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페브리아인들은 한낮의 어둠에 두려워했습니다.
그 순간, 눈을 감은 시온이 미사포를 쓴 채 곧게 선 자세로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왔습니다. 시온의 주변에는 빛이 된 그레데엘므가 그녀를 감싸주고 있었습니다.
신성하고 경이로운 모습에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레데엘므는 시온의 이름을 새로이 붙여주었습니다.
아낙시오니아.
천계의 언어로 ‘별의 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늘에 아름다운 미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아낙시오니아, 이 땅의 수호를 위하여 페브리아에 잠드니 수호의 신으로 영원히 기억되리라.】
이어서 시온의 영을 하늘의 별로 만들어주었습니다.
한낮의 어둠 속, 별이 빛나는 동시에 어둠이 일제히 걷혔습니다. 다시 세상이 환하게 빛나자 사람들은 자리에 엎드려 신의 강림을 맞이했습니다.
시온은 아낙시오니아라는 이름으로 페브리아의 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죽인 그레데엘므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일까요. 그레데엘므는 천사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명계의 마왕인 하이데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주제에 신앙심이나 끌어모으고 있는 그대를 어쩌면 좋을까.”
천사의 힘과 모습을 유지한 이유는 페브리아의 신앙심 덕분이었습니다.
신의 외형과 이름은 인간 세상 곳곳에 다르게 형상화되었으나 신을 향한 믿음의 형태는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잃어버린 권한도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랑을 주관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별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권한만 사라졌을 뿐, 여전히 신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마력까지 얻게 되었기에 지옥의 어떤 악마도 그를 벌하지 못했습니다.
하이데스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골칫덩이가 떨어졌구나.”
“골칫덩이…… 귀엽다, 그 말.”
그레데엘므가 킬킬거리자 하이데스도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미친 건 덤이고.”
하이데스는 그레데엘므를 명계로 데려갔습니다. 외관이 바뀌지 않는 그의 모습이 천계와의 크고 작은 협상에서 유리하게 작용하리라 판단해서였습니다.
판단은 옳았습니다. 골치 아픈 문제에 그레데엘므만 슬쩍 비춰주면 천계와의 문제가 어느 정도 유연하게 해결되었습니다.
하이데스와 그레데엘므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지냈습니다.
명계는 그레데엘므에게 낙원이었습니다.
누구도 그의 의견과 결정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죽였고, 아니어도 죽였습니다. 그때마다 이유 모를 웃음이 났습니다.
몇 년이 흘렀습니다.
무언갈 죽여도 좀처럼 웃음이 나지 않을 때쯤, 페브리아에 다시 찾아갔습니다.
아낙시오니아를 위해 세워진 교황청에서는 사람들의 신앙심보다 물질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그레데엘므의 입가에 조소가 물렸습니다.
“빤해.”
이대로라면 아낙시오니아는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게 분명했습니다. 그레데엘므는 그러길 원치 않았습니다.
사랑을 주관하는 권한은 박탈당했으나 사랑의 파편 정도는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곧장 파편으로 묘약을 만들어서 교황을 속박했습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영혼이 가장 맑은 시기인 대여섯 살 아이들을 중에서 차기 교황을 선발했습니다.
사랑의 묘약에 걸린 교황들은 제 역할을 충실히 행했습니다.
그레데엘므의 세상은 다시 평화로워졌습니다.
막막한 외로움과 사무치는 고독으로 이루어진 그의 평화가 깨진 건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이었습니다.
시온…….
미쳐서 환영까지 보이는 걸까.
아니, 어쩌면, 정말로.
페브리아의 높은 절벽에서 황급히 기체로 변한 그레데엘므는 몸을 숨기고 다시 눈앞의 존재를 찬찬히 뜯어 보았습니다. 두 번, 세 번, 열 번을 재차 보아도 시온이었습니다.
그때 시온과 함께 있던 한 아이가 그레데엘므를 발견했습니다.
이후부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심장이 쿵쾅대면서 놓칠 수 없어, 라는 말이 머릿속에 가득 찼습니다. 심장이든 머리든 뭐든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바닷물에 흠뻑 젖은 시온을 안고 있었습니다.
“……저는 시온이 아니에요. 제 이름은 다이애나예요.”
“응. 이거 먹을래, 시온?”
다시 만난 시온은 자신을 다이애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레데엘므는 시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건 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해바라기가 있습니다.
한 송이든, 열 송이든, 백 송이든 해바라기는 해바라기였습니다.
시온이 시온이듯.
시온은 그레데엘므를 무서워했습니다.
하지만 그레데엘므가 자신을 무척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레데엘므는 시온의 손끝만 닿아도 어디 아프진 않을까, 부러지진 않을까, 상처 나진 않을까 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니까요.
시온의 경계는 차츰 허물어져 갔고, 조금씩 웃어주었습니다.
