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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43)화 (143/168)

143.

호엘리반은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앙디스를 움직이는 건 민들레 홀씨를 부는 일만큼이나 쉬웠다.

페브리아의 마법 결계가 무너졌다는 말만 흘리면, 기다리라는 호엘리반을 말을 무시하고 어떻게든 드래곤을 구해서 습격할 족속들이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개떼같이 덤벼든 거지. 멍청한 게 얼마나 나쁜 건지 이런 식으로 알려주게 돼서 조금 슬프네.”

그때 그의 뒤에 숨어있던 연분홍색 드래곤이 머리를 쏙 내밀었다.

호엘리반이 슬프다니!

솜브가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콧구멍을 드릉드릉하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곧 배신감이 비친 얼굴로 뚱하게 소리쳤다.

“순 거짓말쟁이! 하나도 안 슬퍼 보이는데요!”

“…….”

“되게 신나 보이는 얼굴로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호엘리반 님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프시오 님이 천배 만배 아깝, 악!”

솜브가 정수리를 감싸며 눈물을 찔끔 흘릴 때였다.

“프시오 님께 다 이를 거예……!”

퍼엉-!

교황청 건물 위로 호엘리반과 솜브의 눈에만 보이는 마법 폭죽이 터졌다. 동시에 호엘리반이 솜브의 어깨를 감싸고 상냥하게 말했다.

“일러.”

이어지는 그의 말에 솜브가 흠칫거렸다.

“그런데 고자질도 맡은 일을 잘해야 당당하게 할 수 있을걸?”

“…….”

“나한테 천배 만배 아까운 프시오가 솜브에게 실망하는 일은 없겠지?”

* * *

세실은 공터에서 파탐을 피웠다.

지금쯤이면 페브리아에서 일이 한창 벌어지고 있으리라.

그녀는 모든 게 빨리 끝나길 간절히 고대했다. 요즘 그녀의 머릿속은 호엘리반을 족칠 생각으로만 빼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실은 그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결심했다. 모든 게 끝나면 호엘리반을 고자로 만들어 버리기로. 한 가지 걸리는 건 프시오였다.

걔는 무슨 죄인가.

역시 고자 말고 다른 방법으로 족쳐야 하나, 차라리 원형 탈모가 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휴대용 재떨이에 파탐 꽁초를 넣을 때였다.

멀리서 호엘리반을 고자로 만들어 버리자고 마음먹게 했던 결정적 계기가 걸어오고 있었다.

점점 더 저는 다리를 하고서.

“……하.”

세실은 뇌 뚜껑이 열릴 것 같았다.

그녀가 하임의 다리를 치유한 건 뚝딱된 게 아니었다.

하임의 다리는 후천적인 장애였다.

일반적인 의술로는 어림도 없었고 치유 마법 중에서도 세실 조차 버거워하는 고난도 술식이었다.

즉, 하임의 다리는 그녀의 눈알이 뽑힐 만큼 정성과 노력과 시간이 깃든, 아주 숭고한 결과물이었다.

뚝딱된 게 아닌 만큼 수술보다 더 중요한 건 재활 운동이었다. 그걸 병행해야지만 원래대로 돌아갈 확률이 낮았다.

그래서 수도 없이 말했다.

재활 운동하라고.

안 하면 다리도 원래대로 돌아가고 자기 눈도 돌아갈 거라고.

그런데도 저 망할 남자는 보란 듯이 그녀의 숭고한 결과물을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고 있었다.

차라리 눈에 안 보이면 이렇게 뚜껑이 열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호엘리반이 고자가 될 이유는 충분했다.

하임이 더 가깝게 다가왔다.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는 한쪽 다리를 이끌면서.

세실은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상스러운 말을 억눌렀다.

“어이.”

하지만 하임은 대꾸도 안 하고 휙 지나쳐갔다.

제법 빠르게.

황당하게 그를 보는 사이 거리가 멀어져갔다.

세실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 광속으로 뛰어가서 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세실이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

“…….”

세실은 하임의 품에서 거의 다 죽어가는 새끼 고양이를 보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건 또 뭔데 다쳐있고 지랄이야.

새끼 고양이는 배 안쪽이 찢어진 데다 내장까지 파열되어 숨이 끊어질락 말락,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다. 하임이 무엇이라도 해보고자 집에 데려가려던 참이었다.

세실은 곧바로 겉옷을 벗어서 땅바닥에 깔고 고양이를 눕혔다. 이어서 한 시간이 넘도록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마나를 끌어 올리며 집중했다.

얼마 후, 새끼 고양이가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가쁘게 숨을 쉬었다.

하임은 적잖게 안도했다.

그는 마법을 몰랐지만, 고양이의 숨통이 트였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깊은 한숨을 쉬며 긴장했던 어깨를 떨어뜨렸다.

세실이 말했다.

“일단 급하게 처치했지만 장기가 너무 훼손돼서 잘못하면 또 터질 수 있어요. 출혈이 생기면 바로 저한테 오세요.”

“네.”

“재활 운동도 하고요.”

하임은 대답이 없었다.

세실은 그 자리에서 호엘리반을 고자로 만들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 *

페브리아의 하늘이 어둑해졌다.

태양을 가린 검은 장막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서 초자연 현상이라도 본 듯이 입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이윽고 어둠이 페브리아를 완전히 덮쳤다.

