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제인이 귀가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늦을 때면 언제나 그랬듯, 루가 정원에 마중 나와 있었다.
옆으로 서 있던 루가 슬쩍 고개를 틀며 제인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몸이 자연스럽게 그녀 쪽으로 향했다.
제인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자신의 절망을 바라는, 그러면서 사랑을 속삭이던,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데시안을.
제인이 발을 떼었다.
그러다 다시 제자리에 섰다.
루가 고개를 비스듬히 떨어뜨리며 의아한 듯이 그녀를 보았다.
제인이 두 팔을 벌렸다.
네가 와.
와서 나를 안아.
그 모습에 루가 미혹에 절인 듯한 미소를 그리며 천천히 제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를 가두듯 품에 안고 속삭였다.
“왔어.”
“응, 잘했어.”
“예뻐?”
“예뻐. 세상에서 제일.”
루가 장난스레 물으며 바라보자, 그녀는 보란 듯이 사랑스럽게 대답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공허가 그득했다.
그리고 한 사람.
제인만이 그 공허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루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네가 더 예뻐, 제인.”
그녀의 시선이 그의 푸른 눈을 지나서 미려한 콧대와 입술, 봄바람에 너울지는 검은 머리카락으로 옮겨갔다.
목숨 바쳐 사랑할 것들이 눈앞에 몽땅 있었다.
그날 밤.
루는 제인의 시간에 맞춰서 침대에 누워서 제인과 마주 보며 웃었다.
“정말이래도.”
제인이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정말은 무슨, 내가 어떻게 너보다 더 예뻐?”
“데시안은 거짓말하지 않아.”
“웃기시네. 너는 내가 하게 만들었잖아.”
코웃음 치는 제인을 보며 루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빼앗고, 믿음을 갖다 바치게 하고, 종국에는 이해라는 사치까지 바라게 하는 이 인간은 실로 그에게 거짓말을 하게 했다.
사랑한다는 거짓말.
하지만 이제는 그게 정말 거짓말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음을 빼앗긴 순간마저 모르는데 그 고백을 어찌 거짓말이라고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없어.”
그의 단조로운 읊조림에 제인이 물었다.
“뭐가 없어?”
“제인, 너는…… 내 미학이야. 그러니 내 눈에 너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어.”
그가 눈을 감고 제인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갔다. 더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진 둘 사이에 틈이라곤 없었다.
그럼에도 더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제인.”
“……응.”
루가 숨이 막히도록 더 끌어안은 탓에, 제인이 겨우 대답했다. 그러나 숨 막히는 고통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렇게 죽어도 좋을 것 같아서.
루는 제인의 이름을 몇 번 더 불렀다.
그녀가 품에 있는데도 찾는 듯이. 혹은 새가 지저귀듯이, 혹은 짧은 노래처럼 부르고 또 불렀다.
제인은 그 흔한 이름이 제 것이라는 게 기뻤다.
기쁘고 슬펐다.
이제 얼마나 더 불릴 수 있을까.
제인이 고개를 들었다. 입을 맞추고 그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내일…….”
목소리가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루.
나는 정말 잘 울지 않는 아이였거든.
울어도 달래줄 어른이 없는 아이는 초라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너를 따라오고부터 나는 잘 울어. 궁금하기도 해. 이 많은 눈물이 어디에 숨어있다가 나오는 걸까?
어쩌면 내 슬픔은 숨바꼭질을 잘했던 걸지도 모르겠어. 아무도 찾지 못했던 내 슬픔을, 유일하게 발견한 게 너였던 거지.
제인은 밀려오는 슬픔을 저항하지 않고 밖으로 흘려냈다.
“우리 내일 가을에 가자.”
“…….”
“무화과가 먹고 싶어.”
그 순간, 루는 세상이 멈춘 기분이 들었다.
아니면 심장일지도.
그의 차가운 손이 더 차갑게 식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조각처럼 굳어진 틈으로 푸른 눈동자만이 흔들렸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줘야 하는데,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언가 그를 칭칭 감아서 묶었다.
겪어본 적 없는 공포가 그의 폐 안까지 들이닥쳐서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그때였다.
제인이 그의 뺨을 감싸고 다시금 입을 맞췄다. 감은 눈 틈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가벼운 입맞춤에 짠맛이 났다.
제인은 부드럽게 입술을 떼었다. 잿빛 눈동자에 아름다운 데시안이 고였다.
언제 말하려고 했어?
날 사랑한다는 말은 진심이었어?
그런 마땅한 물음을, 제인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원망 같은 감정에 중독되면 끝이 없다. 숨통을 터주는 것 같아도 결국 목을 조른다. 숨을 쉬기 어렵게 만든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제인이었다.
루가 힘겹게, 숨을 토해내듯 그녀를 불렀다.
“제인.”
제인은 대답 대신 한 번 더 그의 눈과 뺨,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런 와중에도 눈앞이 흐려지고 또렷해지길 반복했다.
루가 잿빛 속에 갇힌 기분으로 그 모습을 바라볼 때였다.
“루, 끝까지 발버둥 쳐.”
제인이 웃었다.
“구해주고 싶게.”
떨어지는 눈물보다 더 맑은 얼굴로.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제인은 라트올이 있는 별채로 가서 방문을 두드렸다. 머리가 까치집이 된 라트올이 대충 안경을 끼며 방문을 열었다.
“왜요.”
