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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37)화 (137/168)

137.

그레데엘므는 루에게 공허를 채울 수 있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악마의 푸른 눈이 반짝였습니다.

맹목적인 사랑의 아름다움과 비극의 미학도 알려주었습니다.

루가 기뻐했습니다.

그레데엘므도 기뻤습니다.

그레데엘므는 더 이상 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신이 으뜸으로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레데엘므는 루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너라면 신이 사랑하는 인간 하나쯤은 완벽하게 빼앗지 않을까.

그는 루를 어느 깊은 동굴로 데려갔습니다.

“너에게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인간이 스스로 걸어온다면 봉인되지 않을 거란다. 그럼 약속대로 내 운명까지 너에게 주도록 하마.”

“아무도 걸어오지 않으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곳에 봉인되어야 하지.”

그레데엘므와 루는 맹약을 맺었습니다.

봄이 되었습니다.

루를 사랑하고 따르는 앙디스인들은 그 누구도 동굴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햇볕이 따스해지고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며 잠들었던 짐승과 벌레들이 깨어나는 동안에도 동굴로 찾아가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사이 맹약으로 인해 앙디스에 머무르고 있던 그레데엘므는 인간 세상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무엇 하나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동그란 빛의 형상으로 둥둥 떠다니고 있는 그레데엘므에게 한 숙녀가 말을 걸었습니다.

“천사예요? 아니면 요정?”

그레데엘므는 대꾸하지 않고 유유히 떠다녔습니다. 숙녀가 그레데엘므를 졸졸 쫓아왔습니다.

“천사든 요정이든 고약한 건 알겠네요.”

“…….”

“반짝이는 별처럼 생겼으니 별님이라고 부를게요. 제 이름은 시온이에요. 궁금한 게 있어요.”

둥둥 떠다니던 그레데엘므는 이어지는 아이의 물음에 그대로 멈춰 섰습니다.

“별님,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하나요?”

그레데엘므가 대꾸했습니다.

“신이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단다.”

“어려워요. 쉽게 말해주세요.”

어렵지 않아. 네가 멍청한 거야.

그레데엘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더 쉽게 말해주었습니다.

“신이란 믿으면 있고 믿지 않으면 없단다.”

“아……!”

작은 감탄사였습니다.

마치, 참새 한 마리가 손바닥에서 짹, 하고 우는 듯한 따뜻하고 귀여운 소리에 그레데엘므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시온이 기쁜 듯 말갛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럼 제게는 신이 있는 거네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고작 한 번의 미소에 그 순간이 느릿하게 흘러갔습니다. 다정한 바람, 따뜻한 햇볕, 싱그러운 나뭇잎 소리…….

봄의 한 가운데에서 그 아이는 한 떨기 꽃처럼 웃고 있었습니다.

억겁을 살아온 그레데엘므였으나, 봄이 그렇게 사랑스럽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왜 그토록 인간을 사랑하는지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땅의 인간들은 현혹의 악마를 사랑하는데 어째서 홀로 신을 믿으려 하니.”

앙디스는 해적의 침입이 잦은 나라였습니다.

언젠가 해적이 새벽에 급습했습니다. 앙디스인들은 현혹의 마법으로 그들을 묶어두고 빼앗긴 물건들을 되찾았습니다.

그때 시온은 해적선에 노예로 잡혀 있던 사람들을 발견하고 구해주었습니다.

“한 아이가 제게 말했어요. 누나는 신께서 우리에게 보내준 사람이라고…….”

시온이 얼굴을 붉혔습니다.

“그 말이 잊히지 않거든요.”

그레데엘므가 조용히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얼굴을 붉히면 분홍색 꽃처럼 피어나는구나.

그레데엘므와 시온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뒤로도 시온은 별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둘은 함께하는 시간만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하루는 그레데엘므가 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별님. 신께서는 별님도 영원히 사랑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요. 저희에게 영원을 알려주던 순간까지 별님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다면서요.”

“사랑한다면 곁에 있어 주어야 해.”

시온이 조그맣게 웃었습니다.

“별님은 가끔 바보 같아요.”

그레데엘므는 시온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바보?

멍청하지만 사랑스러운 네가, 내게, 바보……?

시온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습니다.

“세상엔 여러 가지 사랑이 있잖아요. 곁에 있어 주는 사랑도 있고, 곁에는 없지만 기억하는 사랑도 있어요. 그것 말고도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랑이 있을 거예요.”

시온이 입꼬리를 어여쁘게 올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영원히 기억하는 사랑이 더 근사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제야 그레데엘므는 신의 말이 옳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신의 말씀대로, 신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레데엘므는 사랑을 주관하는 천사였음에도 자신의 마음이 사랑인지 몰랐습니다.

“그래도 나는 신을 사랑하지 않는단다. 몹시 미워하지.”

시온은 더는 아무런 말을 덧대지 않고 조용히 미소만 지었습니다.

그레데엘므가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넌…… 웃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네?”

“……아니다, 웃으렴.”

그레데엘므가 이마를 짚었습니다.

“아니다, 웃지 않는 게…….”

“별님, 어디 아파요? 얼굴이 빨개요.”

“…….”