공중에 야생 드래곤을 타고 있던 앙디스인들과 그 아래의 페브리아인들까지 모두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기묘한 광경을 멀거니 응시할 때였다.

“저기 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교황청 건물 위, 꼭대기로.

그곳에는 뭉근한 붉은 빛이 타오르는 석양처럼 둥글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화악-!

일순, 눈이 멀듯 한 광활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시야를 가렸다.

얼마간의 정적이 지난 후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을 때, 작은 탄식이 또렷하게 울렸다.

“화신……!”

뭉근한 빛이 타오르던 자리에는 온몸에 붉은 화염이 치솟는 화신이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날고 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신비로운 경외감이 들게 하는 형상이었다. 일렁이는 화염 앞으로 인간의 윤곽이 흐릿하게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게슴츠레 눈을 뜨면서 초점을 잡으려 했다.

“!”

누군가 소리쳤다.

“마드리안 교황님이셔!”

야생 드래곤을 타고 하늘 위에 떠 있던 앙디스인들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신들에게 좋은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만은 확실했다.

달아나야 한다.

쿠드칸의 온몸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느낄 법한 예리한 감각으로 꿈틀거렸다. 그가 뻣뻣한 안면 근육을 움직여서 도망치라는 말을 하려 할 때였다.

마드리안이 손에 쥐고 있는 샤의 상징인 조각된 봉이 공중에 꽂혔다.

그 순간.

그녀 뒤에 있던 화신의 거대한 화염 날개가 활활 타오르면서 완만한 곡선을 그려내며 너울거렸다.

곧이어 뜨거운 바람이 페브리아 곳곳에 이는 동시에 광활한 빛이 한 번 더 솟구쳐 뻗어 나갔다.

사람들은 눈을 감았으나 귓가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들었다.

-이 땅에 잠든 아낙시오니아께서.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음성이었다.

-페브리아와 샤를 위하여 정화된 화신을 불러내었으니.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파동과 같은 음성이 화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잃어버린 어둠을 되찾으리라.

빛의 발광은 전보다 더 길었다.

-재앙으로부터 구원하리라!

그때였다.

눈을 뜰 수 없는 빛 속에서 난폭하게 터지는 파열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땅 위에 서 있던 페브리아인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두려움에 떨며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어딘가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잦아들 무렵 앙디스인들이 두둥실 떠 있던 하늘에는 잿가루만 눈처럼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빛은 완전히 사그라들었고, 어두운 장막이 걷혔으며, 다시 한낮의 푸른 하늘과 태양이 페브리아를 비추었다.

사람들은 빛과 어둠이 폭풍처럼 지나간 자리에서 바로 눈을 뜨지 못했다. 한참을 빛에 익숙해져서야 겨우 끔뻑거렸다.

“여보, 당신 그림자!”

“아아……! 그림자가 돌아왔소!”

“나도 다시 생겼어, 생겼다고!”

그림자를 잃어버렸던 이들이 햇빛에 번지는 몸의 그늘을 보며 기뻐했다. 그 일련의 광경을 눈앞에서 본 사람들이 경이로운 얼굴을 하고서 모두 한곳을 바라보았다.

평온한 하늘 아래, 마드리안 교황만이 오롯이 서 있었다.

그녀의 옷자락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 * *

“……푸흐.”

나무 위에 앉아있던 제인은 다급히 입을 틀어막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이어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못 참겠다는 양 실컷 웃어댔다.

마드리안 교황이 연극을 펼쳤다는 건 철저하게 계획대로 흘러갔다는 걸 의미했다.

가장 중요한 앙디스의 국권은 드호아망 소속이 될 예정일 테고, 드래곤과 관련된 나머지 문제들은 우위를 점한 호엘리반이 마드리안 교황에게 협상안을 제시하며 풀어나가리라.

그리고 앙디스인들은…….

제인은 그들의 죽음까지 우습진 않았다.

다만, 어린 호엘리반의 어머니를 볼모로 삼아 그를 학대했던 이들의 말로로는 과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앙디스인들에 대한 생각을 떨치며 루를 보았다.

“화신이 했던 대사, 어때? 우리 솜브가 저렇게 연기를 잘할 줄 몰랐어. 배우 해도 될 정도야!”

루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설마, 화신이 솜브인 거 알고 있었어?”

“어느 정도는.”

“와, 넌 진짜.”

그녀가 두 손으로 루의 뺨을 잡았다.

“그렇게 재미있는 건 나한테도 알려 줬어야지, 혼자 알고 있었던 거야?”

제인을 지그시 보던 루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재미없으니까.”

그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너 말곤 전부 다.”

“……이유가 그리 나쁘진 않네.”

한낮의 봄바람에 주변을 떠돌던 화신의 열기가 섞여서 불어왔다. 그러나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는 루의 손길은 여전히 겨울에 머물러 있는 듯 무척 차가웠다.

그때 루가 둘 사이를 파고드는 정적을 뒤로 물렸다.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지?”

“뭘?”

은빛 머리카락에 머무르던 차가운 손마디가 그녀의 목덜미를 느슨하게 잡아끌었다. 서늘한 숨이 제인의 귓가에 닿았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놀이, 정도로 표현하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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