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해밀은 천계의 르젤이었으나 성질머리가 괴팍하고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하급 르젤 주제에 눈알을 부라리며 제 말이 맞는다고 또박또박 대드니 어떤 상관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솔레리안이 와서 물었다.
-너만 괜찮다면 나랑 같이 연옥에 가지 않겠니?
솔레리안은 천성이 올곧은 르젤이었다. 너무 올곧아서 부러져 버린 르젤.
해밀은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고 솔레리안을 따라 연옥으로 갔다.
천계건 연옥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또 얼마 안 가서 나는 안 되겠다면서 내쫓길 게 뻔한데.
하지만 예상 밖으로 해밀은 잘리지도, 내쫓기지도 않았다.
눈을 부라릴 일도 없었고, 또박또박 대들 일도 없었다. 솔레리안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일치했고 항상 옳았다. 살면서 지금까지 봤던 누구보다 강인했다.
해밀은 솔레리안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온 마음으로 따랐다.
모두가 신을 추앙하지만, 그에게 신은 솔레리안이었다. 그렇게 솔레리안을 따랐던 게 자그마치 백 년이었다.
그런 솔레리안의 옳음에 실금이 갔다.
루.
그 현혹의 데시안이 봉인에서 풀린 것이다.
그저 그런 하급 르젤이 현혹의 데시안에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솔레리안의 눈을 피해서 그의 수족인 라트올에게 눈을 부라리는 것 외에는.
가슴이 답답했다.
해밀이 아는 솔레리안은 강인하고, 또 강했다. 하지만 그걸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솔레리안마저도.
강함을 드러낼 기회마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눈에 띄지 않길 바랐다. 공기처럼 조용히 지내길 원했다.
자신을 죄수로 여겼으니.
어느 순간 해밀은 깨달았다.
자신의 신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게, 현혹의 데시안이 아니라는 것을.
천계의 규율이었다.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규율이 올바른 솔레리안의 손과 발을 묶고 억압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부러뜨린 것도 결국 규율 아니었던가.
솔레리안은 너무 많이 부러졌다.
해밀은 더 이상 그녀가 부러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솔레리안 님.”
그레데엘므를 만난 후로 전보다 멍하게 앉아있는 시간이 더 길어진 솔레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해밀이 말했다.
“제게는 솔레리안 님이 틀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
“무엇을 하든지 옳으셨습니다.”
“…….”
“그러니 옳다고 생각하시는 일을 하세요.”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는, 앉아있는 솔레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지옥까지 따라가서 모실 테니.”
“……해밀.”
솔레리안이 옅게 웃었다.
“그래도 될까?”
물기 어린 눈을 하고서.
“그게 그레데엘므 님을…… 사라지게 하는 일인데도?”
해밀은 솔레리안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타락한 데시안이 된다고 해도, 그래서 그녀가 있게 될 곳이 지옥이라 할지라도 중요하지 않았다.
“네.”
그녀는 나의 신이니까.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테니까.
“행하세요. 당신의 옳음을.”
* * *
나흘 후, 페브리아에는 흉흉한 분위기가 도사렸다.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거리에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밤마다 그림자를 잃는 자들이 늘어가는 탓이었다.
사람들은 교황청에서 신의 계시든 뭐든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만한 말을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마드리안은 예상 밖의 행보를 걸었다.
연설은커녕, 얼굴조차 비추지 않는 것이었다.
“교황님께서도 그림자를 도둑맞아서 그렇대!”
“에이, 설마…….”
“그게 아니면 이렇게 조용할 이유가 없다고 봐.”
“맞아. 지금까지 이런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누가 나섰어? 교황님이셨잖아. 그런데 지금 봐.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어?”
그때 누군가가 숨을 죽이듯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 들었어? 드래곤이 사람들의 그림자를 되찾아 줄 거라는 소문.”
그렇게 호엘리반이 비서를 통해서 퍼트린 소문이 페브리아 곳곳에서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그사이 밀리타와 프시오는 매일 밤 착실하게 사람들의 그림자를 훔쳤고, 호엘리반은 연합국들로부터 원하는 답변을 모두 얻어냈다.
또한, 드래곤의 마력을 주입 받은 임상 실험자들의 부작용이 우려되는 기간이 끝나자 비밀리에 운영되던 연구실도 정리되었다.
그쯤, 제인이 하임을 데리고 나갔다.
어색하고 머쓱하게.
그러든 말든 세실은 속이 다 시원했다. 연구실도 정리되었겠다, 이제야 안식년다운 안식년을 보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랬는데.
세실은 현관문 앞에서 진절머리 나는 얼굴로 제인에게 물었다.
“뭐? 이사? 옆집으로?”
“아, 제가 아니라.”
제인은 세실이 부여잡고 있는 현관문을 조금 더 당겼다. 가려져 있던 문 뒤에는 하임이 서 있었다. 세실의 얼굴이 곧바로 굳어졌다.
뭔데, 이 상황.
나 지금 예감이 아주 좋지 않아.
“하임이 이사 왔어요. 이웃사촌끼리 잘 지내시라고 인사 왔어요.”
“…….”
“…….”
세실과 하임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얼굴을 구겼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제인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벌써 친해지셨나 봐요.”
누가?
도대체 누가 누구랑 친해졌는데?
분명 둘 다 그런 얼굴이었는데도 제인은 은은하게 웃었다.
“너-무 잘됐다.”
하임은 고개를 돌린 채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당연히 제인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머쓱하게 굴던 제인이 돌연 정색하며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하임. 다이애나의 바람이라고 해도 궁정에서 약제사부터 연구원까지 될 수 있도록 지원해준 건 당신이에요. 보답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이미 네 보험금이랑 자택으로.
