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41)화 (141/168)

141.

제인이 루와 함께 드호아망 거리에 온 건 정오쯤이었다.

제인은 루를 양복점으로 데려갔다. 호기롭게 문을 열고 들어간 것과 달리 소파에 앉아 있는 지금, 그녀는 무척 난감한 문제라도 맞닥뜨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 이게 의미가 있을까…….”

그녀는 루에게 양복 한 벌을 직접 골라주고 싶었다.

맞춤으로 제작하기에는 시간이 없으므로 이미 만들어진 양복 중에서 한 벌 골라서 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가 환복할수록 제인의 얼굴은 곤욕스러워져 갔다.

문제는 맞춤이냐, 아니냐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데시안이, 빌어먹을 정도로 아름다운 루가 문제였다. 뭘 걸쳐도 다 황홀한 덕택에 모두 넋을 잃었고, 제인은 선택할 의지를 잃었다.

이것도 잘 어울리고, 저것도 잘 어울리면 내가 어떻게 골라? 다음 것도 잘 어울리겠지. 그다음 건 안 어울릴까.

이대로라면 양복점을 통째로 사줘야 할 판이었다.

제인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넌 그냥 거적때기를 걸쳐도 예쁘겠는데. 이런 쪽으론 보는 눈이 없어서 뭐가 제일 어울리는지 모르겠어.”

“쉬울 텐데.”

소매 단추를 채우던 루가 나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벗는 게 제일 예쁘지 않나.”

그의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양복점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못 들은 척을 해야 할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하하호호 웃으며 넘겨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 허둥거리다가 자기들끼리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차라리 전혀 아니라면 맞장구치는 게 훨씬 쉬웠을 터였다.

하지만 저 아름다운 남자를 보라.

누가 그 말에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오히려 너도나도 반응하기를 부끄러워했다.

제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건 그래.”

결국 옷은 루가 직접 골랐다.

제 손으로 루의 옷을 골라주고 싶었던 제인은 그래도 값은 치렀으니 반 정도는 계획대로 되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루가 제인이 사준 옷을 입고 양복점을 나서자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제인은 자연스럽게 매번 가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당에 들어서자 제인을 알아본 종업원이 반갑게 맞이했다.

“드시던대로 드리면 될까요?”

“네.”

잠시 후,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제인이 종업원을 보며 눈에 익지 않은 요리를 가리켰다.

“이건 주문한 게 아닌데요.”

“단골이셔서 덤으로 드린 거예요. 다진 고기 조림인데 아주 맛있어요. 그럼 맛있게 식사하세요.”

“이분도요.”

돌아서려던 종업원이 제인과 그녀가 가리키는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네? 하고 되묻자 제인이 방긋 웃었다.

“이분도 여기 단골이에요.”

“아…….”

종업원은 흑발에 푸른 눈을 가진 손님을 알고 있었다. 성별 가릴 것 없이 살면서 본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다웠으니.

일 년에 한 번씩 와서 연어구이를 먹던 것까지 알고 있었으나 그를 단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오는 손님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 손님이 단골이라는 글자에 하도 또박또박 힘주어 말해서 재차 인사했다.

“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자주 찾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종업원이 돌아간 후, 제인은 포크로 다진 고기 조림을 폭 찔러서 루에게 먹여주었다.

“알고 있었대. 네가 너무 미인이라 아는 체하기 어려웠나 봐.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예쁘래? 옷도 못 골라주게 말이야.”

루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무언가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묻어났다. 이내 얕은 한숨과 함께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제인.”

“많이 먹어 둬.”

제인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짐작하는 듯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가을로 가기 전에 볼만한 구경거리가 있거든.”

* * *

밀리타는 회색빛을 띠는 구슬을 뚫어져라 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희미해. 그때 그림자를 더 긁었어야 했는데.”

프시오에게 가서 물어볼까…….

밀리타의 시선이 프시오와 대화를 나눴던 마법 양피지로 옮겨졌다.

[밀리타. 회수된 구슬을 세어 봤는데 하나가 부족합니다. 혹시 잃어버렸습니까? 호엘리반의 마법이 깃든 거라 만약 아이들 손에라도 들어가면 위험해서요.]

[아……. 하나 깨뜨렸는데 말씀을 못 드렸어요. 죄송해요.]

[깨졌다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알겠습니다.]

아니에요, 프시오.

사실 그거 거짓말이에요.

밀리타는 자신이 한 거짓말을 후회하면서 다시 회색빛을 띠는 구슬을 보았다.

구슬 안에 담긴 건 몰래 긁어낸 제인의 그림자였다.

처음부터 제인의 그림자를 몰래 긁을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집무실에서 모였던 날, 제인의 그림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프시오 덕분에 술식을 써서 작위적으로 생과 사를 볼 수 있게 된 밀리타는 앉은 자리에서 바로 찝찝함을 해소하기 어려웠다.

무의식적으로 제인의 그림자를 살짝 긁었을 때였다.

옆에 있던 카이가 밀리타를 보지도 않고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말했다.

-가야 해.

