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프시오와 대화를 나눈 후, 제인은 곧장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세실이 적어준 서적 몇 권을 빌려서 집에 갈 참이었다.
평화롭게 책을 한두 권 골랐을 즈음, 제인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제목을 발견하고는 오만상을 쓰는 중이었다.
《함께 해요! 그레데엘므의 반짝반짝 별빛 이야기!》
뭐야, 이 소름 끼치는 제목은.
제인은 무시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책에 발이라도 달렸는지 제인이 가는 곳마다 자연스럽게 꽂혀서 자꾸만 시선을 뺏어갔다.
그래도 무시했다.
제인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시하는 데에는 도가 튼 인간이었다.
잠시 후.
탁, 탁, 탁…….
책이 정말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제인을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서적들을 품에 안은 제인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적을 마저 찾을 때였다.
누군가가 제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네?”
“무슨 마법을 연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책 좀 안 쫓아가게 할 수 없을까요……? 너무 거슬려서요.”
제인은 짜증이 치밀었다.
저도 무슨 마법인지 모르겠고요, 저 끔찍한 책 때문에 제일 성가신 건 저거든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누가 봐도 책이 제인을 따라오고 있었고, 그녀는 무시하고 있으니 딱 잡아떼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제인이 욕을 삼키는 사이, 소곤거리던 사람이 인상을 구기며 돌아갔다.
제인은 책을 발로 차고 싶었다.
쫓아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곧장 도서관 사서에게 갖다주었던 그녀였다.
그런데 돌아서자마자 탁탁거리면서 따라오는 끔찍한 책을 어쩌란 말인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집으로 가면 가는 대로 쫓아 올 기세였다. 불에 태우거나 흐르는 강물에 던져도 돌아서면 짠, 하고 있을 것 같은 책이었다.
낭창한 그레데엘므처럼.
제인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의 수작질이 분명했다.
조용히 긴 한숨을 뱉은 제인이 책을 주웠다. 그리고 수풀이 우거진 창가로 가서 패대기치듯 던져 버렸다.
하지만 돌아서자마자 책이 책상 위에 예쁘게 올려져 있었다.
이런, 미친.
그때 책이 저절로 휙 펼쳐지면서 팔랑거렸다. 팔랑거리는 소리가 꼭 그레데엘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봐야 할걸!
제인은 책 앞에 털썩 앉았다.
안고 있던 서적들을 옆에 밀어 두고 책이 팔랑거리지 않게 탁, 눌러 잡았다. 이내 천장을 보며 속으로 신랄하게 욕을 해댔다.
미쳐도 곱게 미치란 말이야, 미친놈아.
그렇게 제인은 세실에게 배운 아름다운 언어를 한참 동안 복습하다가 누군가가 떠올라 그마저도 관두었다.
다이애나.
당신, 왜, 어째서 이런 미친놈을…….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팔꿈치로 파닥거리는 책을 꾹 누른 채 두 손을 얼굴에 묻었다. 이게 집까지 쫓아오면 얼마나 유쾌해질지 눈에 선했다.
신은 뭐 하나.
이 미쳐버린 천사를 내버려 두고.
제인은 손바닥에 묻었던 얼굴을 들고 은발을 거칠게 쓸었다.
읽자.
그리고 혹 떼듯이 떼버리고 가는 거야.
제인은 《함께 해요! 그레데엘므의 반짝반짝 별빛 이야기!》의 첫 장을 펼쳤다.
제목 한 번 거지 같네, 라고 생각하면서.
* * *
아주 먼 옛날, 그레데엘므라는 천사가 살았습니다.
그레데엘므는 신과 가장 가까운 천사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모든 천사가 그러하듯 그레데엘므 또한 신을 사랑했기에 신과 함께 인간 세상을 보살폈습니다.
어느 날, 신이 그레데엘므에게 말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그레데엘므는 고개를 저었지만, 신은 기어코 인간에게 영원이란 시간을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신이 그레데엘므를 불렀습니다.
“그레데엘므야, 고개를 들어라.”
그레데엘므가 순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너는 언젠가 나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게 될 거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게 될 거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네가 빛에 가까워져도, 멀어져도, 어둠에 물들어도 사랑한다는 것을.”
그레데엘므는 차마 그 말까지는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되어도 사랑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부정할까요.
그렇게 신이 침묵하는 존재가 되는 순간, 그레데엘므에게 잊지 못할 마지막 인사를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그레데엘므야, 너는 스스로 침묵하는 존재가 되면 안 된단다. 부디 내가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이 세상을…… 오래오래 지켜봐 주렴.”
그렇게 영원이 된 신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고요히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슬픔을 감당할 새도 없이 그레데엘므는 천계에서 신의 대리자가 되었습니다.
천사들은 제1 대리자인 그에게 인간 세상과 관련한 중요한 일부터 나비가 날갯짓하는 아주 사소한 일까지 모두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인간 세상은 나비의 날갯짓 한 번이 돌풍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돌풍은 많은 배를 침몰시켰고, 많은 이들의 죽음을 집어삼켰습니다.
