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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44)화 (144/168)

144.

제인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이내 몸을 뒤로하며 루와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다.

제인과 루의 코끝이 맞닿았다. 이어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이마부터 다시 코, 뺨과 눈가를 부드럽게 눌렀다.

“언제까지 이럴 거냐면……,”

루는 온기 가득한 애정을 받아내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제인은 그대로 루의 입술에 포개고 숨을 나누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입맞춤이었다. 입술을 뗀 제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무화과 먹으러 가자.”

* * *

제인은 루와 함께 축제가 한창인 가을을 만끽했다.

축제는 볼거리가 많았다.

그녀는 생쥐처럼 여기저기 죄다 헤집고 다니면서도 마법도구 상점이나 보석과 마석을 파는 상점만큼은 어물쩍거리며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시가지를 실컷 구경한 뒤에는 무대 중앙에서 펼쳐지는 서커스를 구경했다.

하지만 루가 제인만 쳐다보는 통에 공연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오래 관람하지는 못했다.

제인은 그를 데리고 시장으로 가서 무화과를 잔뜩 샀다. 그리고 볕이 좋은 벤치에 앉아 잘 익은 무화과를 행복한 얼굴로 크게 베어 먹었다.

루는 웃음을 문 채 조용히 생각했다.

지옥이군…….

이윽고 제인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다람쥐처럼 양 볼에 무화과가 가득 든 얼굴로 키득거렸다.

루는 손수건으로 무화과의 표면을 반질거리게 닦아서 그녀에게 주며 속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토록 평화로운 지옥을 만들어주다니.

여러모로 대단하지 않은가.

그사이 무화과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제인이 루의 다리를 베고 눕자 그가 자연스럽게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제인의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잠을 도통 못 잤던 그녀였기에 밀려드는 어둠 속을 역행하는 기분이었다. 산등선 아래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마도 눈 깜짝할 새에 어두워지리라.

루가 말했다.

“눈 좀 붙여, 제인.”

“안 되는데…….”

“잠깐이라도 붙여.”

고민하던 제인이 루의 품으로 얼굴을 묻었다.

“……그럼 백까지만 세고 깨워줘.”

루가 야트막하게 웃었다.

“그래.”

“대답이 영 시원찮아……. 분명히 말했어, 딱 백까지야…… 백…….”

제인은 루의 손길에 금세 잠들었다.

루는 헛웃음이 나왔다.

단박에 잠든 그녀 때문이 아니라, 눈을 붙이라고 한 주제에 잠든 그녀를 곧바로 깨우고 싶은 자신이 우스워서.

우스운 게 이뿐일까.

처음부터 그랬다.

삼 페렐츠도 안 할 것 같은 모조품을 삼백 온트 짜리라고 굳건하게 믿는 얼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특히 눈동자.

그가 역겨워 마지않는 가짜 보석을 진짜라고,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잿빛 눈동자가 우스웠다.

달빛에 반짝거리는 모조품을 트고 갈라진 손바닥 위에 소중하게 올려놓은 꼴은 또 어떻고.

그게 뭐라고 웃음이 나왔는지.

정말 그까짓 게 뭐라고 함께 속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이다.

제게로 와줄 누군가를 너무 오래 기다린 탓에 웃음이 난 것이리라.

외로워서.

쓸쓸하고 공허해서.

그래서 우연히 마주친 인간이 건네주던, 아무것도 아닌 싸구려 머리끈 하나에 웃음이 난 것이라.

제인.

그 이름을 숲에서 다시 부르게 되던 날, 여자는 낡고 빛바랜 그의 희망까지 반짝이게 해주었다.

발버둥 치라고.

구해주고 싶게 하라고.

지겨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언제 죽을지도 모를 나약한 몸으로 매일같이 숲의 새들을 따라서 제게로 왔다.

그 걸음이 좋았다.

제인의 보폭이, 걷는 속도가, 제게로 오는 방향이 하나같이 좋았다. 즐거운 유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래.

행복이었다.

밤마다 자학을 일삼으면서도 석양이 지는 시간이면 너절한 몸과 마음으로 기어이 제게 오는 걸음이, 끔찍하게도 그에겐 행복이었다.

행복을 만끽하자 희망이 더없이 반짝거렸고, 절망까지 탐났다. 그가 바라는 절망은 손을 휘두르기만 해도 잡힐 만큼 세상 어디에나 있는 절망이 아니었다.

오로지 제인의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맞이할 절망을 바랐다.

죽음에 마땅한 얼굴이 그런 것이니.

자신의 절망을, 고통을 탐내지 말라 목에 단검을 겨누던 그 인간을 품에 안고 싶었다.

외롭고 쓸쓸해 보여서.

내가 보았던 걸 너도 보았겠지.

그래서 내게 함께 도망가자고 한 거겠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너에게 나를 줄게. 내 절망을 줄게. 전부 다 가져.

그때 사실, 두려웠었다고 말하면 너는 믿을까?

바다 한가운데에서 날개도 없는 네가 달아날까,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까, 불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면 너는 웃으려나.

그리고 그게 시작에 불과했다고.

나는 너로 인해 순간순간 늘 두렵고, 불안하고, 초조했노라 고백하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알았던가.

우습기만 했던 게 이토록 두려운 것이 될 줄.

루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잠든 제인의 잔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그의 차가운 온도가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러면서 자신에게 얄팍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은 어떠한가.

만일, 그레데엘므의 맹약을 파기할 수 있다면 그러길 바랄 것인가?

대답은 지독히도 명료했다.

아니.