-아, 됐고요.
-…….
그래.
이런 애가 제인이었다.
하임은 그걸 잊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로 그저 망연하게 서 있었다.
-잔말 말고 페브리아가 잠잠해질 때까지만 지내세요. 앞으로 한동안 뒤숭숭할 거예요.
하임이 또 입을 뻥긋거리려 하자, 제인이 발칵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보면 집이라도 사드린 줄 알겠네. 이 집은 내 명의거든요! 여기서 평생 살라는 것도 아니고 좀 잠잠해질 때까지만 지내라니까, 말 더럽게 안 들어.
그리고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납치, 두 번은 못 할 것 같아요? 포대 자루에 담겨 오고 싶으면 그래요, 그러세요.
하임은 포대 자루에 담긴 제 모습을 상상했다. 암담했다. 상상이 너무 그럴싸했다. 제인은 뭐든 한다면 하는 녀석이었다.
“자, 그럼.”
제인이 하임을 집 안으로 구겨 넣듯이 넣고 해맑게 인사했다.
“인사도 나눴겠다, 하임은 이제 짐 정리하러 들어가세요. 전 약속이 있어서 이만!”
제인이 문을 닫으려다가 다시 벌컥 열었다.
“재활 운동 열심히 하세요. 불시에 확인하러 올 거예요.”
쾅.
그리고 아주 홀가분한 얼굴로 세실에게 이따가 집무실에서 보자며 방방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제인은 곧바로 이동의 문을 열었으나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었다.
세실이 제인의 뒷덜미를 잡고 이를 꽉 물고 있었다.
“왜…….”
그녀의 살기에 제인은 몸을 살짝 떨었다. 이내 뒷덜미를 잡힌 채로 설명했다.
“어…… 세실도 아시다시피 루의 집은 마력이 강해서 못 데려가고, 그렇다고 하임이랑 둘이 살기에는 아직 어색하거든요. 시간이 조금 필요하달까……?”
세실은 다시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러니까, 왜…….”
하필 내 옆집이냐고.
거슬리게.
“그리고 여기 땅값은 떨어진 적이 없다고 하던데요.”
“……누가.”
제인이 방긋 웃으며 돌아보았다.
“호엘리반이요.”
* * *
한편, 늦은 점심을 먹던 호엘리반은 오싹함에 몸을 떨었다.
그와 마주 앉은 프시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춥습니까.”
“뭔가 소름 끼치는 살기를 느꼈어.”
의아함을 거둔 그녀가 포크에 돌돌 만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별일 아니군요.”
호엘리반과 식사를 마친 프시오는 홀로 그의 집무실로 복귀했다. 집무실에는 밀리타와 카이, 그리고 제인이 약속 시간에 딱 맞춰서 기다리고 있었다.
밀리타는 저주가 풀린 프시오를 보자마자 헉, 하고 숨소리를 삼켰다.
너무 예쁜데……?
아이 모습이었을 땐 귀엽기만 했던 크고 검은 눈동자에는 기품이 묻어났고, 그러면서도 짧은 단발이 산뜻한 인상을 주었다.
이내 제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는 항상 예쁘고.
빛나는 은발이 허리춤까지 떨어지는 제인은 속눈썹도 고왔다. 동그란 이마에서 떨어지는 콧대와 입술 선은 그린 듯했고, 잿빛 눈동자는 총명함이 실려있었다.
그렇게 밀리타가 프시오와 제인을 바라보며 꽃밭이네, 하고 소리 없이 흐뭇해하는 동안 카이는 창밖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사이 나벨이 차를 내주고 돌아갔다.
제인이 프시오에게 물었다.
“호엘리반은요?”
“교수 회의에 참석하러 갔습니다. 몸은 괜찮습니까?”
“그럼요.”
호엘리반이 없다니.
제인은 그제야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묻고 다리를 꼬았다. 프시오의 저주를 풀어 줬다고 한들 호엘리반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제인은 허리를 바로 세워 앉아야 했다.
그녀의 독단 행동에 프시오의 길고 지루한 꾸짖음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나무라던 프시오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다치기라도 했다면 정말로 화냈을 겁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네에…….”
“위험한 일은 반드시 상의하세요.”
“네에…….”
“대답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제인.”
대답이라도 잘하는 게 어딘데요!
외치고 싶은 제인이었으나 옆에서 조용히 쿡 찌르는 밀리타의 눈치에 마지막까지 네에, 대꾸하고 말았다.
그렇게 제인을 꾸짖은 프시오가 밀리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은 어떻습니까?”
밀리타가 손바닥을 펼쳤다.
“세실이 그날 바로 진료해줘서 멀쩡해요.”
“다행입니다.”
“카이는 다친 데 없습니까?”
“예.”
카이의 담백한 대답에 프시오가 작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오늘 뵙자고 한 건 전할 말도 있고 다들 다친 곳은 없는지 걱정돼서 불렀습니다. 결계를 구속한 이후로 모인 적이 없으니까요.”
프시오와 밀리타도 각각 페브리아에서 밤마다 그림자를 훔치는 데 총력을 기울였기에 만날 틈이 없었다.
제인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세실이 중요한 것만 마법 양피지로 전해달래요.”
“바쁘답니까?”
“……네, 뭐.”
아뇨.
저랑 호엘리반 때문에 머리 아파서 잘 거래요. 일단 전 그 자리에 서서 15분가량 욕이란 욕은 다 처먹었는데요, 호엘리반은 욕으로 안 끝날 것 같더라고요, 라는 말을 제인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저희끼리 바로 시작하죠.”
소소한 사정을 알 리 없는 프시오가 무리 없이 수긍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젯밤, 마드리안 교황이 엘마뉴엘에 접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