나비의 날갯짓이 죽음이 되는 삶.
그게 인간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유약하고 허망한 인간에게 영원을 가르치기 위해 홀로 영원한 존재가 된 신이, 거짓말처럼 미워졌습니다.
그레데엘므는 신이 침묵하는 존재가 된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신은 어디에도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등을 지고 있는 신이었습니다.
그레데엘므가 낮게 웃으며 생각했습니다.
안다는 건 끔찍한 거야.
억겁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레데엘므는 여전히 인간 세상의 사소한 일들을 결정했고,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신의 등을 바라보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미쳐갔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사랑받는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들은 그 악마의 존재에 치를 떨었습니다. 인간들을 타이르기 위해 내려갈 때마다 그들에게 몰매를 맞고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천사를!”
“더 이상 악마가 인간들을 홀리게 둬서는 안 됩니다!”
그레데엘므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습니다.
알게 뭐람.
그의 미소를 보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던 천사들이 말했습니다.
“그 악마를 처단해야 합니다, 그레데엘므 님.”
바보들.
악마는 악마의 일을 하고, 천사는 천사의 일을 하면 되는 건데.
“알아서 하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듯 조용해졌습니다.
그레데엘므가 알아서 하라고 말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차분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천사, 솔레리안.
신념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그레데엘므의 눈에 그 아이의 신념이 부서지고 무너질 미래가 보였습니다.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에, 다음이 아니라면 언젠가 반드시 그럴 운명이었습니다.
그레데엘므는 눈을 휘며 한 번 더 생각했습니다.
안다는 건 끔찍한 거야.
솔레리안은 몇 번이고 악마를 사랑하는 인간들이 사는 땅, 앙디스를 찾아갔습니다.
그 땅의 인간들은 악마를 따르지 말라는 솔레리안에게 욕을 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매일같이 몰매를 맞고 오는 모습에 천사 하나가 솔레리안의 손을 잡고 함께 앙디스로 갔습니다.
“같이 가자. 혼자 못 보내겠다.”
인간들은 평소처럼 난폭하게 굴었습니다.
던진 것 중에는 날카로운 칼도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악마의 마력이 깃든 칼날이 날아드는 순간, 솔레리안은 누군가에게 안기는 동시에 그녀의 손이 다른 누군가를 밀쳐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아아…….
솔레리안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함께 손을 잡고 와준 천사의 등에는 마법이 깃든 칼이 꽂혀있었고, 솔레리안이 밀친 인간 아이는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사멸되어가는 천사가 말했습니다.
“……하하, 솔레리안. 네가 왜 멍청하게 맞고만 왔는지 알겠다…….”
“말, 말하지 마……. 천계로 가자. 어서 일어나. 나를 잡아, 응?”
“……저 인간들, 홀린 게 아니다, 그렇지?”
맞았습니다.
처음에는 악마가 홀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혹의 힘은 강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풀렸습니다.
앙디스인들은 자의적으로 악마를 따랐으니 솔레리안이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설득하고 기다려주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솔레리안은 굳어버린 몸을 겨우 움직여서 천계로 올라갔지만, 그사이 천사는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친구를 잃고, 인간을 죽게 만든 솔레리안은 천계의 심판대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심판을 받던 날.
인간들이 사랑한 악마가 증인으로 참석했습니다.
그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말했습니다.
“솔레리안은 아이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칼이 날아왔을 때 앞에 있던 아이가 발을 헛디뎌서 위험했으니까요.”
천사의 무죄를 증명하는 악마는 현혹의 악마, 루였습니다.
루의 증명 덕분에 솔레리안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무죄를 증명했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유죄를 증명했다면 솔레리안의 적절한 형량을 위해 심판의 자리에 재차 참석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귀찮아서.
그 이유로 루는 솔레리안의 무죄를 증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솔레리안은 천계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악마에게 빚을 진 자는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하므로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한 명의 천사는 별이 되고, 또 한 명의 천사가 연옥으로 내려가자 천계의 천사들은 루를 봉인해야 한다며 입을 모았습니다.
그레데엘므는 천사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습니다.
악마는 어둠으로 끌어들이고 천사는 빛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각자의 역할입니다. 나머지는 인간의 의지였습니다.
그레데엘므는 눈을 감았습니다.
신이었다면…….
일순, 키들키들 웃음이 나왔습니다.
지긋지긋했습니다. 그레데엘므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언제나 신과 같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언제까지?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자신이 신인지 천사인지 무엇인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타락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타락하는 법은 간단했습니다.
신이 아니라 그레데엘므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면 되었습니다.
그는 천사들을 훑어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자에게는 내가 가마.”
그레데엘므는 루를 찾아갔습니다.
루는 한결같이 여상히 웃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에 일말의 기쁨과 행복, 즐거움 같은 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루하고 무의미한 시간 속을 부유하는 텅 빈 그릇 같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레데엘므는 알아챘습니다.
이 아이는 나와 닮았어.
그레데엘므의 목소리에 흥미로움이 가득 실렸습니다.
“천계에서 너를 봉인하기로 결정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