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제인이 소파에 머리를 기대며 천장을 보다가 방긋 웃는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예상대로네요. 이제 앙디스 쪽에만 잘 흘리면 되겠어요.”
“문제없습니다.”
밀리타가 물었다.
“그러면 접견은 누가 가죠?”
“펠드툰 아저씨와 제가 엘마뉴엘 사절단으로 페브리아에 가기로 했습니다.”
문득 제인의 고개가 기우뚱 기울어졌다.
“어, 그런데…… 아저씨랑 프시오가요?”
제인 역시 프시오가 엘마뉴엘인이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인 마드리안과의 접견은 각국을 대표하는 이들이 사절단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프시오가 이어서 말했다.
“엘마뉴엘 통치제도의 핵심은 시민총회입니다. 총회를 통해 원로 중 한 분이신 펠드툰 아저씨가 교섭을 맡기로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인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지 엘마뉴엘의 교섭을 프시오가요? 라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프시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저는 그 섬의 대지주입니다.”
제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마어마한 부자였군요, 프시오!”
“그쯤 엘마뉴엘 땅값이…… 아뇨, 이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프시오가 고개를 젓고 얼른 대화의 주제를 틀었다.
“밀리타, 결계를 구속하러 갔을 때 교황청 지하에서 마물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네. 엘마뉴엘에서 본 마물들과 생김새가 비슷했어요. 독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지는 확실히 없었어요.”
“그렇군요.”
“숫자도 엄청 많았고요.”
프시오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침묵했다.
결계가 강한 만큼 드래곤의 마력이 많이 필요했으리라. 그만큼 잉여 마력이 흘러넘쳤을 테니 마물 생성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쏟아질 정도로 많은 마물을 의도적으로 모아둔 건지, 아니면 처치 곤란이었던 건지는 다른 문제였다.
어느 쪽일까.
일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무래도 좋은 패로 쓸 수 있는 부분 같군요.”
프시오의 말을 끝으로 네 사람은 얼마간 담소를 나눴다. 화두는 프시오의 외모였다. 제인도 밀리타도 너무 예쁘다고 하자 프시오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제인이 카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
카이는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가 짧은 머리를 쓸어 만졌다.
“예.”
제인은 가슴을 팡팡 치고 싶었다.
예는 무슨 예!
곧 죽어도 밀리타가 제일 예쁘다고 해야지, 이 등신 머저리야.
제인이 밀리타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네가 제일 예쁘대. 내가 들었어.”
“당신이 독심술도 하는지는 몰랐네요…….”
“아냐, 정말 들었어.”
밀리타의 말에 제인이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카이에게 물었다.
“맞죠?”
“…….”
너는 글러 먹었다, 새끼야.
제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찼고, 밀리타는 그런 그녀에게 이거나 먹으라며 입에 땅콩 쿠키를 물려주었다.
그렇게 얼마간 더 담소를 나누다 밀리타와 카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는 검술 가르칠 시간이 돼서요, 마탑 수련장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두 사람이 나가자 제인과 프시오, 둘만 남게 되었다.
제인은 마지막까지 카이를 한심스럽게 보았다.
그때 프시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부탁드린 목걸이 가지고 왔습니까?”
“아, 여기요.”
제인은 루가 잡아 뜯은 마드리안의 목걸이를 내밀었다. 프시오가 목걸이에 깃든 무효화 마법을 자세히 연구하고 싶다고 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며칠만 빌리겠습니다.”
“가지셔도 돼요. 전 그거 꼴도 보기 싫거든요.”
“하지만 루는…….”
“안 그래도 물어봤는데, 별 상관없대요.”
프시오는 울컥했다. 그날 루에게 마드리안의 목걸이를 빌려달라고 했을 때 루의 대답은 달랐기 때문이었다.
-싫은데?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다.
프시오가 그리 생각하며 고맙다고 인사했을 때였다.
제인은 전에 없이 그녀의 이름을 차분히 불렀다.
“프시오.”
마주치는 잿빛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 * *
솔레리안은 걷고 또 걸었다.
귓가에 떨쳐지지 않는 그레데엘므의 목소리를 달고서.
-그 영원 속에 갇혀있어.
솔레리안은 그 말과 그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어서라도 지우고 싶었다. 그의 말이 더 괴롭게 느껴지는 건 그가 이어서 했던 말 때문이었다.
-태초의 신께서 침묵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내게 무어라 했는지 알아?
그 말을 들은 솔레리안은 신이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 마지막 말로 그레데엘므가 얼마나 많은 짐을 지게 됐었는지, 신은 정녕 모르셨던 걸까.
-그래서, 솔레리안.
솔레리안의 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내 손으로 내 목을 조르지도 못해. 이 지옥 같은 영원에서 안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맹약뿐이야.
솔레리안이 정신을 차렸을 땐 크리스털이 가득한 동굴 앞에 다다라 있었다.
그녀는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한참을 끅끅, 울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등을 말없이 다독여 주었다. 고개를 들자 그레데엘므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딸기타르트 먹고 싶어서 그래?”
솔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레데엘므가 웃으며 반겼다.
“그럼 들어와.”