어느덧 봄이 끝나 갈 무렵이 되었습니다.

그레데엘므는 시온과 봄의 꽃이 만발하는 꽃밭에 있었습니다. 시온은 각양각색의 꽃들을 고심해서 꺾었고, 그레데엘므는 그녀의 두어 발자국 떨어진 곳에 앉아있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평화로움이 산들바람을 타고 불어왔습니다.

청명한 하늘과 햇빛, 구름, 흙, 꽃과 꽃내음, 꽃을 바라보는 시온까지 어느 것 하나 신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일순 향긋한 꽃내음이 짙어졌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곁에 앉은 시온이 그레데엘므에게 꽃을 한 아름 안겨주었습니다.

시온이 활짝 웃었습니다.

“예쁘죠?”

“…….”

시온이 안겨준 꽃다발은 조금도 조화롭지 않았습니다.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온의 웃는 얼굴은 꽃다발보다 더 예뻤습니다.

“예쁘구나.”

왜일까요.

시온이 그렇게 예뻐 보일 때마다 그레데엘므는 슬프고 화가 났습니다.

“시온, 나는 사실…….”

그레데엘므의 시선이 낙화하듯 품속의 꽃다발로 떨어졌습니다.

“……나는 신을 미워하는 게 아니란다.”

그의 눈은 여전히 꽃다발에 머물렀습니다. 신을 향한 그레데엘므의 마음은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미워한다거나 하는, 그런 유약한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신은 알고 있었을까요.

사실 그레데엘므는 신을 무척이나…….

“증오한단다.”

신은 침묵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신 외에는 그레데엘므의 생각과 마음을 오롯이 헤아려줄 존재가 없으므로 신은 그를 완벽하게 외톨이로 만들었습니다.

마음을 한 조각이라도 내어주면 눈 깜빡할 새에 죽어버릴, 반딧불이 같은 인간을 사랑할 것이라는 가혹한 예언을 하고서.

인간이 살면 얼마나 살까요.

마음을 준 인간이 죽으면 또다시 홀로 남겨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에는 살아온 억겁의 시간만큼, 남아있는 억겁의 시간까지 슬픔과 그리움, 외로움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때 짧은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하.”

그건 시온의 것이었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시온을 바라보았습니다. 시온이 서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여태껏 본 적 없는 웃음이었습니다.

“거짓말.”

세상이 멈춘 것 같았습니다.

시온은 굳어버린 그레데엘므의 귓가에 속삭였습니다.

“거짓말 마세요, 천사님.”

“시온…….”

그리고 이어지는 시온의 말에 그레데엘므의 심장이 땅에 꽂혔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신이 바라봐주길 바라잖아요.”

그레데엘므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입술조차 달싹거릴 수 없었습니다. 그저 속으로 시온의 말을 부정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아니야.

“악마를 봉인하기로 한 것도 신의 관심을 받길 바라서잖아요. 나를 봐. 나 좀 봐줘. 외면하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혼자 두지 말아줘.”

아니야.

“천사님은 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영원히 신의 사랑을 갈구할 거예요.”

아니야.

“버림받은 개처럼.”

“…….”

그 마지막 말을 끝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레데엘므의 손에 시온의 목이 잡혀 있었습니다.

맥박이 뛰지 않았습니다.

바닥에는 시온이 꺾어온 꽃들이 지천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그레데엘므가 멍하게 중얼거렸습니다.

“……거짓말…….”

그때 낮은 침음이 들려왔습니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돌아보자 푸른 눈의 악마가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그레데엘므는 시온이 천사님이라 부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레데엘므의 손끝이 떨려왔습니다.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여져서 아주 잠시 손으로 얼굴을 가리다가 느릿하게 내렸습니다.

드러난 그의 민낯은 웃음으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널.”

그리고 안에서 한 가닥 남은 무언가가 완전히 끊어져 버렸습니다.

“처음부터 밑바닥에 처박아 뒀어야 했는데.”

루는 그레데엘므의 나비의 날갯짓 같은 손짓 한 번에 어둠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일말의 저항도 없이 봉인된 그의 마지막 모습은 어딘가 무척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주변이 고요해졌습니다.

그레데엘므는 무릎을 굽히고 시온을 끌어안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레데엘므는 생에서 처음으로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온이 언젠가 죽으리라는 것도, 그것이 눈 깜짝할 새라는 것도 알았으나 지금은 아니었습니다.

꽃이 지천으로 깔린 자리에서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다시 해가 뜰 때까지 수천 번도 넘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 시온이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영원히 기억하는 사랑이 더 근사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레데엘므는 더 힘을 주어 시온을 품에 안았습니다.

영원히 기억에 남게 해주자.

그리고 영원히 사랑받게 해주자.

하지만 영원이라는 것은 오로지 신만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억겁의 시간을 살아갈 그레데엘므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그레데엘므가 죽으면 아무도 시온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문득, 신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원을 가르쳐 주려고 한단다.

슬픔이 베인 미소를 지었습니다.

시온이 신이 된다면.

그레데엘므는 시온을 안은 채 온난하고 기름진 땅을 찾아 헤매다가 페브리아라는 작은 나라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모든 빛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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