공허는 여전히 루를 잠식하고 있었고, 애석하게도 그에게 주어진 길은 그레데엘므의 진창과 다를 바 없었다.

-네게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인간의 맹목적인 사랑만이 네 공허함을 채울 수 있단다.

말은 마음이다.

말은 세상이 되고, 저주가 된다.

그레데엘므의 진창에 떨어졌을 때 루는 그의 말이 저주라는 걸 절실히 실감했다.

나를 이 진창에 구르게 하고 싶었던 거구나.

그것도 영원히.

그렇다면 기꺼이 굴러 줘야지.

형벌과도 같은 공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지옥도 흔쾌히 받아들일 것 같았다. 그건 그의 손으로 선택한 지옥일 테니.

결국, 제인을 부를 것이다.

숲의 새들을 보냈던 어떤 날들처럼.

루는 제인의 손등을 잡고 입술을 눌렀다. 손목까지 부드럽게 타고 올라가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이내 희고 찬 손으로 느릿하게 감싸 쥐자 푸른 빛이 그녀의 손목에 스치듯 번졌다가 사라졌다. 그는 각인이 말끔하게 사라진 걸 확인하고 한 번 더 입술을 대었다.

“……백.”

루가 제인의 손목을 깨물었다.

제법 아프게 물었기에 제인이 얼굴을 찡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잿빛 동공이 부풀어 올랐다.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손목을 보던 그녀의 시선이 루에게 닿았을 무렵이었다.

투둑…….

제인의 목걸이가 풀렸다.

“제인.”

루의 손에 든 목걸이와 팔찌가 순식간에 조각나며 사라져 버렸다. 제인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계약 파기였다.

“……진창을 굴러도 좋으니, 내게 와.”

루가 그녀의 손바닥에 파고들 듯 입을 맞추었다.

“네 발로 직접.”

말없이 루를 응시하던 제인의 입술이 조금씩 벌어졌다. 이내 괴로움에 부서지는 표정을 짓고는 잠긴 목소리를 짜내듯 내었다.

“응, 갈게. 너한테 갈게. 그러니까, 제발…….”

제인은 나직이 웃고 있는 루를 꽉 끌어안았다.

“……떨지 마.”

그녀의 품 안에서 잠깐 굳어 있던 루가 느릿하게 제 손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가 작게 웃었다.

눈송이 같이 작고 차가운 웃음소리가 제인의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저보다 훨씬 덩치가 큰 사내를 품에 안은 제인이 넓은 등 언저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루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입술 사이로 그녀의 살결이 부드럽고 진득하게 삼켜졌다.

제인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목덜미에서 떨어진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단단한 치아에 귓바퀴가 잘근 물리면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해, 제인.”

제인의 몸이 저릿하게 떨렸다.

루는 고개를 들고 붉게 상기된 제인을 눈에 박듯이 담았다.

그가 재차 말했다.

“사랑하고 있어”

아름다운 푸른 동공에 색정과 공허, 갈증 같은 감정들이 음침하게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유영하던 제인이 기쁜 듯 말갛게 웃으며 물었다.

“얼마나?”

“징그러울 만큼.”

그 순간, 하늘에서 굉음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에 형형색색 수놓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할 정도로 아름다운 불꽃이었다.

그때 루가 제인의 턱을 조심스레 잡아서 돌리고 입을 맞추었다.

“내가 또…….”

제인이 조그맣게 말했다.

“내가 또 토하면 어쩌려고.”

이어서 능청스럽게 슬쩍 뒤로 물러나자 루가 눈이 멀 듯이 아름다운 미소를 흘리며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끔찍하겠군.”

이윽고 붉은 입술을 머금었다.

어둑한 하늘 위로 황홀한 불꽃들이 끊임없이 피어났다.

살짝 떨어진 입술 틈으로 그의 웃음이 걸렸다.

“그것마저 좋을 것 같아서.”

* * *

쾅쾅쾅!

세실은 궁금했다.

어떤 정신 나간 자식이 아침 댓바람부터 문이 부서지도록 두드리는지. 그 낯짝을 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당긴 세실은 거친 욕설과 함께 손을 뻗었다.

“젠장, 빨리 이리 줘요!”

세실의 다그침에 하임이 얼른 새끼 고양이를 건넸다. 집안으로 다급하게 들어간 세실은 바닥에 깨끗한 천을 깔고 피범벅인 고양이를 눕혔다.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햇살 같은 빛으로 고양이 상태를 진단하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 * *

제인이 불현듯 눈을 뜬 건 아침 햇살이 밀려드는 아침이었다.

그녀는 빈 옆자리를 확인하고 얕은 침음을 삼켰다. 아침이 왔다는 게, 그래서 그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꿈이 아니다.

배게 위에 남겨진 푸른색 머리끈이 말해주고 있었다.

제인은 몸을 일으켜 앉으면서 은빛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었다. 느릿느릿하게 묶고 있자니 어젯밤 일들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평소처럼 식사하고 포도주도 마셨다. 따뜻한 욕조에서 목욕했으며 침실로 들어와 몸을 섞었다.

루의 손길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그는 제인을 집요하게 품었다. 제인의 몸에 기력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다 빠져나가서 까무룩 하게 잠이 들기 전까지, 몇 번이고.

제인은 잠결에 제 몸을 씻어주는 손길을 기억했다. 겨울에 머물러 있는 듯한, 그러나 제인에게만큼은 세상 무엇보다 다정한 손길을.

머리를 다 묶었을 때, 밖에서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라트올이었다.

“……루가 봉인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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