제인은 말없이 빳빳한 봉투를 그의 가슴팍에 퍽, 하고 밀어 넣었다.
거의 한 대 맞은 정도의 강도였기에 라트올은 쿨럭거리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제인을 보았다.
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봉투 안을 보라는 듯 눈짓했다.
이게 뭐길래.
봉투 안의 서류를 꺼내 읽던 라트올의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제인이 무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죽고 나면 당신이 처리해 줬으면 하는 것들.”
쿵.
라트올은 심장이 나가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그의 좁아진 동공이 빠르게 굴러가는 사이 제인이 물었다.
“호엘리반은 이 일, 알아요?”
라트올은 머리가 뻑뻑하게 굴러갔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되지 않아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대답하지. 나 시간 없는 거 알면서.”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라트올은 제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그가 막막한 심정으로 겨우 대답했다.
“아뇨…….”
“그래요. 여행 갔다고 해요. 아주 멀리. 그럼 프시오나 세실도 그렇게 알겠죠. 루에게도 그렇게 말하라고 일러주고요.”
“……당신이 알고 있다는걸, 루가 알아요?”
“네.”
라트올은 머리가 아찔해졌다. 뇌가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레데엘므, 그자의 계시를 받았구나.
그 생각이 들자 목덜미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뛰다 못해 땅바닥에 꽂혔다가 목구멍까지 치는 느낌이 들었다.
제인은 놀라서 자빠질 것 같아하는 라트올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뒤로 돌아섰다.
그러다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자리에 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제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을 냉랭하게 응시했다.
“이게 뭐 하는 짓…….”
“……마요.”
“…….”
“도망가지 마요.”
제인이 별안간 웃었다.
하하.
“걱정 마요.”
그녀의 시선이 다시 손목을 향해 떨어졌다.
“놔요.”
“…….”
라트올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제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별채 문을 열고 나오자 봄 햇살이 정원에 펼쳐졌다. 이어서 정원에 자리한 의자에 앉아 겨우내 앙상했던 가지에 돋은 푸른 잎을 보며 옅은 상념에 빠졌다.
어젯밤, 제인은 한참을 울다가 코를 헹 풀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시답잖은 잡담을 종알거렸다.
간간이 농담도 건넸으나 루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어줄 뿐, 웃지 않았다. 제인이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좀 웃어 봐.
루는 그녀의 손을 끌어내리며 품에 당겨 안았다. 부드럽게 안다가도 갈비뼈가 부서져라 당겨 안았다가 다시 틈을 내어주었다.
-루, 보고 싶어.
-…….
-웃는 거.
그가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이어서 그늘 없이 미려한 웃음을 그려내 주었다.
-원한다면.
새벽녘, 잠이 들락 말락 할 때까지 제인은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은 취향이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물론 같이 사는 동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반대일 줄이야.
제인이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상극인데.
-아닐걸.
-맞는 게 있다고?
-응.
-뭔데?
루는 말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제인이 뭐냐고 물어도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맞춰봐, 라고 할 뿐이었다.
무려 스물아홉 가지나 말했지만 전부 다 틀려버린 제인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안 맞출래.
둘은 대화를 더 나눴다.
제인이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졸음이 불가항력으로 제인을 덮쳤다.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제인은 안 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더 많이 대화 나눠야 하는데.
더 많이 봐둬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눈이 번쩍 떠졌을 땐 이미 동이 터오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루를 한참 동안 보다가 책상에 앉았다.
그렇게 끄적거린 무언가를 라트올에게 주고 온 길이었다.
제인은 머릿속에 떠다니는 상념을 지우며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골똘히 계획했다.
이내 얕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하루가 너무 짧다.
* * *
솜브가 손가락을 꼼질댔다.
자그마한 연분홍색 드래곤으로 돌아와 있었기에 무척 귀여웠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프시오 님?”
이른 아침부터 엘마뉴엘에 온 프시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솜브의 정체를 알게 된 제인이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솜브에게 너무 큰 짐을 지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였다.
옆에 있던 펠드툰이 괄괄한 목청으로 웃어대며 솜브의 등을 시원하게 내리쳤다.
“낄낄낄낄낄! 이 녀석아, 겁먹지 마라! 넌 이제 자유자재로 화신이 될 수 있지 않느냐!”
솜브가 앙칼지게 펠드툰을 노려봤다.
“악! 아파요!”
“아프긴, 낄낄낄!”
“내가 아프다는데 아저씨가 왜 그래요!”
“요 녀석, 말버릇은 하여간! 그게 뭐 아프다고 찡찡대는 게냐?”
“아저씨 손이 손이에요? 망치지!”
솜브와 펠드툰이 끝도 없이 실랑이를 벌였다. 그들에게서 자연스레 잊힌 프시오가 아련한 눈으로 구경했다.
……음. 쓸모없는 다툼에서 평화로움이 느껴져. 조금 전까지의 긴장감이 우스워지는 이 기분, 나쁘지 않아.
프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하하.”
그러자 솜브와 펠드툰이 실랑이를 멈추고 두 눈을 끔뻑거렸다.
프시오가 웃었다.
그것도 어린아이가 아닌 모습으로.
솜브와 펠드툰의 심장에 벅찬 감동과 기쁨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 끌어안았다.
“솜브, 이 녀석아! 뭐가 됐든 무조건 해라, 알겠냐!”
“네,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