그레데엘므는 그 웃음이 좋아서, 정말로 너무 좋아서 시온을 웃게 할 방법을 매일같이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시온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습니다.
시온은 끝없는 애정과 관심에 웃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강물이 흘러가듯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언젠가부터 시온은 다이애나라고 불리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레데엘므는 그것만큼은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레데엘므는 시온과 함께하는 시간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중하고 행복했지만, 언젠가처럼 매 순간 슬펐습니다.
몸이 아팠던 두 번째 시온에게는 남은 시간이 평범한 인간보다 더 짧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레데엘므는 눈 깜빡이는 찰나조차 애틋했습니다.
시온이 신의 품으로 돌아가던 날.
사랑스러운 아이는 마지막까지 예쁜 미소를 보여주었습니다. 심장이 남아나지 않도록 아픈 그레데엘므였기에 그 순간만큼은 시온의 미소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시온이 희미한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선물이야. 내 웃는 모습을 좋아하잖아.”
“……시온.”
“당신은 정말 바보야.”
“…….”
“다이애나라고 불러준다면…… 더 예쁘게 웃어줄 텐데.”
시온은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았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온을 잃은 그날, 그레데엘므는 꽃무덤을 만들어주며 깨달았습니다. 남아있는 억겁의 시간 동안 세 번째, 네 번째 시온을 찾으리란 것을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혀서 숨이 다하는 날까지 심장을 떼어내는 기분으로 몇 번이고 떠나보내리란 것을요.
그레데엘므는 아름답고 공허한 악마를 떠올렸습니다.
깨우자.
깨워서 이 진창을 영원히 구르게 하자.
그레데엘므는 맹약을 유지한 채, 강한 마나를 가진 인간을 이용해서 잠시 봉인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현혹의 악마가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할, 그래서 죽음까지 바칠 인간을 만나기 위해.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여기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시작된 이 이야기의 결말은 누구의 것이 될까요. 그 아름다운 비극을 보며 웃는 건 누구일까요.
이 이야기를 완성하는 건 악마도, 천사도 아닌, 단 한 명의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건 바로 지금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 * *
“안 그래, 솔레리안?”
루가 나른한 웃음을 흘리다가 시집을 내려놓았다.
낯선 이의 침입에 동그랗고 하얀 데코토들이 바르르 떨다가 집으로 숨었다.
데코토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도 솔레리안의 시선은 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그를 이토록 똑바로 직시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레데엘므 님의 별빛을 담아 드리겠습니다.”
“아, 대단한 결심이군.”
그저 말뿐이었다.
결심 따위는 불필요한 일이었다.
솔레리안은 루에게 빚이 있었고, 별빛을 담는 일은 그 빚을 갚는 약속이었다. 르젤은 데시안에게 빚을 지게 되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건 불가의 영역이었다.
루가 웃으며 창가에 몸을 기대었다.
“대단한 결심을 했다고 칭찬이라도 받으러 온 건가.”
그의 조롱 섞인 물음에도 솔레리안은 루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레데엘므 님에 대한 르젤들의 집착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분의 생과 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래시계까지 만들어낼 정도니까요.”
그레데엘므가 천계에 있을 때부터 그가 생에 미련이 없다는 건 솔레리안은 물론, 모든 르젤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모래시계를 만든 건 바로 그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솔레리안 역시도 르젤이었기에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서글펐다.
“맹약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지금쯤이면 모래시계에 변화가 생기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런데 천계가 조용해도 너무 조용합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루가 짧게 대답했다.
“규율.”
“…….”
“르젤들은 명분이 없는 한 천계의 규율에 묶여서 함부로 움직이지 않지. 아니, 못 하는 건가?”
솔레리안은 치욕을 느꼈다. 부정할 수 없어서 더 그랬다.
“……그래도 이렇게 조용한 건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루가 조금 흥미를 내비쳤다.
“이유라.”
솔레리안은 천계가 이토록 조용한 이유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다 몇 가지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천계에서는 당신과 그레데엘므 님 사이의 맹약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조용한 건, 때를 노리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솔레리안이 말을 덧붙였다.
“규율에서 가장 안전한 때를 말이죠.”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어느새 그림자의 위치가 살짝 바뀌었다. 햇볕은 전과 다름없이 따사로웠으나 매 순간이 봄의 끝자락으로 달려가는 것에 불과했다.
문득, 루가 웃음을 한입 물었다.
마치 솔레리안이 말한 ‘때’를 이해했다는 듯이.
“그래, 그렇군.”
솔레리안이 입술을 무겁게, 아주 천천히 떨어뜨렸다.
“그레데엘므 님의 별빛을 담기 전에, 당신께 가는 길을 먼저 열어드리겠습니다.”
올곧은 눈으로 그를 보면서.
“당신이 그토록 와주길 바라는 인간에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