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함께 해요! 그레데엘므의 반짝반짝 별빛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덮은 제인이 고개를 들었을 땐 드호아망 도서관이 아니라 주변이 온통 하얀 곳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인간의 내면 안으로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공간이었다.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다.
여긴 시공간을 초월한 곳이구나.
“안녕, 꼬마야.”
“…….”
“내 초대장 어땠어? 나름 신경 썼는데!”
제인은 마주 선 그레데엘므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를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가슴께가 고르게 올라가고 내려가는 숨을 쉬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말문을 열었다.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그레데엘므는 무언가 깨달은 듯 낯빛에 음영이 졌다.
제인이 단조롭게 말을 더했다.
“냉이꽃 꽃말.”
“…….”
“꽃말 정도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됐으니까. 다이애나가 남자 보는 눈이 발바닥에 있다는 것까지.”
“……꼬마야, 사랑의 종류는 무궁무진해. 꼭 이성적인 게 아니더라도.”
“순진한 척은.”
제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거 내 취향 아닌데?”
그레데엘므의 눈동자에 서늘한 날이 세워졌다.
제인은 굴하지 않고 거침없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내 그의 코앞에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는 목을 길게 뻗었다.
“왜, 나도 죽이게?”
몹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레데엘므가 무감한 얼굴로 침묵을 끊어냈다.
“그랬을지도 모르겠어. 맹약만 아니었다면.”
“맹약…….”
그 말을 곱씹던 제인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한 번 데려가 봐.”
그레데엘므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를?”
“봉인구역.”
생각지도 못한 제인의 말에 그레데엘므가 눈을 토끼처럼 뜨고 보았다.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그러지 뭐, 하고 손뼉을 짝 쳤다.
제인은 순식간에 어둠으로 가득한 곳에 서 있게 되었다. 그곳은 조금 전까지 무한한 흰 공간에서 어둠으로 바뀐 것 말고는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녀가 그레데엘므에게 물었다.
“여기야?”
“여긴 환상이야. 진짜는 따로 있어.”
제인의 물음에 자연스럽게 대답하던 그레데엘므가 문득 제자리에 섰다. 이어서 제인의 목덜미를 잡고 갸웃거렸다.
“그런데 꼬마야, 너는 왜 이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어?”
“없어도 될 새끼한텐 없어.”
“…….”
“그리고 내가 예의 차릴 기분이겠어? 생각을 좀 해.”
“……너도.”
그레데엘므가 제인의 목덜미를 재차 난폭하게 잡아 올리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너도 생각을 좀 해. 내가 정말로 너를 죽일 수도 있어, 꼬마야.”
제인이 웃었다.
“아니다에 한 표.”
“…….”
“내기할래? 난 내 목숨 걸게.”
그레데엘므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뭐랄까.
마치 불이 붙는데 촛농이 녹아내리는 듯한, 화가 나야 하는데 오히려 의욕이 상실되는 그런 이상한 느낌이었다.
상실된 의욕은 손아귀의 힘까지 스르륵 빠지게 했다.
그에게서 풀려난 제인이 멀뚱멀뚱 서 있는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말 걸지 마, 생각 좀 하게.”
그녀는 그레데엘므가 자신을 데리고 온 공간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그림자 안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림자 안은 잉크 같은 그림자가 찰랑거렸고, 무한한 흰 공간도 빛이 있었기에 완전한 무의 공간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제인이 물었다.
“맹약을 파기하는 법은?”
“없어.”
“……루는 예전에도 이렇게 어두컴컴한 곳에 혼자 있었던 거야? 백 년 가까이?”
“응.”
“…….”
그레데엘므가 킥 웃었다.
“고작 백 년 가지고 뭘 그래. 이번에 봉인되면 죽을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데.”
“……너는 그게 재밌어?”
“응.”
그레데엘므가 방긋거렸다.
“웃겨 죽겠어.”
제인은 그레데엘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말에 크게 화가지 않았다. 루가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있을 일은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동시에 모든 게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았다.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지금껏 은연중에 두려움을 느꼈던 그레데엘므에게 막무가내로 대할 수 있는 건 그런 연유에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뱉었다.
“웃겨 죽긴, 진짜 웃기고 앉았네.”
옆에서 그레데엘므가 제법 심각하게 진짜 죽여버릴까, 하고 중얼거렸으나 제인은 못 들은 체했다.
이내 차분하게 생각했다.
루가 죽을 때까지라면 얼만큼일까.
사람은 백 년도 못 사는데 데시안은 다를 것이다. 게다가 데시안은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
“데시안의 평균 수명이 어떻게 돼?”
“수천, 수만 년.”
“……인간이 이곳에 갇히면?”
“아사(餓死).”
제인은 입가에서 웃음을 털어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놓치지 않은 그레데엘므가 눈을 가늘게 뜨며 기묘한 웃음을 흘렸다.
“기특한 생각을 하나 보구나, 꼬마야.”