마탑에서 검술을 가르칠 시간이 된 것이었다. 밀리타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흠칫거리다가 서둘러 구슬을 챙겨서 그대로 집무실을 나왔다.

검술 시간이 끝나자 투명했던 구슬은 회색빛을 띠었다. 너무 연하고 흐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프시오가 마법 양피지로 구슬 개수에 의아함을 내비쳤고, 제인의 그림자를 몰래 긁었던 밀리타는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밀리타는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몰래 훔치고, 거짓말하고.

뒤늦게 사실을 고백하기에는 참으로 떳떳하지 못한 일들이었다. 그녀는 지압하던 손을 내리고 책상에 쿵, 하고 이마를 올려두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제인에게 가서 그림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최대한 피하고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정말로 그림자에 실금이 간 게 맞으면…….

밀리타는 괴로운 눈으로 회색빛 구슬을 내려다보았다.

* * *

프시오는 페브리아 교황청 집무실에 펠드툰과 함께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예상치 못한 물건이었다.

바닥의 카펫.

빛을 흡수하는 듯한 흑색의 카펫이 마드리안이 잃어버린 그림자의 부재를 가려주었다.

바닥에 닿아있던 프시오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갔다.

이내 마드리안의 에메랄드 눈동자와 마주쳤다.

프시오는 내심 감탄했다.

아무리 흑색 카펫에 진실을 숨겨놓았다고 한들 마드리안은 그림자를 도둑맞았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를 시작으로 페브리아 시민들의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불안감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교황청 담벼락을 넘고도 남을 터였다.

그뿐인가.

페브리아의 결계가 무너졌다.

최측근이자 수족인 말렌 추기경은 행방불명되었고, 외부적으로는 호엘리반이 연합국의 발을 묶어 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교황청 직속 부대를 제외하고는 팔다리가 잘린 것과 진배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드리안 교황이 마지막으로 모색한 돌파구가 엘마뉴엘이었다.

일말의 조바심이나 초조함을 가질 법도 하건만, 마드리안은 태연자약하게 프시오와 펠드툰을 맞이했다.

그건 단순히 겉과 속이 다른, 가장된 태연함이 아니었다.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였다.

펠드툰에게 인사를 건넨 마드리안 교황이 프시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마뉴엘의 사절단 명단을 확인하고 꽤 놀랐습니다. 페브리아 보육원의 명예 후원인이자…….”

마드리안이 여유가 흐르는 미소를 지었다.

“콜드리센 대기사의 여식을 이 자리에서 뵙게 되다니 더없이 반가운 마음입니다.”

펠드툰은 마드리안의 긴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프시오가 탁자 아래에서 펠드툰의 손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이어서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마드리안 교황이 다소 아쉬워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교황청에서 몇 차례 초대장을 보내드렸었는데 오늘에서야 뵙는군요.”

프시오는 모호하게 웃었다.

마드리안 교황의 말대로 명예 후원인으로서 교황청에 초대받은 전적이 몇 번 있었다.

단순한 겉치레라고 생각하기에는 초대장이 주기적으로 왔다. 하지만 프시오는 딱 한 번, 그날 이후로 응하지 않았다.

“과분한 자리에 초대해 주신 영광은 늘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드리안 교황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으며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이가 든 중후한 인상에서도 에메랄드색 눈동자만은 시간에 바래지 않은 듯했다.

펠드툰이 운을 띄웠다.

“인사는 이쯤이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슬슬 본론을 꺼낼 시점이었다.

마드리안 교황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재, 페브리아에서 매일 밤 시민들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교황청은 이 사건을 암암리에 조사했고, 배후세력을 찾아냈습니다.”

펠드툰의 미간이 언뜻 좁아졌다.

곧이어 들리는 중후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굳어버렸다.

“배후는, 엘마뉴엘입니다.”

“……!”

프시오의 눈이 미약하게 커졌다.

마드리안 교황이 드래곤의 마석을 갈취하기 위해서 콜드리엔과 앙디스에 접근했던 방식은 회유였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림자가 실종되는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굳이 사절단을 초청하여 엘마뉴엘을 지목한 건 꼬투리를 잡아서 협박하겠다는 의사를 내재하고 있었다.

“지금 그게……!”

프시오는 무어라 말하려는 펠드툰의 몸짓을 눈치채고 조용히 그의 팔목을 잡았다.

크게 반응하지 마세요…….

그녀의 저의가 충분히 전달되었기에 펠드툰은 어깨에 힘을 빼고 시선을 옆으로 흘려냈다.

프시오가 담담하게 물었다.

“그렇게 판단하신 연유를 말씀해 주시죠.”

“연유라…….”

잠시 시선을 떨어뜨린 마드리안 교황이 곧바로 프시오를 응시했다.

사람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기개를 가진 채.

“아시다시피 페브리아가 처음 정복했던 나라가 콜드리센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제가 교황이 된 이후부터 줄곧 마법이 금기되어왔습니다.”

에메랄드색 눈이 느릿하게 휘어졌다.

“콜드리센의 마법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