그는 어디선가 딸기타르트를 금방 만들어 왔다. 이내 솔레리안에게 포크와 나이프, 앞접시를 주며 홍차도 따라 주었다.
솔레리안은 메이는 목구멍으로 딸기타르트를 넘기고 또 넘겼다.
그렇게 딸기타르트 한 판과 홍차 주전자를 다 비웠을 때 솔레리안이 식기를 내려두며 무거운 말문을 열었다.
“……정말, 유성이라도 괜찮으신 겁니까?”
그레데엘므가 토끼처럼 눈을 떴다가 깔깔거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400살밖에 안 된 핏덩어리가 감히 날 유성으로 만들려고 하다니, 하, 참! 뇌를 조금씩 뜯어서 붕어에게 먹여도 시원찮을 정도로 건방지긴 하지.”
뇌를 뜯어서 붕어에게…….
솔레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일일이 상상하지 마.
그때였다.
그레데엘므의 목소리가 잔잔한 호수처럼 퍼졌다.
“내 바람이자 욕심은 하나야. 별의 형상으로 소멸하는 것.”
“…….”
“그리고 유성이 되는 편이 너희에게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솔레리안은 더 이상 어떤 물음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전까지 들끓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차분해졌다.
“그레데엘므 님, 허락해 주십시오.”
“무얼.”
“보좌하고 싶습니다.”
아래로 쏟아져 내렸던 솔레리안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스르륵 당겨 올라갔다. 동그랗게 말려 있던 어깨도 곧게 펴졌다.
“안식에 이르는 별이 되실 수 있도록.”
그레데엘므가 가늠하기 어려운 눈으로 솔레리안을 응시했다.
솔레리안이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덧붙여 말했다.
“제 바람이자, 욕심입니다.”
아직은 르젤의 신분으로 연옥에 있던 솔레리안이었으나 그레데엘므를 보좌하고 나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시원하게 탁 트였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에게는 어떤 곳이든 지옥과 비슷했다.
굳이 더 떨어지지 않으려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인정하니 후련해진 기분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명계에 네 자리가 있어.”
예상치 못한 그레데엘므의 말에 솔레리안은 입술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원한다면 그 자리에 앉아도 좋아.”
침묵이 돌았다.
솔레리안이 한참 만에 물었다.
“저는 처음부터…… 나락으로 떨어질 운명이었을까요?”
“솔레리안.”
그레데엘므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머뭇거리던 솔레리안이 쭈뼛거리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아이처럼 해맑게 그녀의 이마를 콕 찍었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솔레리안은 그레데엘므의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그리고 곧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원한다면.”
* * *
루는 창가에 앉아 시를 읽고 있었다.
청소를 마친 데코토들이 그의 곁으로 스멀스멀 기어 왔다. 이내 커다란 눈망울로 창밖을 보다가 눈썹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루가 작게 웃었다.
“그래, 온 줄도 몰랐던 봄이 지나가는군.”
저를 이런 얼굴로 보는 건 라트올도 마찬가지였다. 라트올은 열심히 마석을 세공했다. 드호아망에는 계속 납품해야 하지 않냐며.
루가 라트올을 지독한 일 중독자처럼 볼 때였다.
-루, 그냥 말하면 안 돼요? 이제 시간이 얼마 없어요. 제인이 묘약에 걸렸을 때처럼 맹약에 대해서도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라트올도 알고 있었다.
그 맹약은 그레데엘므가 인간에게 전해야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그는 하지만, 하고 운을 떼었다.
-언질이라도…….
그때 나는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했었나.
루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엷은 상념에 잠기려 하는 찰나, 데코토들이 두리번거리다가 여전히 웃고 있는 루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제인은 어디 갔냐고 묻듯이.
루는 제인의 하루 일정을 꿰고 있었다.
하임이 묵을 만한 집에 데려다주고 이웃까지 소개해주었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드호아망 마탑에서 작당 모의 중일 테고, 끝나면 도서관에 들러서 세실이 말했던 서적 중에서 몇 권을 빌려 올 것이다.
그리고 제 품으로 들어오리라.
일련의 과정이 타는 목마름이라면, 그 순간은 갈증을 해소하는 물 한 모금이었다.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다. 포기하기 어려운 다디단 과실이었다.
행복.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다.
제인의 모든 걸 잘라내어 가두고 싶다가도, 그 타는 목마름이 괴롭다가도, 공허의 감각이 더욱 살아날지라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행복한 것.
데코토 하나가 꾸물거리며 그의 허벅지 옆으로 다가왔다.
루는 얼굴에 염려가 가득한 데코토를 보다가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강아지는 오늘도 바빠.”
이윽고 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기다림에 익숙하고, 그래서 시를 읽고 있지.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던 한 걸음이 내게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따뜻한 햇볕이 실린 봄바람에 시집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완연한 봄의 끝자락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그의 목을 조르듯.
루가 웃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떨어지는 꽃잎처럼 가볍고 애틋했다.
“그러니, 많이 읽어둬야지.”
쥐고 있던 시집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러자 언제 왔는지도 모를, 시집에 가려져 있던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루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 그래, 솔레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