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사랑.
마드리안은 그레데엘므가 그녀의 부모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하고 싶었다.
천사님,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요.
사랑은요,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거예요. 따뜻하게 안아주는 거예요.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거예요.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법은요, 세 가지를 빠짐없이 하는 거예요!
그때, 여자가 신경질을 부렸다.
-뭐야?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
마드리안의 손목 위로 잘 못 맞아서 생긴 푸른 멍이 드러났다. 그러나 아무도 그 멍 자국에 관심 가지지 않았다.
여자도, 마드리안도.
-엄마, 내가 페브리아를 사랑하면요…….
마드리안이 에메랄드색 눈동자에 오직 여자만을 담으며 여린 목소리로 물었다.
-저, 그럼…… 사랑받을 수 있어요?
엄마랑 아빠한테요.
여자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마드리안은 움찔거렸지만 그래도 가장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며 무구한 눈으로 재차 물었다.
-처, 천사님 뵙고 왔을 때처럼요……. 집에서 아무도 안 아프고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서 다 같이 웃을 수 있어요?
여자가 그래, 하고 대충 대답했다.
마드리안이 기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제인이 그녀의 문 안에서 본 가장 밝은 웃음이었다.
제인은 이어지는 마드리안의 말에, 머릿속에서 겨우 잡고 있던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사랑할래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할래요!
* * *
제인은 망연하게 서 있었다.
앞이 흐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게 눈물 때문이라는 사실이 거지 같았다. 떨어지는 자국마다 연민이 묻어났다.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냈으나 다시 차오르기 바빴다.
빌어먹을.
그때부터는 장면들이 듬성듬성 눈에 들어왔다.
묘약의 저주에 걸린 마드리안을 데리고 교황청에 갔던 부모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멍청하게도 극진한 대접을 받을 줄 알았던 부모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경하게 항의했으나 신의 물건을 훔친 죄목으로 번복 없이 빠르게 사형되었다.
그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던 마드리안은 바로 교황청에 입성하여 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열 밤, 백 밤, 삼백 밤만 자면 부모님이 온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을 어떻게 나누는지 알았던 어린아이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쓸모.
마드리안은 교황청에서조차 그 단어에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갔다.
시간이 흘러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그녀는 최연소 교황이 되었다.
의심하며 사랑하는 저주가 손목에 새겨진 채.
거기까지였다.
제인은 너무 많이 울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더 이상 그녀의 마음을 보고 싶지 않았다. 곧바로 무의식의 영역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제인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 못 해 먹겠네.
제인은 조금 전에 마드리안이 마주쳤던 루에 대한 기억만 잘라내고 그대로 내면의 눈을 떠버렸다.
분명 몸에 힘이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발을 헛디디면서 넘어지려 했다.
툭, 하고 가볍게 그녀를 안은 건 루였다.
“……제인.”
낮은 목소리에 한숨이 실렸다.
제인은 루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내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괴로운 듯 중얼거렸다.
“……모르는 게 나았는데.”
“…….”
“연민 같은 거, 그런 거, 모르는 게…….”
졸음과 두통이 뒤섞였다.
제인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프시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 *
하임은 자신의 처지를 분명하게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이건 감금이다.
다만.
“어이, 재활 운동했어요? 보아하니 어제도 안 한 것 같던데.”
다리를 치료해주고, 식사도 챙겨주고, 재활까지 신경 써 주는 어딘가 이상한 감금.
겉옷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넣고 삐딱한 자세로 묻는 세실과 마주치자마자 하임은 돌아서 버렸다. 그러나 앞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세실이 그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쯧,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
거의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긴 했으나 그는 귀족 가문의 자재였다. 게다가 궁정에서는 약학계 수재 소리를 들으며 각별한 대우를 받던 자였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할 말을 잃은 그와 달리 세실은 거침이 없었다.
“마법사가 무슨 천지창조하는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거듭 말하지만, 당신 다리는 재활 운동 안 하면 원래대로 돌아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모른다.
하임은 모르고 싶었다.
“내가 당신 가만 안 둬. 대가리 박살 내버릴 거라고.”
“…….”
하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세실을 봤지만, 세실 역시도 하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치료 덕분에 하임은 예전보다 다리를 훨씬 덜 절었다. 하지만 더 자연스럽게 걸으려면 재활 운동이 필요한데, 무슨 이유에선지 도통 하지 않았다.
하임이 세실의 손을 가볍게 탁, 쳐냈다.
날파리를 내쫓는 모양새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
세실은 진심으로 하임을 두드려 패고 싶었다.
