과 루 사이에 맹약의 열쇠가 된 여자는 어떤 인간입니까?
-응, 노란색이야.
그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싹수가.
솔레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대로네.”
제인도 주억거렸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진 몰라도 아마 틀린 말은 아닐 거야. 이건 내가 늘, 누누이 말하는 건데.”
제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내 소문은 대체로 맞는 편이거든.”
솔레리안은 그 웃음이 당황스러웠다. 죽음을 앞둔이라고 보기에는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말간 웃음이었다.
그녀는 복잡한 감상을 떨쳐내며 제인에게서 시선을 거둬냈다.
“자랑스럽게 말하지 말지.”
“딱히 부끄럽지도 않아서.”
“…….”
잘 어울리네, 그 마귀랑.
솔레리안은 무의식적으로 드는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내 손안에 흰빛이 형체를 띄더니 순식간에 장대한 검이 쥐어졌다. 그 모습에 제인이 흠칫거리며 솔레리안의 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성향이 과격한 편인가 보네. 그런 건 일찍 말해줄래?”
“하나만 묻지.”
제인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솔레리안이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들어갈 각오는 되어있나?”
그거구나, 네 역할.
제인이 깔깔 웃다가 짧게 대답했다.
“응!”
그때 솔레리안의 장검을 보고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르젤들 사이에서 의뭉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레리안, 자네…… 여기까지 온 진짜 연유가 무언가?”
솔레리안이 거대한 장검을 휙 돌렸다.
이어서 암벽 위의 르젤들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그레데엘므 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이 있다고 하여 성심성의껏 훼방 놓으러 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비록 지금 연옥에 머무르고 있다고는 해도 자네는 누구보다도 그레데엘므 님을 충성스럽게 따랐던 르젤이 아니었나?”
“지금도 변함없어요.”
“그런데도 그 선택이 옳다고 판단하는 건가?”
“누가 그러더군요. 각자에게는 각자의 옳음이 있다고.”
솔레리안이 한 번 더 장검을 돌리며 결연하게 말했다.
“이게 제 옳음입니다.”
르젤들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순간, 장검이 빛의 장막에 강하게 내리꽂혔다.
쩌적- 쩍…….
제인은 이미 몇 걸음 물러나서 장막의 금이 쩍쩍 갈라지는 광경을 흐뭇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그것도 손뼉까지 치면서.
쾅!
이윽고 사방에 금이 간 장막이 폭발하듯 바깥으로 터져 나갔다.
제인은 양팔로 재빠르게 얼굴을 가렸다. 일대가 고요해지고 희뿌연 먼지가 날릴 무렵이 되어서야 팔을 내린 그녀가 탐탁지 않다는 듯이 솔레리안에게 말했다.
“나까지 위험할 뻔했잖아.”
“누가 봐도 손뼉 치면서 좋아할 타이밍은 아니었어.”
그녀들이 무덤덤하게 대화하는 사이, 하나같이 굳어 있던 르젤들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목소리를 쩌렁쩌렁하게 높였다.
“솔레리안! 이게 무슨 짓인가!”
“아무리 그레데엘므 님이 미쳤다지만, 자네까지 미치면 쓰나!”
그때 누군가 바락바락 소리치는 어느 르젤의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그대, 말조심하게. 그레데엘므 님을 욕보이지 말게나.”
그가 솔레리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장검에 깃든 마력, 그레데엘므 님의 것인가?”
솔레리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눈썰미는 그대로십니다, 라카엘.”
그녀의 대답에 라카엘을 비롯한 모든 르젤들이 저마다 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 틈에 제인이 솔레리안 곁으로 와서 조그맣게 물었다.
“당신, 얼마나 강해?”
“…….”
“솔직하게 대답해봐.”
제인이 재차 물었다.
“강해?”
“약해.”
솔레리안의 대답에 제인의 낯빛이 흐려졌다.
“야단났네. 내가 원하는 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거지 흙바닥에서 개죽음당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동굴 안에 들어가도 개죽음인 건 마찬가지 아닌가?
솔레리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제인이 르젤들을 가리켰다.
“저게 끝인 건 맞아? 여기서 더 많아지면 골치 아파.”
솔레리안은 이미 해밀을 천계로 보내놓고 오는 길이었다. 지금쯤이면 카샤와 함께 아마 깽판을 치고 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 저게 끝일 거야. 게다가 저들은 우리한테 손끝 하나 못 건드려. 네가 동굴로 못 들어가게 방어만 할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천계는 규율을 가장 중시해. 그래서 르젤들은 명분이 있어야지만 움직여. 아무 명분도 없는 상태로 인간인 널 해치면 심판대에 올라가는 걸 피할 수 없어.”
솔레리안이 이어서 말했다.
“쉽게 말해서 사리는 것밖에 못 한다는 뜻이야. 나도 저들과 같은 르젤이라 누구보다 그걸 잘 알아.”
제인이 감명받은 얼굴로 솔레리안을 바라보았다.
“객관화가 훌륭해. 마음에 들어.”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서 이렇게 안 기쁜 적은 오랜만이네.”
“너무 칭찬하지 마. 쑥스러우니까.”
“…….”
잘 어울려.
솔레리안은 재차 생각하면서 장검을 꽉 쥐었다. 그레데엘므가 나누어준 마력이 피가 빠르게 도는 동맥처럼 뛰는 것 같았다. 그녀 혼자서도 르젤들을 대항하기에 충분한 마력이었다.
약간의 문제라면 성력만 다뤄온 그녀에게 낯선 힘의 파동이라는 것 정도.
익숙해지기만 하면 될 텐데.
솔레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고 태양이 떠 있는 위치를 확인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어.
그때였다.
태양을 바라보던 솔레리안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리는 동시에 암벽 위에 서 있던 라카엘이 손날로 무언가를 빠르게 쳐냈다.
라카엘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하하, 짜증 나네.”
옆을 돌아보자 기습공격에 실패한 제인이 마력에 집중하듯이 호흡하다가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반드시 죽어 주겠다는 얼굴로.
“될 때까지 해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