“기특?”
제인은 말이 웃겼다.
자신의 뇌를 까뒤집어서 탈탈 털어도 기특한 생각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장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기특한 것보다는 지독한 것들로 가득 들어차 있으니.
그때 그레데엘므가 제인을 내려다보며 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꼬마야, 너와 계약한 데시안은 네 목숨을 노리고 널 곁에 둔 거야.”
제인은 이 상황에 무구한 낯으로 말하는 그레데엘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살짝 치를 떨었다. 이내 착잡한 심경으로 애틋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다이애나…….
당신 얼굴만 보는 그런 사람이었어?
“그런데 그 애송이를 원망하거나 도망치고 싶어 하기는커녕 기특한 생각을 하네?”
“…….”
기특이라니.
다시 생각해봐도 제인이 먹은 마음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원망?
-네 심장과 영혼을 나에게 줘.
-제인, 나는 누구보다 너의 절망을 원해.
처음부터 목숨을 노렸던 거냐고 쏘아붙이기에는 지금까지 수많은 암시가 있었고.
-날 위해서 죽어.
노골적인 언질이 있었다.
-나는 나를 위해 살다가, 너를 위해 죽을 거야.
그 말에 다짐까지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원망하고 도망치는 건 제인이 오랫동안 해오던 일이었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남은 건 결국 고통뿐이라는 걸.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타인에 대한 미움 같은 건 바닥에 깨져서 흩어진 유리처럼 상처가 되기 쉽다.
“기특한 거 아니야.”
“그러면?”
호기심 가득한 그레데엘므의 물음표에 제인이 걸음을 멈추고 그와 마주 섰다. 그리고 아주 담백하게 대답했다.
“사치.”
그레데엘므의 입술이 슬 벌어졌다. 이내 입술 틈이 점점 더 벌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한참을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레데엘므는 생전 그렇게 웃어 본 적이 없었다.
아, 정말 웃기다!
사치라니!
같잖은 애송이가 자기를 유성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걸 알았을 때보다 훨씬 더 왁자지껄하게 웃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쳐냈다.
이어서 제인의 두 손을 잡고 활짝 웃었다.
“꼬마야!”
제인이 정색하며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자 그레데엘므는 한 손으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날 즐겁게 해줬으니 이걸 줄게. 넌 가질 자격이 돼.”
평평하고 동그란 유리 조각 안에 압화된 냉이꽃이 들어있었다.
제인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이거?”
“응, 두 번째 시온이 준 거야. 잘 간직해.”
“…….”
다이애나.
다정함을 알려주고,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
봄의 햇살을 닮았던 당신.
제인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더 이상 다이애나를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여기서 계속 생각하면 분명 목이 멜 것이고, 꼴사납게 울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울보가 다 됐다.
압화 유리를 주머니에 넣고 숨을 골랐다.
이내 슬픔을 갈무리한 제인이 그레데엘므를 똑바로 보았다.
“그래서, 그게 언제야.”
그레데엘므의 입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냈다.
* * *
호엘리반의 자택으로 귀가한 프시오는 제인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이윽고 그녀보다 훨씬 더 늦게 귀가한 호엘리반에게 전달해 주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호엘리반이 그녀의 말을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마드리안 교황이 사랑의 묘약의 저주에 걸렸다…….”
“네. 아무래도 지금껏 전쟁으로 페브리아의 영역을 넓혀 가면서 신앙심과 드래곤 마석에 집착했던 이유가 모두 묘약의 저주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런 것 같네. 이대로 두면 언젠간 드호아망에까지 손을 뻗칠지도 모르겠어.”
프시오도 호엘리반의 말에 동의했다.
드호아망 마탑에서는 드래곤 마석을 통해 마력이 없는 자들도 마법사로 양성할 수 있는 교육 과정을 진행할 예정이었으니 가능성이 충분했다.
호엘리반이 물었다.
“제인은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마드리안 교황이 묘약의 저주에서 풀어 줄 의향이 있냐고 물어봤습니다만.”
프시오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제인이 했던 말을 회상했다.
-마드리안 교황이 가여워요. 처음에는 그 사람을 연민하는 게 거북했는데요, 조금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건 진심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눈썹을 아래로 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대로 쭉 가엽게 여기고 싶어요. 평생.
프시오의 안색을 살피던 호엘리반이 제인이 했던 말을 대충 예상했는지 말을 돌렸다.
“아버지께선?”
프시오는 마법 양피지를 보여주었다.
양피지엔 펠드툰의 글씨체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타락한 르젤이 만든 사랑의 묘약은 저주란다. 저주에 걸린 장본인이 마음을 열고 스스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정상적으로 푸는 방법은 없다고 봐야지. 하지만 최후의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제인이 묘약의 저주에 걸려있을 때 세실이 그 얘기를 아버지께 왜 말씀드리지 않았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네.”
호엘리반은 이어지는 단어 조합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정신 파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