제인이 왜 이렇게 말을 잘 안 듣고, 속이 꼬일 대로 꼬이고, 버르장머리도 없나 했더니 바로 이 새끼가 원인이었다.
* * *
어슴푸레한 새벽.
겨우 눈을 뜬 제인은 잠든 루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푸른 새벽을 머금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다가 그의 뺨을 닿을 듯 말 듯 만졌다. 그러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실내화를 신고 몇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다가 끊겼다.
루가 슬며시 눈을 뜬 건 그때였다.
침실에 루 혼자였다.
제인이 방금까지 있었던 온기만이 침대에 남아있었다.
루는 인간을, 특히 제인이라는 인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둥지에 있는 새끼 새처럼 자신이 주는 안락한 것들만 받으며 지내면 좋으련만 구태여 관문을 넘고, 마법사가 되고, 그렇게 고단한 길을 걸어가는 게 그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 너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테니, 나도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겠지.
이해가 무슨 필요 있겠는가.
가둬서 묶어 놓으면 이런 꼴을 보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프시오든, 세실이든, 누구든 가까이 오지 못하게 잘라내고 오로지 제 세상에 가둬놓으면 될 일이었다.
그리도 쉬운 걸 하지 않는 이유는 생각보다 적지 않았다.
제인이 원하니까.
원하는 걸 모두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다 주면서, 그녀에게 단 하나를 바라고 있으니까.
루는 나직이 웃으며 푸른 시간이 머무는 창가로 갔다.
고작 인간 하나 없을 뿐인데, 시간은 보란 듯이 천천히 고여간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이 길어질 것이다.
그의 잿빛이 돌아올 때까지.
* * *
타박타박 걷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제인은 연구실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열었다.
책상에서 서류를 보던 세실의 시선이 제인에게서 시계로, 다시 제인에게로 향했다. 심상치 않은 제인의 표정을 읽은 세실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제인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면 마법 알려준 거, 시험했던 거죠?”
“…….”
“제가 어디까지 가는지 확인하려고 했던 거죠.”
“그래.”
단조로운 대답에 제인이 실소를 머금었다.
“연민이 뭔데요.”
“…….”
“그게 뭔데…… 제가 그 인간을 아프게 하지도 못하게 해요.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게 해요. 아무것도 못 하게 해요, 왜.”
제인이 세실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절박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여자는, 그 미친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걸 위해서 일부러 병을 퍼트리고,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고, 그걸로 믿음을 부추기고, 그렇게…….”
나쁜 짓을 서슴없이 하는 인간인데.
“그깟 연민이 뭐라고.”
부모에게 매질 당하는 여섯 살 아이를, 그런 기억을 품고 사는 사람을 어떻게 더 아프게 해.
어떻게.
“연민을 왜 알게 했어요. 내 손으로 상처 하나 정도는 주고 싶었는데…….”
제인은 세실이 미웠다.
이어서 심장을 저릿하게 만드는 이름을 목이 멘 소리로 겨우 말했다.
“하임에게는…….”
세실의 어깨를 부여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약제사라는 일이 그 사람의 전부란 말이에요. 걸을 수 있게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미친 여자가, 그걸…….”
제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럼에도 슬픔은 넘쳐흘러서 그녀의 손목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걸 부쉈어.”
“…….”
“그걸 망가뜨렸어.”
“…….”
“죽이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어디 하나는 박살 내고 싶었는데!”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훔치고 세실을 보았으나 차오르는 서글픔은 그녀를 또렷하게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나도 못 했어. 할 수 없었어. 빌어먹을 그 연민 때문에.”
제인은 턱 끝에서 맺혔다가 떨어지는 눈물이 서러웠다.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세실의 손길이 서러웠고, 자긍심을 짓밟힌 하임이 떠올라 서러웠다.
결국, 서러움이 북받쳐 목 놓아 엉엉 울었다.
세실은 긴 한숨을 쉬며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민은 누군가를 살게 하지.”
제인은 그녀의 다정한 손길이 싫었다.
싫지 않아서 싫었다.
세실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누군가는 그걸 이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 입히게도 하지. 그러니 양날의 검이다. 그럼에도 연민은…… 그 어떤 사명, 어떤 책임, 어떤 정의도 대신하지 못해.”
세실은 문가에 서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연민이란 건, 머리로 할 수 없거든.”
줄곧 벼락이라도 맞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가 조용히 돌아섰다.
돌아서는 발소리가 서러운 울음에 묻혔다.
하지만 세실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한쪽 발이 아직도 조금 끌리는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슬픈 밤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그래서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알게 되는 그런 밤.